기획ㆍ특집
<춤웹진> 2013년 12월호에서 비평가 이지현은 “춤 생태계는 건강한가”라는 제목으로 공공 춤 지원금 심사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춤 지원금 심사위원들의 책임감과 의식 등을 거론한 이 글은 심사위원의 자질과 지원금 심사방법 등과 맞물려 지원기관과 춤계에서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춤웹진>에서는 지원심사와 관련된 춤계 현장의 생생한 소리를 듣기 위해 지난달 김신아의 글에 이어 연속 기획으로 이 문제를 조망한다. (편집자 주)
느닷없이 조심스런 사례를 들자면, 불과 몇 년 전에 있었던 00문화재단 지원사업 중 젊은 안무가를 위한 특성화된 프로젝트에 그 간 무용수로서만 활동해 온 한 40대 중견(나이로) 무용가가 지원 신청을 했고 인터뷰 심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필자는 현장에 없었기에 정확한 정황은 말할 수 없지만, 당시 이 심사 과정은 심사위원과 무용가 간의 지원신청 자격기준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해 춤계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여기에서 '견해 차'란 한쪽은 사업취지로 봤을 때 연륜을 비추어보아 지원대상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고, 다른 한쪽은 이제 안무가로서 본격적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에 신진 안무가로서 지원대상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혹, 이러한 견해차가 두 당사자 간의 사건(?)의 직접적인 요인이 아니었을 수가 있기에 필자의 사견일 수 있음을 미리 밝히고 싶다. 또한 이 사례와 상관없이 모든 상황에는 다양한 견해 차에서 오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음을 분명히 하며,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서로 다른 그 '견해 차' 중 누가 옳고 그른가의 문제가 아니라, 순간 판단되어진 기준이 때로는 모호하거나, 그 명확한 선례가 없을 경우에는 갈등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기준은 공정함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공정하지 못하다는 불신의 정서가 경험적으로 누적되어 있는 현실 속에서, 이런 자기피해적 의식은 예술가들을 병들게 만드는 위험한 증후군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이런 피해의식은 보상심리로 작용하여 옳고 그름의 이중적 잣대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발생한다. 이것은 심사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혹은 모종의 부정이 있어서 자신이 선정에서 누락되었음을 보상 받으려는 무의식적 과잉 반응으로 나온다.
물론, 지금까지의 모든 지원심사가 공정하고 객관적이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은 누락에 대한 반응이 너무 상호 적대적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선정된 명단을 보면서 왜 이런 사람이 선정되었는데, 왜 나는 떨어졌는가를 단순한 푸념이 아니라 적대적 분개로까지 치닫는 위험한 상황을 가끔 목격하기도 한다.
이는 곧 심의나 심사위원에 대한 불신과 분노로 이어졌고 결과를 둘러싼 수 많은 루머를 소모적으로 재생산함으로써, 결국에는 모든 분야에 보이지 않는 줄 세우기 문화를 은연 중 강요해오고 있다. 그나마 이런 악순환으로 인하여 지원제도는 과거에 비해 다양화되었고 맞춤형 기능을 갖춘 제도로 끊임없이 진화해가고 있다. 더불어 심사방법도 조금이나마 체계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
공동체 의식과 서로를 인정하는 똘레랑스의 상호존중 필요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든 문화재단이든 지원제도와 프로그램은 위에 언급했듯이, 나날이 발전해가고 있고, 심사 방법도 체계화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마지막에는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그 한계가 있을 수는 있다. 여기에는 상호 신뢰와 관용, 소외된 곳에 대한 이해 등 좀 더 통큰 범위에서 접근하려는 다각적인 합의가 필요하다. 곧 프랑스인들의 똘레랑스 같은 정신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춤계는 고루한 논쟁을 해가며, 속된 말로 밥그릇만 챙기기에만 몰두해 있는 듯하다. 스스로 불공정하다고 느낀다면 좀더 합리적으로 여론을 형성해야하며, 공식적이고 투명한 채널로 이의를 제기하거나 문제제기와 대안방안에 대해서도 제안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덧붙여, 이런 과정이 사심이나 집단적 이익을 우선시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무개념 사심의 접근은 우리 춤사회를 혼탁하게 만들 뿐이다.
각 지역 문화재단의 심사와 달리, 전국구 지원창구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심의위원 구성은 분야별, 지역별, 장르별로 고루 분포하여 편성한다. 분야별이라 함은 각기 평론가, 무용가, 공연관련 종사자(기획, 행정, 정책 등)를, 지역별이라 함은 서울 거주외의 지역관계자, 장르별이라 함은 현대, 발레, 한국무용 등 어느 한 쪽으로 편중하지 않음으로써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나름의 여러 장치를 고안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객관적 포석도 극단적인 견해차에 의해 두 가지의 양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 우선, 부정적인 시각의 대변은 이렇다. "우리나라의 예술적 수준의 향상을 위하여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며 나눠주기식 지원은 안 된다." 긍정적인 대변의 시각은 "그간 지원사업에 소외된 지역과 신진 분야의 장르의 발전과 기회제공을 위하여 다수를 위한 형평성을 제고해야 한다.“
심사위원의 구성은 이미 후자의 견해를 따르고 원칙을 정해 놓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된다. 즉, 장르별 배분구성이라 함은 창작분야에서 당연 창작을 주도하고 있는 현대무용 지원자가 그 수혜대상에 집중되겠지만 형평성을 고려하여 발레와 한국무용에 티오가 발생한다는 사실이고 지역별 배분 구성은 또 다른 티켓을 가져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성원칙으로 나온 결과를 전자의 기준에서 보면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서열(?)식 기준에 부합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선정되었다는 논리가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상호 의식의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대의적인 관점에서 제도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나라 지원제도의 변화는 단순 특정한 분야의 사회에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전반의 발전 흐름과 비전, 그리고 그 비전이 세계 다른 나라의 교류에 영향을 받고 영향을 준다는 전제하에 변화해 가고 있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심사과정을 살펴보면, 서류심사에 있어서는 공연계획의 충실성과 타당성, 공연작품의 예술성, 해당분야 발전에의 기여도와 파급효과라는 3가지 측면을 중점적으로 심의를 하는데, 서류심사를 하면서 느낀 점은 많은 무용가들과 무용기획 종사자들이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서류심사는 형식이다.", "좁은 무용계에게 될 사람만이 되니, 내용은 자세히 안 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심사위원마다는 다르겠지만 필자 같은 경우는 예산 내역의 합리성과 기획에 있어서의 홍보와 마케팅 전략을 가장 눈여겨 본다. 비교분석하다보면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예를 들어, 예산내역에는 홍보와 마케팅 비용에 대한 내용은 없는데, 홍보와 마케팅 전략을 보면 꽤 많은 예산을 투입해야 할 거창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현실적인 여건과 맞지 않는 경우도 많다. 말만 그럴싸하게 꾸미면 내용은 포장되어 있으니까 높은 점수를 줄 것이라는 착각을 하는 걸까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유사한 사례는 너무 많다. 작품내용과 예산규모의 밸런스가 안 맞는 경우도 허다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제3자에게 자신의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지가 빈약하다는 것이다. 이 점은 본인 또한, 때때로 부끄러움을 갖기도 한다.
다원분야에서도 책임심의를 한 적이 있다. 특히 미술 분야의 신청서는 상당히 간단명료하게 페이퍼 작업을 한다. 그들이 전달하고자하는 내용은 분명하다. 물론 페이퍼 작업이 좋다고 그 결과가 꼭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기대하게 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일 때가 있다.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페이퍼보다는 현실적이고 명확한 페이퍼가 사업계획 충실성에 신뢰를 주기 때문이다.
실연심사는 최선을 다해서 선정작품을 보려고 하지만 피치 못 할 사정으로 한 두 편의 작품을 놓칠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의 수가 당사자들에게 불이익을 초래할 것 같아 최선을 다 하였다는 양해를 구하고 싶다.
경우의 수는 다른 곳에도 존재한다. 우선, 당신에게 질문하고 싶다. 당신이 본 작품 중에 어떠한 작품이 가장 마음에 드십니까? 여기에는 많은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반응하는 것이 있고 스타일의 차이에서 오는, 또는 누구는 잘 만들어진 고전적 작품을, 누구는 실험성이 강한 것을 선호하는, 기타 등등으로 견해 차이로 수가 갈리는 경우, 이럴 때에는 모르는 변수가 작용할 때도 더러 있다.
이럴 경우에는 다수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소수의 의견이 잘못 되었거나 틀려서가 아니다. 견해의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그 뿐이다.
물론 마음은 안타깝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는 소수는 자신의 오만을 인정하는 것이요, 소수의 의견을 무시하는 다수의 행동은 모략으로 변질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본인 자신도 노력해야 하겠지만 지원제도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스스로의 자생력을 위하여 다양한 자구책을 마련해야 한다. 모든 것을 지원제도로 풀려는 생각은 스스로 함정을 파는 행위이다. 우리에게 무엇이 더 소중한가를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함께가는 공동체 의식부터 서로를 인정하는 똘레랑스의 상호존중, 그리고 열린구조의 창작환경을 위하여 서로 한발씩 다가간다면 조금은 용기가 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