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2012년 가을, 비평가 이순열의 글을 찬찬히 다시 보게 된 것은 예기치 않은 기쁨이었다. 문학 미술 음악 등 예술 전반을 아우르는, 선생 특유의 감각도 감각이지만, 한국의 춤 사회를 바라보는 열린 시각, 비평의 본질을 간파하는 시선은 정확하고 날카로왔다. 그것은 나에게 비평, 비평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창작가와 비평가와의 관계, 좋은 평문이 갖추어야 할 요건, 비평적 글쓰기 등등…. 선생이 남긴 글들을 메모하면서 내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시급히 달라져야 할 우리나라 춤 비평 전반의 어두운 현실이었다.(필자 주)
1999년, 두 개의 춤 잡지가 새롭게 태동해 4개의 춤 전문지를 갖게 되었을 때 한국의 춤계에는 춤 비평 지면의 확대, 춤 비평을 기고하는 인적 자원의 증가, 그리고 이를 통한 춤 비평 작업의 활성화에 대한 기대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춤 전문지의 창간은 발행횟수가 거듭되면서 그것이 가져오는 역기능에 대한 우려- 비평의 질 저하, 자격 미달의 비평가 양산, 편집권의 남용, 저널리즘의 사유화, 지나친 상업주의가 현실로 나타났다. 이 같은 신생 전문지의 편향된 편집 방향은 기존 춤 전문지에도 나쁜 영향을 미쳐, 이즈음 이들 한국의 춤 관련 매체들의 실상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대부분의 춤 전문지는 저널리즘의 기본 정신을 잊은, 집단 이기주의가 앞서면서, 공적 기능이 약해지고, 특정 평론가 집단을 고의적으로 배제한 비평 지면의 운영으로 저널리즘 스스로 비평작업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춤계에는 인터넷 웹진 등의 창간으로 춤 지면이 확대되고 더러 신진 평론가들의 가세가 이루어지긴 했으나, 지면이 늘어난 데 따른 과도한 글쓰기 등을 포함한 비평의 질적인 문제와 매체 간 경쟁으로 인한 비평가 양산, 발행인과 편집자의 편향된 방향에 의한 비평가에 대한 월권 행위 등 춤 비평 작업에 대한 우려와 경계의 목소리가 만만치 않다.
자원 낭비로까지 비쳐지는 무분별한 공연 화보의 남발, 변화되지 않는 천편일률적인 기사 구성과 레이아웃, 빈약한 정보, 무엇보다 질 낮은 기사와 평문 등등…, 기존 춤 전문 매체의 지면 구성은 국내외로 엄청나게 신장하고 있는, 이즈음 한국 춤계의 다양성을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한국 춤계의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칠 만한 중요한 사안에 대해 제대로 된 분석이나 여론 수렴 없이 매체의 이해관계에 따라, 편집인 한 사람의 시선에 따라 그것이 마치 춤계 전체의 여론인 것처럼,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기도 한다.
“무용평론가”란 직함을 달고 활동하던 비평가들의 수는 1990년대에는 10명을 조금 넘었다. 2000년대에는 20여 명 정도였으나 최근 2,3년 사이에 이름도 생소한 인물들이 인쇄 매체와 인터넷 매체에서 무용평론가란 이름을 들이밀고 있고 그 수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제대로 된 통찰력을 갖고, 실제로 현장에서 춤 공연을 보고, 지속적으로 비평 작업을 하고 있는 비평가들의 수는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일간지 등 신문 문화면의 춤 공연 리뷰에 대한 인색 현상은 여전히 계속 되고 있다. 고정적인 비평 난이 운용되고 있는 신문은 없고, 이따금 있는 춤 공연 리뷰는 거의 담당 기자들의 글로 채워지고 있다. 기자들에 의한 글쓰기 작업은 공연 작품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을 토대로 한 비평 행위라기보다는 공연의 스케치 정도에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작품에 대한 자문을 받을 경우에도 특정 분야의 인사들에 치충,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사례도 자주 목격된다.
한국의 춤 비평문화, 건강한가?
이밖에도 춤 비평과 관련된 문제점은 평문의 객관성 결여, 비평가들의 도덕성, 특정 장르에 대한 비평 부재, 지역 춤 평론가들의 부족 등이다. 이중에서 춤 비평가들의 자질과 도덕성, 평문의 객관성 문제는 비평이 기록 작업의 기능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보면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안이다.
비평가 이순열은 “무용과 비평의 기능”이란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가 비평가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문학이나 예술에 실패한 무리들’(Those who have failed in literature and art) 이 득실거리는 난민수용소라면, 그리고 그 난민수용소에서 화려한 외계를 선망하면서 욕구불만을 털어놓고 있는 낙오자라면, 그리고 이따금 그 화려한 무대에서 던져주는 뇌물이라는 이름의 빵부스러기를 굶주린 아귀처럼 게걸스럽게 탐식하는 기생충이라면 그런 비평가는 없어져서 마땅할 것이다.
비평이란 예술의 대열에서 낙오한 패잔병이 은거하면서 예술행위나 공연에 대해서 게릴라 전술로 뒤통수를 치고 헐뜯는 악담이어서는 물론 안 된다. 비평 또한 창조 작업이어야 하며, 그렇게 될 때만 비평의 기능은 살아날 것이다. 그런데도 비평이 가끔 공연자의 시녀가 되어 박수부대로 전락하는 추한 꼴을 우리는 목격한다.
어느 나라에서도 어느 시대에서도 공연자는 자신이 동원한 박수부대에 대해서 욕설을 퍼부었다는 예는 없다. 그러나 그런 행위야말로 자신의 예술에 대한 더없이 치욕적인 모독이 될 것이다. 정당한 판단과 정당한 평가야말로 공연자나 비평가가 다 같이 생명으로 삼아야 할 소중한 비평의 기능일 것이다.”
우리나라 춤 전문지의 발행인은 공교롭게도 대부분 무용가들과 춤비평가들이다. 그리 크지 않은 춤 시장에서, 잡지의 발행과 운영의 대부분을 광고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광고 수입이 결국은 잡지 운영의 가장 큰 버팀목인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광고란 것이 여성지 등 다른 잡지 매체와는 달리 기업 등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리 대부분이 개인 무용가들이나 무용단체의 공연 광고로 채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과정에서 춤 저널리즘이나 크리티시즘도 그 건강성을 위협당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춤 전문지가 바로 무용가들이 선사(?) 혹은 기부(?)하는 30만원, 50만원, 100만원 짜리 광고에 의존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상거래의 이해관계는, 50점 짜리 작품이 90점으로 바뀌고, 졸속 공연이 우수 공연으로, 빈약한 안무가 최고의 안무로 둔갑하기도 한다. 자주 광고를 게재하는 춤 단체의 공연에는 한 명도 모자라 두, 세명의 전속 비평가들의 평문이 가세하기도 한다.
어느 듯 무용가와 비평가의 관계는 창작자와 비평가와의 관계가 아니라 광고주와 사업주의 관계가 된다. 춤 전문지가 거느린 비평가들, 특정한 매체에 종속된 비평가들은 사업주의 눈치를 보게 되고, 평균점 미달의 공연을 평균점 이상으로, 때론 아주 화제가 된 공연도, 무용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공연도 때론 침묵으로 일관한다.
나이든 비평가들이나 이제 막 비평을 시작한 젊은 비평가들이나 저널리즘의 보이지 않는 황포에 휘둘리게 되는 것이다. 주례사에 가까운 비평, 칭찬 일색의 비평, 본문의 내용과는 다른 제목 붙이기 등이 모두 저널리즘이 크리티시즘을 지배하는, 그런 잘못된 페혜가 만들어낸 결과물들이다.
그렇다. 춤 저널리즘과 춤 크리티시즘, 춤 매체의 오너와 무용가와의 불건전한 상관관계는 작금의 우리 춤계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병폐이다.
저널리즘은 속성상 여론을 주도하고, 감시하는 기능을 갖는다. 신문이나 잡지 등 활자 매체를 이용한 출판 저널리즘 역시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그런 기능 수행을 위해 저널리즘은 비평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상관성을 갖는다. 전통적으로 저널리즘과 비평 작업은 서로 의존관계이면서 때로 극도로 대립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의 춤 전문지로 그 범위를 한정했을 때 한국의 춤 저널리즘과 크리티시즘은 대립 관계보다는 밀월 관계가 더욱 강하다.
일부 매체의 편집진에서는 비평가들에게 특정 무용가들의 작품에 대한 호의적인 평을 부탁 혹은 요구하고, 일부 비평가들은 그런 요구 또는 강요를 섣불리 묵살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기도 한다.
반면에, 비평가들에게 무한정 지면을 오픈하고 있는 매체의 경우 비평가들 스스로 그 것을 잘못 인식하는 사례도 목격하게 된다. 편집자의 입장에서 보면, 평문의 질이 떨어지거나, 글의 내용이 잘못된 논지를 펼치고 있거나, 평자 스스로 너무 흥분해 개인적인 편견이 지나치게 앞서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내용의 변질까지 가져오면서 필자의 원고를 마구 난도질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게재지를 마치 자신의 발표지 인 양 착각하는 필자의 태도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비평가는 다수의 독자층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매체의 특성을 항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데로 춤 관련 매체가 증가하면서 무용예술과 관련된 글을 기고하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다. 평문을 게재하는 필자들의 경우 작품에 대한 다른 시각이나 그것을 평하는 방법적인 면에서, 물론 다양한 패턴을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평문이 아닌 이른바 시평 형태의 글이나, 정책적인 내용들을 제안하는 것이라면 평자의 잘못된 판단과 활자 매체를 통한 그 내용의 기술은 엄청난 폐해를 가져올 수 있다.
한 편의 공연을 보고 그 작품에 대해서만 기술하는 공연 리뷰와는 달리 시평 형태의 글은 무용계 전체의 흐름을 제대로 조망할 줄 아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짧은 시간 동안, 춤계 안을 들여다 본 단편적인 인상만으로 춤계 전체의 흐름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시평 형태의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시의 적절한 주제를 고르고, 그것에 대해 진단하고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는 안목을 필요로 한다. 만약 그 내용이 한 나라의 문화 정책을 좌우할 수 있는 것이라면 글 쓰는 사람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뒤따른다.
잘못된 판단력으로 왜곡된 글을 쓰는 것은 차라리 글을 안 쓰는 것만 못하다. 비평가들에 의한 글 쓰기 작업과 정책적인 자문에 참여하는 것은 그만큼 신중해야 한다는 말이다.
새로운 세기를 맞은 한국의 춤계는 무엇보다 총체적으로 양보다 질적인 면에서의 변화가 절실히 요구된다. 여기에는 공연에서부터 교육을 포함한 제반 여건의 변화는 물론이고, 세계 무대에서 한국 춤계의 위상을 높이는 작업까지도 포함된다. 이 같은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해 고민하고, 그에 대한 해결점을 찾고 이를 실천적으로 수행해 나갈 주체자 중에는 저널리즘과 크리티시즘도 포함된다.
춤 전문지가 저널리즘 고유의 책무를 소홀히 하고 크리티시즘을 구색 맞추기의 하나로 인식하는 것을 견제하는 것 못지않게, 잘못된 크리티시즘에 대한 저널리즘의 견제 기능도 강화되어야 한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나 그 글을 갖고 잡지를 만들어야 하는 편집자에게나 그 지면이 소중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제 한국의 춤 저널리즘과 춤 크리티시즘은, 창작가와 비평가는 은밀한 밀월관계에서 벗어나 상호 견제의 수위를 더욱 높여야 한다. 건강한 저널리즘과 크리티시즘의 회복이야말로 한국 춤 문화의 경쟁력을 좌우할 만한 파괴력이 있고, 그래서 그 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춤 비평은 어디로 가야하나? 비평가 이순열이 쓴 글에서 우린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창조자나 공연자에게 자기 비평의 정신이 요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평 또한 또 하나의 창조 작업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비평가는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비평과 공연 사이의 관계는 맹목적인 대립이거나 야합이어서는 안 되며 궁극적으로는 항상 청중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