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현실 떠안은 딴따라의 춤과 미학
채희완 교수 고별 강의

한국춤비평가협회 공동대표인 부산대 채희완 교수가 지난 6월 정년 퇴임 고별 강의를 가졌다. 채희완 교수는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무용과 교수 및 같은 대학 예술문화영상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다. 미학자·비평가·탈춤 이론가로서 70년대 이래 탈춤 및 문화 운동의 지주로서 활동한 채희완 교수는 특히 지행합일(知行合一)의 독특한 춤 미학과 비평을 조탁 전파해왔다. 지난 6월 있은 그의 고별 강의 가운데 일부를 가급적 육성대로 채록 발췌하여 본란에 소개한다. 8월 23일 그의 정년 퇴임 기념 행사가 예정되어 있다. - 편집자



... 오늘 비가 와서 정서적으로는 아주 좋습니다. 다만 이 회합이 끝나고 또 한 차례의 다른 모임에 지장이 되지 않을까 우려되는군요. 이야기를 뒷풀이 얘기로 풀어볼까 합니다.

 

 

 



뒷풀이가 잘 돼야

제가 우리 전통 사회에서나 이후 여러 가지 삶의 공연에서 볼 때에 참으로 이상하게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맨 끝에 공연이 끝나고 고맙다고 커튼콜을 해야 하는데, 우리에게서는 맨 처음에 커튼콜을 하고 시작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게 참으로 묘한 느낌을 줬었는데요. 저도 마찬가지로 끝부분에 있는 뒷풀이부터 잠시 먼저 해보려고 합니다. 여기 쓰여 있는 대로 모든 행사는 뒷풀이 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뒷풀이가 잘 되었을 때만이 앞에서 한 행사가 성공적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뒷풀이 하자고 오늘 모인 겁니다. 비가 약간 오더라도 야외 기분을 느끼면서 오늘의 이 모임의 의미를 작은 술과 풀어보기를 바랍니다.

오늘 제가 이야기 드리고자 하는 고별 강의라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어느 시간에도 제 사생활과 개인적으로 연관되는 것을 한번도 얘기한 적이 없습니다. 아까 장백산군이 지지난해, 지난해인가요? 희망버스에 한 번 간 그것을 목격당해가지고 같이 있었는데, 그 이후에 그런 집회도 많이 갔고 또 잘 모르시겠지만 밤무대 뛴 적도 많고 여러 가지 개인적인 그러나 그것이 꼭 개인적인 것만은 아니었는데, 일부러 숨기고 숨기고 해왔던 그런 것을 오늘은 조금 들통을 내면서 말하자면 제가 그런 사회생활을 한 것과 연관시키면서 얘기를 잠시 드리고자 합니다.

어쩌면은 아까 여러분이 뜻밖에도 제 경력을 들으시고 의아하게 생각하셨을 텐데요 그렇습니다. 저는 낮에는 말하자면 강단에 서서 서생 노릇을 하고 밤에는 밤무대에 가서 뛰곤 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얘기하자면 먹물과 딴따라를 같이 한 셈입니다. 조금 고상하게 얘기하면 서생과 광대 노릇을 같이해서 그 두 가지가 참으로 어울리기 어려운 그런 일인데 좀 멋있게 해야 되고 엄숙하게 해야 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놀고 자빠져야 되는 이 두 가지 상충되는 것을 제가 몰래몰래 했었는데, 아까 경력에 그런 것을 연관시키게 되었습니다.

저로서의 공부는 한국 사람은 어떻게 놀았는가입니다. 전통사회에서도 그 다음에 19세기 말 20세기로 넘어오는 근대 시기에서도 해방공간 이후 오늘날 우리가 살아나가면서 사는 가운데서의 놀이들. 이것이 어떻게 들어와 있었고 그 내용이 무엇이고 그 내용 속에 담겨져 있는 한국인의 의식이나 미의식이나 민족정서는 무엇인가, 그것이 앞으로 이 땅에 살아나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힘이 되고 어떤 방향 설정에 도움이 될 것인가 여기에 관심을 두고 저는 몇 가지 사실들을 목격하고 만들어내기도 하면서 그것을 저의 공부 자료로 삼고 거기에 대해서 여러 사람들과 논의 하고 뒤풀이하고 그렇게 해왔던 공부적 삶, 미적 삶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한마디로 그것을 줄인다면 나에게 탈춤적 삶이란 무엇인가 그렇게 요약을 해 볼 수 있습니다.



탈춤적 삶과 딴다라식 실천

탈춤, 저로써는 삶의 힘이고 공부의 대상이고 또 제가 실천적인 것을 한다면 바로 그것을 통해서 할 수있는 소통의 매개 통로인 동시에 결국은 탈춤 식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나의 마지막 소망이다, 그렇게까지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은 제가 대학에 들어와서 탈춤을 처음 접하고 나서 생각했던 끊임없이 화끈한 것이어서 그 후 40년이 지나고 또 제가 앞으로도 몇 년 더 살 수 있다면 계속 탈춤적 삶을 지향하면서 살겠다 그렇게 굳게 다짐해 왔습니다. 그 얘기의 일부를 오늘 제가 잠깐 얘기해 드리고자 하는 겁니다.

지금 제목을 <예술인의 길>이 아니라 “술”자를 일부러 빼지 않았나 이게 뭔가 숨은 뜻이 있지 않았나 했지만은 그러기보다는 예술인하면 저한텐 조금 어감상으로 덜 와 닿고 그래서 딴따라를 부드럽게 표현하면 예인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옛날 같으면 광대이고 죄인이고 창패이고 각종 떨거지 유랑패들의 행위들을 총칭해서 그런 삶을 살아나가는 사람들 이런 의미로 예인이라는 이름을 지어봤습니다.

딴따라다 그러면 여러분이 일면 호감을 받으면서 일면 거부감도 있을 텐데요, 저희는 대학에서 탈춤을 하면서부터도 정식 딴따라는 못됐지만 그래도 계속 딴따라란 용어를 써가면서 우겨왔습니다. 그것을 두고 문화 운동하는 사람으로서 자기 비하가 너무 심하지 않느냐 라고 그렇게까지 충고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만, 그러면서 더 멋있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산스크리트어로 탄트라라는 말이 있는데 거기서 딴따라란 말이 나왔다 그걸 아느냐 이렇게 얘기한 사람도 있었습니다만 제가 알아본 결과는 일제 때 곡마단, 서커스단이 오면 그 앞에 각종 악기를 불면서 길놀이를 하고 홍보를 하는 팀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주요 음악들이 딴딴따~따라따라딴딴따~ 하면서 행렬지어 가는 바로 그런 풍각쟁이의 서양풍, 동양풍, 한국풍 그런 선전 길놀이의 행각에 나오는 소리를 의성어로 딴딴따라따라~ 이렇게 해서 붙인 것이라고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세시봉 시절 그들이 나와서 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그들도 스스로 딴따라라는 말을 쓰대요, 그래서 공감을 느끼고 비록 딴따라가 여러 가지 상스러운 놀이를 잡스러운 예술을 하지만은 뜻은 왕, 몸은 똑같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그럴수록 앞으로도 딴따라라는 용어를 계속 쓰려고 합니다.

단지 제가 딴따라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을 계속 고민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70년대 처음 딴따라의 활동과 딴따라적인 생각을 하면서 가장 먼저 오는 생각은 과연 나는 민중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70년대, 여러분이 마땅히 기억을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근대화 초입에 들어와서 농촌사회가 도시로 이동되면서 갖가지 근대화의 여러 물결 속에서 기층 민중의 삶을 한 부속품으로 공장 노동자가 아니라 공장의 한 기계와 같은 그런 작업을 하는 세력으로 떨어지면서 거기서 나라가 지향하는 바대로 수출 강국의, 수출 입국의 잘사는 사회, 더 이상 가난이 없는 사회를 지향하는 그런 것에 비참하게 동원된 그런 피눈물어린 사람들의 삶을 딴따라와 더불어서 접하게 되면서, 과연 나라고 하는 지식분자, 먹물들, 배웠다는 것들은 이런 삶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무엇을 공부해야 될 것인가? 어떤 공부로 새로운 사회가 돼야만 이들과 함께 같은 공동체의 장을 이룰 수 있겠는가라는 그런 고민을 하게 되고, 그것은 개인적인 고민인 동시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 땅의 많은 지식인들과 많은 여러 비롯된 사람들의 공동적인 문제로 부각시키는 데 표현되는 이 논리는 또 실제로 그것을 딴따라 식으로 실현할 수 있는 방법론은, 조직은... 등등에 관해서 관심을 갖게 되고 그것을 저의 작은 생각으로 좁은 몸으로 실현을 해보고자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제가 몇 가지 생각 해놨던 것을 잠시 얘기를 드리는 것으로 오늘 얘기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탈놀이 부부의 충격파
 

1975년 창작과 비평 여름과 가을 호에 두 번에 나눠서 연재된 서종문 선생님이 쓰신 변강쇠가(歌) 연구라고 하는 그 글을 읽고 제가 60년대 말 우연히 탈춤을 보고 받았던 충격 그 이상으로 학문적인 충격을 받았습니다.

변강쇠가 연구... 강쇠, 여러분 잘 기억이 나지요. 거기에 관한 글이었는데요, 판소리의 연원을 이야기하는 판소리의 이면적인 내용을 밝히는 그런 논문이었는데, 바로 거기에 이런 글귀를 인용하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갔습니다. 광해조에 살았던 유몽인(柳夢寅), 그 당시 중국도 다니고 해외 물정도 많이 알은 삐딱한 지식인으로서 얼마간 정부기관의 박해를 받으면서 그가 쓴 책들이 간행되지 못하고 사후 200년 이후에야 겨우 자손에 의해서 책이 발간된 어우야담에 나오는 얘기였습니다. 시정잡배, 시정의 이야기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포착을 해서 그것을 들고 남긴 한 대목인데요. 바로 지금 여기에 여러분들에게 나누어드린 쪽지에 나와 있는 한자 문구입니다. 따로 번역을 한 자 한 자 하지 않고, 한 사람의 배우가, 딴따라가 있어서 얼굴에 귀신 탈을 쓰고 그의 처와 함께 서울 한강 가에서 놀이를 했던 모양입니다. 한강 가에서 걸식을 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탈놀이로 밥벌이를 하면서 살고 있는 부부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처가 봄이 되어서 한강물이 얼었다가 서서히 풀리는 바로 그 얼음 강가를 건너가고 있었는데, “不脫鬼面爲戱” 연희를 하기 위해서 얼굴에서 탈을 벗지 않았다, 탈을 쓴 채로 얼어서 녹짝지근한 봄철에 한강 강물을 건너가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가다가 갑자기 그 처가 얼음덩어리 밑으로, 물 밑으로 빠져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優人” 남편이지요, 그 사람이 “不遑脫鬼面” 황급한 나머지 귀신탈을 벗지 못하고 발걸음을 멈춘 채 얼음 위에서 울부짖었다. “彼雖哭泣之哀” 그가 비록 엎드려 울면서 애통해했으나 그러나 구경꾼들은 소리를 낮춰서, 소리를 죽이고 웃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전부 그 몰골을 보고 다 웃었다는 얘기입니다.

두 부부가 한강 가에서 탈을 쓰고 놀이를 하면서 밥벌이를 하고 있었는데 봄이 와서 얼음이 녹아서 서서히 얼음이 녹아가는 강 위를 건너가면서, 탈놀이를 하느라고 탈을 벗지 않고, 그러다가 갑자기 마누라가 강물에 빠져서 죽게 됐습니다. 그것을 보면서도 남편은 속수무책으로 그냥 길바닥에 앉아서 우는데, 우는 모습이 우는 몰골이 하도 우스꽝스러워서 그것을 보던 사람들이 웃었다 하는 겁니다.

광대상의 비참함이 바로 관객들에게는 웃음으로 보였다는 비극적인 상황과 희극적 표출, 그것은 비장과 골계라고 하는 미감이 복합적으로 이뤄진 것입니다. 조금 더 강하게 얘기하면 비극적인 아내의 내용은 거죽이 당의, 달짝지근한 것으로 입혔는데 희극적인 요소로 입혔다라고 풀이를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속울음 겉웃음” 이라는 용어로 해석을 하고, 무대에 걸친 응어리진 한(恨), 그것이 드러날 때는 신명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합니다.

삶의 빡빡스런 것을 풀어헤치고 신명을 이야기하는 방식이어서 거기 묻혀져 있는, 응어리져있는, 벌써 그 시기가 광해조니까 17세기 초겠지요.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는 길거리에서 장인부부 악사의 작은 노랫소리를 길거리에서 보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서 저는 딴따라의 길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을 다시 곰곰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70년 중반에 황석영 선생이 서울 영등포 어딘가에 첫 살림을 차린 아파트에 들어가니 현관 들어가는 벽면에 어떤 한자 글귀가 쓰여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바로 이 문구였습니다. 그 당시 한국일보에 장길산을 연재하는 초기에 있었는데 그 장길산의 내용이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하는구나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의 말할 수 없는 독서량도 놀라웠지만, 그리고 장길산이란 역사대하소설을 꾸미게 하면서 역사적으로 학문적으로 뒷받침해온 정석동선생의 광범한 사료도 놀라웠지만, 바로 서종문 선생이 판소리의 근원적인 일화를 찾고 저로서도 벌써 딴따라의 변함없는 삶의 정경을 여기서 찾고 거기서 나의 삶과 나의 학문이 다시금 삐뚜루 나갈 때 과하게 나갈 때 다시 돌이켜보게 되는 하나의 거울과 같은 노릇을 해왔습니다.


​예인의 솟을굿
 

그렇게 해서 예인들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몇가지 종목을 찾아 보게 되었는데요, 어름이 있습니다. 그것은 남사당 여섯 가지 래퍼토리중의 하나이죠. 비나리로 처음 풍물을 시작하고 버나돌리기를 하고 그 다음에 이 어름이라고 하는 줄타기, 그 다음에 탈놀이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인형극, 그들의 이름으로는 덜미이지요, 목덜미를 잡아서 고정한다고 해서 덜미라고 하는 프로그램의 중심부 중의 하나입니다. 어름이라는 것인데 줄타기입니다. 줄타기의 내용은 74년에 지은 김지하 시인이 쓴 시가 있습니다.

몇 가지 대목만 읽어보면, 칼날에 더한 가파로움, 잠보다 더한 이 홀로 가는 허공의 아픔, 외줄에 거네 딴 길이 없어, 제기랄, 딴 길이 없어 얼음에 거네. 목숨을 발에 걸어 한 중간에 걸어 이미 태어날 적에 죽음은 좋은 것, 단 한번뿐일 테니까.

예인으로서 절체절명의 시기에 부름을 받잡은 사람의 노래가 아닌가 싶습니다. 드디어 죽임을 죽어 박살난 피토해도 웃겨야 하는 그러한 어름을 타는 광대 노릇에 김지하 자신의 신세를 빗대놓고 지은 시입니다. 이 시는 1975년 제3세계권에서 주는 노벨상에 버금가는 로터스 문학상을 받는 결정적 계기가 되는 시였습니다. 딴따라의 길, 허공에 발을 디디면서 자칫하다가 떨어져 사고치고 죽을 수도 있는 바로 그 한 길 위 삶을 사는 자의 절체절명의 시기를 부름받은 예인의 한 모습을 절절한 삶으로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제가 나중에 본 것으로서는 황해도 무당굿이었는데요, 큰 병을 시름시름 앓다가 병명을 모른 채 기다리다가 나중에 큰 무당이 돼서 자기 몸에 든 신의 정체를 알게 되고 그것을 위해서 굿을 올려가지고 자기 병이 씻은 듯이 나은 사람들 중에 무당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 거치는 하나의 통과의례가 있습니다. 그것을 솟을굿이라고 하는데요. 말하자면 허공에 달려있는 작두 위에 올라가는 그 순서가 내림굿을 받은 사람 중에 무당의 길로 들어서자고 자기 스스로를 다짐한 사람들이 거치는 마지막 입사식 행사입니다.

작두타기는 염력을 과시하는 그런 대목이기도 합니다만 대부분의 한강 이북 쪽의 무병환자들이 겪는 과정 속에서 생겨나는 영험력, 그것이 작두타기라는 모습으로 드러나는데, 경기도 지역의 작두타기는 땅바닥에 작두를 놓고 두 사람이 껴안고 있지만은 황해도 지역의 것은 처마 위까지 단을 쌓아서 처마 위에 두 사람이 올라가서 작두를 잡으면 한달음에 뛰어올라가서 그 위에 몸을 싣는 그 대목입니다. 그 대목이 솟을굿이라는 대목인데요, 바로 예인의 길로, 무당의 길로 들어선 자가 마땅히 거쳐야 되는 솟을굿.

그리고 이 과정을 거치면서 예인은, 무당은, 예술가는 자기 자신의 몸이 자기 자신의 몸만이 아닌 많은 민중에 쌓여져 있는 표현의 욕구와 표현의 내용을 이 한 몸으로, 이 한 몸으로라고 하는 말은 나의 개체적인 존재를 가능케 해주는 생명에너지, 개체 생명의 에너지 자리 그 에너지를 덜어낸 빈자리에 민중적인 신명의 에너지를 채우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신명으로 민중의 숨어있는 신명에 불 지르는 자, 바로 그 과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 솟을굿의 작두타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딴따라로 활동하는 것이 이런 과정을 통하지 않고서 과연 제대로 되겠는가 라고 생각하면서, 결국 솟을굿을 하지 못한 저로서는 제대로 된 딴따라가 되기 어렵구나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약간 위안삼아서 학교생활도 하고 가르치고 했는데 이것도 저것도 안 된 얼치기가 돼버렸습니다. 한탄스럽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예술•정치•역사의 일체성
 

그리고 또 한가지 1920년대 러시아의 한 상황입니다. 나라에서 각국의 외교관들을 불러가지고 큰 연회장에서 공연을 했습니다. 국가의 이데올로기뿐만 아니라, 국가의 새로운 세계 전망을 외교관에게 과시하기 위한 프로그램에 한 사람의 가수가 초청받았습니다. 노래를 하러 나오는 순서가 가까워 졌는데 그 공연장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가지고 ‘너 나와라! 우리와 같이 노래하자’라고 했습니다. 그 때, 이 가수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될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국가를 위해서 노래를 할 것인가, 아니면 공연장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민중들의 민주적인 요망을 같이 하기 위해서 바깥으로 나가야 될 것인가, 바깥에 나가서 만약에 한다면 내 목숨은 어떻게 될 것인가 등등에 해당되는 것을 곰곰이 생각한 끝에 나가서 그곳을 탈출해서 일반 민중의 공연장에서 노래함으로써 국민적 가수로서 할 일을 다했다라고 얘기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또한 1940년대 초중반에 중국에 일본의 제국주의의 침투와 대항하는 항일무장투쟁이 일어났는데요. 당시에 일본에서 모던댄스를 배워온 吳曉邦, 영국에서 발레를 배워온 戴愛蓮, 이 두 분이 실제로 항일무장투쟁현장 전쟁터에서 연행의 소조직을 꾸려서 작품을 짜서 공연을 하고, 물론 전쟁이 휴지 기간이었을 때였죠. 그리고 또 낮에는 총을 쏘고, 또 시간을 내서 소조로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담아서 이를테면 민족의식과 민중적 의식을 고취시키는 그런 프로그램을 가지고 공연을 하고 했습니다.

창과 꽃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데, 바로 그런 사람이 중국 근대 춤의 시초를 열어 놓고 1949년 공화국이 마련된 이후에 중심 인물로 부각이 됐습니다. 따지면, 한국에서의 근대 예술의 한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춤의 경우에 불행히도 우리는 중국의 吳曉邦, 戴愛蓮, 그런 사람을 우리는 갖지 못했다는 것, 그것이 한국 춤의 큰 역사적 불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얘기는 예술은 정치나 역사나 이데올로기에 파묻혀가지고 거기에 복종하는 거기에 굴종하는, 거기에 봉사하는 것이어야 되느냐 아니냐의 문제를 떠나 있습니다. 예술과 정치, 이것은 구분해 볼 수 있고 구분해 보지 않아야 하는 두 가지 특성이 같이 있는데 ‘정치적인 것, 정치적으로 논다’라고 할 때는 마땅히 구분해서 떨쳐버려야 하는 것이지만 삶의, 역사의, 사회의, 우리가 태어나고 죽고 내 자손이 다시 여기서 같이 지내야 할 바로 그런 이 땅의 문제와 더불어서 예술과 같이 실현이 된다라는 것은 그것은 너무나 이해하기 전에 마땅한 것이어서 그런 의미로서의 정치와 예술의 통합이라고 하는 것은 많은 예술가들이, 많은 정치지망적 예술가들이 생각해 봐야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일선 문화투쟁으로서의 정치, 정치적 문화투쟁으로서의 문화라는 말이 1970, 80년대 많은 인문학회 사이에서 공공연히 이야기되어 왔습니다만 원칙적으로 생각했을 때 예술과 정치는 한 몸이라는 것이고 정치적인 것이라는 그런 약간의 폐쇄적인 전술적인 차원인 것과는 구분해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술적 진실과 딴따라의 삶 

 

이제 마지막에 도달하기 시작하는 데요, 무대 뛰는 사람들의 가장 큰 소망은 무대에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해서 무대에서 죽은 사람이 더러 있죠. 어느 연기자 중에서는 그의 명연기 중에서도 어느 극 중에서 15~20분간 죽어가는 과정을 연기하는 대목이 너무나 빼어나서 그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팬이 되고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그는 무대에 서서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죽어가는 연기를 했습니다. 막이 내렸죠. 사람들이 의아해했습니다. 계속 죽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찾아봤더니 정말 죽었습니다. 그날따라 많은 관중들이 딴 날에는 그렇게 근사하던 죽음의 연기가 오늘은 왜 이리 시원찮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정말 죽은 겁니다. 실제로 죽은 것과 죽은 듯이 하는 것은 다르다는 겁니다.

예술적 진실, 그것은 실제 사실을 전달해주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전달이 진실의 문제로 이전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적인 차원이란 생각에서 학문적인, 도덕적인, 정치적인 많은 객관적인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예술적 표현을 얻어서 예술적 진실로 전화되어야 되는 것, 저는 그런 생각을 이 자리에서 생각해봤습니다. 사실과 진실, 실제와 예술적 진실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의 한 이야기가 되겠지요.

그리고는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광대예수, 그리고 악인(樂人), 음악가 공자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자리에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신 분들도 계시고 기독교의 선교과정이 삶의 한 지향점으로 되신 분도 계시겠지만 너그러이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는 70년대에 와서 기독교의 토착화와 기독교의 사회화와 더불어서 민중예수로, 아프리카 사람들은 흰 예수가 아닌 검은 빛깔의 예수, 남미도 마찬가지죠. 그렇게 자국화된 그리스도의 교리가, 메시지가, 선교의 방향이 자국화되면서 민중화되면서 여러 가지 해석을 많이 낳았는데요, 민중 예수, 해방자 예수, 혁명아 예수에 이르기까지 이야기가 진전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 70년대 중후반에는 딴따라패 사이에는 예수를 광대로 놓고 그 광대적 삶을 본받는 한 과정으로 예수의 일생(예수전이지요)을 몇 가지 어설픈 공연으로 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의 삶을 딴따라의 삶으로 보는 것이 그야말로 불순하게 하는 측면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를 보면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 가장 떨거지 같은 제자들이 수두룩했지요. 그리고 그가 만난 많은 사람들은 전부 다 민중, 암 하레쯔, 억압받는 병든, 가난한, 못사는 사람들과 연관돼서 같이 어울리고 떠들고 다니면서 그야말로 강연도 하고 몰려다니고 그렇게 했지요. 오병이어의 삶이라든지 다 그것은 저는 광대적 진실의 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무리지어서 산으로 들로 바다로 몰려다니면서 먹고 자는, 같이 해온 그것이야말로 딴따라적 유랑 예인의 삶이 아니었던가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드디어는 죽음의 첫 관문인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그 광란의 떠들썩한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여지없는 딴따라의 중심부 입성을 연상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여러 행적을 보더라도 최후의 만찬에 한 잔 걸치면서 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 그리고 그의 첫 기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갈릴레아 가난한 신랑신부의 혼례식에서 술이 떨어지자 그야말로 장풍 날려서 물을 술로 바꾼 그런 사건이라든지, 그가 마지막 십자가에 못박혀 사흘간 피와 땀과 액체와 눈물을 흘리면서 한 마디 한 것. 한 마디가 아니라 여러 마디로 되어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근사하게 이야기한 것도 있지만 왜 나를 이렇게 못살게 구느냐? “엘리엘리 나마 사박다니” 고통에 찬 말도 있었지만 제가 더더욱 눈여겨본 것은 한 잔의 포도주 그것을 “I’m Thirsty” 목마르다라는 것이죠.

이런 등등의 예수적 종교 상징 그것은 딴따라식으로 보면 바로 딴따라의 행위 그 자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딴따라 예수로서의 딴따라적 메시지는 무엇이었는가? 바로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 차원이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한편 그런가 하면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고 공자는 마지막 남은 것은 유어예(遊於藝)라고 하는 용어를 써서, 수많은 예술장르 중에서도 성어악(成於樂)이라고 하는 음악에서 완성된다고 하는 그런 용어를 쓰면서 맨 마지막에 칠십이 되어 제멋대로 해도 큰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라는 그런 용어를 하면서 지극히 자유로운 한 경지를 그는 살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것을 부추겨 마지 않았던 것은 음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가 한 일 중에는 시경의 편찬이 있지요. 시경은 시귀로 이루어져 있는 문학도의 필독서입니다만, 따지고 보면 당대까지 내려온 수많은 민중가요들의 가사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러 현악기 관악기의 훌륭한 연주자, 가수, 작곡가이기도 하고 당시의 큰 이론가들과도 대화를 나누고 작품평을 하면서 결국은 여러 왕국을 다니면서 자기의 뜻을 받아달라고 하면서 무리를 이끌고 순방을 떠나서 먹을 것이 떨어지고 적들에게 붙잡힐 때도 포위된 가운데서도 노래하고 춤추고 딴따라 짓을 했습니다. 아까 장자가 어머니의 죽음을 새로운 세계의 이전이라고 생각하면서 음악을 한 것과 그것보다는 더욱 더 여러 무리를 이루면서 행했던 그의 야외 콘서트판, 이것을 우리는 그의 이면사에서 보게 되는데요. 저로서는 그를 싱어송 라이터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많은 종교에서 춤과 노래와 딴따라적인 것이 왜 같이 가고 있는가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엄숙하기 짝이 없는 유교의 양식에서도, 또 마호메트교에서도 그들의 예배양식은 노래와 춤과 몸짓으로 되어 있습니다. 종교의 교리가 가장 실천적으로 드러났다고 하는 예배 양식, 미사라든지 법회라든지 제사라든지 이런 것이 악가무의 양식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종교를 연구하고 종교에 신념을 가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바로 종교 속에 그것을 부추기고 있는, 또 그것을 가능케 해주는 예술 장르 특히 딴따라 장르에 유의해주시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몸, 세계 인식의 통로 

 

그렇게 해서 딴따라로서의 자기 몸, 딴따라로서 해야 될 일, 흔히 말해서 예술가는 무당이 되어야 한다, 예술가는 사제다 그리고 민중의 예술의욕을 대변해주는 사람이다라고 이야기하는데요. 바로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될 표현 기량의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한때는 메시지가 훌륭하면 그것은 다 허용될 수 있다는 기량의 좋고 나쁨, 기량의 떨어짐도 허용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내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개체 생명을 보존하려하는 그런 에너지를 드러내고 그 자리에 축적되어 있는 민족적인 민중의 삶에서 우러난 미감과 미의식과 그 신명을 거기에 채워서 바로 그것을 통해서 일반 민중의 숨어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삶의 의욕, 예술적 의욕, 새로운 생각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지향점을 감명시켜서 불러일으키는 것. 저는 그것을 딴따라의 일이라고 생각해서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나의 몸이 세계를 인식하는 데 첫 통로가 되고 있다라는 것을 요즘은 서양의 학자들의 의견에서 찾아보게 됩니다만 오히려 딴따라의 진정성 속에서 그 문제를 다시 되돌이켜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왕불복, 딴다라의 길
 

드디어 마지막 미완성의 미학인데요, 몇 가지 묻는 것으로 이야기를 요약해야겠습니다. 작품은 창작자의 손에 의해 완성되는가? 질문 자체가 답변이 있지요.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이겠고요. 그럼 어디서 완성되는가? 보는 사람, 관중, 청중, 감상자, 미학적 용어로 하면 향수자에 의해서 또 다른 작품으로 만들어지고 재해석되고 그래서 보고난 사람들이 제각각 자기의 작품을 만들어 가는 것, 열어져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포착해 내서 자기화시킨 것, 이것이 작품의 감상이고 오늘날 많은 미학은 예술가의 체험, 창작체험이지요. 또 예술작품의 내용과 형식에 중심을 두지 않고 그것이 어떻게 해석되고 재창조되는가에 참여자, 수용자의 것으로 이전(移轉)되고 있는 예술 논의의 방향이 이전과 연관되어서는 수용미학이 일어나고, 수용미학이 점점 더 참여미학으로 가게 되면서 참여미학이 드디어 한 판을 이루는 작품을 가지고 작품이 단순히 예술가가 밀실에서 컴컴한 작업장에서 해오고 그것을 통해서 예술가를 만나는 그런 방식의 것을 깨뜨리고 직접 더불어서 감상자와 더불어서 작품을 짜나가는 한 판을 이루는 공동참여의 장을 열어주는, 그래서 진행과정 전체가 하나의 예술상황이 되는 너무나 복합적인 상황의 것으로 이전되고 있는 과정과 더불어서 현대미학의 문제를 미학적으로 풀이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그런 생각입니다. 그래서 드디어는 작품은 작가에 의해서, 감상자에 의해서 서서히 완성되어 갈 뿐만 아니라 역사적 풍상과 함께 역사적 이끼와 함께 서서히 완성되어 갈 뿐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럼 언제 완성되었다고 하는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금 이제 이 자리에서 여기 지금 이곳 여기 이 시간에 완성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살아있는 생동하는 현장으로서의 작품, 살아 생동하는 작품으로서 고정적인 것으로 있지 않고 흘러가는 한 과정 속에서의 일시적인 애증, 그것은 다시 풀림의 연속성을 가지는 것에서 흐름 속의 하나에 던져져 있는 것으로 바라본 시각이 최근 21세기 들어와서 생태론과 더불어서 예술작품에 살아 있는 것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고 그것을 동양식으로 이야기하면 미완성의 과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미완성의 과정이라고 이야기하는, 또는 미완성, 결국은 완성되지 못한다는 것인가, 완성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것인가, 또는 완성을 거부한다는 것인가, 완성의 부정인가라는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맨 뒤에 있는 인위적 무위와도 같은데요, 무위를 이미 행함입니다. 안한다는 것을 행한다는 것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적극적으로 안한다라는 뜻이 되어서요 그 말의 근원적인 용어는 ‘無爲而無不爲’입니다. 무위라고 하는 것은 그러나 무불위이다. 무불위의 해석이 여러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만 그것을 직설화법으로도 보고 은유적 표현으로도 보고 역설적인 것으로도 봅니다. 이러하지 않은 것, 그러나 이러하지 않는 것을 위해서는 안되는 것이 없다. 이러하지 않으나 이러하지 않은 것으로 못할 게 없다. 완성의 미결인지 부정인지, 함의 부정인지, 함의 과정인지, 완성의 과정인지, 완성의 부정인지의 문제를 따져보게 됩니다. 그것은 이미 서양에서도 ‘Solar Passive’라는 용어로서 passive, 수동적인 것이고 solar, 태양적으로 적극적으로, 적극적으로 하지 않음이라는 뜻으로 이해하게 되는데 無爲而無不爲 용어의 뒤를 이어주는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런 Solar Passive의 자세를 계속 지키다보면 온갖 것이 저절로 달라져간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 뒤가 흘러가면서 생기는 변화를 생각하게 되는데요.

함과 하지 않음, 딴따라들은 처음에 놀이라는 것은 일의 대척적인 지점에 있는데, 또 노는 것은 일하지 않는다라는 것이 되는데 일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일을 하는 자. 이것이 딴따라지요. 일과 놀이는 대척적인 관계에 있어서 일하지 않고 놀기만 한다라고 흔히들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그 노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이미 역설적이긴 합니다. 바로 이런 하는 것과 하지 않음 이것을 하지 않음을 통해서 하지 않음을 적극적으로 함으로써 자기의 할 일을 다 하는 자세를 바로 딴따라의 길이라고 생각해봤습니다.

바로 이 과정에서 얻는 미적 범주는 고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은 노(老)대가가 못 부르는 노래, 명무가 못 추는 춤으로, 명필이 못 쓰는 글씨에서 보여지는 것과 통한다고 생각할 수 도 있고 그것은 원천적인 졸렬함입니다. 투박한 것이지요. 고졸은 시서화에서는 더 이상 도달할 수 없는 마지막 경지, 그 너머를 일컫는 것인데 이것은 딴따라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白樂天이란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 집에 와서 글을 짓고 그 글을 옆집에 사는 꼬마 아이에게 이야기해줍니다. 그 아이가 들어보고 “되었다.” 하면 그제서야 ‘아 내 글이 되었구나.’ 해서 발표를 했다고 합니다. 돌아가신지 얼마 안 되는 원주에 사셨던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글씨와 그림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보게 됩니다. 군고구마 아저씨가 삶의 절실한 심경으로 써놓은 군고구마 팝니다라는 글씨야 말로 더할 나위없는 최고의 경지다라고. 그런 이야기가 바로 고졸의 경지와도 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바로 그러한 별거 아닌 것, 시시해 보이는 미적 평화의 세계, 그것은 못생긴 것 그것이 더욱 더 매력적일 수 있다는 역설을 품고 있어서 그것을 우리는 미적 추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딴따라의 길 그것은 그야말로 길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만, 가다가 마는 길이 아니라 가다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나는 길이 아니라 가고 가고 끝없이 가서 다시 되돌아오는 길입니다. 그것을 주역에서는 무왕불복(無往不復)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쓰여 있습니다. 가서 돌아오지 않음이 없다, 한번 떠난 것은 으레 돌아오기 나름인데 돌아온 것은 위상으로는 변함이 없습니다, 애써서 갔는데 결국은 와보니까 떠났던 그 자리입니다. 한 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떠나서 둘러가서 다시 돌아온 그 자리에 있는 한은 떠날 때의 내가 아니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까 뒤풀이를 이야기했는데요. 뒤풀이를 하다보면 몸이 망가집니다. 수명이 짧아지는 대신에 몸은 깊어집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오듯이 다시 돌아와 보게 됩니다. 술을 마시다 마시다 보면 깰 때가 있습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깰 때까지 마시자입니다. 그것은 1박 2일, 2박 3일 코스로는 되지 않겠지요. 평생을 두고 걸어가야 될 술꾼의 길입니다. 술꾼의 길과 딴따라의 길은 서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떠날 때 그 자리에 비록 돌아왔지만 그 때 돌아온 나는 떠날 때의 내가 아닌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있는 그런 새로운 사람으로서 자기 몸으로 다른 사람의 신명을 불러일으키는 것, 그것을 우리는 마지막 뒷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돌무덤으로 향하는 딴따라의 마지막 행각이라 생각할 수 있고 바로 그 무덤가에 눕혀진 그것을 통해서 자기 삶이 서서히 완성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차수를 변경, 2차, 3차 가다보면 차수가 변경되지요. 그것은 차원의 변화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흥분한 나머지 약간 비약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만, 저의 근본적인 생각, 딴따라적인 생각은 이렇습니다. 삶의 현실 속에서 생겨나는 여러 삶의 문제들과 더불어서 생각하는, 현실회피가 아니라 현실에서 멀어질수록 좋다는 예술이 아니라 현실을 떠안고 민중들의 삶과 더불어서 학문이 예술이 세계가 전개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이야기를 끝으로 모아보면서 고별 강연을 마치고자 합니다.

 

 

 

2013. 07.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