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故 한상근 선생 추모 특집
한상근의 퍼포먼스 <상념(想念)>
이만주

 한상근의 갑작스런 타계가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 늘 공연판에서, 강남의 춤전용M극장에서, 대학로에서 우리와 어울리던 그였다. 올해가 환갑으로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젊은이처럼 새로운 도약을 꿈꾸던 차였다. 바야흐로 그가 인연을 맺었던 대전을 중심으로 관()의 도움 없이 독립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순수하게 한반도 중원의 공연예술권의 확립을 시도하던 참이었다. 그같은 꿈의 실현을 위해 실제로 타계하기 전까지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었다. 건강을 돌보지 않은 채, 온몸을 불사른 그런 혼신의 노력이 갑작스런 죽음을 불러왔는지도 모른다. 그의 앞으로의 예술활동을 기대해볼 만 했는데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나와는 1980년도 후반에 만났으니 짧은 교유라고는 할 수 없으나 내가 춤 비평활동을 시작하는 5년 전까지는 수년에 한번씩 우연히 만났을 뿐이니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최근 5년간은 자주 만나 어울렸으나 그가 대전시립무용단 예술감독으로 대전에서 활동하였으므로 막상 그의 작품을 접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허나, 필자는 한상근에 대한 믿음을 가졌었다. 그는 드물게,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이 있는 남자무용가였다. 춤과 공연예술에 관한 한, 기량과 함께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춤 작품을 보는 눈이 송곳처럼 예리하고 정확했다. 예술 전반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채우고 춤예술에 대한 지식을 넓히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했고, 여러 곳과 여러 외국의 유명 안무가들을 실제로 찾아다녔다. 발품을 팔아가며 일본의 부토세계를, 탄츠하우스의 부퍼탈을 돌아다닌 것으로 알고 있다. 언젠가 에딘버러 페스티벌에는 한 달여 숙소를 정해놓고 머무르며 온갖 공연을 다 보았다는 얘기를 직접 들려주었다.

 그가 춤예술가로서 정상에 다다랐다고는 볼 수 없다. 그는 쉬기도 하면서 정상을 향해 꾸준히 올라가고 있는 터였다. 하지만 그는 그가 먼저 오른 팔부능선에서 후배 남자 독립무용가들의 손을 잡고 이끌어주는 큰 형의 노릇을 충실히 했다. 그는 춤예술에 있어 그의 선배 세대와 후배 세대의 허리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 전통춤, 창작춤, 컨템포러리 댄스의 접점 구실을 했고 남자무용가들과 여자무용가들의 교량이 되는 흔치 않은 역할을 했다.
 그는 한국 춤계의 성격을 달리하는 여러 원(Circle) 안에서 의식 있고 색깔 있는 춤을 추는 원의 구심점으로 훌륭한 리더의 몫을 했다. 그것은 그가 그만큼 춤 실력이 있고 인간적인 역량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와 같은 리더의 자리를 메울 무용가가 쉽게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의 타계는 한국 무용계의 적지 않은 손실이다. 우리의 애석함을 어찌 필설로 표현할 수 있으랴!
 나는 그의 춤 공연을 딱 세 번 관람했다. 하지만 두 번은 정식 춤 공연이라고 볼 수 없는 경우였다. 그러나 셋 다 그가 직접 춤을 춘 경우였고 두 공연은 무용관계자들이 보지 않은 공연이었으므로 기록으로 남긴다. 정식으로 쓰는 춤 평이 아니라 목격담이다.

 1989년 어느 날
 19896, 파리에서 예술수업을 마치고 귀국한 다()장르 예술가 임경숙이 지금은 헐린 서울대학병원에 붙은 건물에서 크레아시옹(Creation)'이라는 작은 카페를 열었다. 곧 단골이 생겼다. 민속학자 선생, 지금은 중견 미술비평가로서 활동하는 윤진섭, 나중에 홍대 근처 시어터 제로(Theater 0)를 창설한 심철종, 현재는 세계적인 미술가가 된 이불 등이었다. 그때 30대 중반이던 한상근이 남자무용가라고 하며 가끔 들렸다.
 개인적으로는 그 당시, 여행사에 적을 두고 있었으나, 1988년 파리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7개월 간 여행을 하고 돌아온 터라 어느 정도 유럽 문화·예술의 흐름을 알고 있었다. 카페 크레아시옹의 분위기는 온통 당시에 유행하던 퍼포먼스(행위예술)’였고 나도 퍼포먼스 관람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인가 나는 운전기사 역할을 했다. 내 승용차이던 르망을 몰고 김포공항으로 가, 당시 열렸던 퍼포먼스 페스티벌에 참가할 일본의 여자 퍼포머인 토키코 오야마(당시 60대 후반이거나 70)와 어느 남자 퍼포머, 그리고 그의 여제자를 태우고 대학로로 왔다.
 그날 밤이었던가 다음 날 밤이었다. 그 일본의 퍼포머들과 한상근이 크레아시옹에서 조우했다. 맥주가 몇 순배 오간 후, 한상근이 옆에 놓여 있던 조그만 원통 양철 안에 들어 있던 촛불을 오른 손 바닥에 올려놓았다. 그리곤 작은 카페 공간 안에서 즉흥으로 춤을 추었다. 옆 눈으로 지켜보던 일본의 남자 퍼포머가 평을 했다. 그때 한상근은 30대 중반이고 그는 40대 후반이나 50대였으니 한참 선배이기는 했으나 상당히 교만한 말을 뇌까렸다. “동작이 잘못되었다. 내가 가르치겠다.” 옆에 있던 나는 당황스러웠다. 즉흥 동작만을 보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며, 한국과 일본은 문화의 근본이 다르고 더군다나 가다()가 생명인 일본예술과 자유스러움과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한국예술이란 판이한데 무엇을 가르친다는 말인가?
 그런데 곧 판은 바뀌었다. 그 일본 퍼포머의 제자이자 동거녀인 퍼포머가 한상근의 즉흥춤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얘기하며 그에게 조금 전 춘 춤에 대해 꼬치꼬치 묻는 것이었다.
어언 4반세기가 지났는데도 그 밤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2008년 어느 날
 아르코 대극장에서 한상근은 비가(悲歌), 어두운 기억 저편에 서서를 직접 무대에 올라 공연했다. 여행배낭을 등에 멘 한상근이 무대를 왔다갔다하던 모습이 떠오르고, 마치 시골 영감이 처음 서울로 여행을 와 허둥지둥해 하는 모습처럼 보였던 느낌만이 기억에 남아 있다.
 끝나고 인근 생맥주집인 호브노브에서 소위 마무리잔치를 할 때였다. 술이 몇 순배 돈 것도 아닌데 한상근은 옆 자리의 딸도 아랑곳없이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우는 것이었다. 오랜만의 공연이 회한에 사무쳤던 모양이었다. 잔이 비어서가 아니라 생맥주 잔을 들고 있던 내 손이 헛방아질을 해댔다. 나는 그때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하나의 춤 공연에 저렇게도 깊은 슬픔이 가슴 속에 배여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2011611
 그날, 오후 8시를 전후한 무렵 속리산 천왕봉 밑 도화리 너와집 야외무대. 한상근은 20여 분간 <상념>이라는 퍼포먼스(행위예술)를 펼쳤다. 그날 그는 속리산 기슭과 너와집 야외무대 전체를 넓게 이용하여 소위 요즘 말하는 사이트 스페시픽(Site-specific)한 공연을 했다.
 천왕봉 밑 너와집은 내 막내동생의 농가주택으로 동생은 매년 한 번씩 널찍한 야외에서 음악회를 개최하곤 하는데 2011년이 6회째였다. 명칭은 음악회지만 국악, 가요, 팝송 외에 마임, 퍼포먼스 등도 이루어지며 공연이 끝나면 밤새도록 막걸리 파티가 이어진다.
 도화리는 도로가 포장되기 전까지는 전국에서 가장 깊은 오지 중의 하나로 꼽히었을 정도로 산골짜기이나 어느덧 너와음악회의 팬들이 생겨 음악회가 열릴 때면 경향 각지로부터 2백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날도 현직 군수로부터 전직 국회의원, 서울과 지방으로부터 자연을 찾아 온 사람들, 산골동네에서 농사짓는 사람들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특이한 관객군을 이루었다.
 종이로 된 수의를 입고 산기슭 숲 속에 숨어 있던 한상근이 도자로 된 유골함을 안고 내려와 춤을 추며 퍼포먼스를 시작하자 공연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일시에 숨을 죽여 천왕봉 일대에 일순 침묵이 흘렀다. 제목은 상념이었지만 누가 보아도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공연이었다. 죽음이란 인간 누구에게 있어서나 궁극적인 의문이 아니겠는가.
공연이 끝나자 한때 연극을 했었고 수년간 서울국제공연예술제 홍보팀장을 했던 동생이 내게 말했다.
 형은 춤비평가로 어떤 공연을 좋은 공연이라고 보는지 모르겠으나 내 경험으론 간단해요. 조금 전, 한선생이 공연할 때 보셨지요.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그 20분 간 말소리 하나 들리지 않지 않았습니까? 조용하다는 것은 관객이 몰입되었다는 얘기이고 그런 공연이 좋은 공연이라는 것을 저는 경험으로 알아요.”
 그가 공연하던 동안, 농부고 국회의원이고 이미 취한 취객이며 모두 말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이따금 산골의 적막을 깨는 풀벌레 소리만 들렸을 뿐 처연한 정적 그 자체였었다.

 



 한상근의 공연은 그 밤의 하이라이트였고 그 날의 음악회를 격상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공연을 화제로 삼았다. 시골 야외무대에서 이루어진 공연으로는 기대 이상으로 정성이 깃들어진 수준 높은 공연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공연이 끝나자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자리를 떠, 홀연히 사라져 더더욱 짙은 여운을 남겼다. 이번의 그의 급작스럽고 안타까운 타계처럼…….
 아마도 그 20분간의 공연은 한상근이 그의 예술 생애에서 거의 말년에 혼자서 출연하여 직접 연희하고 춤을 춘 귀한 공연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침 그 당시를 촬영한 사진들이 필자에게 있어 귀중한 자료라 생각되어 이 지면을 빌어 공개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는 생전에 좋아했다는 대전 현불사 쌍둥이 나무 밑에 잠들었다. 삼우제를 지낸 후 4월 23일 지노귀굿을 했다 한다. “하늘을 자유롭게 나르는 새가 되었다. 그런 후, 언젠가는 다시 인간의 탯줄을 받아 인간으로 태어나 못 다한 춤의 완성을 이룰 것이다”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그의 부인인 이공희 영화감독이 전해주었다. 

​이만주
​본 협회 회원, 춤비평
2013. 05.
사진제공_이만주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