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1970년대 후반 이후, 잘 알고 있듯이, 이순열 선생의 춤 비평은 춤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그 파란은 80년대 초반에 잠잠해진 것으로 보인다. 파란이 일어나지 않을 만큼 춤계 풍토가 성숙해졌거나, 아니면 선생의 비평이 뜸해진 때문인 것 같다. 그러다 1992년 ‘춤의 해’개막을 전후하여 선생은 또 다시 파란을 일으켰다.
근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이순열 선생을 사숙(私淑)하였다. 1970년대에 청년 시절을 보낸 사람들 중에 나 말고도 이순열 선생을 사숙한 사람이 또 있을지 모르겠다.
요즘은 노래방이 대세인 데 비해, 당시에는 많진 않았어도 음악 감상실이 청년 세대의 문화 아이콘이었다. 명동 한복판의 필하모니, 청진동 어귀의 ‘르네상스’는 클래식 음악 감상실로 성가가 대단했다. 정부가 외화(특히 달러화)를 철저히 관리 통제하던 시절은 아마도 해외 음반은 사치품으로 분류된 탓으로 거의 수입되지도 못했고 LP 명반 한 장을 가지면 세상을 가진 듯이 뿌듯해하는 그런 시대였다. 그 시절 클래식 음악에 대한 갈증을 풀어준 곳은 클래식 음악 감상실이었다. 분위기는 달라졌겠지만, 지금도 서울 몇 곳에 유사한 음악 감상실이 있다고 하나 문화 아이콘은 아닌 듯하다. 요즘 재조명되는 추억 속의 음악다방‘세시봉’도 그 시절 일이다.
그 무렵 KBS(한국방송공사) 1FM이 음악 전용 방송으로 개국하여 클래식 음악을 집중 송출하였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잠자리에 들 때까지 KBS 1FM을 온종일 틀어놓는 것은 나의 습관이었다. 그런 중에서도 나는 ‘명곡의 전당’이라 기억되는 프로그램을 마니아 급으로 애청하였다. 서양 클래식 음악을 자세한 해설과 일화를 곁들여 들려준 이 프로그램은 기억하건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저녁 7시경부터 두 시간 가량 진행되었다. 방송되는 곡을 남들과 달리 과장법 없이 또 감정에 치우침 없이 담담하게 소개하는 이 프로그램은 진행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경청하는 재미가 나로선 대단하였다. 그러는 몇 해 사이 내 음악 식견이 쌓인 것은 물론이다.
그 프로그램을 진행한 이순열이란 분을 저녁마다 듣는 것은 취미 이상으로 그 시절 나의 부전공 필수였다. 잔잔한 시그널 음악으로 프로그램이 열리고 그 분의 또박 또박 이어지는 언사와 유려한 음성은 무수한 클래식 곡들과 함께 나의 하루에 방점을 찍어주었다. 80년대 전반기 어느 시기부터 그 언사와 음성을 듣지 못해 아쉬웠다.
1987년 한국춤평론가회가 결성되어 그 분을 직접 만났다. 방송 청취자 입장을 넘어 같은 회의 회원으로 선생을 만나게 되었으니 세월이 그만큼 흘렀나 보다. 선생의 꾸밈없는 언사나 소탈한 차림새는 나와의 거리를 그만큼 좁혀주었다. 게다가 방송에서는 들을 수 없던 선생 특유의 독설을 가끔 듣게 된 것도 그 이후의 일이다.
1992년 ‘춤의 해’는 전망 좋게 지정되었으나 개막하기 전부터 참 어수선하였다. ‘춤의 해’ 취지를 벗어나 ‘춤의 해’를 독점(獨占)하거나 전유(專有)하거나 사유(私有)하려는 움직임이 적지 않았다. 선생은 처음에는 ‘춤의 해’ 조직위 기획실장, 그 다음에는 공동운영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춤의 해’ 조직위 운영위원으로 동참한 나는 선생의 일거수 일투족을 볼 수 있었다. ‘춤의 해’를 독점·전유·사유하려는 동향에 앞장서서 맞선 사람은 이순열 선생이었다.
선생이‘춤의 해’개막 직후 사퇴한 사실은 당시의 난맥상을 반증하며, 나로선 원칙주의자 이순열을 보았다. 나는 90년대 중반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설립 준비과정에서 선생과 함께 활동하고 2010년 한국춤비평가협회를 함께 창설하였다. 그때마다 선생의 원칙주의는 두드러졌고 후배들에게 일종의 지침으로 받아들여졌다.
선생과 함께 지역을 여행한 적이 몇 차례 있다. 그럴 때 한갓지게 틈나면 선생께 개인적으로 종종 반복해 들은 청년 시절 일화는 두 가지였다. 먼 바다나 들판을 바라보거나 아니면 땅바닥을 내려 보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모드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먼저 선생은 고등학생 시절에 집단으로 일본행 밀항을 기도하였다가 큰 풍랑을 만나 부산 옆 거제도 앞바다로 되돌아와야 하였다. 그리고 육군 훈련소에 입소하는 날 선생은 훈련장 운동장에서 당시로는 희귀했을 영어 소설에 몰두하였는데, 그 다음에 어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두 가지 일화에서 나는 선생의 단도직입형의 자세를 읽었다. 선생의 평소 화법에서나 비평문에서나 드물지 않은 직설적 언설은 그런 단도직입형 태도의 가감없는 투영이라는 게 나의 짐작이다.
선생의 비공식 학력은 끝이 없는 듯하다. 그와의 대화와 글에서 특히 사전(辭典)과 인문 고전(古典)을 거듭 숙독한 내공(內功)이 역력할 뿐더러 진정성도 감지된다. 그런 결기에서 간혹 뿜어지는 선생의 독설은 단연 문화재급이다. 다른 사람들도 이 말에 동감할 줄로 믿는다.
말씀 중에 단박 드러나는 독설이 아니라 말씀이 한번 휘돌아 회전해서 독설이 솟구치기 때문에 선생의 독설을 접수하려면 마침표까지 전체 문장을 잘 들어야 하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선생의 어법에 익숙지 않은 사람은 당황하기 일쑤이다. 언중유골(言中有骨)을 넘어 언즉골(言卽骨) 같은 선생의 독설에는 해학마저 담겨져 듣는 이를 즐겁게 한다. 저 넓은 스타디움의 시원스런 장타(長打)처럼 선생의 독설은 여운이 길다. 이것도 나에게는 사숙 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