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故 한상근 선생 추모 특집
한상근과의 대화 : 나의 작품 세계 그리고 예술적 성장기를 말한다

 

- 본 자료는 제8회 민족춤제전(2001, 민예총 민족춤위원회 주최; 분단 2세기, 평화천사 종횡무진)의
팜플렛 <경지(境地):>(185쪽)에 수록된 바 있으며, 그해 민족춤제전에서 춤패 아홉은 한상근선생의
안무작 <없는 지역 번호입니다: 부가!... 북아!>를 출품하였다. 본 인터뷰에서 그의 활동상은 2001년도까지
소개되므로, 그의 전모를 알리기에는 제한적이라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는 서울시무용단에 25년간 근속한 최장기 근속 단원이었다. 서울시무용단은 1999년 전신 서울시립무용단이 재단법인화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는 올해(2001년) 4월 대전시립무용단 단장으로 부임하였다. 때마침 그는 그전부터 예정된 작품 <꽃신> 연작을 공연(2001. 4. 5-8.)하고 있었는데, 자연히 인터뷰는 <꽃신> 공연이 있은 홍대 앞의 씨어터 제로 극장에서 시작하였다. 그러나 공연과 갑작스런 부임에 따른 이런저런 일 때문에 바빠서 인터뷰는 중도에 끊겼다가 다시 날들을 잡아 장소를 옮겨가며 3일(인터뷰 일시: 2001. 4. 7-9.)만에 마무리되었다.

 

 




대전시립무용단 단장 부임을 앞두고
 

김채현: 이번에 대전시립무용단에 부임하셨죠? 소감부터 한 말씀 하시죠.
한상근: 24년만에 서울시무용단을 떠나니까 시원섭섭합니다. 대전시립무용단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프로무용단의 하나로 만들고 싶습니다. 먼저 책임이 무겁고, 좋은 작품을 통해 지방에도 춤이 확산이 되어 춤세계가 발전하도록 이바지한다는 각오입니다.
김채현: 좋은 작품은 어떤 작품인가요?
한상근: 무엇보다 첨단 과학의 도시 대전의 특색에 맞는 작품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첨단과학과 인간의 본능적인 움직임이 만나는 그런 작업들... 그리고 대전 시민들이 좋아하고 나아가서는 새 예술 조류의 일환으로 퓨전 양식의 춤도 구상하고 싶습니다. 다양한 춤 관객들에 밀착해 들어가는 그런 작업으로써 시민의 세금에 합당한 작업을 해야 하겠죠. 그런데 대중의 욕구만 따르다 보면 예술 작업은 소홀히하기 쉬우니까, 보충 작업으로 균형도 맞추어야 하겠지요. 또 한국무용 계열 공립 단체이므로 민속 프로그램도 운용해야 할 겁니다. 대전에서 춤문화를 다양하게 알릴 작업들을 며칠 동안 구상해 보았습니다. 지금껏 내부 문제도 없지 않았던 듯해서 단원들과의 단합이 첫째고 기량 높이기도 중시해야 합니다. 단원들한테 확고한 무용단을 만들기 위해서 전통의 밤 또는 창작의 밤을 일년에 한두 번 정도 해서 그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있어야 한다는 느낌도 듭니다. 또 여러 선생님을 모시고 재교육을 하고 싶습니다.
김채현: 이전에 대전에서, 서울시무용단의 일원 또는 개인적으로 공연하신 적이 있습니까?
한상근: 전혀 없었습니다.
김채현: 참 의외이면서도 금방 이해가는 말씀입니다. 대한민국에 도시와 도시 사이에 물류 유통만 있을 뿐 문화 교류는 없다는 걸 재확인하게 됩니다. 상상력이 빈곤한 사회지요.
한상근: 대전에서는 아니었지만, 그런 것들이 없지 않았어요. 몇 번 행사위주로 치러졌지요.
김채현: 90년대 초반에 있은 전국시립무용단무용제를 말씀하시는군요.
한상근: 전국시립무용단무용제가 서울 국립극장에서 여러번 있었죠. 해당 시에서 했던 공연들을 그대로 갖고 오니까 신선도가 떨어져서 아니면 예산 문제로 중단된 줄로 압니다. 이번 기회에 시립 단체들이 모여 무용을 활성화하는 방법들을 제안하려고 합니다. 충청권에서는 각 지자체 시장들끼리 만나서 연합 합동 공연을 크게 추진하자는 의견들이 오가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일례로 2002 월드컵 때 무용단들을 모아 객원 안무를 내세우는 그런 형식을 거론한 모양입니다. 전문 인력들이 학생들을 동원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직업 무용단원들 200명 정도를 모아 작업할 토대를 만들어 월드컵에 대비하자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답니다.




2001년까지 1천회 공연, 백편 출연, 50여편 안무
 

김채현: 알겠습니다. 서울시무용단에 재직할 동안 공연 출연 횟수와 출연 작품 수는 얼마나 됩니까?
한상근: 뭐 셀 수 없지만, 24년 재직하였으니 공연은 줄잡아 1천회는 되겠고, 작품은 100편 정도 될까요?
김채현: 본인 안무 작품은 몇 편 정도 됩니까?
한상근: 서울시무용단 내에서만 6편을 안무하였습니다.
김채현: 그외에 뮤지컬이나 창극, 연극에서 안무도 많이 지도하신 걸로 압니다. 그런 작업은 몇 편이나 될까요?
한상근: 그건 정리하지 못했어요. 좀 많지요.
김채현: 창극이나 뮤지컬에서 근자에 안무 지도한 것으로는 어떤 작품이 있습니까?
한상근: 작년 9월 국립창극단 <수궁가> 완창전, 작년 11월 공연한 오페라 <심청>에서 안무를 맡았죠.
김채현: 그럼 1년에 대체로 몇 편의 연극이나 뮤지컬을 안무했습니까?
한상근: 해마다 서너 편은 안무한 것 같군요.
김채현: 뮤지컬이나 연극 안무는 언제부터 하게 되었습니까?
한상근: 전문적으로 안무를 하게 된 것은 80년대 후반부터였죠.
김채현: 그럼 줄잡아 50편 정도 되겠네요?
한상근: 네.




안무에 연출 요소가 두드러져
 

김채현: 무대춤에선 연출이 중요하고, 선생님 작품에선 연출 요소가 두드러진다고 봅니다. 연출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안무가들은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않는 것 같아요. 아마 한선생님이 다른 무용가와 구분될 수 있는 그런 지점이 아닌가 싶은데요...
한상근: 연극, 오페라, 뮤지컬, 창극을 안무하면서 그 작업들의 연출을 춤적으로 어떻게 극대화시켜야 하는가...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사실은 이름 없이도 많이 연출해주었어요. 지난해 전국무용제 대상작 <훨훨>도 연출했죠.
김채현: 연출이 잘된 작품이어서 대상을 탔는지, 아니면 자신이 연출했으므로 대상을 탔는지, 어떻게 보십니까?
한상근: 그 작품은 극장 공간을 잘 활용한 작품이었다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평이었습니다. 경기도 지역에서 연출해서 대상을 탄 작품도 있구요.
김채현: 고등학교때 안양예고에서 연극을 전공한 이력도 크게 작용했으리라 여겨지는데, 어떻습니까?
한상근: 이론적으로 무대 구성을 배우기는 하였으나, 고교 졸업후 연극에서 조연출을 맡아 공간이 어떻게 쓰여져야 하는지, 어느 연출자가 블로킹 선을 그었을 때 저것보다 이것이 좋지 않나 하는 나름대로의 판단들이 있었기에 작용했으리라 봅니다.
김채현: 그럼 연극 안무나 무용 연출에서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상근: 작품 스타일에 따라 틀리죠. 저 같은 경우에는 작품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의 포인트를 4포인트쯤 잡지요. 가령 4포인트의 그림처럼, 작품이 극적으로 갈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해서 30분 짜리라면 너댓 포인트를 잡습니다.
김채현: 여기서 포인트는 대목이나 구비를 의미하죠?
한상근: 예, 관객이 집중할 수 있는 대목, 즉 주요 구비를 몇 개 설정해야 30분의 시간 동안 작품이 지속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섬’ 이라는 작품이라면 일단 한 포인트를 보여 주고 그 다음 두 번째, 세 번째 더 많은 섬의 모습들로 가면서 섬을 점점 구체화시키는 그런 방법입니다. 그리고 무용수에게 움직임이라는 것은 공간에 대한 싸움입니다. 우리가 날을 수도 없고 땅으로 꺼질 수도 없으므로 공간과 싸움할 때 이 공간을 전부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연출적으로 생각합니다. 공간이 해당 작품에서 어떻게 적절히 활용되고 맞아떨어지게 할 수 있는지 극장에 맞는 공간 활용 방안을 찾아내죠. 동숭동 바탕골극장 공연에서는 옆으로 돌아서 올라가는 철 계단이 있었는데, 극장 구조에 맞게끔 작품 구조를 만들어 썼습니다. 좁은 공간이 있다면 그 공간에다 또 다른 장면들로써 2중 3중의 것들을 부대 공간으로 만들어 작품이 표현하려는 것을 살려 나갑니다. 이번 <꽃신> 같은 경우에는 이 씨어터 제로 극장 천정에 보조 장치가 없어 무엇을 뿌리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만, 해야 되니까 사람을 한시간 동안 천장에 있게 해서 가루를 뿌리게 했죠. 악조건 에서도 공간을 작품에 맞게 만들어야 합니다. 기존의 벽 혹은 공연장 구조를 어떻게 활용하느냐, 혹은 세트를 활용해 공간에서 불명료하고 열악한 점들을 개선해서 작품과 맞아 떨어지게 하는 그런 방법이 중요하죠. 그래서 작품은 극장에 따라 임할 때부터 방법이 틀려집니다. 만약에 이번 <꽃신> 연작에서 ‘그림자’가 문예회관대극장에서 공연되었다면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서울시무용단 창작 활동의 두 특성

김채현: 댄스 포럼처럼 일부 잡지에는 선생님의 그동안의 이력이 소개되었으므로 그 점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연극계에서 이진순 선생님을 돕다가 서울시무용단에 입단했고, 그후 30대 중후반에 대학에 진학하고 대학원 과정을 마친 만학도였지요. 서울시무용단 활동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싶은데, 선생님은 서울시무용단 최장기 근속 단원이었습니다. 서울시무용단의 창작품에 대해서도 연출을 많이 하셨죠?
한상근: 문일지 선생님이 단장으로 있은 88년도 작품에서 조연출을 했고 배정혜 단장님 때는 ‘하얀 강’ ‘서울까치’를 연출하면서 안무를 도왔고, 명의는 직접 연출이 아니었지만 안무할 때 옆에서 함께 연출 공간까지 생각하면서 작업했죠.
김채현: 그러면 서울시무용단에 계시면서 작품에서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 말하자면 일례로 예술감독 같은 여러 역할들이 있겠죠. 단원이면서 스텝진으로서 상당히 많이 관여하셨을 텐데...
한상근: 문일지 선생님 계셨을 때는 그 선생님의 극적인 무용을 춤꾼 입장에서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 상의 드리면서 안무자와 작업했었지요. 배정혜 선생님 같은 경우는 동작들을 작품에 맞게 요소요소 짜두고 극적 구성이 필요하다면 이음새를 생각해서 장면들을 연결해주는 방법을 택했지요. 저는 단원으로서 무용수를 하면서도 배정혜 선생님으로부터 동작을 많이 받지는 않았어요. 그러니까 어떤 장면이다 하면 그에 대해 제가 동작을 만들고 이 부분에서는 앉는 설정이 더 좋지 않을까 싶으면 그렇게 해봅니다. 제가 두바퀴 도니까 더 좋다든가 하는 그런 방식이죠. 저와 배선생님의 관계는 동작을 마냥 짜주고 받는 그런 관계보다는 저의 개성을 살리고 또 조정하는 그런 방법들로써 작업했죠.
김채현: 그런 과정에서 본인도 공간에 대해 연출 측면에서 많이 연구했을 것 같은데...
한상근: 무용 작업을 함께 한 경험으로는, 문일지 선생님 같은 경우는 극적인 요소를 중시했고, 배정혜 선생님은 동작 위주였어요. 그래서 원로 박용구 선생님은 문일지 선생님을 피나 바우쉬에 비교하고, 배정혜 선생님을 모리스 베자르에 비교를 했습니다. 두 분 가운데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좋은 점만 골라 작업하려고 했지요. 동작이 결여되거나 극이 결여되어 춤사위로만 푼다든가 하는 미흡한 점을 고려하여 두 방법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거기에다 한상근의 퍼포먼스적인 것, 혼합적인 것들을 합쳐 한상근만의 색깔을 가진 작품을 만든다는 생각이 있었지요. 그래서 처음에 만든 <적색 경보> 같은 작품은 굉장히 퍼포먼스적이면서도 퍼포먼스로 분류되지 않았지요. 애당초 저의 춤을 행위의 춤이라고 기억이 나는데 그러면서 그때로는 새로운 시도였으므로 그렇게 얘기했겠지만, 지금 와서는 <적색 경보>를 행위의 춤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새로운 것에 대해 두 분이 가졌던 극적인 것과 춤사위적인 것들을 결합하고 거기다 획기적이며 심지어 파격적인 것들을 투여해서 춤이 큰 공감대를 내포할 수 있게끔 하였습니다. 거기에 또 다른 재료들이 많이 투입되어 춤 장르를 넓힌다는 그런 생각이 지금까지 작용해왔습니다. 지금 나이 들어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정리되어가면서 40대 후반에는 작품들이 저 자신도 모르게 달라지고 다듬어지고 혹은 더 과감해지지 않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한상근이라면 매우 파격적이었는데 많이 다듬어져 가네, 이런 생각에 저 스스로 놀랄 때가 있어요. 작품들이 자식처럼 저를 닮아야 할텐데 어떨 때는 저도 모르게 변해가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연극
•영화관람, 작품 구성에 자극

김채현: 창작 활동이 아니라도 춤 이외의 다른 공연물을 많이 보시죠? 부지런하기로 소문나 있습니만, 1년에 영화나 연극을 몇 편정도 보시는지...
한상근: 춤 연습하지 않는 주말에는 많이 봅니다. 과거 30대에는 대학로에서 연극을 200편 정도하면 200편을 다 보러 다녔었어요.
김채현: 40대에는요?
한상근: 좀 줄었습니다. 40대 들면서 대학로에 연극 공연 횟수는 많아졌는데 질적으로 좋은 작품들이 적고 진지하지 않게 속성으로 만들어 상업적으로 간다든가 해서 점점 안 보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200편에서 줄어서 100편... 그러다가 요즘은 아주 좋은 공연 아니면 안 보러 가게 되고 오히려 춤 공연에 더 중점을 두게 되더라구요. 그러면서 제 아내가 영화를 하고 있으니까 영화를 비디오로, 아니면 영화관에서 봅니다. 영화는 아카데미 수상작부터 시작해서 깐느, 베니스 영화제 수상작은 물론이고 놓친 작품이라도 비디오로 본다든가 해서 좋은 영화들은 다 봅니다. 최근에도 <번지 점프를 하다>를 비롯 요새 영화들도 다 보고...
김채현: 그럼 그런 영화나 연극을 본 경험이 춤에서 어떻게, 어떤 요소로 나타날까요?
한상근: 저도 예측할 수는 없죠. 영화나 연극을 보면서 좋았다 하고서는 잊어버리죠. 그것들이 다 쌓여졌다가 어느 작품을 만들 때 어느 순간에 조립되어 다른 물체로 나타나는 그런 식입니다.
김채현: 선생님 무용 작품에 대해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영화나 연극이 있습니까?
한상근: 어느 한 영화가 아니고 이것저것 모아져 제 머리 속에서 재생됩니다. 가령 ‘밤꽃’을 한다고 하면 에이즈에 관한 영화, 커밍아웃 영화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 영화들이 내 머리 속에서 비벼져서 밀가루가 반죽에서 국수가 나오듯하기 때문에 꼭 어느 한 영화를 지칭하기는 힘듭니다. 어느 독특했던 영화는 보고 나면 내용도 잘 몰라도 잠재되어 있다가, 이런 작품하고 싶다고 하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건 이렇게 만들면 되잖아 하는 식으로 금방 튀어나오는 식이죠. 작품할 때는 이렇게 가면 되는가, 이게 맞을까 하고 계속 고민해서 작품 구상이 떨어지는 데 한 1년 걸립니다. 일단 그렇게 되면 작품에 돌입하는 건 빠르죠. 전제가 확실하게 돼 있으니까...




전향적 창작집단 '춤패 아홉'과 초기 작품세계
 

김채현: 다시 창작 얘기로 되돌아가자면, <적색 경보>가 1987년에 발표됐고 그전에 <무초>가 있었죠?
한상근: 네, 1983년의 <무초>가 첫 안무작이었죠. 처음 소극장에서 한 이 작품은 그 다음에 확대되어 세종문화회관대강당에서 12명으로 공연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세종문화회관대강당에서 하면서도 겁 없이 공간 활용을 하였습니다. 그때도 공간 활용에 대한 생각들이 저한테 강했나 봅니다. 검정줄과 하얀줄이 세종문화회관대강당에 늘어뜨려지고 교차되게 만들어 공간의 여백들을 살려 나갔지요.
김채현: <무초>는 지금의 <꽃신>처럼 춤패 아홉하고 공연하였지요. 춤패 아홉은 서울시무용단 내의 별개 소집단 무용단으로 있었던 것 아닙니까?
한상근: 예, 그렇죠. 당시 서울시무용단에는 문일지 선생님 제자들로 구성된 한국무용아카데미가 있었는데, 저는 아카데미와는 별도로 다른 깃발을 들어 보았죠.
김채현: 그럼 춤에서 어떤 방향을 모색했습니까?
한상근: 기존의 아카데미는 학구적이었다면 저는 창작에서 전향적인 그런 집단을...
김채현: 전향적이다는 것은 춤 작품 경향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까?
한상근: 춤 작품 경향에서 기존의 것보다 더 낫고 다른 색깔은 없을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김채현: 지금도 그 춤패 아홉이 계속 유지되고 있는 줄로 아는데, 아홉 명으로 구성됩니까?
한상근: 아니오, 다섯 명일 때도 있고 12명이 넘을 때도 있고 수시로 바뀌죠.
김채현: 그럼 왜 아홉이라 하였습니까? 혹시 동양 특히 우리나라에서 아홉이라는 숫자를 좋아하고 떨어지지 않는 수, 완성으로 가는 의미를 가진 좋은 의미때문입니끼?
한상근: 춤패 아홉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분은 월간 춤의 조동화 선생님입니다. 제가 너무 욕심이 많고 의욕적이니까 너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말고 그냥 꾸준히 작업해 나가면서 채워졌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에서 지어주신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춤패 아홉이라는 것에 유다른 의미는 두지 않고, 쓰기도 쉽고 또 춤 창작에서 도움을 받을 때 가령 아홉 가지의 장르들이 모여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식으로 느슨한 의미에서 특별한 의미없이 쓰기도 합니다.
김채현: 82년도에 아홉이 결성되었고, 83년 12월에 <무초>를 세종문화회관 소극장에서 다른 세 작품과 함께 발표했죠? 초기 작품 세계를 <무초>부터 짚어나갈까요?
한상근: <무초>는 분단국의 씨앗을 그린 작품입니다. 분단국에서 양쪽 무초들이 만나 하나되는 과정들을 30분 길이로 만들었습니다. 서로가 그리워하면서 스쳐가버리고 이루지 못하므로 마음이 하나 되어야 싹이 트고 통일될 수 있다는 겁니다. 싹이라는 것이 땅에 떨어졌다고 해서 그냥 나는 것이 아니고 온도와 물, 토양이 맞아야 트듯이 흑백의 보자기를 가진 두 사람이 서로 그리워하면서 감싸안고 한 알의 밀알로 남을 때 흑백이 그림으로 변화되도록 하였습니다. 속뜻은 한 알의 밀알이 썩어야 많은 싹이 나듯이 통일 문제도 둘이 서로 보듬어졌을 때 하나가 되지 않겠느냐 해서 만든 것이 <무초>입니다. 그 다음에 발표한 <투쟁>은 바둑판을 무대에 깔아 놓고 흰 알, 검은 알이 싸우는 작품이었어요. 서로 싸워 이겼지만 승자는 항상 또 다른 도전을 받아야 하는 즉 끝없이 경쟁해야 하는 인간들의 불안정하고 왜소한 모습들을 바둑 게임에 비유한 작품이죠. 작품 <영원하리>는 대한민국은 영원하다는 주제로 계곡을 만들어 남자와 여자가 이 땅에 온 장면을 태극기를 슬라이드로 비추어 거기서 춤추게 하였는데, 그 당시에는 태극기 밟는 것을 모독이라 여기는 때였죠. 작품 <조용한 사람>은 전태일의 삶을 그린 책을 읽고 아픈 사람, 소외된 사람, 노동자에 대해 관심을 갖고 나도 동참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분신한 전태일의 외로운 투쟁을 소재로,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 같은 분위기를 그렸지요.
김채현: 베케트의 <고도를...> 같은 느낌이 들군요. 이 네 작품은 정치성 내지 이데올로기 지향성이 높고 선명하다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게 된 배경이 있습니까?
한상근: 성장기에 저는 부모님에 대해 원망이 컸어요. 나는 왜 부유한 집에서 못 태어났는지... 그런 생각을 많이 했는데 나이 들면서 이것은 부모님 잘못이 아니고 사회구조 때문에 부모님이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깨닫게 되었어요. 당시 독재정권 치하에서 저는 무용가로서 몸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무한히 감사했습니다. 또한 춤의 상징성은 연극과 이래서 틀리구나 그리고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구나 하는 자각도 들었지요. 제가 아픈 역사 현장에 바로 있었더라면 더 과감한 표현과 공감을 확 불러들이는 작품을 내었을 텐데,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접촉이 없었기에 아쉬웠습니다.
김채현: 그런 각성을 언제쯤 하게 되었어요? 서울시무용단 들어갈 때부터였습니까?
한상근: 아니요. 무용단 입단 때 제가 안 것은 오로지 연극과 탈춤뿐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밥을 먹기 위해 무용단에 들어갔고, 그 후에 빈민선교 사람들, 공장 노동자들과 접촉해 가며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되지 않았나 합니다. 그래도 난 아직도 행복하구나, 잠 안오는 약을 먹으면서까지 일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그런 고마움에서 춤을 더 열심히했던 것 같습니다.
김채현: <무초>를 공연하고 나서 당시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한상근: 그때 발레 동작과 현대무용 동작을 한국무용에 썼다는 찬반의 평이 있어서, 음악과 연관된 동작, 춤사위 개발에 힘쓰게 되었죠.
김채현: 그후 단원 구성은 변화가 있었나요?
한상근: 서울시무용단 내에서 완전히 독립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인원은 유동적이었습니다.
김채현: 춤패 아홉에서 한선생님과 가장 오래 작업하신 분은 누구일까요?
한상근: 홍경희씨와 박영순씨... 구연순씨를 87년도에 만났지만 그전까지는 홍 선생님과 공연하였습니다. 운영은 공동 경비로, 공연은 자비로 했고, 각자에게 기회가 되었죠. 제 이름으로 만들면 제 공연으로 하였습니다.
김채현: <무초>에서 동작 해체가 있었는데 그 관점은 무엇이었습니까?
한상근: 양반 춤과 상민 춤을 대비시키고, 집단무 그리고 흥과 멋을 교체하며 작업했죠.
김채현: 그럼 <적색 경보>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을까요?
한상근: 더 발전되어 안무 라인을 강조하는 작업과 에이즈와 공해에 대한 문제들이 더 원천적으로 나오고 춤사위를 더 끊어 동작을 개발했죠. 그리고 숨막히고 긴박한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물고기가 땅바닥에서 타닥 튀는 것처럼 원천적 표현이 격해지고 극대화되어 거기서 느껴지는 엑스타시 등이 표현되도록 했죠.
김채현: 거기서 하이라이트라 할까 아방가르적인 대목은 무엇일까요?
한상근: 이 작품은 통상적인 너댓 구비에 비해 12구비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관객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끝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한꺼번에 많은 것을 보여주어서인지 한상근이는 아이디어 뱅크로 불려졌습니다. 살을 뜯으면 피가 나오는 효과를 노렸듯이 분장에서도 7시간 정도 걸렸고 소화기와 연막탄을 터뜨리고 와이셔츠를 붉은 연막탄으로 물들일 정도로 관객을 혼내면서 함께 공존했다고 봅니다. 우리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범세계적인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점을 신라의 처용 설화 시각에서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의문을 품고 만든 작품이라 하겠죠.
김채현: 처용을 직접적으로 설정하진 않았죠?
한상근: 예, 처용 의상을 변형해서 제 혼자 상징적으로 입었죠.
김채현: 정치성이 강한 작품이었고 본인을 자연스럽게 알린 작품이었군요. 그후 서울 시립무용단에서 주역을 맡은 것으로는...
한상근: <백결>과 박용구 선생님의 대본을 쓴 작품 <고리>가 있죠. 이를 계기로 올림픽 성화 봉송을 제가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채현: <적색 경보>가 사람들에게 한선생님에 대해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해석할 수 있겠어요?
한상근: 네. 춤계에선 지랄 같고 희한하다고 생각했겠죠. 만약 제가 전통무용을 습득하지 않았다면 또 다른 취급을 받았을 텐데, 그전부터 김천흥, 이동안, 김숙자 여러 선생님들께 춤을 수련하였기에 인정받을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유럽 현대춤 조류 섭렵과 이후 창작 활동
 

김채현: 자, 그후 문예진흥원의 지원금으로 유럽으로 춤 연수를 떠나는데, 6개월간의 무용 연수 기간 지원금에 더 보태어 자비로 3개월 간 더 계신 줄로 압니다. 왜 유럽을 택했나요?
한상근: 우리나라는 미국의 영향이 너무 컸고, 또한 저의 춤스타일을 부토나 피나 바우쉬와 많이들 비교했고 또 파스텔톤의 유럽 작업 경향들에 대해 공부하고 싶었죠.
김채현: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한상근: 예, 유럽의 독특한 색깔을 익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김채현: 파리에서 몇 개월 계셨습니까?
한상근: 9개월간 계속 있었고 중간중간에 다른 지역으로 가서 공연을 보았고 몰래 카메라로도 찍어왔는데, 우리의 방식과는 맞지 않아 지금도 카메라로만 볼 수 있는 아쉬움이 큽니다.
김채현: 프랑스 현대무용, 독일 현대무용 중에서 어디서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봅니까?
한상근: 피나 바우쉬와 윌리엄 포사이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바우쉬의 작품을 많이 접했기에 그런 것이 무의식적으로 작업에 반영되지 않았나 봅니다. 또 윌리엄 포사이드의 작품을 보면서 현대발레적 다양한 실험 효과들을 생각하면서 그때까지 생각했던 발레를 달리 보게 되었고 앞서가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김채현: 연수 학교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한상근: 파리에 소재한 에콜 드 스펙타클이었는데, 공연 전반에 대한 것 즉 연기, 노래, 안무법, 컨템퍼러리 댄스들을 배우면서 저보다 나이 어린 선생한테 겸손한 자세로 배워야 한다는 가르침과 유학생활의 어려움을 체험하고, 한편으론 나는 정지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늘기도 했습니다.
김채현: 그곳에서 춤에 대해 구상도 하셨습니까?
한상근: 아니요, 저는 국내에 오면 춤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어요. 공부하면서 내가 이전에 배운 춤에 대해 오히려 자신감을 잃었어요.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 것이라는 생각에서 춤을 대해 왔었는데, 유럽에서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는 시스템과 비교하여 한국에는 그런 시스템이 없고 색깔이 없는 그런 시스템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나하는 생각을 4, 50% 하게 되었고, 또 좋은 무용수들은 교수들 밑에 있는 것이 우리 실정이었지 않습니까. 다만 우리 춤에서 호흡의 요소들, 신체의 움직임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과제를 안고 돌아왔죠.
김채현: 92년 <비행>이라는 작품을 올리게 되었는데, 작품을 포기한다고 했다가 갑자기 하게 된 것처럼 심경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습니까?
한상근: 서울시무용단의 정기공연이었습니다. 마침 돌아오니까 예산이 3천5백만원 정도 남았었는데 저로선 만져볼 수 없은 큰돈이었어요. 그 돈을 누군가가 쓰고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사정이었데, 저의 창작 동반자들을 모으는 시스템을 이 작품을 통해 만들어보자는 심정에서 마음을 고쳐 먹었지요.
김채현: 조지 오웰의 <1984년>을 연상시키듯이 꽉 짜여진 현대의 감시와 지배 사회를 비판한 작품이었지요. 검정 양복에 검정 중절모를 쓴 감시자들, 권력의 대행자들 그리고 웅크리고 스러진 민중들... 대형 철제 아이빔과 대형 집진기를 동원하여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 거대한 스펙타클을 조성하지 않았습니까. 한국무용이다 아니다를 넘어서는 작품이었습니다.
한상근: 현대 국가 비판이 주제였습니다. 국가는 권력에 치중하고 사람들은 왜소해졌죠.
김채현: 움직임이 크게 두 집단에 따라 달라지는 이원화된 느낌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만...
한상근: 네, 지배자는 덜 움직이고 민중들은 몸부림치는 식으로 다단계적 움직임 구도를 사용했죠.
김채현: 권력에 따라 움직임이 달라지는 것은 춤사회학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논제입니다. 그외 움직임에서의 주안점은 무엇이었습니까?
한상근: 프랑스에서 컨템퍼러리 댄스를 배우고 나서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춤사위는 전반부에는 한복을 입었다가 중도에는 꺾기 휘집어돌기 어깨 동작 등의 동작이 생기다가 후반부에서는 컨템퍼러리적 동작으로 가면서 동작의 변화를 통해 시간의 흐름과 안무에 변화를 주었죠.
김채현: 그 작품은 피나 바우쉬적이라고들 그러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상근: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렇게 생각하도록 가만히 있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김채현: 94년 전봉준의 일대기를 묘사한 <녹두꽃이 떨어지면>을 창작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서울시무용단과 함께 하게 되었는지 과정부터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한상근: 93년도에 배정혜 선생님이 안무를 하고 94년에는 한 선생이 작품해라 했고 94년도가 동학 100주년이어서 전봉준이라는 인물을 춤으로 조명해야 되지 않는가 싶었습니다. <녹두꽃이 떨어지면>이라는 노래 구절을 단서로 작품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인물사를 연구하고, 민중들이 싸움할 때 옷고름 입에 물고 달리면 총과 칼이 피해간다는 믿음들도 알게 되어 춤적으로 많이 참조했습니다. 같은 해에 안무해주었던 연극 <들풀의 노래>에서는 굉장히 리얼하게 작업하였다면, 여기서는 상징적으로 처리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전봉준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우리가 얼마나 고민했을까하는 의문, 그가 죽었을 때 비가 내렸기에 꽃비가 내리게 하고 또 그의 여인이 죽었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하는 등등의 인간적 측면을 서사적으로 그렸죠. 또한 한 인간의 고난이 우리에게는 잊혀져 가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여기서도 무대 전면에 대형 빔을 설치하여 형광등을 달고 아파트 같은 효과를 통해 지금 전봉준은 죽어가는데 아파트의 불은 여전할 뿐이다는 우려에서 마음에 간직하려고 만든 작품입니다.
김채현: <비행>과 <녹두꽃이 떨어지면>의 작품양식은 엇비슷한 것 같은데요?
한상근: 디자인을 <비행>에서는 이태섭씨가 하였고 <녹두꽃이 떨어지면>에서는 최상철씨가 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색깔이 틀리듯 디자인의 색깔도 틀리기 쉬운데, 아마 저예산으로 할 수 있는 오브제가 엇비슷해서 그런 지적이 있는 줄로 압니다만, 저는 그런 뜻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김채현: 그럼, 움직임과 공간에서는 운용폭이 더 넓어지지 않았나 싶어요?
한상근: <녹두꽃이 떨어지면>은 전쟁이 일어나는 장면에서 빨리 움직이거나 가장 느리게 움직이고 정지하는 식으로 해서 중간적 움직임이 없이 안무했죠.
김채현: 동작이 <비행>에 비해 섬세해졌지요?
한상근: 신체 구조가 정신에 대응해 섬세하게 움직이는 정도를 높였습니다. 사실 심혈을 다해 만든 작품이기에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입니다.
김채현: 그 다음에 <도라지꽃 할미꽃>이라는 정신대 사실을 작품화했는데, 그 이후에는 창작품이 없었죠?
한상근: 네. 그해 전반기에 <녹두꽃이 떨어지면>에 예산을 집행하고 나니 남은 예산이 너무 적어 아무도 작품을 맡으려 하지 않았기에 제가 맡았죠.
김채현: 역시 예산이 적어야 인연이 되는군요... 꽃이라는 낱말과 만남이 잦은 듯싶은데요. 이 작품에는 일본군에 의한 집단 린치 장면도 등장하고... 소극장 작품이니까 움직임도 정교할 수밖에 없죠?
한상근: 정신대 사실(史實)은 많은 사람들이 작품으로 만들었습니다. 도종환씨의 시에 정신대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 시가 주는 느낌, 역사적으로 이야기되는 우리 여성의 아픔들을 솟대의 비원으로 풀려고 했습니다. 스토리 없이, 그들이 끌려가서 당하는 고통의 연속이 주조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동작이 다양해지고 섬세해 질 수밖에 없었죠. 강강수월래 형식을 통한 도망, 눈물 젖은 베개, 자기 슬픔을 이고가고 던져버리는 이야기를 하였죠. <도라지꽃 할미꽃>은 여성 문제를 더 부각시키는 작업의 일환이었어요.
김채현: 1999년 가을에 <꽃신>을 하기 전까지 한 4년 동안의 공백기에 뮤지컬, 연극 안무를 계속하셨는데 그것말고 또 다른 일이 있었습니까?
한상근: 그전에 무용단 내에서 이런저런 어려움이 없지 않았습니다. 배정혜 단장님 부임 5년이 지나자 콤비로서 호흡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공립단체 어디에서든 창작은 자칫하면 갈등의 소지를 동반합니다. 그래서 지도단원 역할에 더 충실히 하자는 마음에서 창작을 자제했죠.
김채현: 지도단원이라는 제도가 언제부터 있었죠?
한상근: 89년도에 문일지 선생님이 만들어 놓았고, 배정혜 선생님이 부임하면서 무용단 내에서 오디션을 통해 지도단원을 2명 뽑았죠.



작품 <꽃신> 의 세계, 여성 심리를 해석하다

김채현: 이번 <꽃신> 작품의 주안점은 무엇입니까?
한상근: 제일 어려웠던 것은 신발이라는 일상적인 물 소재가 나를 가두는 일이었어요. 소재의 폭이 좁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연구해야 작품이 나오고, 많은 오브제 중에 꽃신을 선택한 것이 상상력을 제한하지만 <꽃신>을 집대성해서 작품을 만들자는 것이 저의 의지였죠. 계속해서 <꽃신- 소리> 등의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시리즈를 만든다면, 상품성도 있고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을 겁니다. <꽃신>을 하면서 어려웠던 것은 두 작품을 올릴 때 전혀 다르게 보이게 하기 위해 많은 아이디어를 내야 하므로 난관이 많았죠. 기존의 <꽃신- 발자국>은 포스트극장에서 하였지요. 이번에는 전반적으로 씨어터 제로 극장에 항상 설치되어 있는 철 구조물을 이용해서 피어나는 꽃의 이미지를 가미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 대관을 좀더 길게 잡아서 꽃상여를 만들려고 했다가 그 이미지가 아니어서 취소하고, 검정 차단막을 입혀 파이프 기둥들이 안 보이게 하자고 해서 일일이 꽃을 붙여 달고 코디를 하면서 바람에 회오리치는 꽃 이미지의 원근법을 이용하여 극장이 더 크게 보이도록 최종 해답을 갖고 공연 3일전부터 무대 세팅에 들어갔죠.
김채현: 극장을 완전 개조했군요. 이번 <꽃신>에 대한 반응은 대개 긍정적인데, 춤꾼들의 내적 표현력이 상당히 잘 피었다고 봅니다. 이번 안무는 어디에다 초점을 맞추었는지요?
한상근: 극적 상황을 심리적으로 풀어 조각조각 붙여보고 싶었습니다. 한 인간의 심리 묘사를 통해 새로 추가한 것이 <꽃신- 그림자>입니다. 심야부터 아침까지의 여성 심리를 해석하자는 것이 목적이었죠. 사실은 여인이 밤에 나간다면 불결해 보일 수 있고,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어서 여자인 내가 그냥 스스로 원해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꽃신의 유혹으로 인해서 꽃신의 정들이 나를 내보내서 떠밀려 나갔다는 식으로 줄거리를 설정하여 여인이 부정적이지 않고 꽃신의 양성적 요소에 의해 나아간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갔죠. 또한 가야금의 여성스러운 음악이 너무 좋다 보니까 움직임이 그냥 나오지 않겠나 싶었지만 사실은 그것이 고민이었어요. 정들의 움직임에 의해 여성이 밤에 나가지만 부정하게 보이지 아니할 것, 무용수를 고를 때에도 섹시하게 보이지 않고 지적으로 보이면서 스트레치가 잘 되고 팔힘과 아울러 기량이 좋은 한국적 무용수를 찾은 끝에 구서영을 골라내었죠. 또한 시간 변화를 어떻게 줄 것인지도 문제였죠. 그래서 나무 여섯 그루가 움직이면서 시간을 흐르게 하고 공간 이동을 나타나게 했고 전체를 5장으로 나누었죠.
김채현: ‘그림자’에서 무용수가 심리를 잘 표출했다고 봅니다만, 춤꾼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되죠.
한상근: 그렇죠, 안무가가 좋은 안무를 했어도 무용수가 그에 대해 고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필요한 캐릭터로 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채현: 마지막에 철골 구조물에서의 심리적 중압감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나오는 듯한데, 그것을 해석해주시겠습니까?
한상근: 결국은 한 여성이 자신의 심리적으로 많이 체험하려 하고 긴 치마 폭의 이야기를 갖고 있지만 펼칠 수 없고, 꽃처럼 아름다운 것에 머물 수밖에 없는 그래서 여성의 치마가 긴 굴레가 되어버리는 이미지를 그려내고 싶었죠. 사실은 연출적으로 가능하다면 장치의 꽃 회오리들이 한순간에 휙 하고 없어져 검정막에서 이 여자 홀로 꽃으로 머물고 음향과 장면이 전환이 되어 여인이 그곳에 점 찍히는 그러면서 자기 세계를 연상시키는 아이디어도 있었습니다.
김채현: 두 번째 작품에 세 여성이 나오고 대나무 장대를 갖고 종이를 짓이겨 선혈이 낭자해지도록 해서 간담을 서늘케 하는 장면처럼 남성들의 포악스런 내면이 리얼하게 그려졌다고 보는데요...
한상근: 젊었을 적에는 어떻게 사실적으로 나타낼 것인지에 중점을 두었는데, 지금은 의도적으로 피하는 경우가 많죠. 여기서는 같은 동작을 의도적으로 반복 사용하고 음악 또한 미니멀을 추구하였습니다. 여성들의 기다림과 연관해서 더 지리한 느낌을 주기 위해 목발을 사용하되 상식적인 활용에 개의치 않고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여성 세 명을 통해 한국춤의 테크닉, 공간 변형, 인생의 변화를 보여주고 싶었으나 큰 테두리만 제시해서 동작을 일일이 짜주지 않고 오히려 즉흥을 노렸죠. 결국엔 혼례에 등장하는 족두리와 꽃신을 벗고 이별의 길로 떠나고, 그래서 여자와 어울리지 못하면서도 여인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남성상을 그렸습니다.
김채현: 좁은 공간에서 한국춤의 움직일듯 말듯한 움직임이 집중적으로 활용되었다고 보여지는데요.
한상근: 그렇죠, 정중동의 차원을 춤꾼들이 잘 표현했죠. 정일 때에도 마음속에서는 동이 움직이고 있어서 정으로 표현되는 수많은 장단들을 발바닥이 에너지를 머금고 표현하는데 보여지는 것은 정입니다. 그래서 정 속에 동이 많고 동 속에는 정이 많음으로써, 이 조화를 통해 한국춤이 가동된다고 생각하죠. 그리고 감정선에 춤적인 요소를 주려고 노력합니다.
김채현: 이번 소극장 무대에서는 대극장의 분위기가 날 정도로 폭을 깊게 길이를 높게 활용하였는데, 새로운 양식이죠. 이런 새로운 양식에서 공간뿐 아니라 시간도 잘 구성되어야 하는데, 시공간의 싸움이라 말이죠.
한상근: 프로 무용수로 25년 동안 매일 연습해 왔는데 땅으로 꺼지는 것도 하늘로 나는 것도 아닌 바닥과의 싸움이죠. 공간과의 싸움이고 움직임과의 싸움이란 말이죠, 그래서 공간 활용의 극대화를 많이 생각하게 되죠.
김채현: 시간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 전제되지 않은 공간 활용은 허하고 테크니컬한 것에 머물기 쉬운데 ...
한상근: 그냥 뜬구름 잡듯 누구나 다 동작을 짤 수는 있어요. 그러나 관객들과는 춤언어가 일상 언어처럼 약속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아주 상징적이고 압축적인 언어를 써야 합니다. 자기만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장점이자 단점이 됩니다. 안무가가 춤을 짤 때 이것이 장면으로 나누어지면 하루가 지났는지, 열흘이 지났는지에 대한 분명한 자기 개념이 서야 시간과 공간이 명료히 나타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공해를 나타내는데 연구 없이 막연히 매달리므로 의미가 없고 또 동작을 짜려면 어려운 것이 아닌가 싶어요. 또한 개념에 맞는 동작을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지요. 무용안무가들이 유의해야 할 것은 자신이 짜는 동작에의 책임과 목적의식이 서 있을 때 연출가가 도와주는 것이지 처음에 타이틀을 주어 연출가가 안무를 하도록 하는 그런 비합리는 지양되어야 합니다.
김채현: 1988년 민예총이 결성되었죠. 그에 관해 선생님의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으신 것이 있다면.
한상근: 민예총이 떴을 때에는 저만이 가진 고민이 있었는데, 이런 과제를 가지고 각 분야에서 시대적 슬픔, 시대 상황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점이 반가웠어요. 민족굿이라든가 민족영화, 사진, 문학을 접하였지만, 춤은 당시만 하더라도 그들과 동등한 위치가 아니었으나 함께 겪는 시대적 아픔이 거론되면서 춤이 발전할 계기다 싶어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공감이 있었지만 서울시무용단원으로 되돌아오면 그러한 관계들이 엷어지곤 하는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걸렸습니다. 제2회 민족춤제전에 참여하고 그 다음에 실질적으로 만날 기회가 적었다는 점을 반성해봅니다. 공립무용단에 소속하지 않았다면 자주 참여해서 우리 현실의 고민과 나의 고민을 함께 생각하고 작품에 녹여낼 수 있었지 않았나 싶어요.




2001 민족춤제전에서 50년 역사 속 '상싱' 그려내
  

김채현: 이번 제전에서 분단상황의 아픔은 제2부로 나옵니다. 제2부의 주제로서 선생님은 북녘에 소식을 전하려 해도 통신이 두절되어 전할 수 없는 아픔을 표현하려는 것 같은데, 잠시 소개해주시겠습니까?
한상근: 민족춤제전에서 2009년까지 주제가 정해진 것에 대해 굉장히 좋다고 생각합니다. 매년 민족춤제전이 시작되기 전에 아 올해는 이런 주제로 하는구나 하고 느낄 만큼 항상 많은 생각을 유도합니다. 무용가로서 안무가로서 이런 작업을 어떻게 꾸밀 것인가 하는 것들을 자주 고려하게 하는데, 그리고 나선 제가 참가하지 않으니까 잊어버리곤 하지만 한국뿐 아니라 세계 속의 문화 조류를 조금이나마 느끼게 해주어서 참 좋죠. 이번 분단2세기를 맞아서 통일 문제에 대해 제가 꼭 참가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저의 1982년도 첫 입문 작품인 <무초>가 남북 문제 이야기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통일 문제는 저의 화두로 가장 많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번 분단2세기는 옴니버스 양식으로 나누어져 저는 상실 부분을 맡았습니다. 작품은 기승전결과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 첫날 1부에 연이어 2부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상실 부분입니다. 만나지 못하는 우리 이산가족들의 슬픔, 타향이지만 그리워해야 하는 아픔, 전세계에서 자유 왕래도 없이 통일되지 않은 유일한 나라의 현실 속에서 한쪽 날개를 잃고 같은 민족이면서도 만나지도 못하고 또 어 그랬던가 할 법한 수수께끼 같은 아픔들을 표현해 보고 싶습니다. 70년대 어렸을 적에 삐라를 주워 읽으며 그런가 하면서 놀라기도 했고, 남북적십자 회담이나 극소수의 전화를 통해 만나기도 하고, 요사이 방문을 통해 이뤄지는 소수의 만남 들을 리얼하면서도 표현적으로 풀려고 합니다. 전화기 같은 것을 가지고 나와 전화를 걸기도 하지만, 춤사위 속에 처절함이 녹아 있어야 합니다. 상호 왕래는 열거나 막기, 연다는 것은 빛이 들어오는 그런 것들로 표현하고, 가고 싶은 것은 현수교 무대 계단을 막 밟고 올라가서 뛰어내리거나 주저앉는 식으로 표현하고 싶어요. 금속성과 인간들 간의 관계도 생각할 수 있죠. 금속성이라는 것은 상징적으로 분단의 이미지, 안테나의 이미지일 수도 있고 그러면서 좌절하는 과정을 그릴 수 있습니다. 그런 오브제를 이용한 표현 방법을 다양하게 구상하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경의선이 이어질 것이니까, 그것이 실크로드로 화하면서 상실 속에서의 희망으로 비치게 하고 싶습니다. 50년 역사 속에서 상실은 있지만 그래도 희망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은 그 다음 안무자의 과제로 넘기고, 저는 상실 속에서 경의선 철도가 죽 열리면서 말만 들어도 그림이 그려지는 식으로 안무할 계획입니다. 사실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점이겠습니다만, 이번 안무의 주안점은 같은 음악이라도 저렇게 동작이 다양하게 변할 수 있구나 하는 느낌을 부각시키려 합니다. 전화를 걸었을 때, 삐라가 떨어졌을 때, 문이 열렸을 때, 경의선이 뚫릴 때도 아리랑음악이 나오도록 합니다. 상황 상황 속에서 잊을 만할 때쯤이면 아리랑음악이 나와 아리랑 안무에 다양한 동작을 부여하려고 합니다. 어느 순간에 정박에 맞추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는 엇박에만 맞추기도 하고 어느 때는 사이사이를 유랑하면서 한국춤의 엇박과 사이사이음에 따른 움직임들을 표현적인 동작을 만들어 보려 합니다. 그전에 제가 만든 신비스런 것, 표현적인 것, 극적인 것과는 또 다른 패턴을 만들어내고 싶습니다. 다양한 춤사위를 연결하면서 공연하는구나 하는 인상을 줄 수 있으면 좋겠지요. 아리랑 음악이 계면조 5도이기 때문에 뻗는 라인들보다 궁글러지는 라인과 흘려지는 라인들이 많이 나와요. 이 네 가지 패턴들이 어떻게 달라질지 저도 흥미를 가지며 안무하고 있습니다.
김채현: 구비를 몇 개로 설정했습니까?
한상근: 35분이면 5구비 정도... 저와 미국 팀만 한다면 50분을 생각하는데 3팀이 하니까 50분이면 너무 길고 아주 핵심만 추려 35분 정도 하려고 합니다. 만약에 안무가 잘 짜지면 조금 늘이고 그렇지 않으면 34분 선에서 끊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김채현: 무용수들이나 춤꾼들은 춤패 아홉 단원입니까?
한상근: 예, 일단은 춤패 아홉이지만 좀 유동적입니다. 혹시 다음부터 민족춤제전에 출품한다면 대전시립무용단과 함께 하는 한상근의 어떤 작품이 되겠죠.



노조활동, 오디션 제도와 해촉건 되짚어보다

춤계 이기적 관행 반성되어야

김채현: 4월 1일자로 대전시립무용단장으로 부임하신 걸로 압니다. 서울 시립무용단에서 24년 재직하셨고 우리나라 국공립 무용단을 합쳐서 최장기 근속 단원이지 싶은데요. 단장이 되면 그만큼 책임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서울시립무용단에 재직하고 있던 99년도 초겨울의 오디션 건으로 재임용에서 탈락되었죠. 그 직전에 세종문화회관이 재단법인화하면서 노조가 결성되었죠. 노조활동을 계속하고 복직 소송을 해서 2000년 6월에 지방노동위에서 승소하여 복직한 거 아닙니까? 그런데 대전시립무용단장이 되면 단원들은 노조원이 될 수 있지만 단장은 노조원이 안된단 말이죠. 책임자는 노조를 꺼리는 것이 일반적 경향입니다. 자 그럼 입장이 바뀌게 되는데 어떻습니까?
한상근: 대전시립무용단은 재단법인이 아니고 단원은 시의 준공무원입니다. 공무원들은 일단 노조가입이 안됩니다. 만일 대전시립이 재단법인화되면 저는 단원들이 노조활동을 하도록 하겠어요. 지금도 무용단들이 단장이 바뀌면 단원이나 훈련장을 바꾼다든가 자기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것이 흔한 관례입니다. 저는 단원으로 24년간 있으면서 불합리를 많이 보았습니다. 시립단체들만이 아니라 대개 단체들에서 단장이 바뀌면 역사는 있되 전 단장의 작품과 레퍼토리들은 하나도 남지 않고 단원들도 다 바뀌고 자신의 파워를 심으려 하고... 하드웨어만 있고 인맥과 취향이 지배할 뿐 콘텐츠웨어는 없어지는 등의 문제점이 크지 않습니까. 새로 뽑은 단원들에게도 전혀 모르는 것을 새로 가르쳐야 하니까 솔직히 말해 막대한 낭비가 따르지요. 공립무용단이라면 적어도 평론가들이 주목했던 작품은 이전 단장의 작품이라도 재창작해서 레퍼토리화해야 합니다. 가정해서 <백조의 호수>처럼 단원들이 그 순서들을 다 알고 있는 작품도 잠자고 있다면 말이 아니지요. 의상, 음악 그리고 배역도 그래요. 좋은 작품, 웬만한 작품은 더 좋게 신임 단장의 생각으로 다듬어 작품으로 재개발하면서 전임 안무가의 이름을 살리고 사례하여 미래를 보고 한국춤을 가꾸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24년 동안 느꼈던 것은 그러한 것들이라, 단원들이 노조에 가입한다고 해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하고 싶다면, 정당하게 권장해야 합니다. 근로 시간은 지키지만 예외는 있고, 작품 상황에 따라 더 연장할 수도 있겠죠. 혹시 제가 노동조합보다 앞서서 일할지 어떻게 압니까. 타 분야에 비해 대학 졸업 단원이 월급이 적다면 사실 그들의 권익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잘못된 관행은 내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그들을 무작정 쪼아 붙일 생각은 없습니다. 재단법인화되기 전 서울시립무용단 행정에서 20여년간 경험한 바에 비추어 볼 때, 춤 실력이 기준이 된다면 앞장서서 총대를 메고 그들의 권익을 위해 단체의 장으로서 일할 각오입니다.
김채현: 이제 과거사라 할지라도 들어야 할 부분이 많은 것 같군요. 선생님의 개인사에 큰 고비라면 고비였고 사건이라면 사건이었을 소위 서울시무용단 단원 해촉 사건은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기록하고 넘어가야 하겠군요.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만, 이해해 주십시오. 앞서 잠시 언급한 서울시무용단 오디션과 단원 해촉 사건은 지난해 6월 법에 의해 다행히 원상복구되었습니다. 원래 9명이 해촉되었고, 그 가운데 4명은 서울시무용단원이었죠? 단원 오디션과 본인의 해촉 사건에 대해 어떤 판단을 가지고 계십니까?
한상근: 이번에 서울시무용단원을 사직하면서 세종문화회관과 서울시무용단 경영진에 인사하러 갔을 때 그 분들은 참 불가사의하다, 오디션 심사는 공정했고 잘못한 사람은 없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시간이 해결해주겠죠.
김채현: 그렇게 보면 불가사의하겠군요. 문제의 진원지는 오디션 제도이고 문제점은 여전히 잠복해 있는 줄로 압니다. 춤계 발전을 위해 고쳐져야 할 점이 많죠. 세종문화회관 노조에서도 오디션 제도가 원래 취지를 벗어나 유발하는 폐해를 지적했습니다만, 저는 경영진이나 노조나 자기중심적인 심지어 이기적인 관점을 배제해야 오디션 제도가 원래 취지를 발휘할 것이라고 덧붙였어요. 오디션 제도 일반에 대해 어떤 판단을 갖고 있습니까?
한상근: 우리나라에서 오디션 제도는 단장이 바뀔 때마다 불거져 나온 것이 그간의 상례였어요. 단장이 바뀌면 다음 수순으로 오디션이 강화되는데, 일상적으로 단원과 단장 사이에서 권력의 횡포라 할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노력 없이 얻으려는 사고가 문제의 시발점입니다. 저도 대전시립무용단에 부임하는 그 순간부터 오디션을 주관하는 입장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어느 도시의 시립무용단 책임자로 갈 정도이고 다수인들이 공감을 하는 작품을 낸 저 사람이 그렇게도 실력이 없는가, 24년간 노하우를 가졌고 봉급이나 축내듯 놀지도 않았는데 이런 사건이 생겼다면 분명 오디션 제도에 문제가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 상식적 의문 아니겠습니까. 학연, 지연, 혈연과 관련해서 춤계에 만연한 전근대적인 생각들, 단원을 간단히 쳐낼 수 있다는 그릇된 자세, 오래 있었다고 꼭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장기근속 단원을 사퇴시켜도 내 좋으면 되지 하는 이기주의가 발동하지 않는지 반성되어야 합니다. 이런 유형의 이기주의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춤계만의 일도 아니겠는데 아무튼 참 버젓이 자행되어 왔습니다. 그전부터 측면에서 오디션 작업을 지원해온 저는 그런 현상들의 원인을 속깊게 유추할 수 있죠. 우리 춤에 유파가 많아서 본인이 전통춤을 좋아한다거나 인맥으로 아는 사람이 있으면 오디션에서 유심히 보게 되고, 낯선 사람은 지나가는 경향이 있어요. 오디션에서 심사하는 사람에 따라 주관성이 작용할 소지는 적지 않은데, 그래서 객관성을 지키려는 공정한 자세가 더욱 필요하겠지요. 저도 심사 채점한 경우가 있었지만, 심사위원 개인의 취향이 크게 작용하므로 점수가 고르지 않을 가능성도 있고 어느 정도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돌발적인 오류를 예방하기 위해 단장이 점수를 부여하는 여지도 크게 두고 있고, 예컨대 단장 평점이나 기여도 같은 점수가 작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므로 대개 오래 근속한 단원이 유리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참 유감스럽죠. 그후 1년 반 동안 무척 힘든 과정이었습니다. 주위 분들이 우리를 격려해 주어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습니다. 오늘까지 1년반을 되돌아보면 인생론을 이야기하고 싶을 정도죠. 어쩌면 본의 아니게 인생을 다시 한번 직시할 계기를 얻었다는 점에서 당시 오디션 심사위원들에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춤은 '혼의 춤'
 

김채현: 감사드린다니 다행스럽군요. 마지막으로, 안양예고 시절에 탈춤을 배우신 적이 있고, 그 다음에 강령탈춤을 이수하였는데 한국춤에 입문하게 된 과정을 간략히 소개해주시겠습니까?
한상근: 제가 근 30년 한국춤을 추게 된 것을 업이라 생각합니다. 전생에 연이 있지 않았나 싶지요. 춤과 제가 태어난 한국은 서로 떨어질 수 없고, 또 현대춤과 발레도 있었는데 한국춤을 접하고 우리의 소리를 들으면 흥으로 공감하는 바가 컸어요. 고등학교 시절 한국춤도 송범 기본을 배웠습니다. 그때만 해도 명확한 커리큘럼이나 메소드가 없어서 배우가 되기 위해 움직임의 기본을 홍금산씨에게서 배우면서 한국춤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어요. 그때는 번역극들을 굉장히 많이 보았습니다. 당시 국립극단의 ‘꽃상여’라든가 한국 창작극을 보고 정서적으로 매우 공감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에 필요한 움직임을 보면서 그런 쪽에 드라마틱하고 엑스타시에 도달할 만한 요소가 있을 것이다는 짐작에서 한국춤에 대해 생각이 자연스럽게 넓혀졌어요. 내가 한국인이니 당연히 한국에 관한 것도 알아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작용하였어요. 저와 결혼하면서 한국무용을 한다니까 처가 쪽에서는 집안에서 매일 대금소리나 한국음악을 많이 들을 거라 생각했다는데, 무용단에서 매일 한국음악을 듣고 하는데 집에 와서까지 듣고 싶으냐 하는 농담도 했지만, 지금도 한국음악과 춤에 내재한 미묘함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합니다. 또 우리춤이 세계적일 수 있는 요소를 많이 생각합니다만, 한국춤을 나도 모르게 선택했던 것에 후회는 없어요.
김채현: 우리춤과 외국춤을 비교하자면 복잡한데, 한마디로 어떻게 요약하시겠습니까?
한상근: 혼의 춤이라고 하고 싶네요. 다른 나라 춤에서도 에너지 개념은 흔하죠. 우리춤과 컨템퍼러리 댄스나 발레가 가진 에너지는 같지 않습니다. 정확히 과학적으로 구명되진 않은 상태인데, 우리춤의 호흡이나 기가 에너지로 어떻게 표출되는가 하는 원리를 저도 계속 의문을 갖고 체험적으로 주시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것과의 차이를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야 할지는 저에게도 숙제입니다. 일부 무용가들이 이에 대해 엇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이 부분에 대해 더 연구해야 하겠는데, 그러나 기본은 같다고 봅니다. 내뿜고 정돈하는 시간대가 길기

2013. 05.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