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한상근은 현대의 시대 정신에 적합한 한국무용의 무대 양식을 개발하는 데 주력해 왔으며, 전통미와 현대적 감각의 접목을 실험하여 한국무용이 현대적(컨템퍼러리) 아이디어를 내포하도록 하는 작업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서울시립무용단의 최장기 근속 단원으로서 쌓은 무대 경험, 연극 조연출가로서의 경력, 그리고 실험 정신은 한상근으로 하여금 새천년에 한국무용의 양식화 작업에서 선두주자로 되게 하였으며, 특히 남성 무용가로서 한국무용의 퇴행적(退行的)인 무대 시각을 타개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다.
서울에서 성장한 한상근은 중학교 때부터 영화에 관심이 컸었다. 그리하여 안양예술고교 연극영화과에 입학하여 탈춤과 한국무용 기본 등을 조금 배웠다. 1972년 안양예고를 졸업하고서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연극 현장에 더 이끌렸다. 해마다 열리는 행사인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탈춤을 구경하고부터는 탈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1970년대 전반기 국내에서는 탈춤 부흥 운동이 일어나서 몇몇 무용가들은 한국무용의 아이덴티티를 자각하고, 또 무용의 사회적 역할도 모색하고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탈춤을 익힌 바 있는 한상근에게 탈춤 부흥 운동은 그의 춤 작업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73년부터 국가 주요무형문화재인 강령 탈춤을 김실자, 김정순 등으로부터 배워 1979년에 그 이수자가 되었다. 그의 춤이 드러내는 생동감과 힘은 그가 탈춤으로 춤의 기본기를 익히게 된 경험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무렵에 한상근은 극단에 입단하여 8편 가량의 연극에서 조연출을 맡았다. 주로 극단 광장에서 연출가 이진순 아래에서 수련한 조연출 경험은 장차 그의 춤 창작품에 큰 밑거름이 된다. 당시에 대사 위주였던 연극을 벗어나 새로운 연극 다시 말해 새로운 공연 형식이 몸짓과 함께 모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더욱이 한상근의 무대춤의 한 가지 주요 특징을 이루는 크고 작은 스케일의 연출을 지향하는 성향은 이때 형성되었음에 틀림없다.
1978년 한상근은 그때 창설된 지 몇해 되지 않은 서울시립무용단에 오디션을 거쳐 입단하였다. 서울시립무용단의 문일지 단장은 창설 이래 1988년까지 장기 근속하였다. 한상근은 단원으로서 그녀를 도와 서울시립무용단이 현대적 무대 양식의 한국무용을 시도하는 데 큰 역할을 맡았으며, 한편으로는 자기대로 독자적인 무용 세계를 모색해 나갔다.
서울시립무용단에 입단한 이래 한상근은 사실상 문일지의 제자 차원에서 한국무용을 체계적으로 배웠으며, 이 동안에 처용무, 춘앵전 등의 여러 가지 궁중무용과 승무, 불교무용, 태평무, 살풀이, 진쇠무 등의 고전 한국무용을 익혔다. 이런 경력은 그의 현대화된 무대가 한국적 미감과 기개(氣槪)를 갖추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고 있다.
서울시립무용단 단원으로서 한상근은 200편 가량의 무대 무용(이들 무용은 대부분 초대 단장 문일지와 제2대 단장 배정혜의 작품으로 구성된다)에 출연하였다. 1983년 10월 한상근은 서울시립무용단 내의 동호인 무용 단체로서 춤패 아홉을 창단하였다. 이미 1982년에 서울시립무용단은 한국무용아카데미를 부설하여 단원들에게 무용 교육을 심화시키고 창작 발표의 기회를 제공해주었으며, 한상근도 그 창설 멤버였다. 한편으로 한상근은 그와 뜻을 같이 하는 단원들과 함께 한국무용아카데미보다 더 개성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실험적 창작의 소그룹으로서 춤패 아홉을 결성하였으며, 이후 춤패 아홉을 통해 자신의 소품들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 국내에서는 공간사랑(Space Theatre)과 세종문화회관 소극장을 발판으로 해서 젊은 무용가들에게 발표 기회를 자주 제공하는 데 중점을 두고 창작의 기법을 실험하도록 자극한 소극장 무용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한국무용아카데미와 춤패 아홉도 이 운동에 적극 합세하였다.
1983년 12월에 한상근은 서울시립무용단의 공연에서 자신의 첫 창작품인 ‘무초(蕪草)’를 14명의 무용수를 기용하여 발표하였으며, 단순한 무대 장치와 의상을 배경으로 해서 흑백의 대조적 양상이 강렬한 이미지를 전달하였다. 이 작품은 그 다음해 5월 춤패 아홉의 창단 공연에서 재각색되었다.
‘무초’에서 한상근은 무엇보다 장래성을 예고하는 개성을 과시하였으며, 또한 시대상을 시사하는 발언을 춤에 담아내었다. 모두 네 개의 작품을 안무한 가운데 한상근은 기존의 고요하던 한국무용 무대에 소음과 같은 구체음악을 도입하여 한국무용의 보수적 감각에 도전하였고 움직임에서 한국무용의 기존 구성 방식을 탈피함으로써 새로운 양식을 추구하는 성향을 뚜렷이 내비쳤다. 기존의 한국무용 언어를 사실상 해체하고 새 언어를 모색하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2인무로 재각색된 ‘무초’에서 한상근은 다른 여성 무용수와 등을 맞댄 자세에서 역학적인 상호 관계를 전개해나갔고, 이 관계 속에는 작품 제목이 암시하듯이 민중들에 대한 억눌림과 그것의 풀림을 은유하는 어떤 정치성이 담겨 있었다.
‘무초’에 담겨진 그와 같은 정치성은 당시 한국에서 철권 통치를 휘두르던 군부 독재 정권 시대에 시민들이 가졌던 보편적 정서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내의 예술과 무용은, 일부 예외가 있긴 하였으나, 그 당시 그러한 보편적 정서를 표현하는 데 미온적이거나 심지어 외면하였다. 여기서 한상근의 문제 의식이 발견되며, 그의 다양한 무용 실험은 정치성을 은유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장치들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와 동시에 억압적 정치 상황에 대해 진보적인 시각의 성향을 노출하기를 꺼리는 기존의 무용 형식에 대한 반성의 한 사례였다고 생각된다.
이후 ‘무초’에서의 정치성은 ‘적색 경보(赤色 警報)’에서 강화되었다. 1987년 7월 바탕골극장의 기획으로 열린 소규모 페스티벌(이 페스티벌의 주제는 9일간의 장례식이었다)에서 발표된 ‘적색 경보’는 일종의 총체예술적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적색 경보’에서 어떤 위협 세력과의 긴장어린 대결 상황에 처한 공동체의 모습은 콜라쥬 형식으로 처리되었다.
연막탄 가스, TV의 원폭 및 공해의 장면들, 색종이 세례, 전자음악, 목소리, 신음소리, 손뼉치기, 사물놀이 리듬 등등 그때까지 한국무용 장르가 경험하지 못했던 시청각적 이미지들을 동반하면서 ‘적색 경보’는 낙원 상실과 지구의 황폐화를 퍽 인상깊게 주지시켰다. 시청각적 이미지들이 난무하는 와중에 10명의 무용수들이 피나는 상처를 안고 몸부림치고, 다시 어떤 침입자들에 의해 강제된 한정된 공간 내에서 그 공간을 벗어나려 허우적대며 몸부림치지만 무용수들은 끝내 그 속에 갇혀 버린다. 한치의 전망도 가능하지 않은 그런 환란의 상황 속에서 한상근은 거의 벗겨지고 있었고 그가 행한 바닥에서의 뒹굴음, 날개짓, 꿈틀거림은 가부장적인 현실 세계 체제에 대한 본능적 저항으로 읽혀졌다. 그러고 나서 이어지는 공중에서 바닥으로 투하되는 색종이 세례와 소화기의 회백색 액체, 풍선, 그리고 밝은 조명 속에서 새옷차림으로 노는 아이들의 무등타기와 잠들기와 같은 결론부는 현실 상황뿐만 아니라 자아의 자기 중심성을 극복해야 새 세계가 가능하다는 그의 현실적 진단을 예시해 주었다.
‘적색 경보’에서 한상근의 활개 펴는 모습과 허리굽혀돌기는 한국무용에 뿌리를 대고 있었으며, 이와 동시에 다소 충동적이면서 우발적인 몸짓들은 그의 춤이 한국무용에 맴돌고 있지 않음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난무하는 시청각적 이미지들에서는 그가 무용에 무대공학(시어트리컬리티)을 충분히 개입시킬 의사를 가졌음이 확인되었다. 이와 같이 이미지들이 난무 하도록 하는 연출 메소드는 이후 10년간 그의 작품에서 주도 동기가 된다.
1988년 12월 한국에서는 1945년 이차대전 종료 이래 최초로 영속적인 전국적인 규모의 진보적인 예술단체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the KPAF)이 결성되었다. 한상근은 이 연합의 민족춤위원회(the Minjockchoom Dance Committee)에 창설 멤버로 참여하여 지금까지 그 임원으로 활동해왔다. 이 무렵 그는 한양대학교 무용과와 중앙대학교 대학원을 뒤늦게 졸업하였고, 1991년 9월 문예진흥원의 해외 연수 장학금을 받아 파리의 에콜 드 스펙타클에서 연수하였다. 이 에콜에서 현대무용 실기, 재즈 댄스, 드라마 기법 등을 익히는 한편으로 피나 바우쉬 등의 탄츠테아터를 비롯 유럽의 컨템포러리 춤 조류를 섭렵하였다.
프랑스에서 귀국한 후 1992년 9월에 한상근은 서울시립무용단에 복직하였다. 그해 11월 그는 서울시립무용단의 중견 단원들인 주옥녀, 홍경희와 함께 ‘비행’을 공동으로 안무해서 발표하였다. 내용과 형식에서 ‘비행’은 ‘적색 경보’의 확대 재생산 판(version)이었으나 ‘적색경보’보다 강한 입체감을 갖고 있었다. 전반부에 무대를 가로지른 거대한 철골조, 수직으로 내걸린 집진기 모양의 구조물, 그리고 결말 부분에 정면에 높이 세워진 이동 조명 운반대는 ‘비행’이 펼쳐지는 규모를 남김없이 대변한다.
‘비행’에서 수십명의 무용수들은 검정 정장차림의 감시자들, 초록 한복 차림의 피지배자들, 그리고 죽음의 사신들로 나뉘어 죠지 오웰의 ‘1984년’과 흡사한 세계의 일원처럼 보였다. 집진기는 증기기관처럼 연무를 피우고 인간을 덮치며 거대한 조명 운반대에서는 눈부신 조명이 쏟아졌다. 그래서 기계 음향이 뒤섞인 무대는 마치 거대한 공장이나 수용소 군도(archipelago)에서 인간들이 한쪽에서 감시하고 또 한쪽에서 허덕이는 그런 죽음의 공장을 연상시켰다. 강제 노동과 위기의 강도는 긴박감을 더해가는 금속성 음향과 장면들로 암시되었다. ‘비행’이 소개하는 춤 동작은 강제수용소에서 그렇듯이 집단의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움직임과 폭력적인 제스처가 주류를 이루었다.
‘적색 경보’와는 달리 ‘비행’은 실험작이 아니라 세종문화회관의 초대형 무대에서 올려졌다는 점에서 표현주의 계열의 스펙타클을 염두에 둔 한상근의 굳어진 방향을 천명한 작품이었다. 여기서 그가 유럽 연수에서 피나 바우쉬 계열의 탄츠테아터에 경도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비행’ 다음의 작품으로서 1년 반 후에 한상근은 같은 극장에서 서울시립무용단의 안무자로서 ‘녹두꽃이 떨어지면...’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대형 철골조 빔을 장치로 활용하면서 여타의 장치와 이미지들을 동원하고 침략과 억압으로 점철되는 현실 세계를 다수의 피억압자의 시선으로 그렸다는 점에서는 작품 ‘비행’과 근친 관계에 있었고, 극적 스펙타클과 춤적 특성이 동등한 비중으로 다뤄졌다는 점에서는 그가 탄츠테아터에 경도되었음을 재확인해 주었다. 세기말에 드라마와 댄스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무대 조류는 한상근의 젊은 시절 연출 경력을 되살려 놓고 있다.
녹두꽃은 동학혁명에서의 전봉준 의병 대장을 상징한다. 1894년 한국에서는 최초의 근대적 민중혁명이 시도되었고, 이 동학혁명의 최고 지도자가 전봉준이었다. 1994년은 동학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한상근이 타이틀 롤을 맡은 ‘녹두꽃’은 ‘비행’에 비해 강화된 춤적 요소를 다양한 구성으로 처리하고 서로 대조되는 이미지를 선명하게 제시하고 또 구체적 역사를 민중의 시각에서 해석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그는 소극장 규모로 ‘도라지꽃 할미꽃’을 발표하였다. 일제 치하 한국 여성들이 일본군의 성적 노리개감이 된 역사적 사실이 극적 스펙타클과 춤적 특성의 동등한 관계 내에서 다시 형상화된 것은 그의 역사 의식이 구체적 현실에 밀착되어 갔음을 의미한다. 이즈음 서울시립무용단의 2대 단장이던 배정혜는 한상근의 작품의 내용과 형식 양 측면에서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 표현주의적 경향의 작업들에서 움직임은 빠른 마무리가 아니라 때로 응어리를 감내해야 하는 인간들의 육화된 내면이 폭발음의 여진처럼 전달되었다. 1999년 10월 봉건적 체제 내에서의 억압적 혼인 관계를 표현주의 방식으로 이미지화한 소품 ‘꽃신’은 한상근이 여전히 표현주의적 발상을 통해 한국무용의 새 양식을 개발하는 데 주력하고 있음을 짐작케 하였다. 스펙타클한 이미지가 이어지는 와중에 줄거리를 펼쳐내는 집단의 반복된 움직임에서 우리는 다시 말해 극적 연출력, 진보적 현실관 그리고 한국무용의 아이덴티티가 한상근의 방식으로 교차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 이 자료는 ‘Contemporary Dance Scenes of Korea'(2001, Korean Information Service)의 발간을 위한 기초 자료의 일부로 작성 기고되었으며, 한국춤 해외 소개 도서에서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역사적 사정과 한국춤을 이해시키는 것을 고려해서 서술되었으므로 다소 어색한 표현이 있을 수 있으나, 자료의 원본성을 존중하여 원문 그대로 제공한다.(필자)
본 협회 공동대표,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춤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