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국가무형문화재 〈승무〉 예능 보유자이자 민주 열사들의 넋을 달래주었던 무용가 이애주 선생이 지난 5월 타계하였다. 고인은 어릴 적부터 춤을 췄고, 한영숙에게 승무를 사사받아 정통 승무는 한성준에서 한영숙을 거쳐 이애주로 이어졌다. 고인은 1970년대 대학가 민중문화운동 첫 세대였으며, 80년대에는 많은 열사들의 장례식에서 온몸으로 춤을 추었고, 〈바람맞이〉 춤으로 국내외에 전무후무의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전통춤을 시대 환경에 맞춰 재정립하는 작업과 생명 중심의 춤을 실행 모색해왔다. 고인은 생전에 “우리 후손들뿐 아니라 생명의 정통몸짓을 원하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비전을 밝힌 바 있다. 고인의 작업과 업적을 기리며 일부 자료들을 통해 걸어온 길을 소개한다. - 편집자
고 이애주 추도사, 프레시안, 2021. 5. 14.
'시대의 춤꾼' 이애주 서울대 명예교수(경기아트센터 이사장)의 문화예술인장이 13일 엄수됐다. 지난 10일 일흔 넷의 나이로 이애주 명예교수는 1987년 민주항쟁 당시 이한열 열사와 박종철 열사를 위해 한풀이춤을 추고 제주4·3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진혼무를 추는 등,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 역사를 춤으로 함께 썼다.
12일 서울대 병원 영안실과 13일 마석 모란공원에서 있었던 이애주 명예교수 문화예술인장에서 발표된 채희완 부산대학교 명예교수의 추도사 전문을 싣는다.
새 세상을 연 생명평화의 춤, 이애주형 추도사
채희완_부산대 명예교수
하늘나라에서 애주형을 급히 찾는 전갈이라도 받으셨는지요. 하늘나라에서 무슨 변괴가 생겨 젊은이가 잡혀가고 매 맞고 죽어가니 서둘러 와서 진혼무 한거리 추라는 급전을 받으셨는지요. 굴뚝탑에 올라간 노동자가 다 죽어가니 어서 건너와 사람 살리는 춤, 한거리 추라는 언명을 거역치 못해 건너가셨나요.
4대강 5대양 6대륙이 죽어가니 어서 와 물길, 땅길, 하늘길을 되살리는 새 천지 세상춤을 추러 바삐 가셨나요.
하늘을 닮아 땅을 만들었다니 거꾸로 땅의 세상을 하늘이 닮기도 한다더니, 하늘나라 변괴도 수선하는 춤 한바탕 부름을 받고 가셨으니 땅에서처럼 죽임 죽이는 춤추시고선, 애주형! 이젠 몸 내려놓고 평안에 드시길 바랍니다. 때론 땅의 그리움의 춤도 추시고, 이 땅에 계실 때 시간을 못내 바빠 못 추셨던 재미나고 신나고 환희용약하는 춤을 하늘나라에서 자빠지듯 한바탕 추고 안락하시길 비옵니다.
추도사 낭독 모습 ⓒ프레시안 |
1987년은 남한 정국의 민주화체제가 시작되는 역사적 전환기였습니다. 젊은이들의 죽음을 통한 민주화 쟁취의 물결은 질풍노도의 거센 비바람 폭풍 속, 거기에 애주형의 바람맞이 춤과 한판 춤, 썽풀이 춤이 있습니다.
이한열의 죽음에서 비롯된 씨춤, 물춤, 불춤, 꽃춤은 농업생산 생명 과정을 닮으면서 거기에 민주춤의 꽃과 열매 거두어들이기까지 물고문과 불고문과 성고문의 고통과 죽음이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로써 춤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칼과 총알과 대포가 되었습니다. 정치적 죽음에서, 경제적 고갈에서, 문화적 혼미에서, 예술적 방탕에서 벗어나는 전국민적 불림이 되었습니다. 갖은 죽음에서 떨쳐 일어나는 춤의 신명은 인간사뿐만 아니라 산천초목까지 새 생명의 새 물기로 젖어들게 했습니다. 작은 몸, 보잘것없는 춤사위가 일으킨 회오리입니다. 애주형의 춤은 보는 관중도 덩달아 물들여져 참여함으로써 역사의 실천이 되게 하였습니다.
집단 신명의 기운은 새 세상을 이끄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신기와 신명의 집단 체험, 승생기(乘生氣) 체험은 전국토로, 전국민으로, 공동의 역사체험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이로써 적어도 타락한 신무용 시대는 그 역사적 임무를 끝내고 사라져야 했습니다.
1996년 승무로 예능보유자가 된 이후에도 애주형은 이 땅 방방곡곡, 면면촌촌을 무른 메주 밟듯하며 신명의 소재지를 찾아 지역 춤 공부를 하려, 다른 시간을 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선 울릉도, 독도, 한라산, 태백산, 강화도, 백두산 등지 이 땅의 경개를 찾아 춤으로 몸을 바쳐 드렸습니다.
그것은 애주형의 첫 창작 작품 〈땅끝〉에서 폭압적인 성주에 저항하여 청춘남녀가 그 권역을 탈출하다가 끝내 죽어 해변에 끌려오는 것에 대한 역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 땅 곳곳을, 살을 물리치고, 일상공간에서 거룩한 공간으로 뒤바꾸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춤 일도 남모르게 쓸쓸히 어기차게 해내었습니다.
애주형의 스승 한영숙 선생을 길러주신 분은 할아버지 한성준선생이셨습니다. 한성준 선생은 일제 때인 1930년대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춤이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그는 명창 뒤치다꺼리 하는 고수로서 보잘 것 없는,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씀은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는 성경 말씀이나 태초에 율려가 있었다는 고대의 말씀처럼 엄청난 선언이었습니다. 사람의 일거수일투족 모두가 춤이고, 일상 동작에 장단만 맞춘다면 그건 모두 훌륭한 춤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일에 장단을, 신기를, 놀이를 불어넣으면 춤이 되고 삶이 제대로 궁극에 이른다는 것이지요. 이는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말씀의 춤적 해석입니다. 일하는 사람마다 신명을 타면 모두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일컫습니다. 신명을 타면 모두 거룩한 삶을 사는 ‘일상의 성화’인 것이지요. 동학 가르침의 몸 실천입니다.
한성준 선생은 그래서 승무, 살풀이, 학춤 외에도 각종 일춤과 딱딱이패 등 직업춤들을 창작해냈습니다. 일 신명에 고요를 섞어 혼연지일기(渾然之一氣)의 춤세상을 만들어냈습니다.
애주형의 춤은 이를 받아 삼천여 뼈마디가 추는 한영숙 선생을 본받아냈습니다. 애주형은 승무의 예능보유자가 되고 나서도 승무를 스님의 춤이 아닌, 종교적이고 고매한 춤이 아닌, 일하는 사람들의 중생춤으로 보았습니다. 자연의 계절에 맞추어 일하는 자의, 생명주기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일상인의 일하는 역사춤이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곧 일상의 성화이고, 구르며 나아가는 순환적 진화입니다.
백기완선생이 말씀한 ‘한발 떼기에 목숨을 거는’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노동의 연장으로서의 춤을 넘어 노동의 성화(聖化)로서의 예술입니다.
애주형은 근래 경기도당굿의 악가무를 근거로 하여 본향 태평춤의 복원에 몰두하였습니다. 한성준 선생이 일찍이 자신의 수의를 태평무 의상으로 해달라고 하셨답니다. 왕과 왕비가 여민락(與民樂)하는 왕꺼리춤을 궁극으로 삼았듯이 애주형도 그러한 것을 그 마지막 작업으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본향 태평춤으로 오늘날 세상살이의 생명을 불러내고 화해를 고취하는 생명평화의 춤을 갈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늘의 부름을 받고 일찍 가신 것이 조금 억울합니다. 역사의 짐을 진 춤,죽어가는 이를 살리는 춤, 죽어가는 자연을 되살리는 춤, 힘겹고 어려운 춤만 추시고 재미나고 신나고 즐거운 춤 한자리 못하신 것 때문입니다.
이제 하늘나라에서 하늘 변괴를 수선하는 춤 임무를 마치시고 평안한 세계에서 편히 좀 쉬세요. 또 때로 못다 마친 지구별의 세상일이 그리우시면 마구잡이 보릿대 도구떼, 못 배운 춤, 깨춤, 거리춤, 병신춤, 무애무로 한바탕 환희작약하여 거꾸러질 때까지 추는 춤판을 벌여주십시오. 거기에 우리도 부름 받자옵고 달려갈 터이니 낑가주시면 고무진신(鼓舞盡神)으로 사흘 낮밤을 춤으로 자빠지겠습니다.
2021년 5월 12일
고 이애주 추모의 글, 더프리뷰 기고문, 2021. 5. 10.
김영희_전통춤이론가
춤꾼 이애주(1947~2021)는 국가무형문화재 27호 승무의 예능보유자였고, 1980년대 민중문화운동의 중심에서 춤을 통한 시대적 발언의 선봉이었으며, 만물생명의 온전한 살림과 보존을 위해 자리를 가리지 않았던 인물이다. 이 일들을 모두 춤으로 풀어냈고, 춤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펼쳐 보인 춤꾼이며, 시대의 예술가이고, 문화운동가였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갑작스런 소식에 문화예술계는 모두 황망하였다. 전통춤계를 포함한 문화예술계의 큰 별이 떨어졌으니, 그의 활동은 이제 과거형으로 남게 되었다.
춤의 첫 발을 띠게 해주신 스승 김보남
이애주 선생은 1947년 서울 운니동에서 출생했다. 부모님의 고향은 황해도 사리원이었으나 서울로 이주하였고, 이애주 선생은 운니동에서 태어나 창덕여중・고까지 다녔다. 운니동에는 국립국악원이 있었다. 국립국악원의 악사이며, 춤 교육을 도맡았던 김보남(金寶男, 1912~1964)에게 그의 어머니는 이애주를 입문시켰다. 어린 이애주는 교동국민학교를 파하면 스승 김보남의 연습실로 달려가 춤을 학습하고, 국립국악원 국악사들의 연주를 귀담아 듣고 그들의 반주에 맞춰 춤을 추었다. 최고의 예술 환경에서 이애주 선생의 춤의 싹이 발아되었던 것이다.
스승 김보남이 작고하기 전까지 이애주 선생은 궁중무의 기본부터 〈기본춤가락〉, 〈승무〉, 〈검무〉, 〈풍물소고춤〉, 〈무고〉, 〈춘앵전〉, 〈민요가락〉(아리랑, 밀양아리랑, 노들강변, 양산도, 천안삼거리 등) 등을 배웠다. 주목할 점은 김보남에게 배운 〈승무〉가 후에 한영숙에게 배운 〈승무〉의 뼈대를 고스란히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김보남이 이왕직 아악부의 아악수로 활동하던 1937년에 민간에서 활동한 한성준에게 〈승무〉를 배웠기 때문이었다. 이애주선생이 김보남에게 배운 〈승무〉도 한영숙에게 배운 〈승무〉도 한성준의 〈승무〉였던 것이다.
춤 인생을 결정한 스승 한영숙의 맏제자가 되어
이애주 선생은 1965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과에 무용 전공으로 입학한 후, 국립무용단에서 객원으로 공연하기도 했고, 대학 4학년이었던 1968년에 문화공보부 주최 ‘신인예술상’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작품은 〈산조 – 바닷가에서〉였다. 이렇게 이애주 선생은 춤계에 공식적으로 데뷔할 즈음, 두 번째 스승이자 춤 인생을 결정짓게 되는 한영숙(韓英淑, 1920~1989)을 만나게 되었다. 한영숙은 1930년대에 전통춤을 집대성했던 한성준(韓成俊, 1875~1941)의 손녀이자 수제자였다. 한성준은 사위어가는 조선춤의 독특한 미와 정조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1937년에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설립했고, 한영숙은 이 무용단체에서 핵심적으로 활동했다. 한성준 타계 후 전통공연예술계는 한영숙을 한성준의 후계로 인정했으므로, 1969년에 〈승무(僧舞)〉의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었고, 1971년에는 한성준에서 한영숙에게 계승된 〈학무(鶴舞)〉도 중요무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었다.
이애주 〈승무〉 ⓒyoutube.com/더프리뷰 |
이렇게 민속춤의 맥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한영숙은 이미 이애주 선생을 눈여겨보고 있었고, 그를 당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스승 한영숙의 문하에서 민속춤의 정수를 올곧게 학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애주 선생은 〈승무〉와 〈살풀이춤〉, 〈태평무〉, 〈학춤〉, 〈검무〉 등을 정성스럽게 배웠고,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전수평가 발표회에서 1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한영숙은 1971년 국립극장에 올린 자신의 전통무용발표회에 이애주 선생을 아낌없이 무대에 세웠다. 1부 공연에서 이애주는 〈칼춤〉, 〈학춤〉을 추었고, 김천흥선생과 송범선생이 찬조출연한 〈봉산탈춤〉의 노장과정에서는 소무를 추었다. 그리고 2부 〈법열곡法悅曲〉에도 출연하였다. 〈법열곡〉은 불교의식무와 승무의 원형을 살려 현대무대에 맞게 구성한 접속곡 형식의 작품이었다. 이애주 선생은 스승 한영숙을 떠올리며 1994년에 〈법열곡〉을 공연하기도 했다.
공연 후 무용평론가 이병임은 ‘무형문화재에 대한 보호와 후계자 양성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한영숙씨가 우리 한민족의 찬란한 문화적인 유산을 보전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진통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한영숙씨의 정열과 후계자 이애주양의 성장이 우리가 기대하는 곳에서 어긋남이 없기를 믿어마지 않는 바이다.’(「한국전통무용의 정수-인간문화재 한영숙씨의 공연의의」, 『월간무용』 4호, 1971.)라 평했다. 당시 25세의 이애주 선생이 한영숙의 후계자로서 춤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대 문제의식을 표출한 첫 공연 〈땅끝〉
이 무렵 이애주 선생은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처용무의 사적 고찰과 그 전승문제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인문학적 소양을 넓히기 위해 서울대학교 국문과에 편입하였다. 이때 문화운동 1세대들을 만나 교류하였는데, 그들에게 춤을 가르쳐주기도 하고 함께 춤추며, 밤늦도록 한국 춤과 문화에 대한 열띤 토론을 했었다. 이 만남은 이애주 선생이 자신의 춤관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1974년 6월 국립극장 소극장에 올린 이애주 선생의 첫 번째 춤판은 자신의 인생 행로, 춤의 행로를 결정한 공연이었다. 1부는 전통춤 공연이었고, 2부는 〈땅끝〉이라는 창작 작품이었다. 〈땅끝〉은 외딴섬을 장악한 섬주의 처녀 공출을 통해 당시 폭압적인 정치상황을 묘사했으니, 공연의 서문에 ‘우리 춤의 현실은 어떠한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우리 춤이 무의식적인 태만과 무(無)사상(思想)의 몸짓으로 저급하게 전락되어버렸고, 더구나 소수인에 의해 독점적인 전유물로 고립되었다. … 이번 춤판은 우리 춤의 원형을 최대한으로 살리면서 우리의 몸짓에 바탕을 두고 오늘의 문제의식을 표출코자 하였다.’고 하였다.
이애주 선생이 사용한 ‘춤판’이라는 용어는 당시 무용계에서 매우 선언적이었다. ‘춤’이라는 용어가 ‘무용’이라는 용어에 대해 상대적으로 후진적이고 저급하게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용’은 일제강점기에 본격적으로 사용된 외래용어이므로, 이애주 선생은 본래 우리 춤을 일컫는 ‘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우리 문화의 원형성을 내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전통춤에 대한 관심은 더욱 넓어지고 깊어지고
다음 해 이애주 선생은 무형문화재 27호 〈승무〉의 이수자로 인정받으면서, 우리의 전통예술에 대한 관심이 더욱 확장되었다. 이 당시 한국학에 대한 높은 관심과 함께 민속예술들이 속속 발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들을 지켜보며 이애주선생은 우리 춤에 대해 더욱 넓고 깊게 사고하기에 이르렀다. 민속예술 속에 숨어있는 민속춤들을 보고 배우며 전통예술의 춤과 소리와 음악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종합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또한 민속춤들이 민간의 삶을 반영하였으며, 다양성과 자유로움이 전통춤의 특성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봉산탈춤〉이 1960년대에 복원될 무렵 이근성(李根成)에게 〈봉산탈춤〉을 배웠고, 〈경기도당굿〉의 최고 예인이었던 이용우(李龍雨)옹에게 경기도당굿의 가락과 춤을 배웠으며, 역시 경기도당굿의 조한춘(調漢春)옹에게도 배웠다. 봉원사의 박송암(朴松岩)스님에게는 작법을 배우고, 가곡 명창 김월하(金月荷)에게는 가곡도 배웠다. 박상화(朴相和)옹에게는 영가무도(詠歌舞蹈)를 전수받았다.
이애주 선생은 춤과 소리와 악기 뿐 만이 아니라 회화에서도 전통춤의 원형과 정신을 찾고자 했다. 서울대 개교 40주년 기념공연으로 1986년에 올린 “민족적 예술형식의 모색을 위한 춤과 미술의 만남” 공연은 전통춤과 관련된 회화작품들을 짝지어 구성하였다. 1부에서 「조선시대 의궤도(儀軌圖)」, 「계회도(契會圖)」와 〈일무〉, 〈춘앵전〉을 연결하고, 2부에서는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불화와 〈승무〉를 연결하여 비교하였다. 3부에서는 조선시대 풍속화, 불화, 민화, 장승을 〈허튼춤〉, 〈양반춤〉, 〈병신춤〉을 연결하여 모색했던 것이다.
스승 한영숙에게 배운 주요 종목들로 이애주 선생의 독자적인 춤판도 열었다. 1983년 공간사랑에서 공연한 “한영숙류 이애주 전통춤”의 프로그램은 〈살풀이춤〉, 〈태평무〉, 〈승무〉가 중심이었다. 특히 〈승무〉는 염불로 시작하여 잦은 염불, 허튼타령, 잦은타령, 굿거리, 잦은 굿거리, 법고, 당악, 굿거리로 장장 30분에 걸쳐 추었다. 〈승무〉는 우리 몸의 뼈 삼천마디를 모두 움직여 우주 전체를 내 몸 안에 끌어안아 추어야 한다는 춤이다. 더우기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공간사랑의 전통예술 기획공연들은 숨겨진 전통춤의 명인들을 세상에 알리는 매우 의미 있는 무대였다. 이애주 선생이 공간사랑에 올린 “한영숙류 이애주 전통춤” 공연에서 이 춤 세 바탕을 단독의 춤판으로 추어냈으니, 스승 한영숙의 춤맥이 명실공히 이애주에게로 이어진 것이었다.
1980년대의 〈진혼춤〉, 〈바람맞이〉
1982년 서울대학교 체육교육과의 무용 전임이 된 후, 1984년에는 ‘춤패 신’을 창단하여 그간 배우고 익힌 전통춤들을 기반으로 공연활동을 하였다. 창단공연으로 국립극장 실험무대에 올린 나눔굿 〈밥〉은 송암스님에게 배운 식당작법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재구성한 작품이었다. ‘굿판에 오셔서 밥과 떡과 술을 나누어 먹읍시다.’라는 짧은 해설은 곧, 밥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작품 〈도라지꽃〉은 1985년 6월 23, 24일 서울 놀이마당에서 벌린 공연이었다. 정신대에 끌려간 조선의 누이들을 참혹하게 짖밟히는 도라지꽃에 비유하여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1980년대에 이어진 열사들의 장례식에서 시퍼렇게 큰 칼을 양 손에 들고 추었던 춤은 밀양의 춤꾼 김타업에게 배운 ‘휘쟁이춤’이었다. ‘휘쟁이춤’은 망자의 상여가 집을 떠날 때, 상여 앞에서 잡귀를 물리치기 위해 추었던 춤이다. 또 1980년대에 열사들의 장례식과 대중집회에서 이애주 선생이 추었던 〈진혼춤〉, 〈한풀이춤〉, 〈넋풀이춤〉은 살을 푸는 진혼굿에 다름 아니었다. 이는 작가 이애주가 1970년대 유신정권 이래 1980년대에 군부정권이 집권했던 한국사회를 통과하며 ‘개인의 살풀이춤’이 아닌 ‘사회의 살풀이춤’으로 〈살풀이춤〉의 의미를 확대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춤들은 모두 전통춤, 전통예술들을 근거로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춤들이다. ‘전통을 온존히 알면 창작은 저절로 된다.’는 이애주 선생의 말은 바로 그 뜻이다.
1987년 6월 연우소극장에 올렸다가 ‘이한열열사 국민장’ 이후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4만의 관객이 보았던 〈바람맞이〉(1987. 8. 21, 22) 또한 전통춤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었다. 씨춤, 물춤, 불춤, 꽃춤으로 구성된 〈바람맞이〉는 1980년대 후반 격변의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예술가이자 지식인으로서 자기 발언이었다. 〈바람맞이〉에 대해 일부 비평가는 선생의 춤이 춤이 아니라, 움직임, 몸부림일 뿐이라는 반론을 제기했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춤을 바라보는 입장의 차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었다. 춤은 시대와 더불어 시대를 대변해야 한다는 이애주 선생의 춤 개념이 생생히 반영된 춤이었기 때문이다. 김근태 국회의원은 1980년대 이애주 선생의 춤에 대해 ‘전통춤을 갖고 당대의 문제, 당대의 아픔을 이렇게 절실하게 출 수가 있구나. 아, 이렇게 해서 한(恨)은 가슴에 남되 원한(怨恨)으로 남지 않을 수 있는 어떤 승화가 이루어지는구나.’(‘The Earlist Dancer’ Arirang TV, 1999. 8. 10.)라고 회상하였다. 이애주 선생의 〈바람맞이〉는 시대를 마주하며 발언했던 예술가의 행보를 보여준 춤판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다시 전통춤으로의 침잠, 한영숙에 이은 〈승무〉의 계승
그렇게 격정의 세월이 흐르는 중 1989년에 이애주 선생의 스승인 한영숙이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스승의 타계와 동시에 이애주 선생은 전통춤 자체로 침잠해 들어갔다. 1990년 호암아트홀에서 “한영숙류 이애주춤판” 공연 후, 교육과 강습을 통해 전통춤을 다시 성찰하기 시작하였다. 우리 춤의 기원을 찾고자 1995년 중국의 고구려 고분과 백두산을 둘러보았고, 후에 「고구려 춤의 상징체계」(1999)라는 박사학위 논문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이애주 선생은 1996년에 스승 고 한영숙에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27호 〈승무〉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한영숙은 애제자 이애주에게 〈승무〉는 우리 춤의 기본이고, 우리 춤의 정신이 담겨있는 춤이라고 생전에 늘 말씀하셨다. 예능보유자 지정은 춤꾼으로서 크나큰 영광이었다. 그러나 영광보다는 스승의 춤을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였다. 스승 한영숙과 그의 스승인 한성준의 예술적 의미를 되짚어보았으니, 아무도 찾지 못했던 한성준의 묘를 1997년에 홍성에서 찾아냈고, 1998년에는 홍성에 한성준의 춤비를 세웠다. 매년 홍성에서 “한성준 춤소리기념예술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또한 한영숙춤보존회의 회장으로서 스승 한영숙의 제자들과 함께 매년 정기공연을 주최하여, 한영숙류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 〈학춤〉의 맥을 지켰다. 2020년에는 한영숙 탄생 100주년 행사도 주도하였다.
한성준 한영숙으로 이어진 춤들을 계승하며 이애주 선생은 ‘스승님께 우리 춤을 이어받은 것을 좀 더 잘 정리하고 정립시키면서 제 후대 제자들 밑에 길이길이 맥이 이어지게 하는게 책임이면서 의무라고 볼 수 있지요. 그것이 옛날 거를 보존하고 그거로 끝나면 안되고, 우리 춤의 그 시대 시대 생활이나 몸짓이 축적되어 춤이 되었듯이 제가 전수받고 추고 있는 이 춤도 시대정신과 막 부닥치면서 다시 극복이 되면서 이렇게 잘 살아나서 이 시대 현대의 춤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이 또 제가 해야 될 일 같습니다.’(KBS-TV의 「TV명인전-이애주」편 1999)라고 했다. 한국춤의 정수를 계승하고 더욱 단단한 한국춤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이애주 선생의 막중하면서 절실한 책임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시대와 함께 하며 당대의 춤으로 추어져야 한다고 했다.
‘생명 살림’과 ‘한밝춤’의 구현을 위해 춤추라
이애주 선생은 살아있는 생명체들은 모두 춤출 수 있다는 춤의 본질을 사회화하고자 했다. 인간뿐 만이 아니라 우주 만물이 온존하게 생명을 유지하고 발전하기를 희망하면서 다양한 현장에서 춤추었다. “성덕대왕신종 타종식”에서 〈살풀이춤〉 〈관동대지진 한국인 희생자 추모굿〉 〈독도지킴이춤〉 〈바이칼 천지굿〉 〈소나무살림기원춤〉 〈북관대첩비 고유제〉 등 생명의 현장에서 춤추었다. 바로 1년 전 2020년 봄에도 〈사북항쟁 40주년을 기념하며 희생자들을 위로한 영혼 천도제〉에서 춤추었다.
그리고 생명 중심의 정신과 그 구체적 방법이 우리의 전통춤 안에 이미 내재하고 있음을 ‘춤을 통한 길닦음’이란 화두로 제시하며, ‘한밝춤’을 추자고 했다. 예컨대 고구려 무용총 춤 그림에서 분출되고 있는 기운을 감지하고, 우리 춤은 몸 안 기(氣)의 흐름은 물론 몸 밖의 기와 상응하는 무아일체를 몸으로 느끼게 만듦으로써 어디에도 없는 깨달음의 춤-한밝춤을 출 수 있다는 것이다. 박상화로부터 전수받은 영가무도(詠歌舞蹈) 역시 이애주 선생이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생명 살림’의 사상과 한밝춤을 구현하는 방법이었기에 무대 공연에서도 제자들과 함께 여러 차례 실행했다.
명무(名舞)의 의미를 되새기며
문득 명무(名舞)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무용평론가였던 고 강이문은 명무에 대해 ‘모름지기 명무(名舞)란 천부적 자질을 가진 자라도 오랜 세월을 거친 피나는 규범적 학습과 보고 듣고 행하는 풍부한 미적 체험에 의해 적어도 한 시대 한 민족의 심미적 규범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춤』, 1986년 6월호.) 라고 정의했다. 그렇다. 명무란 춤이 처할 위치를 잘 알고, 춤이 한 시대의 복판에서 당대의 진(眞)과 선(善)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애주선생은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전반에 걸쳐 춤춘 진정한 명무였던 것이다.
이제 이애주 선생은 2021년 5월 13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서 영면했다.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첫 번째 노제를, 과천의 승무전수관에서 두 번째 노제를 지내고, 모란공원까지 함께한 자리에서 동료, 후배, 제자들이 흐드러진 춤판을 벌렸다고 한다. 선생은 영면했지만, 끊임없이 배우고자 하셨고, 춤추고자 하셨고, 또 당신의 춤을 전승하고자 하셨기에, 아마도 이애주 선생과 선생의 춤은 후학들에 의해 계속 회자되고 되짚어질 것이다.
비평, 한국일보, 1987. 7.
김채현
이애주의 춤 〈바람맞이〉(연우소극장, 6. 9~15: 김덕수네 사물놀이와 이애주의 독무로 77분간 진행)는 1천3백여 관객을 동원하고 5백 남짓의 사람들이 입장하지도 못해 되돌아가게 함으로써 또 하나의 바람을 일으켰다. 춤추는 동안 이애주는 몰입지경에 달하였고, 이애주의 그런 상태를 사물놀이가 즉홍적으로 뒷받침하여 그의 참된 경지를 춤으로 보여주도록 하였다. 이애주의 춤은 자신의 굳건한 춤개념에서 출발하며, 그의 춤이 색다른 경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어떤 신념에서 그 연유가 찾아진다.
이애주의 춤 〈바람맞이〉 팸플릿 표지 |
이애주는 이렇게 말한다. “일은 상황의 모순을 극복하고 옴바른 삶을 확장, 심화시키려는 제반 몸짓이다. 그 몸짓이 자연스레 표현되는 것이 춤이며, 춤은 진실된 일을 통하여서만 건강하여질 수 있다.” 그에게서 일과 춤은 삶의 자연스런 과정으로서 동일시되며, 그러므로 이번 공연은 삶과 예술 간의 경계를 철폐하는 경향의 작업임은 물론이며, 일·놀이·춤의 3자가 통일되는 상태를 지향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 응어리지고 몸부림치는 동작들이 변형된 춤사위로 출현한 것에 주목할 필요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런 춤사위들을 추구하게 만든 근본 동기가 더욱 주시되어야 할 것이다.
생명의 막이 열리는 씨춤판, 죽임의 음흉한 세력과 맞서는 씨앗들의 대립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물춤판과 불춤판, 삶의 부활을 기원하는 액풀이의 꽃춤판의 4부로 구성된 이번 공연은 열띤 느낌을 전달하여 이애주의 저력을 재확인해주었다. 무당춤, 살풀이춤, 허튼춤, 탈춤, 승무 등 재래의 양식들은 해체되어 이애주식의 비틀기, 비비꼬으기, 오그리기, 뻗기, 거꾸러지기 등의 몸짓과 융합하여 춤꾼 자신의 새로운 몸언어로 현저하게 부각되었다. 이애주의 춤사위는 규정된 틀 속에서 맴돌지 않고, 춤꾼의 상황인식에 따라 몸에서 짜내어지는 체액(體液)으로 생각된다. 이애주가 대표로 있는 춤패 ‘신’과 서울의 몇 연희단체들이 거의 유사한 동기에서 재래의 양식과 일상적이며 상황적인 동작들을 합체시키는 작업을 적극 실천하는 중에 있고, 청주에서도 ‘우리춤 연구회’가 두세 달마다의 정기공연을 통하여 그런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우리춤연구회는 이 시대의 왜곡된 생명의 문제를 풀어내는 살풀이로 구실하는 데서 춤의 최우선적인 역할을 찾는다.
〈바람맞이〉는 병든 세상 속의 고통과 절망에서 해방되려는 싸움판으로서, 여기서는 춤과 진실의 폭로가 동화된다. 굿의 일반적인 절차를 따르는 점에서 이 작품은 굿춤으로도 해석되는데, 게다가 공통된 상황인식이나 생활감정을 관객과 함께 전제하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이 작품의 추상성이 깔려 있으니, 그런 전제조건에 해당하는 인식이나 감정을 공유하지 않는 관객에게 작품의 본래 의도가 전달되겠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같은 맥락에서, 솔로로 진행된 탓이기도 하겠지만 특히 두번째 물춤판에서 생명의 짓밟힘은 있었어도 그 연유는 모호하였다. 하기야 세상살이의 모순을 한마디로 해명하기란 어려울 테지만, 아무튼 모순의 까닭을 설득력있게 제시했어야 하였다. 이 작품이 굿에 지나치게 의뢰하였고 굿과 공연의 구분이 선명하게 내려지지 않은 데서 이와 같은 허점이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시평, 월간중앙, 1987. 9.
김채현
이애주 〈바람맞이〉 |
현대무용에 대한 대체적인 개념규정은 극장성 및 연극적 처리를 축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이는 서구의 무용계, 게다가 현대무용의 발상지라 언급되는 미국의 무용계에서 통용되는 개념인 것으로 필자는 안다. 그다지 문제가 없을 성싶은 이런 식의 개념은 그러나 춤의 역사에서 현대무용을 기존의 옛춤을 뒤엎은 새로운 형태의 춤으로 받아들이고 이 새로운 형태의 춤이 우리 시대를 대변하는 춤이라 인식될 경우 심각한 문제를 촉발하게 될 것임을 명석한 독자는 알아차릴 것이다. 즉 극장 형식,연극적 전개 형식을 취하지 않는 춤은 적어도 우리 시대의 예술적인 춤의 범주에서 제외되는 것이 상례이겠기 때문이다.
과연 극장식 춤, 줄거리 전개의 춤만이 예술로서의 춤이고, 우리 시대를 대변하는 춤일까? 논리적으로 말하여 현대무용은 ‘현대적인’ 예술무용일 따름이고 춤 일반의 일부분인 까닭에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아니다!’이다. 현실적으로는 극장식 현대무용이 풍미한 미국에서조차 포스트모던댄스나 실험 무용이 등장하기에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역시 ‘아니다!’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무용계는 아직도 초창기의 현대무용 개념에서 연역되는 춤 개념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구한말, 더 늦게는 1920년대 이후 우리의 춤 개념은 이 연역된 춤 개념을 벗어나는 춤을 적어도 예술의 범주에서는 제외시켜서 정립되었다. 현상적으로 현대무용과는 전혀 이질적인 전통적 무용은 ‘격이 낮은’ 춤으로 치부되고, 현대무용을 추종하는 새 춤들은 ‘격이 높은’ 무용으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현대무용의 각 작품이 가질 현실적 역량이 일차적인 문제로 부각되지 현대무용자체를 여기서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물론 현대무용 자체는 모더니즘과 연관하여 언제라도 검토되어야 한다). 다만 필자는 현대의 외래 무용을 수용하는 우리의자세가 주체적이지 못하였고 따라서 우리의 춤 관념이 심히 오염되었음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문화적 역량을 높이고 주체 문화를 향한 소망에서 이제 춤 혹은 연희활동이 그동안의 뿌리 없는 상태를 벗어나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을 학수고대하는 일도 당연하게 되었다. 오히려 그런 일이 너무 늦게 그리고 지지부진하게 이루어진 것이 개탄스럽기만 하다. 한국의 문화계 일반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용계에서 비약적인 혁신을 도모하는 작품들이 ‘진지하게’ 거론되어야 할 필요성은 여기서도 발견된다.
연세대 노천강당에서 이틀간 1만2천명 가량의 관객이 운집한 가운데 벌어진 한판춤 〈바람맞이〉(8. 21-22. 이애주의 독무로 70분간 진행)는 한국춤의 대단한 가능성과 차후의 혁신을 재확인하였던 공연으로 평가된다. 공연의 전체 흐름은 지난 6월 연우소극장에서 있었던 것을 축으로 해서 여전히 삶과 예술의 통합을 지향하고 있으며, 올해 2월에 공연된 춤패 불림의 〈이 땅의 춤을 위하여〉와 동일선상에서 한국춤이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수용해왔던 것을 과감하게 벗어났다. 춤이 향락의 도구, 장식의 수단, 망각의 대용제이긴커녕 예술의 본령에 충실한 삶(인간다움의 생명)의 촉진제라는 사실은 여지없이 입증되었다고 믿어진다.
모두가 부르짖는 ‘민주화’가 최우선적인 이상으로 설정되어야 할 당위성은 〈바람맞이〉가 우리 사회의 습관화된 폭력성을 증언하는 데서 입증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이번 공연은 민주를 겨냥하는 대중사회의 대규모적인 굿이라 해석되고 아울러 삶(굿과 사건)과 예술(짜여진 춤)의 만남이 과학적으로 이루어진 모범작이었다. 버스 속에 날아든 최루탄 앞에서 ‘우리 아기 살려주세요!’라고 절규하며 젊은 엄마가 아기를 부둥켜안은 가슴 뛰는 현장을 중심으로 젊은이들의 시위 현장 그리고 민주화의 대열에서 폭력으로 인해 쓰러져가는 한열이 및 그의 장례식에서 있었던 춤의 현장을 선명하고도 힘차게 담은 대형 그림 석 점이 걸린 가설 무대, 또한 공연의 앞뒤와 중간중간에 불려졌던 〈아침이슬〉 〈님을 위한 행진곡〉 등의 노래는 이작품이 사회적인 힘을 얻어내는 데 한몫을 담당했다.
이런 배경 아래 쓰러지기, 꼬여지기, 뿌리치기, 머리 처박기, 나자빠지기, 휘두르기, 주저앉기, 굳어지기 등의 몸짓들이 환기시키는 억누름과 그에 굴하지 않는 일어섬은 작품 관람 대중들에게 우리 자신들의 상황을 주시하도록 이끌었다.
〈바람맞이〉 식의 형식과 내용을 갖춘 공연이 그동안 거의 없었던 우리 현실에 비추어볼 때 이번 공연에서 보여준 엄청난 관객의 관심은 주지할 일이다. 이 현상에서 우리는 춤과 아주 서먹서먹한 관계를 가졌고 심지어는 드러내놓고 춤을 경멸하였던 이 나라 대중들이 잠재적으로 무엇을 소원해 왔는지를 읽어내어야 할 것이다. 상업적인 천박한 관심들 때문에 훼손, 왜곡, 오도되기까지 한 〈바람맞이〉는 단적으로 우리 민중들의 문화적 역량이 성숙하고 (건설적인 의미에서) 승리하고 있음을 응변하였다. 그러므로 전국을 휘몰아친 〈바람맞이〉에서 스타가 있었다면 그것은 스타로서의 이 나라 시민들이었다.
그들은 〈바람맞이〉에 참여함으로써 민주화와 인간화를 향한 의지를 몸으로 보여주었고, 참다운 춤이 갖추어야 할 자격요건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에 대하여 무언의 응답을 하였다. 예술에 관한 한 무지한 자들이라는 억울한 평가를 받은 이 나라 백성들이 오히려 그렇게 평가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은 이번에 〈바람맞이〉를 통하여 확인되었다. 그들로 하여금 예술에 접근하지 못하게 만든 사이비 예술개념, 사이비 춤 개념 그리고 이런 따위의 사이비성을 방만하게 조장한 사이비 문화기구에 그 책임이 있음은 불문가지이다.
〈바람맞이〉는 협소한 예술 개념, 춤 개념을 현실에 맞서 적극적으로 확장시키는 작업의 일환이다. 정서의 확장과 고양, 물음의 확장과 고양, 인식의 확장과 고양에 예술의 알맹이가 감춰져 있을진대 〈바람맞이〉는 이 알맹이를 복권시켰고, 시민들은 그에 동참함으로써 이 알맹이를 다졌다.
삶과 예술의 만남이 예술가의 일방적인 노력만으로 달성되리라는 것은 착각이다. 예술가의 감탄, 외침에 관람자의 화답이 주어지고 그런 결과 관람자가 삶의 현장에서 새로운 삶을 창출하려는 욕구가 솟구칠 적에 제대로 된 만남이 이뤄진다. 따라서 건전한 예술 감상은 언제나 역사적인 성격을 띠며, 이런 점에서 예술 감상, 춤 구경도 능히 실천의 활동으로 정의된다. 긴 밤 지새우고 〈바람맞이〉는 왔다. 이제는 우리들 자신이 그에 화답(和答)을 보낼 차례이다. (1987.9.)
이 인터뷰는 이애주 선생의 사회 참여 춤 활동을 비중 높은 화두로 시작하여 이와 함께 생명의 춤 모색 작업을 소개하며 고인의 성장기부터 일대기를 담았다. 인터뷰 전문 가운데 사회 참여 춤 활동 부분을 전재한다. - 편집자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
1987년 6월 항쟁 당시 박종철, 이한열 열사를 기린 '살풀이 춤'으로 대중들에게 '민중춤꾼'으로 알려져 있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인 서울대 이애주 교수를 만났다. 서슬 퍼렜던 시절, 광장에서 바람맞이 춤을 추는 것이 무섭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때 나는 국민들의 열망과 함께 몸으로 말한 것뿐이다. 그림 하는 사람은 그림으로, 문학 하는 사람은 글로 이야기하듯 나는 몸으로 나의 생각을 춤추었을 뿐이다. 안하고는 못 배길 만큼 시급한 상황이었다"라고 답한다.
"춤은 경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여건이 뒷받침 안 되면 막을 올릴 수 없다. 근 7,8년 동안 나는 제대로 된 극장에서 춤판을 벌인 적이 없는데 극장을 얻을 자본도 없고, 정치력도 없고 '내가 가진 것은 오로지 춤뿐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혹시 기득권들이 싫어하는 현장에서 춤을 췄던 것이 대관도 힘들어지고 후원도 받기 힘들어지게 한 것은 아닌가 궁금했다. 그래서 현실과 타협하고 싶지는 않았나 물었다. 그러자 "타협이라는 것조차도 생각해 본적이 없고 그냥 내 갈 길을 가는 거다. 타협이니 비타협이니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나한테는 질문 자체가 안 맞는 질문이다. 어렵지만 내가 추구하는 것을 계속하다 보면 뜻 맞는 사회와 뜻 맞는 사람들을 만나 잘 될 때가 있겠지. 오로지 자기가 생각한 그 길을 가는 거다"라고 이야기한다.
춤, 마당, 판이라는 말을 처음 공식적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라는 질문에 "1974년에 개인 춤 발표를 했다. 그런데 발표회 제목을 그 당시는 '이애주 무용발표회'라고 하여야 했는데 도저히 그렇게 쓸 수가 없어 '이애주 춤판'이라고 했다. 왜냐, '무용'이란 말은 일제 강점기 때 들어온 식민 용어로서 그때부터 춤이, 몸짓이 본격적으로 왜곡되고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때 식민용어로 바꿔진 우리말을 제대로 회복시키려고 하는 사람을 두고 불온한 용어를 쓰는 색깔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분류시켰고 국립극장 '블랙리스트' 10명 안에도 포함돼 있다고 들었다". '춤'이란 단어가 이렇게 편하게 쓰이기까지 이런 이야기들이 숨어 있는지 몰랐다.
꿈이 무엇이냐고 묻자 "정말 융합적인 우리의 몸짓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춤 대학이 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기관이 없다. 내게 우리 몸짓을 제대로 교육할 수 있는 자율성을 준다면 춤 학교를 제대로 만들어서 교육하고 싶다. 우리 후손들뿐 아니라 생명의 정통몸짓을 원하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라고 한다. 춤 대학 이야기를 들을 때 마치 "내 공연은 무용발표회 대신 춤판이라고 할 거야"라며 상기된 표정으로 재잘대던 20대의 이애주를 마주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 겁이 난다. 한번은 다리가 아파 쓰러진 적이 있는데 '이러다 영 못 일어날 수 있겠구나. 이제 마지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는 이야기에 나도 겁이 난다. "이번 년도 상반기까지를 춤 60년으로 보고 그 안에 꼭 정리를 해야만 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호흡도 그렇고 어쩌다 삐끗해서 몸이 잘못되면 영영 내 춤은 구체적 몸짓이 영상으로나마 남게 될 수 없다. 하지만 그 작업을 여태 못했다. 음악, 조명, 연출, 의상을 정통으로 갖추고 음향, 영상 작업 등을 헤아려보니 억대 이상이 든다고 한다. 1000만 원도 없는데 말이다(웃음)"라는 이야기에 춤은 경제라는 말이 서늘하게 들려온다.
공연 예술가로서 무대에 설 기회를 차단당하면서도 그 당시 주류 담론인 무용이라는 말 대신 한국 전통의 춤, 마당, 판이라는 말을 쓰기로 작정하고 밀어붙였던 20대 청년 이애주.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1970년대의 그가 그럴 수 있었듯이 2010년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20대도 그저 힐링을 당하는 세대가 아닌 세상을 힐링할 수 있는 판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제주 4·3 희생자,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핵 없는 세상을 위하여, 그리고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죽음을 추모하는 대한문 앞에서 지금도 특별한 무대 없이 현장의 아픔을 위로하고 있는 그의 춤을 2050년대의 청년들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 다만, 이런 아픈 현실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박종철, 이한열 열사를 기린 '살풀이 춤'으로 대중들에게 '민중춤꾼'으로 알려져 있다. 서슬 퍼렜던 시절에 시국 열사들의 죽음을 기리는 자리에 홀로 서 한풀이 춤을 춘다는 것이 보통 용기가 없으면 못했을 일인 것 같다.
그 당시는 이승만, 박정희 시대를 지나 독재가 몇십 년 이어진 상황이라 나뿐만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폭발 직전에 있었다. 1987년 1월 박종철 군이 물고문으로 죽고 이 사건이 신문에 대서특필 되면서 전 국민이 경악을 금치 못했고 한마음으로 모이면서 6월 항쟁이 일어났는데 그날 바로 바람맞이를 추게 되었다. 사실 1960, 70, 80년대에 독재정권이 이어지면서 그들의 표현대로 반합법적이고 비합법적인 집회와 투쟁들이 계속해서 이어져 왔고 이 와중에 서울대생 박종철의 사망으로 6월 항쟁이 일어난 도화선이 되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춤으로 몸이 그렇게 움직여진 것이다. 춤이 삶의 몸짓이 축적된 것이라면 과거의 살아온 몸짓, 지금의 사는 몸짓, 미래의 살아갈 모든 몸짓 등이 춤의 생생한 토대라고 본다. 춤은 사상과 철학이 몸놀림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때 나는 국민들의 열망과 함께 몸으로 말한 것뿐이다.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 때도 그랬다. 이한열 군이 최루탄에 쓰러지고 나서 병문안을 갔더니 연세대 도서관 앞에 수천 명의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모여 밤샘 집회를 하고 있었고 나에게도 발언을 좀 해달라고 하여 "나는 말도 잘 못하고 춤으로 할 수 있을 때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돼서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서 춤을 추게 된 것이다. 그림 하는 사람은 그림으로, 문학 하는 사람은 글로 이야기 하듯 나는 몸으로 나의 생각을 춤추었을 뿐이다. 안 하고는 못 배길 만큼 시급한 상황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대통령 후보격이었던 노태우 씨도 국민의 폭발적인 민주화 투쟁에 6.29 선언으로 굴복한 척한 것이 아닌가.
이애주 〈바람맞이〉 |
어떻게 해서 바람맞이 춤을 추게 된 것인가?
그 당시는 연습장도 없어지고 주위 사람들은 다 감옥 가고 고문 받고 있을 때였다. 혼자 활동도 못하고 리듬도 다 죽어가는 것 같았고 내가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침잠해 있을 때 서울대생 박종철 물고문 사건이 터졌다. '인간성을 말살시키고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이 현상은 도대체 뭘까' 하며 저절로 몸으로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마침 그때 처음 김민기, 김석만, 이상우 등 연우무대 후배들이 신촌에서 혜화동 이전 개관 공연을 부탁한 게 계기였다. 본격적으로 준비를 하며 고문, 탄압과 관련된 춤을 다 조사해 봤는데 고문 춤은 서양이고 어디고 세상에 없더라.(웃음) 성춘향을 어르며 추는 칼놀림 정도밖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연우무대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그러자고 승낙하고 나니 기운이 막 살아나는 것 같았다. 사물놀이 원조격인 이광수, 김덕수한테 요청을 했더니 흔쾌히 악을 맡기로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사물놀이 10주년을 맞으며 돌파구가 없었는데 아주 잘 됐다고 좋아하였다. 그렇게 만들어 나간 것이 '바람맞이'이다. 일주일간 공연을 했는데 사람들이 너무 몰려들어 표도 환불해 줄 정도였다. 돈을 받으려면 제대로 최고로 받자고 하였는데도 표가 동이 났었다.
그때 학생들은 대부분 못 들어왔다. 그 후 서울대 학생회에서 학교에서 꼭 해주셨으면 하는 간청을 하여 선뜻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서울대에서 하기로 한 전날 사물놀이패가 일본 공연 운운하며 못하겠다고 하여 방까지 붙였는데 하지 못했다. 내가 지도교수로 있던 춤패 '한사위' 학생들이 나에게 선생님 공연취소로 자기네들이 얼굴을 못 들고 다니고 나는 서울대 학생들에게 약속을 안 지킨 비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웃음) 당시 춤패 '한사위'는 남북한 통틀어 최고의 춤패라고 소문이 났을 정도로 대단한 춤패였다. 그냥 있을 수 없어 '한사위'에게 제안을 했는데 "내가 밤을 새워 장단을 가르쳐줄 테니 할 수 있겠어?"라고 물었더니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러겠다고 해서 밤을 새워 반주 음악을 가르쳤고 아주 어려운 장단은 그냥 그리듯이 했다. 기본으로 깐 장단이 도당굿장단이었는데, 도당굿장단하면 기법적으로 정말로 까다롭고 어렵기도 하지만 음악적으로는 고도의 기법과 예술성을 갖고 있었다. 당연히 그 악과 같이하는 춤도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한사위' 학생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장단을 비슷하게 그려가며 밤새워 연습했고, 다음날 새벽에 학교로 이동해서 포스터를 붙이며 준비했다. 공연을 하려고 대기실에 있는데 햇빛은 눈이 부셨고 밤에 잠을 못 자서 그런지 눈이 시큼시큼하며 눈물이 저절로 났다. 소도구 준비과정에서 물춤을 추기 위해 물자배기가 필요한데 학교에 있을 리 만무하고 여기저기 뒤지다가 그냥 플라스틱 쓰레기통을 잘라 광목을 씌웠고 어디 가서 가마때기 하나를 장만해서 멍석 대신 깔고 하는 그런 식이었다.
그날이 바로 6월 26일이었고, 1시에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바람맞이 춤판이 열린 것이다. 원래는 연우무대라는 작은 실내 공간에서 춤을 췄었는데, 그날 춤을 춘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은 하늘 뚜껑이 열린 것 같았다. 장단이 시작되면서 눈부신 파란 창공이 보이더니 나도 모르게 하늘과 땅을 껑충 오르내리는 춤사위로 바뀌어 붕붕 뛰어올랐다. 당시의 춤판과 관객과 학생들의 기운이 하나가 되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춤사위가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연우무대에서 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바람맞이가 되었다. 한 시에 시작한 그 춤이 두 시에 끝나니 바로 전국적으로 민주화 대행진이 일어나는 시각이었다. 두 시를 기점으로 서울에서 부산에서 광주에서 대도시와 방방곡곡에서 전국적으로 국민들의 거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신문에 하늘로 뛰어오른 춤 사진(한국일보 최규성 촬영)이 게재되어 모두가 충격이었고 신참이었던 그 기자는 덩달아 유명해졌다.(웃음) 그 춤판에 외신기자를 포함해서 웬 기자들이 그렇게 많이 모여 찍어대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는데, 다음날 보니 춤춘 사람이 서울대 모 여교수라고 하며 '이애주 교수가 민주화 대행진에 불길을 댕겼다'는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그 이후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서 하나의 진혼의식으로서 춤을 추며 뜻하지 않게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자연스럽게 현장과 연결되어 인천 수은공장에서 명을 달리한 16살 소년 문송면, 태백 탄광에 성완희 열사, 거제도 조선소에 이석규 열사 등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례식 등 전국으로 각 지역으로 다니며 또 다른 바람맞이 의식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이한열 열사 장례식 당시의 상황에 대해 조금 더 듣고 싶다.
장례식 때 춤 의식을 치르기 위해 밤을 새워 노동자 풍물패와 대학생 풍물패에게 장단을 가르쳤다. 내 춤을 반주하겠다고 연세대 강당에 전국에서 모여든 200여 명 풍물패에게 짧은 시간에 장단을 가르치느라고 한숨도 못 잤다.(웃음) 나는 학생회 측에 "전 세계에서 외신기자들도 속속 모여들고 있는데 기독교식 장례는 우리 민족 문화의 망신이다. 우리 식의 장례식을 해야 한다"고 몇 번이고 당부했다. 며칠을 토론한 후 마지막 날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우상호(현 민주당 국회의원)가 "선생님 뜻대로 하기로 했습니다"라고 하더라. 그러나 장례식 당일 날 보니 기독교식으로 진행됐고 사회자가 장례식이 끝난 후 모교수가 춤을 춘다는 식으로 발언을 했다. 밤새고 난 새벽에 준비하고 앉아 있는데 후배 조경만(현 목포대 교수)이 "누님, 사회가 춤추게 해야 합니다"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맞는 말이었다. 또 민문연(민족문화연구소) 후배이자 정책국장으로 있던 정희섭이 핏빛 물든 옷을 입고 앉아 있는 나에게 "누님, 어쩌다가 이렇게 되셨습니까?" 하더라.(웃음) 이런 이야기들을 지금 생각해 보니 참 눈물겹다. 그러고 나서 민주화 운동이 전국적으로 불길처럼 올라 그 열기로 그야말로 사회가 춤춘 것이다.
이애주 〈바람맞이〉 |
'바람맞이'라는 춤의 이름에 담긴 뜻이 궁금하다.
바람이라는 것은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바람에 의해서 춤이 추어진다. 움직이는 자연이다. 나는 우리 춤을 자연춤이라 하는데 '스스로 自'에 '그러할 然'자라 스스로 그러하게 몸짓이 나오는 거다. 모든 춤은 움직여지는 것이고 그 움직임은 바람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는데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현상, 꽃봉오리가 마지막에 터뜨려지고 씨앗이 흩뿌려지는 등 모든 과정이 자연이고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매개체가 바람이다. 바람은 생명 그 자체로서 생명의 몸짓을 일어나게 하고 쓰러지게 하고 재탄생시키기도 한다. 바람을 맞이해서 스스로 그러하게 같이 간다는 이야기다. 예컨대 해맞이 춤을 출 때 여명이 밝아오며 해 뜨는 찰라 그 밝은 빛을 맞이하게 되고 모든 만물을 따뜻하게 비춰주고 꽃피우게 한다. '맞이'라는 의미는 해가 지는 것까지도 포함된다. 지는 해를 보내고 다음날 뜨는 해를 또 맞이하는 것이다. 바람맞이도 그렇다. 그 춤거리가 씨, 물, 불, 꽃으로 이루어졌는데 맨 처음 씨 춤은 바람에 의해서 흩뿌려진 씨가 싹으로 움트는 과정이다. 물춤에서는 비가 오고 적당량의 물이 있을 때 제대로 된 생명활동을 할 수 있는데 반대로 물이 너무 넘쳐 버리면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물춤이다. 불도 마찬가지인데 불이 없으면 우리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지만 이것을 과도하게 잘못 사용했을 때 사람이 죽어 넘어가고 생명활동은 끝이 나게 된다. 바로 불춤의 주제이다. 마지막 꽃춤은 물고문과 불고문으로 목숨이 스러지고 그 죽음이 거름이 되어 다시 생명의 꽃이 피어나는 상생의 과정을 빚어낸 춤이다.
'맞이'가 '환대'의 뜻이 있는 건가?
춤에 '올림채'라는 춤사위가 있다. 나를 숙이고 비우면서 상대방을 모시는 것인데 '모신다'는 것은 공경으로 맞이한다는 뜻이다. 곧 올리고 모시며 하늘을 맞이하는 의미다.
그 시대 사람들의 열망을 바람맞이 춤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춤은 몸의 언어이자 시대의 언어라고 한 말이 이해가 된다.
루쉰 예술론이든, 마르크스 예술론이든 그리고 좌파이론이든 공통적으로 예술이란 정치, 경제, 사회와 하나로서 인민들의 삶과 같이하는 개념이다. 이전엔 글로만 읽고 알고 있었지 그것을 몸으로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 바람맞이를 추며, 이한열 열사의 춤을 추며, '춤은 정치이고 사회이고 모두가 하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기자는 내 춤을 보며 '시국 춤'이라고 했고, 어떤 기자는 사회적인 관점에서 '사회 춤'이라 했고 정치의 관점에서 본 기자들은 '정치 춤'이라고도 했다.
고 이애주 첫 춤 공연 팸플릿 자료, 1974. 6.
47년 전에 있은 이 춤판은 고인의 예술관을 보여주는 작업으로 자주 회자된다. 이런 점과 당대의 공연 상황을 미루어 짐작해보게 하는 자료라는 점에서 당시 공연 자료를 원본대로 수록한다. - 편집자
춤판을 벌리며
오늘의 이땅에서 춤을 춘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춤을 추지 않을 수 없는데에 춤꾼의 절규가 있는 것이다. 오히려 작은 몸짓이나마 전력투구하는 길만 이 현실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창조적 생명력을 획득할 수 있는 길인 것이다.
우리의 춤의 현실은 어떠한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우리의 춤이 무의식적인 태만과 무사상의 몸짓으로 저급하게 전락되어 버렸고 더구나 소수인에 의해 독점적인 전유물로 고립되어졌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춤은 모든 문화 형태 중에서 가장 무관심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같은 오욕과 슬픔으로 가득찬 문화 현실 속에서 춤꾼의 입장으로 아무 탈 없이 있다는 것이 소름끼치도록 부끄럽기만 하다.
여기에 뜻을 같이 한 동료 학우들과 함께 벌리는 이번 춤판은 참을 수 없는 아픔의 몸짓 바로 그것이다. 퇴폐와 불협화음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존의 춤을 정립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전통 무용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 춤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이다. 이번 춤판은 전통문화의 전승 발전이라는 과업 아래 우리 춤의 원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우리 몸짓에 바탕을 두고 오늘의 문제의식을 표출코저 하였다.
앞으로 민족문화의 창달을 위해 우리의 작업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의 몸짓이 끝끝내 고통을 참고 극복해나가는 절규의 몸부림이 될 것을 다짐한다.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로 하나의 진통을 함께 겪는 춤판이 벌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평소부터 이끌어주신 한영숙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 협찬하여 주시는 봉원사스님, 국립국악원 악사 여러분,,뒤에서 애써주신 정병욱 선생님, 제자를 써주신 김정록 선생님, 그리고 이번 줌판을 함께 마련한 동료 학우들께 감사한 마음을 잊 을 수 없다. 1974. 6. 22 이 애 주
1. 春鶯囀 이애주
이조 純祖28년에 翼宗이 만드신 춤으로 平調 靈山會相曲 에 맞추어 추는 宮中 呈才이다. 宮中呈才笏記에 기록되어 있는 무보는 다음과 같다.
樂奏柳初新之曲 (平調會相) - 이하 생략
2. 鶴舞 이애주 정재만
(중요무형 문화재 제40호)
고려때부터 전해오는 宮中 鄕樂舞로서 두루미의 움직임을 상징적으로 재현하는 춤이다. 樂學軌範 卷之五에 기록되어 있는 무보는 다음과 같다.
樂奏步虛子令諸波唱歌上歌見擊泊 - 이하 생략
3. 살풀이 한영숙
살풀이는 살을 푼다는 ‘굿’에서 파생한 어휘로 해석된다. 이 춤은 민속악의 대표적인 살풀이 장단에 맞추어 추며 다양한 움직임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홍과 멋을 마음껏 낼 수 있다.
4. 민속탈춤
○ 뭇동춤 채희완 외 7 명
봉산탈춤 둘째 마당에 나오는 팔먹중들의 군무이다.
○ 미얄춤 이애주
1930, 40년대에 황해도 사리원 지방에서 추어지던 미얄줌이다.
5. 佛敎儀式춤 봉원사 스님 협찬
부처님 생전시 영산회상에서 행하시던 대제때 추어지던 춤이다.
○ 三歸依禮 김민기 외 10명
○ 千手錄羅, 提雜錄羅, 明錄羅 장만철
○ 法彭, 弘彭 이애주 외 3명
○ 道場揭, 四方搖身, 香花揭 유갑수 외 3명
○ 打柱 김석만 외 3명
6. 僧舞(중요무형 문화재 제27호) 이애주
불교의식무용올 토대로 하여 韓成俊 옹이 체계적으로 민속화시킨 춤이다. 춤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 염불, 염불도드리
○ 타령, 타령도드리
○ 굿거리, 굿거리도드리
○ 법고
○ 굿거리
— 쉬는 시간 —
7. 땅끝 (창작무용) 이애주 외 전원
꽃이 피려 한다. 먹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음산한 바람 속 물결치는 어느 섬「땅끝」의 한 때. 꽃은 피려고 몸부림한다. 몸부림, 무엇이 이 몸부림을 억누르고 있 는가. 무엇이 꽃을 죽게 하는가. 죽은 꽃에서 흐르는 피가 굳어 굳어 차디찬 돌이 되게 하는 것이 누구냐, 광풍과 암흑으로 꽃을 질식시키고 메마른 자들로 하여금 살찐 자를 예배케 하는 것은 한낱 잡귀 망령이었다. 온갖 허위의 의식으로 메마른 자들을 들씌운 쇠갈퀴 멍에였다. 잡귀 망령이라면 쫓아낼 수 있다. 우리의 몸속에 흐르는 붉은피로 쫓아낼 수 있다. 죽은 꽃 살아 피어오르게 하는 우리의 몸짓 속의 뜨거운 율동으로 밝은 날은 올 수 있다.
우리의 몸짓에 내재하고 있는 본연의 생적 율동성을 최대한의 기저로 하여 오늘의 시대 체험적인 예술 의지를 미적 가치의 세계로 구상화하여 보았다.
특별 출연
한영숙 (중요무형문화재 승무 · 학무 예능보유자)
김천흥 (중요무형문화재 종묘제례악 · 처용무 예능보유자)
박송암 (중요무형문화재 범패 예능보유자)
김구해 (중요무형문화재 범패 예능보유자)
김태섭 (국립국악원 재직)
춤꾼
이애주
정재만 (경희대학원 졸) 채희완(서울대학원 미학과) 외
장만철 (서울문리대 고고학과 4) 김민기 (서울대 미대 회화과 4)
류경희 (서울사대 체육과4) 김석만 (서울문리대 지리학과 4)
박정국 (서울문리대 철학과4) 문명옥 (서울사대 체육과4)
정숙채 (서울사대 체육과4) 박계순 (서울사대 체육과4)
박진희 (서울사대 체육과4) 김유덕 (서울사대 체육과4)
윤영애 (서울사대 체육과4) 장영희 (서울사대 체육과 3)
유갑수 (서울사대 체육과 3) 김경선 (서울사대 체육과 3)
최옥수 (서울사대 체육과3) 곽관주 (서강문과대 사학과2)
정용지 (서강이공대 생물학과2) 윤승희 (청주여사대 무용과2)
이승욱 (연대공대 토목과2) 이춘길 (서울문리대 심리학과2)
이미경 (청주여사대 무용과1) 이정식 (서강대 독문과1)
정병훈 (연대 철학과1)
잽 이
정재국 (국립국악원 재직)
김중섭 · 사재성 · 김종식 ( // )
김영동 (서울음대 국악과4) 이종구 (서울음대 작곡과4)
이명희 (서울대학원 국악과1) 이경희 (서울음대 국악과1)
뒷 일
-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