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먼동이 트는 새벽에 이 글을 씁니다.
갑작스런 영면 소식에 슬픈 마음 가눌 길 없어 며칠 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던 것은 선생이 우리 무용계에 남긴 흔적이 결코 녹녹치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생은 전방위적으로 활동한 우리 무용계의 전사(戰士) 였습니다.
서울시립무용단에서부터 시작 창원시립무용단, 대전시립무용단으로 이어진 직업무용단과의 작업, 어려운 여건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역 무용가들과의 연출, 객원 안무 등을 통한 공동 작업도 적지 않았습니다.
남성 무용수 및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젊은 무용인들의 힘든 작업 현장에도 자주 모습을 드러냈고, 춤 비평가들의 활동에도 오래 동안 변함없이 관심을 가져 주었습니다.
제가 <객석>의 무용담당 기자로 문일지 단장과 배정혜 단장의 서울시립무용단을 취재할 때 무용수로 때론 지도위원으로 작업의 중심에서 활약했던 선생의 역동적인 모습은 마치 춤을 위해 태어난 전사처럼 보였습니다.
서울시립무용단의 몇몇 무용수들로 이루어진 창작 그룹 한국무용아카데미의 활동도 떠오릅니다.
당시 젊은 무용인들의 의욕은 정말 대단했지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는 그들의 열정보다 춤에 대한 진정성이 더욱 고귀해 보입니다.
바탕골예술관에서 선생의 개인 작업으로 선보인 <적색경보>는 커다란 화제가 되었지요. 당시 젊은 기자였던 저는 선생의 자유로운 예술세계와 도발성에 스스로 흥분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대전시립무용단, 창원시립무용단의 상임안무가로 단체를 이끌던 때 의상, 무대미술, 음악, 조명 등 제작 스태프와 비평가 등 서울에 있는 관계자들과 소통을 확대해 지역과 중앙과의 교류에도 힘썼었지요.
대전예술의전당 앞마당에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 돗자리를 깔고 물 건너 야외무대에서 펼쳐지는 춤 공연을 보던 관객들의 모습, 적은 예산을 쪼개 외국 안무가들과 국내 안무가들의 작업을 모은 기획공연 등 작은 국제교류 프로그램도 기억에 남습니다.
외롭고 힘들게 작업하는 아웃 사이더 후배 무용인들에게도 남달리 관심을 보였던 선생의 공백은 그래서 결코 작지 않아 보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배려하고 나누기보다는, 사사로운 개인의 이익을 챙기는 어른들이 적지 않은 혼탁한 무용계에서 선생은 어두운 구석구석에도 눈길을 주었던 분이셨습니다. 세미나나 토론회장에서 특유의 흥분된 목소리로 우리 무용계의 문제점 등을 통렬하게 질타하던, 선생의 그런 모습들이 그리워질 것입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표류하지 않고, 힘든 환경을 스스로 감내하며 자신의 길을 가고자 했던 선생은 돌이켜보면, 무용계의 고질적인 병폐인 인맥, 패거리 의식으로부터 자유롭고자 스스로를 채찍질했던 외로운 예술가였습니다. 만학을 고집하며 최근까지 대전 지역의 춤 발전을 위해 35명의 무용인이 출연하는 전통춤판을 기획했던 춤에 대한 식지 않은 선생의 열정은, 새로운 세상에서도 이어질 것입니다.
자정을 넘기면서까지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춤계의 많은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나누었던 따뜻한, 친구 같은 예술가로 선생은 제 가슴 속에 살아 있을 것입니다.
본 협회 공동대표, 국제공연예술프로젝트 대표, 춤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