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 이 글은 한국춤평론가회 발간
‘춤 저널’ 제16호(2001년)에 실린 글이다.
부호 표기는 원문의 것을 그대로 따랐다. - 편집자)
1.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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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는 우리나라 근대무용의 서막을 알린 전설적인 무용가이다. 아름다운 신체와 탁월한 용모는 무용가로서의 성공을 점치게 하였고, 예술에 대한 부단한 연구와 창조활동은 그녀가 한국 일본을 뛰어넘어 세계적인 무용가가 되는 데 좋은 조건이 되어 주었다. |
2. 崔承喜의 인품과 성격
1) 무대 위에서 빛나는 아름다움
최승희는 중학교 일학년 때만 하더라도 학급에서 키가 제일 작았으나 3, 4학년 때부터 커져서 졸업할 때에는 1미터 70 가까이 되어 그때의 한국 여자로는 키가 큰 사람이 되었다. 최승희는 눈이 크고 유난히 밝고 예리하며 눈매가 당찼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는 성품이 여기서 나타났다. 코는 오똑하고 입술은 정열을 머금은 듯이 매력이 있었다. 키가 크면 흔히 어깨가 올라가거나 처졌기 일쑤인데 최승희는 몸매가 나무랄 데 없이 보살처럼 선이 고왔다. 손은 다른 사람보다 길어서 춤 동작의 아름다움이 잘 나타났다. 이렇듯이 얼굴의 모양이 이른바 서구 미인형에 가까운 점도 없지 않았으나 최승희는 가까이 보면 여자답기보다는 오히려 중성답게 보였다. 그러나 이 여자는 무대에 서면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나왔다. 두 눈은 별빛같이 빛나고 입가에는 무슨 요정이나 마술사와 같은 웃음이 떠돌고 온몸이 이상한 후광에 휩싸여 그윽한 빛을 발산하는 듯이 보였다.2)
이렇게 최승희는 외형으로 보아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존재였다. 평소의 용태가 현대적이며 몸 관리가 철저해서 함부로 외출하지 않았을 뿐더러 의상 디자인에도 천재적인 센스가 있었다. 또 위세가 당당했으며 여자다운 섬세함과 애틋함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개성적이고 서구적인 멋과 한국적 멋을 겸한 멋쟁이의 자질이 몸에 배어 있었다.3)
2) 自尊心으로 무장된 구두쇠
최승희가 자존심이 강한 것은 숙명 여학교에 다닐 때에 벌써 나타났다. 공부를 잘 한데다가 미인이고 정승 판서를 지낸 해주 최씨의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런 최승희는 일본의 제일 무용가가 되었고 나아가 세계를 누비고 다니면서 세계적 무용가가 되자 일본의 제일 무용가라는 명예와 한국 여자의 대표자라는 강한 자존심을 느낀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자존심은 8․15 해방이 되어 서울로 돌아왔을 때에 최승희를 친일파로 모는 사람들과 매스컴의 냉대들로 몹시 손상되었다. 그리하여 견딜 수 없는 모욕감이 생겨 그 여자에게 월북할 동기를 만들어 주었다.4) 최승희의 자존심은 북한 생활에서 한층 더 강하게 나타났다. “내가 세계적인 무용가”라는 말을 수시로 입에 올렸고 다른 무용가들과 공존하기를 거부했다.
이러한 자존심과 이기성으로 최승희는 김일성 주석에게 말해서 유일하게 개인 명의의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신설했다. 그때에 문화선전상이던 허정숙까지도 무시해 버릴 정도였으며, 그밖에 공산권 국가 순회 공연을 독점하고, 정치적 집단 활동을 무시하고 하여 안하무인인 데가 있었다.5)
안막-최승희 부부는 꾸준한 반려자로서 참다운 동지로서 또 사랑하는 부부로서 삶의 태도가 훌륭했다. 그러나 안막은 유명한 부인을 데리고 살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특히 북한의 문화선전 부장의 자리에 있을 때에는 아내 때문에 많은 타격을 받았다. 주로 외국 공연을 갈 때에 단원 선정 과정에서 간섭을 많이 하고 공연하러 갔다 온 뒤에는 후문이 좋지 않았다. 예컨대 당의 지시 사항을 어기는 수가 허다할 뿐만 아니라 언동이 불순하고 딸 안성희만 돋보이게 하고 하여 주위 사람들의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6) 한편으로 최승희는 돈 문제에는 무섭게 매정했다.
이와 같이 최승희가 돈에 궁색할 정도로 구두쇠가 된 것은 숙명 여학교에 다닐 때에 가세가 기울어 어렵게 살았던 것과, 동경 시절에 돈이 없어서 결혼 반지, 시계, 피아노 등을 전당포에 잡히고 그 돈으로 무용 발표회를 하던 것, 그리고 미국에서 무용 공연이 예정대로 진행이 되지 못해 호텔에서 나와 빈민들이 사는 아파트 한 칸을 빌려 살다가 마지막에는 흑인들의 토굴 같은 곳에서 살던 것 등 고통스러운 생활에서 뼈저리게 체험한 결과 때문이다. 철학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최승희는 돈이 없으면 죽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돈을 두고는 구두쇠가 되어 버렸던 듯하다.7) 그러나 이러한 최승희도 무용을 창작할 때에는 작곡비, 의상 제작비 해서 무용 작품 제작비는 물 쓰듯이 아끼지 않고 썼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8)
3) 마음 속의 저항심
최승희는 감수성이 뛰어나 안막이 말한 내용을 작품으로 소화하는 데는 천재적이었다.9) 이러한 감수성은 무용 작품 창작에서만 그 기능을 발휘한 것이 아니었다. 최승희의 일상생활에서는 한국 사람들을 깔보고 차별하는 일본인들의 행동으로 저항심이 부풀어진 사건들이 자주 있었다. 이는 정치적 안목을 가진 항일 행위라기보다는 자기를 모독한 데에 대한 반감과 감수성이 풍부한 성격이 민족의식으로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승희의 감수성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것이 친일 행동과 전혀 무관하지 않을 듯도 하다. 최승희의 행동에는, 예컨대 예절이나 사람을 부려먹는 방법까지도 일본적인 것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것은 열여섯살의 소녀 시절에 동경에서 살다가 일본 사람의 습관에 동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 여자는 동경이라는 현실의 고향과 서울이라는 상상의 고향을 가지고 살았던 절반은 일본인, 절반은 한국인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발언을 반드시 친일 행위로 규정짓기보다는 일종의 감정 표현으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최승희는 얼핏 보면 친일 행위를 하는 듯했으나 한국 사람이 일본 사람에게 앞서가는 것을 보면 한국 사람의 본성을 나타냈다.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하자 프라이팬을 가지고 춤을 추었고, 방송이나 신문의 인터뷰에서 “일본이 이겨서 즐겁다. 그러나 한국 사람이 이겨 주어서 더욱 즐겁다.” 는 말을 하기도 했고, 한국의 권투 선수 서정권이 일본 선수를 눕혀 이기자 그 사람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었고, 평양 축구 선수단이 동경에서 일본 축구팀과 시합을 하면 시합장에 나타난 한국팀을 응원했다.10) 이와 같이 최승희는 자기 나름대로 민족의식도 있었고 그 마음속의 저항심이 강했다.
4) 신비성과 사치
사람에 따라서는 종종 최승희에게서 일종의 종교적 환상 같은 것이 나타난다고 했다. 이를테면 스승인 이시이 바꾸가 제가 최승희를 보고 말하기를 “하느님이 아름다움을 창조할 때에 최승희를 모델로 해서 만든 것이 아닌가”했고, 다까다 세이꼬가 최승희를 보고 “신이 보낸 사람인 양 그이에게는 우리들과는 다른 신기가 있다”고 평하면서 “그이는 스스로도 무용 신격자로서 군림하는 자존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도 최승희의 그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최승희는 춤의 정신을 우리나라 무당춤에 비유하기도 했다. “춤속에 내가 있다”, “무속에 진정한 춤이 나온다”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성품 때문에 그 여자는 자기 예술을 독특한 자기 만족감 위에 세우고, 나아가서는 자기에게 특유한 개성미를 발휘하여 무대에만 올라가면 초인간적 표현으로 관중을 자기 몸 속으로 끌어당기고 말았다. 이러한 신비성과 황홀성의 춤을 보려고 사람이 운집하고 거기에 도취되었다.
최승희는 이러한 종교적 신비주의를 보통 사람들 앞에는 어지간해서는 안 나타내고, 마치 무당들이 굿당에서만 신비성을 보이듯이 대개 무대에서만 볼 수 있게 했다. 안무할 때에 절대로 사람이 보지 않는 데서 한다거나, 8.15 해방 후에 남한 땅에 있느냐 북한으로 가느냐를 결정하려고 무당굿을 하여 공수를 받았다거나, 일제말 중국 화북 지역 공연 때에 자기의 영감으로 위기를 모면한 것도 이 여자의 종교적 신비주의에서 나온 행동이라 할 수 있다.11)
예술가나 스타들의 특성은 예나 이제나 몸가짐이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최승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몸치장, 소지품 등이 사치스럽기 짝이 없었다. 외출할 때면 으레 의상은 그 시대에 가장 신식인 옷차림으로 하고 얼굴 화장을 진하게 하여 호화로운 최고 용모를 갖추었다. 무용가이면서 일본의 으뜸가는 모델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옷차림이나 장식품과 같은 것을 자문해 주는 미술가와 디자이너와 재봉사까지 단골로 두고 있었다. 일제말 일본과 미국의 전쟁에 돌입했을 때에 일본의 거의 모든 여자들은 한결같이 시국의 요청에 따라 이른바 “몬뻬이”를 입고 다녔는데 최승희는 그런 옷을 입지 않았고 동경 시내에 나갈 때에도 전차나 버스와 같은 것도 절대로 타지 않고 택시나 자가용을 이용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치스러운 생활은 어렵게 사는 북한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안막이 숙청된 후 찍은 최승희의 한복 차림은 너무나 초라하고 촌스러워 최승희의 몰락상이 이러한 의상에서도 나타나는구나 하고 느끼게 한다.
5) 남자 기질이 있는 거인
최승희가 자기만 돋보이게 하는 습성은 세계적 무희가 되는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이를테면 제자들에게는 일본 이름을 쓰게 하고 자기만 최승희라는 한국 이름을 쓴 것도 좋은 예가 되겠다. 또 최승희는 권위주의적 행동이 몸에 배었는데 이는 자기의 예술을 대단히 자랑스러워하는 자부심을 가졌던 것과도 연관이 될 것이다. 최승희의 이러한 권위주의적 행동은 북한에서 권세를 부리며 사는 동안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를테면 제자들에게 자기 발을 씻기게 하거나 어깨를 주무르게 하거나 앉을 때에 의자 수발을 들게 하는 것들이 그것이었다.12)
또 최승희는 함부로 언동을 하는 수가 많았는데, 대개 상대가 약자이기보다는 강자일 때에 더욱더 강하게 나타났다. 이를테면 “내가 이런 사람인데 네가 무엇이길래 이러느냐”하는 식의 감정적 행위로 나타났다. 공연하는 동안에 북한의 고위 간부인 당원이 최승희에게 뺨을 맞았던 소동이나 문화선전상 허정숙과 심한 충돌을 한 것들도 같은 맥락의 사건들이었다.
아무튼 최승희는 누구에게나 “내가 세계적 예술가”라는 것을 명분으로 앞세워 권위를 확보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정치계에서 상당히 높은 비판의 소리를 들었을 뿐더러 김일성에게서까지 비판을 받기도 했던 듯하다. 그 독재적이고 스스로를 우상화하는 행위가 표적이 되어, 최승희는 이른바 부르조아적 예술가, 불평불만하는 반당 행위자로 낙인 찍혀 혹독한 비판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로지 짐작이기는 하나, 최승희의 이러한 행위 때문에 그이가 숙청된 육십칠년부터 모든 예술에서 자기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많은 예술가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이른바 집체 예술이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한편으로 최승희는 성격이 오만하며 수다스럽고 이기적이어서 매사에 타산적이고 명예욕이 충만된 사람이라는 평이 있다. 매사에 모범적이거나 평범한 행동을 싫어했다. 지역주의, 국가주의마저도 좁은 생각으로 보았기 때문에 민족주의만 좋아했다. 세계 제일, 세계 정복, 세계 동포주의의 생각을 한, 세계인적 성품이 강한 여자였다. 그리고 그 생각은 벌써 21세기를 향하고 있었다.13)
3. 崔承喜의 예술적 열정
1) 세계를 넘보게 한 힘
최승희는 길게 뻗어 있는 일본의 국토를 북에서 남으로 왕래하면서 공연을 몇백회나 하여 그 명성은 가와바다 야스나리(훗날 노벨 문화상 수상자)가 말하듯 일본 제1의 무용가가 된다.14) 최승희를 세계적 무용가로 만들기 위해서 안막은 프롤레타리아 문학 활동을 중지하고 최승희 무용의 총지휘를 맡았다. 작가 생활을 하던 큰오빠 최승일과 학교 선생 노릇을 하던 작은오빠 최승오도 직업 생활을 그만두고 최승희를 도왔다. 그러나 최승희에게 있어 큰힘이 된 것은 일본의 최고 지성과 원로 예술가들이 참여한 최승희 무용후원회 발족이었다.15)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는 여운형, 송진우, 마해송, 손기정씨가 가담하였고 중국에서는 매란방까지 후원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최승희는 높은 산을 넘는 용사처럼 한 고개, 한고개를 넘어 고난과 찬사 속에서 세계적 무희의 자리로 올라가는 욕망의 장도에 올랐던 것이다.
2) 예술의 세습화
최승희는 자기 예술을 가족 중심으로 전수시키는 수단을 썼다. 이시이 바꾸는 자기 제자들에게 자기 성을 주어 누구나 할 것 없이 이시이라는 성을 쓰게 했지만, 최승희는 예술의 맥이 단순히 성을 주는 것만이 아니라 혈맥으로 이어져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딸에게 무용을 가르쳤고 제자 김백봉과 시동생 안제승을 강제로 혼인시킨 것이다.
그런데 최승희는 세습 무당처럼 이러한 혈맥의 전수 체계를 지나치게 신봉하다 못해 더나은 제자가 있어도 키우지 않고 무조건 자기 딸에게만 온갖 정성을 다했다(이러한 편파적인 일로 북한에서 적지않은 비판을 받았다). 일제 시대에는 자기 딸 이름이 안승자였는데 예명을 최승자라 했다. 이는 이시이 바꾸가 제자에게 자기 성을 준 것과 자기가 생각한 세습 체제의 혈맥을 통합한 전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3) 정치와 예술의 분리론자
최승희는 정치와 예술의 분리론자였다. 이 주장은 미국 공연때와 남미 공연 때에 자기를 일본의 스파이라고 한 말에 반발에서 비롯됐다. 유럽 공연 때에 프랑스는 정치와 예술이 구분되어 있다고 찬양한 바 있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사석에서 자주 당에서 정치와 예술을 구분하지 못하고 너무 이래라 저래라 한다고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16)
최승희는 정치와 예술은 분리돼야 한다는 것을 그 무서운 일본 군사 정권에 건의한 바도 있다. 그 시대는 전쟁 승리를 위한 국민 총력 시대였는데도 최승희는 비예술적인 정치무용보다는 일본을 소재로 하는 예술 작품을 하고 싶다고 해서 허가를 받아냈다. 그러나 최승희의 “정치와 예술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발언은 일본 군정에서는 통했으나 북한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무용은 검열을 받았고 당의 명령에 따라 무용 대본이 바뀌거나 표현 방식에서 압력을 받거나 한 것이다.
4) 崔承喜 집념과 욕망
최승희는 자기 예술에는 매우 엄격했다. 그리하여 공연 때마다 제자들에게 무대는 “최후의 결전장”이라는 말을 해 주었다. 아마 이러한 말이 오늘날 북한의 무용가들에게도 이어져 무대에 올라가는 것을 전투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최승희는 예술의 욕망 때문에 부모에게는 불효자가 되었다. 공연 때문에 아버지, 어머니의 임종 때도 가지 못했다.
최승희의 꿈은 우다이 샹카나 아르헨티나와 같은 민족 무용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 공연을 성공리에 마친 최승희의 눈은 좀 달라졌다. 이번에는 동양 발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춤은 북한에서는 주로 무용극 창작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이 최승희는 오로지 예술의 욕망을 성취하려는 무한한 야심과 전략가적 방법으로 혈투한 인물이었다.
4. 崔承喜 예술적 인기
1) 동양적인 매력
최승희는 1934년에 잡지 「레이죠가이」주최의 일본 여류 무용 대회에 출연하여 「에헤야 노아라」라는 한국춤을 추어 무서운 신인 무용가가 나왔다는 절찬을 받았다. 평범한 이 찬사는 최승희가 일본의 최고 스타가 될 것임을 예고해 준말이었다. 최승희는 그 뒤로 제일회 신작무용발표회 평에서 크게 절찬을 받고 뒷날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 가와바다 야스나리에게서 일본의 제일 무용가라는 선언을 받았다.
이시이 바꾸는 최승희의 인기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17) “인기를 경시하는 예술가가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마음을 알고 싶다. 인기란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최승희의 인기는 놀랍다. 저만큼 세상에 문제를 던져 준 것만 해도 유쾌한 일이다.”
최승희 인기가 절정에 이른 것은 긴자에 있는 일본 극장에서 행한 일본의 최고 희극 배우 에노모도 겐이찌 곧 속칭 에노겡, 브라운과 했던 삼인 합동 장기 공연 때였다. 관객은 둥글게 생긴 극장 주변을 세 바퀴, 네 바퀴를 돌면서 관람권을 사야 했던 것이다. 일본 평론계에서는 이 경이로운 공연을 보고 “춤으로 스타가 탄생한 것은 최승희의 경우가 처음이었다.” 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18)
그런가 하면 유럽인들은 오페라 극장이나 국립 극장과 같은 대형 극장에서는 주로 발레 무용만 보아 왔는데 일본 제일이자 동양에서 으뜸가는 조선의 미녀 무용가가 동양 무용을 공연한다는 것이 선전되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지도를 가지고 와서 최승희의 나라 코리아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면서 그 춤을 구경했다는 일화가 있다. 유럽 공연의 성공은 파리 공연의 성공으로 말미암았는데, 그것은 또 근본적으로 최승희가 솔로 댄서로서 체격과 예능이 완벽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성공은 미국, 중남미 공연의 흥행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 하겠다.
최승희는 미국, 유럽, 중남미 공연에서 수많은 신문과 많은 무용 평론가들에게서 세계적 무희로서 찬사를 받은 가운데 150회나 공연하였는데 이렇게 성공한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 대답은 필자가 생각하기에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로, 최승희는 솔로 댄서로 어느 누구보다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최승희는 천재적 표현 기술로 동양의 신비와 멋을 보여준 것이다.
세계적 무용가, 동양의 무희라는 명예를 얻어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에 최승희는 예술이 한층 상승했고 인기도 더 높아져서 차원높은 무용가가 되었다. 일제 시대 스타라 하면 무용에서는 최승희, 영화에서는 리 고오랑(이향란)이었다. 그러나 이 둘의 대중적 인기는 좀 다르다. 리 고오랑은 서민적이고 양적인 인기를 누렸다 한다면 최승희는 지식층의 인기를 누렸다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최승희의 공연장에는 외교관, 정치인, 회사 사장, 교수 말고도 작가, 화가들과 같은 예술가, 신문사, 잡지사 사람들이 오고 하여 관객의 폭이 넓고 관람자의 수준이 높았다.19)
2) 가련한 조선 여자, 희망을 주는 민족의 꽃
그런데 최승희의 인기는 나라에서마다 조금씩 달랐다. 일본 사람들에게서의 인기는, 그 여자가 식민지 출신의 가련한 조선 여자라는 것 때문에 일어난 심리적 연민과 그 춤이 일본인들이 보아온 일본 춤과 현저히 다르고 훨씬 더 아름다웠기 때문에 생긴 호의가 합쳐진 것이었다. 그리고 유럽인들은 최상의 조건을 갖춘 솔로 댄서가 동양의 신비로움을 보여준다는 데에 매혹되었다.
그러나 조선땅에서 최승희의 인기가 폭발한 원인은 또 다르다. 일제 식민지 억압 속에서 나라를 잃고 사는 우리 민족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일등을 한 손기정 선수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세계적 무용가가 된 최승희에게서도 긍지를 가질 수 있었다. 일제시대에는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 사람과 겨누어서 무엇에서나 이겨주면 그 사람을 영웅시했다. 국가와 나라가 없는 어둡고 절망적인 시대에 나라 없는 서러움의 분풀이를 해 줄 사람은 손기정 말고는 최승희 밖에 없었다. 따라서 최승희의 공연장은 일종의 대리만족이라 할 분풀이의 장소가 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 한국에서 누린 그 인기는 최승희로 하여금 첫째로는 민족의식을 되살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둘째로는 위안과 희망을 조선인들에게 주게 하였고, 셋째로는 단합의 기회를 가져다주게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 사는 교포와 중국에서 사는 교포들에게서 끈 인기는 그 열도가 더욱 더 강했다. 일본 공연에서 있었던 일이다. 1942년, 1943년 해서 두 차례에 걸친 제국 극장 대공연에서는 일이층에는 일본 사람과 외국인이 자리했고 조선인은 주로 삼층에 자리하였다. 최승희의 춤이 시작되자 뒷좌석에 자리한 조선 사람들은 한국말로 최승희를 성원하는 함성을 질렀다. 이 함성은 민족 의식이 담겨 있어 일본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함성이었다. 멋쟁이 할아버지의 입에서는 ‘얼씨구 잘한다’가 나오고 할머니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하여 모두들 고향에 온 듯이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최승희의 인기는 중국 교포 사이에서도 대단했다. 최승희는 1942년부터 몇 차례 주로 만주 지역을 돌며 중국 공연을 가졌는데, 이때의 상황을 최봉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최승의는 일제말에 교포가 많이 살고 있는 심양과 목단강 등지에서도 공연을 하였는데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이 길, 저 길을 통해서 이곳 주민들은 최승희를 ‘우리 민족의 꽃’, ‘세계적 무희’라고 불렀다. 최승희가 춤을 잘 추고 미인이라는 점도 있었지만 그토록 눈물을 흘리게 되고 감격해서 박수를 치는 것은 그 여자의 춤을 통해서 나라는 없지만 우리 민족은 살아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20)
5. 崔承喜 예술의 몇 가지 특징
1) 安漠 기획, 崔承喜 춤의 특징
최승희가 일본의 최고 무용가가 되고 나아가서는 세계의 무희라는 명예까지 누리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는 그 천재적 예술성에 있지만 뒤에서 수고한 남편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작품은 지역적인 고려를 해 공연하였다. 이를테면, 같은「보살춤」이라도 한국, 일본, 중국에서의 음악, 의상, 기교, 표현이 다 달랐다.21) 포스터, 유인물, 팜플렛과 같은 것은 최승희가 미인이었고 체격이 좋았기 때문에 이러한 외모가 강하게 나타날 수 있게 유명한 작가에게 부탁해 사진을 찍어 만들었다. 선전은 주로 신문 기사로 했다. 그리고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우선 한국 교포나 일본에 유학온 학생들에게 그 주소와 이름을 알아서 선전 유인물을 보내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최승희는 프로그램에서 무용 종목을 스무 가지에서 마흔가지를 소개할 수 있어 다른 무용가들과는 달리 장기 공연을 할 수 있었다. A․B․C․D해서 네 가지 종목을 공연했기 때문에 무용을 보는 관객들은 사람에 따라 자기가 보고자 하는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두번 보는 사람부터는 관람권의 요금이 할인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흥행술도 최승희 무용 공연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점이었다.22)
또 그때에 최승희만이 하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 사진 선전이었다. 아름다운 최승희의 무용 사진들을 공연 중간 휴식 때나 공연이 끝날 무렵에 입구나 매점에서 보통 다섯 장과 열 장을 한조로 해서 팔았다. 최승희는 이렇게 사진을 팔아 관객들이 그것을 간직함으로 자기 춤을 영원히 잊을 수 없게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연기간 선정에도 활용하였다. 예로서 1942년 동경 제국 극장에서 24회, 1943년의 23회의 연속 독무공연의 성공이 사진 판매와 관계가 있다.23) 최승희는 세계적 흥행사나 흥행 단체와 제휴를 하려고 했다. 그 유명한 흥행사 휴록을 잡은 데에도 그러한 목적이 있었다. 최승희가 미국, 유럽, 중남미 공연을 할 때에 그 나라의 국립 극장과 대극장에서만 공연을 백오십회를 한 것은 그이가 미인 무용가였고 일본, 동양의 최고 무희라는 선전 때문에 가능했다.
최승희가 무용을 시작한 것은 1926년이었다. 그리고 무용을 그만 둔 것이 1964년이었다. 그 기간이 37년 동안인데 공연 횟수가 2500회에서 3000회까지 되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때의 이러한 기록은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것이라는 정평을 가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 극장에서 두 번에 걸쳐서 시도한 장기 독무 공연 또한 전무후무한 세계 기록이라는 것도 잘 알려진 바이다.24) 그런데 괄목할 만한 것은 이러한 공연들 모두가 관객이 만원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 점 또한 최승희만이 가진 신화이다.
2) 동서양을 넘나든 작품들
최승희의 무용 작품은 315종목에 이른다.25) 그런데 최승희의 무용 작품은 시대의 흐름과 상황에 따라 변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데뷔했을 때의 첫 한국춤 작품은 민족성이 강하게 풍기는 「에헤라 노아라」였다. 이 작품은 흰옷을 입은 젊은 한량이 코믹하고도 명랑하게 추는 춤이다. 이 춤은 평화를 사랑하고 낙천적인 백의 민족 곧 한국인의 기질을 강조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는 최승희가 미국과 유럽, 중남미의 순회 공연을 한 때였다. 최승희는 그때에 “코리안 댄서”로서 공연했기 때문에 공연 작품도 몇 가지 동양 무용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한국 무용 작품이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의 최승희 무용 공연은 동양 무용, 한국무용, 일본 무용의 차례로 안배를 해서 한 것이었다. 최승희의 동양 무용은 주제가 동양의 전설, 불상, 벽화, 비극, 고전 양식을 중심으로 한, 고도의 문학성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었다.
최승희는 1946년에 북한에 월북하여 1947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의 작품 중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은 무용극 「해방의 노래」와 「반야월성곡」그리고 독무 작품「노사공」이었다. 1950년부터 1952년까지에는 최승희가 중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중국 희극 학원 무도반 교수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무용과 중국 무용을 균형있게 안배해서 공연을 하였다. 이때에 창작된 작품으로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중국의 경극 무용을 무대 무용으로 재정리한 여러 가지 무용들26)과 한국 무용인 「어머니」라는 독무 작품이었다.
1952년 말부터 1953년에 이르는 시기는 인민군 위문 공연을 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때의 작품은「전선의 밤」,「조국의 깃발」,「여성 빨치산」해서 주로 군가나 씩씩한 음악에 맞는 투쟁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나 1954년부터 1958년까지는 북한에서 최초로 천연색 영화로 만들어졌다는「사도성의 이야기」라는 무용극27)과「맑은 하늘 아래」라는 무용극 해서 두 작품이 나왔다. 이 작품도 혁명성이 있기는 하나 최승희는 김일성의 혁명 투쟁을 한번도 작품화하지는 않았다. 최승희는 1958년에 안막의 숙청으로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다가 스스로 대본을 쓰고 안성희가 안무한「옥련못의 이야기」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하고 무용계에서 완전히 제거되어 버렸다.
다음으로 최승희의 작품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첫째로 최승희의 작품은 세속적인 주제보다는 역사와 민족을 다루는 내용을 주제로 한 것이 많았다. 그러므로 한국춤이거나, 중국춤이거나, 일본춤이거나 춤들이 대개 민족적 배경을 깔고 있었으며 동양 정신을 강하게 풍겼다.
둘째로 최승희는 작품 이름을 조금씩 바꾸면서 무용 구성도 조금씩 달리하여 새로운 작품이 되게 하는 방법으로 그이 나름대로 개성이 있는 프로그램을 형성하였다.
셋째로 최승희의 작품은 시대적 환경과 공연 지역에 따라 거기에 맞는 무용 종목을 형성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최승희는 한 곳에서 생활한 것이 아니라 공연 위주의 생활을 하면서 작품 자체와 흥행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게 했음을 알 수가 있다. 어쨌든 작품의 성격이 감각적이고 감정적이어서 그 내용이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시각성이 강했다. 따라서 작품이 가지고 있는 철학적인 깊이가 그다지 없는 것이 예술성으로 보아 흠이었기는 하나 그 대신에 대중성이 강하여 대중들에게 친밀감을 안겨주었다.
3) 崔承喜 춤의 특징
최승희는 다른 무용가들에 비해 음악적인 무용가라는 평을 자주 들었다. 무용 창작에서 반주 음악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반주 음악하는 사람을 엄선하고 우대하여 그이와 함께 생활을 하기가 예사였다. 이렇게 최승희는 반주 음악에는 많은 투자를 했다.
최승희는 이십년대에는 레코드 소리나 피아노쯤의 반주로 춤을 추었는데 유럽에 건너갈 무렵부터는 가야금, 피리, 장고와 같은 악기 연주가 따랐다. 그러나 사십년대부터는 한국 악기인 삼현육각으로 악기 편성을 하여 공연하고 동양 무용이나 일본 무용에는 해당 고유 악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김일성 수령과 나눈 면담에서 최승희는 무용극을 개발하여 한국 발레를 민족 무용으로 정립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평양최승희무용연구소가 신설된 배경에는 최승희의 이러한 커다란 목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최승희는 남편 안막이 평양음악대학의 초대 학장이 되자 “이때다”하고 우리나라 악기를 개조해서 오케스트라로 편성해 달라고 했다. 안막은 이 말의 뜻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곧 악기 개조 작업을 실시하였다. 그래서 나온 것들이 오늘에 나온 개조된 민족 악기이다. 최승희가 우리나라 악기를 개조하여 오케스트라 편성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에서였다.28)
우선 첫째는 종래의 삼현육각 편성만 가지고서는 음향이 너무 약하여 대극장, 대무대, 큰 무대장치, 많은 사람의 등장과 같은 형상과 조화를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삼현육각 연주의 음색은 흥과 슬픔은 표현할 수 있지만 다양한 감정과 표현으로 극적인 예술성을 나타내기에는 모자란다는 점이이었다.
셋째는 무용극은 적어도 한 시간에서 세시간까지쯤 소요되는 예술이고 그 자체가 단순히 우아하거나 슬프거나 한 정서적인 면뿐만 아니라 희로애락을 모두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연주법 또한 다양해야 하고 작곡한 곡을 연주해야 하기 때문에 악기가 과학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승희는 평소에 우리나라 국악기의 발달 없이는 한국 무용의 발달도 없다고 주장한 사람이다. 또 음악적으로 동서 음악을 비교할 수가 있었으며 악기의 연주도 얼마쯤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반주 음악에는 몹시 예민하고 까다로우며 엄격한 사람이었다.
최승희의 단발머리는 안막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최승희의 특징을 살리려고 머리 모양을 고정시키도록 조언한 것이다. 또 솔로 댄서인 그이가 머리에 쓴 관을 신속히 쓰고 벗을 수 있게 하자면, 또 수시로 가발을 하자면 단발이 필요했다. 최승희의 무용복에서 특징적인 것은 1~2분에 갈아 입을 수 있는 특수한 무용복의 제작이라 할 수 있다.
최승희의 무용은 삼십년대 초에는 현대무용 위주로 창작됐기 때문에 그 기교가 이시이 바꾸 계통의 현대무용 기교가 주축이 되었고, 삼십년대 후반부터는 비로소 한국 춤의 기교가 나오기 시작했다. 최승희 무용의 기교는 기본적으로는 이시이 바꾸의 현대무용 기본과 이시이 연구소에 강사로 나온 고바야시 슈사꾸에게 배운 ‘리드믹’이 주축이 되었고 한국 무용은 한량들이 가락에 맞추어 흥겹게 어깨춤으로 추어 멋을 부리는 이른바 허튼춤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춤에 따라서는 전통 춤동작을 넣어서 안무한 것도 있었다.
최승희의 한국춤은 흥에서 멋으로 이양되는 데에 기교의 핵심이 있으므로 섬세한 동작은 없으나 활달하고 힘이 넘쳐 흐르듯이 역동적인 동작이 멋들어지게 전개되었다. 전통적인 한국춤에는 전형화된 춤사위가 있는데 최승희가 추는 한국춤에는 그런 전통 춤사위는 적은 편이나 그 대신에 서정적인 동작과 변덕스럽고 코믹한 동작, 그리고 낙천적이고 풍자적인 표현 동작들이 나왔다.
최승희가 세계적 무희가 되고 대중적 인기를 얻은 중요한 요인 하나는 무용 연기이다. 곧, 한 사람으로서 몇천명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는 신기한 표현력이라고 할 수 있다. 최승희는 무대에 올라가면 팔짓, 어깨짓, 허리놀림들로 넓은 무대 공간을 꼭 차게 했다가 물 흐르듯 흐르기도 하고 물결치듯이 격해지기도 하고 하여 그 한사람의 움직임에 관객들이 완전히 압도되어 버렸다.
그러나 최승의 무용 기법에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것은 바깥 형태로 잘 나타나지만 내면적인 섬세한 기법은 홀대되고 춤속에 정서나 모양은 강하게 나타나지만 다양한 선이 없었다. 또 우리나라 춤의 춤사위를 그 멋진 표현으로 승화 시키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승희의 눈은 관객들을 빨아들이는 흡인력이 있었다. 그 눈빛은 몹시 영롱하고 총명하여 놀랍게도 잘 관객들의 영혼을 빼앗아갔다.
최승희 무용의 안무와 구성은 1930년부터 1945년까지에는 솔로 무용의 것이었고 1947년부터 1967년까지의 묵한에서는 무용극 형식과 군무에 따른 것이었다.
최승희는 무용 안무를 어느 누구도 볼 수 없는 방에서 혼자 했다. 최승희 안무의 특징은 음악에 맞추어 치밀하게 동작을 맞춰 가는 것이 아니라 최승희의 움직임에 반주가 따라 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안무는 핵심적 동작만을 창작해 표현적 분위기를 정하는 안무라 할 수 있다. 최승희의 무용이 미완성의 신선한 춤이라는 평은 이러한 안무의 미학에서 나온 것이다.29)
최승희는 관객 2700명을 수용한다는 동경 제국 극장에서 24회와 23회 연속 독무 공연을 시도했다. 이러한 장기 공연은 초인간적 체력이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런데 최승희는 이시이 바꾸 연구소 시절에 하루에 열다섯 시간을 뛰었던 강인한 체력과 인내력이 있어서 이 공연을 해낸 것이다. 이 여자는 이 공연에서 또 놀라운 시도를 했다. 그것은 1분 동안에 의상을 갈아입고 공연하는 형식이었다. 이러한 형식을 쓰게 된 이유는 관객들의 지루함을 덜고 그 시선을 무대로 끌어모으는 데에 있었다.30)
최승희의 무용 형식은 북한에서 펼친 무용극에서는 달라진 것이 발견된다. 그것을 자기가 생각한 한국 발레, 또는 동양 발레라는 형식의 민족 무용극을 정립하면서 그 나름대로 창조하려고 노력한 형식이었다. 그러나 최승희 무용의 근본적인 형식에는 몇 가지 특색이 있다. 이를테면 최승희 무용은 대체로 음악을 시각화한 춤이라 할 수 있다. 작품 구상으로 보아서는 음악의 형식을 빌리거나 연극적 형식을 흡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무용은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느낌이 강하여 내면적 깊이가 있기보다는 그 움직임이 다이나믹한 특징을 가졌다.
최승희는 처음에는 한국춤이 기생들이 남자들의 술좌석에서 춘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 혼이 없다고 보고 이러한 춤보다는 농민들이 일하면서 추는 허튼춤을 받아 들였으나 한성준의 춤을 조사한 후부터는 기생들의 고전무용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혼을 집어 넣어서 새로운 한국춤을 창조한 것이다. 그러니까 최승희의 한국춤은 서구적 미학의 한국적인 미학을 접목한 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최승희는 북한에 있던 1954년부터는 본격으로 무용극에 손을 댔으니 이는 한국적 미학에 서구적 미학을 접목하는 과정이었다 하겠다. 그러나 당은 그이의 춤을 복고주의 무용이라고 배격했다.
6. 崔承喜에 대한 평가
1) 두 가지 고정관념
근대 무용의 선각자이고 세계적 무용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승희의 역사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따라 다닌다. 긍정적인 면은 우리나라 근대무용을 주도해온 세계적 예술가라는 점과 민족의 자존심을 살려준 민족의 꽃이었다는 사실이고, 부정적인 면에서는 최승희는 친일파였고 월북예술가라는 점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최승희가 일제 시대에 친일 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근원적으로 우리 민족이 나라를 잃어버리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 땅에서 살았기 때문이고 최승희가 월북하게 된 것도 우리 민족의 비운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는 식민 통치, 분단, 전쟁, 이념,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부대끼다가 스스로 몰락한 예술가인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의 평가는 이러한 문제가 아니고 최승희의 무용은 무엇인가를, 그 사람이 추구했던 무용이 역사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를 따져보고, 그 사람이 추구했던 무용의 이상이나 주장 같은 것이 우리 무용계에 기여한 바가 크다 하면 그것을 남․북 무용계에서 부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2) 근대 한국 무용에 남긴 발자국
최승희는 우리나라 예술사(무용사)에 기록되어야 할 업적과 공적을 세운 사람이다. 최승희가 우리나라 무용 발전에 어떠한 혁신적인 일을 했는지 살펴보면 아래의 서술과 같다. 일본 무용은 의상을 통한 표현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육체를 내놓고 춤추는 무용가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최승희는 일미터 칠십이라는 좋은 체구에 미인인 여자로 과감하게 반나체로 춤추는 작품을 만들어 공연한 것이다. 이와 같이 최승희는 이제야 볼 수 있는 육체 예술을 70년 전에 벌써 시도한 것이다.
흔히 우리나라 근대 무용사에서 배구자가 창작 무용의 선구자로 인식되지만 따지고 보면 한두 작품을 냈을 뿐 그것이 무용사조를 바꾸어 놓을 정도는 아니었다. 따라서 엄격히 말해 창작 무용의 씨를 이 땅에 뿌린 사람은 최승희라 할 수 있다.
북한에서 한 활동에서 주목되는 것을 최승희가 세계 순회 공연에서 깨달았단 동양 발레의 정립이라는 큰 이상을 실천해 보았다는 것이다. 이른바 조선 민족 무용극이 그것이다.
최승희가 우리나라 무용, 특히 조선 민족 무용극을 발전시키려고 우리 악기의 개조와 우리 악기를 이용한 오케스트라 편성을 추진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오늘의 북한 민족 악기가 나왔고 이러한 전통 악기 개조 운동은 한국에서도 요즈음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들이 앞으로 좋은 결실을 맺는다면 이 일을 최승희가 먼저 시작했음이 앞으로 큰 공적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최승희의 근대 한국춤은 일제 시대부터 계속해서 젊은 무용가들에게 받아들여져 그것이 교육계말고도 국립 무용단이나 직업 무용단 그리고 무용 콩쿨 대회에서 이른바 신한국 무용이라 해서 전파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보급된 최승희의 신한국 춤은 약 120여 종류의 작품이 있으며 중요 작품으로는 일제시대의 것으로「천하대장군」,「화관무」,「화랑의 춤」,「가면무」,「봉산 탈춤」,「장고춤」,「춘향」,「산조」,「초립동」,「신노심불노」,「에헤라 노아라」,「검무」,「무녀무」,「즉흥무」,「승무」,「아리랑」,「민요조」들이 있었고 북한에서 창작한 무용으로는 주로 김백봉, 전황, 한순옥 들에 의해 「화관무」,「농악무」,「봄처녀」,「목동과 처녀」,「부채춤」,「동심」,「꼭두각시」,「장검무」,「물동이춤」들이 보급되었다. 그리고 오늘의 북한 춤으로 이어져 있는 최승희의 춤은「샘터에서」,「약수터」,「향발무」,「쟁강춤」(「무녀무」의 변형),「무지개춤」,「목동과 처녀」,「사당춤」(삼인무) 들이고, 다섯 종류의 무용극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작품에서 우리나라는 물론 오늘의 북한에서도 최승희의 춤을 지금도 많은 무용가들이 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3) 세계가 알아준 동양 춤꾼
최승희는 미국 공연을 먼저 하고 유럽, 중남미를 돌아다니면서 한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서양 사람들에게 코리안 댄서 최승희가 추는 한국 민족의 춤을 보여주고 다녔다. 여러 나라의 국립 극장과 대극장에서 한 공연이 모두 150회나 되었는데, 그 결과로 여러 나라의 무용 평론가와 신문이 동양의 무희, 세계적 무희로서 찬사를 해 주었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때에 동양, 서양을 막론하고 한 무용가가 이처럼 세계 언론들의 절찬과 열렬한 환영으로 일관된 경우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오늘날에도 개인 무용가가 외국의 국립 극장 진출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70년 전의 최승희는 그 일을 해냈다는 것이다. 그만큼 세계에서 그 춤을 인정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최승희가 세계적 무희로 인정받게 된 공연은 1939년 12월 28일부터 31일까지 나흘 동안 미국 뉴욕 세인트 제임스 극장에서 열린 홀리데이 댄스 페스티발에다. 최승희는 아메리칸 발레 카라반 (후에 뉴욕 시티 발레단), 마사 그레이엄과 함께 그 대공연에 참가했다.31) 그때의 미국 최고 무용단과 같이 공연했다는 것은 미국의 예술계에서 최승희를 동양 최고 무용가로 인정한 증거가 된다. 사실인즉 1938년부터 1940년까지 삼년 동안 세계 순회 공연을 했을 때에는 세계 무대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한 솔로 댄서는 최승희와 크로이즈베르크 밖에 없었다.32)
이와 같이 최승희는 우리 민족의 딸로는 최초로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경이로운 공연을 했고 동양 무용을 내세워 서양 무용에 도전했으니 누구보다 더 앞서가는 예술 사상가였다. 최승희가 동양 무용을 내세운 것은 서양 사람들의 관심을 모아 스스로 세계적 무용가가 되고자 하는 욕심과 무관하지 않았겠지만 동양 무용의 세계화를 이슈로 내세운 셈이다.
최승희의 세계적 활동 중에서도 중국에서 했던 경극 무용 정립 연구는 세계 무용 역사의 차원에서도 높이 평가할 만한 공적을 남긴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최승희는 1951년부터 1952년까지 이태 동안 북경에 있으면서 중국 경극 지도자들에게 원시 그대로 남아있는 중국 가무극을 무대 예술로 정리하는 대책과 방법을 제기하였다. 이렇게 하여 경극 연기의 춤 구석구석에 최승희가 체계화시키고 예술적으로 다듬어 놓은 무용동작이 있음을 그때에 같이 일을 했던 메이란팡(梅蘭芳)이나 그밖의 경극인 원로 무용가들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오늘날 중국의 경극이 세계적 무대 예술로 각광을 받고 있다고 볼 때에 최승희의 이러한 작업은 세계 연극이 된 경극의 변천 역사에 기록해 두어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본다. 3년간의 유럽 공연 후 일본 제국극장에서 24회 연속 독무공연은 명실 공히 개인 공연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긴 공연으로 기록되었으며 이때의 한국 교포들은 이 공연에 많은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33)
7. 결론
최승희는 한마디로 전설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그 평가는 흑백의 논리로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최승희라는 인물을 놓고 생각하면 그녀는 친일적 인물, 월북예술가라는 약점을 가지고는 있지만, 좀도 깊에 추적해 보면, 일상생활이나 예술을 하는 동안에 노출된 행각은 반일 반사회주의적 행위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는 등 위선적인 면이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의식적으로 정치를 이용하기는 했지만, 그 자체는 모두 예술에 대한 광기(狂氣)에서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 보면, 최승희는 분명히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녀는 분명 우리민족의 사기(士氣)를 올려놓았고, 썩어있는 기생춤에 민족적 정신을 넣어서 예술무용으로 승화시켰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무용을 위해 치열하게 예술혼을 불태우는 열정을 보였으나 결국은 민족비극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최승희는 연구하면 할수록 그녀는 전설적인 인물답게 많은 점에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여전히 남아있음을 느낀다는 점이다. 여기서 최승희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의 일면들을 몇가지 예를 들어 보기로 한다.
① 이름에 있어 일본발음 “사이쇼오끼”의 해석과 창씨개명문제, 의상에 있어 양장하거나 한복만 착용한 이유
② 노벨상 수상자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를 비롯하여 일본의 명사와 최고의 예술가들, 좌파적인 개조사(改造社) 사장 야마모도 노리히코(山本實彦), 한국의 여운영, 송진우 등이 참여한 최승희 후원회의 정체.
③ 세계순회 공연때 지역에 따라 재페니스 댄서, 또는 코리안 댄서로 행세한 뒷이야기.
④ 이른바 일본군의 문시에 나타난 특원과 공연내용
⑤ 태평양 전쟁 종전후 이시이 야에코(石井八重子)의 증언과 노가(露木)라는 사람의 말을 인용해 아사이 신문(朝日新聞)에 발표한 ‘최승희 일본탈출’이라는 기사의 내막.
⑥ 8.15해방 후 안막과 최승희 귀국의 수수께끼
⑦ 친일파를 싫어하는 매란방(梅蘭芳), 주은래(周恩來) 수상, 정율성(鄭律成), 모택동(毛澤東) 시를 중심으로 작곡활동을 한 한국인)과의 친교배경.
⑧ 공산당원이 아닌 특권과 개인 우상화 배경.
⑨ 최승희를 숙청한 배경
⑩ 김일성(金日成) 수령의 회고록에 최승희가 다루어진 이유.
⑪ 김대중 대통령 방북시 만수대예술단이 보여준 최승희와 안성희의 작품, 그리고 복권소식.
최승희가 우리나라 근대무용의 선구자로써 많은 활동과 업적을 남겼음에도 위에서 제시한 문제들은 아직 풀리지 않는 사항들로 남아있다. 이는 분단이라는 현실상황이 안겨준 최승희 연구의 한계이기도 하다. 나의 최승희 연구가 7여년 동안 자료들 모으고 주변인 증언을 들으며 그녀의 생애와 예술적 행적을 추적했음에도 이와 같은 문제는 어쩔 수 없이 풀리지 않은 의문으로 남고 말았다. 이러한 의문이 있다 해도 최승희가 우리나라 근대무용의 가장 앞선 선구자라는 사실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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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병호, 『춤추는 최승희, 세계를 휘어잡은 조선여자』, 뿌리깊은 나무, 1995.
2) 조택원 증언(무용가)
3) 안보승 증언(안막의 형)
4) 안경호 증언(미국 CBS방송 서울 지국에 관계한 영화인)
5) 장문해 증언(북한에서 최승희 제자)
6) 안제승 증언(안막의 동생)
7) 정병호, 앞의 책, p.149.
8) 김백봉 증언(최승희와 동서간)
9) 안제승 증언(안막의 동생)
10) 손기정 증언(최승희 친교인사)
11) 지영희 증언(최승희 무용반주 국악인)
12) 장홍심 증언(한성준 제자)
13) 다가시마 유사부로 증언(崔承喜 저자)
14)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 “무희 최승희론” 문예 11호, 1939.
15) 정병호, 다가시마 유사부로 공저 일본어판 「세기의 미인 무용가 최승희」, MT출판사, 1994, p. 167.
16) 일본 아사히 신문, 1940년 12월 14일
17) 이시이 바꾸 “무용은 마음의 창” 최승희 팜플렛
18) 미쓰요시 나쓰야와 오자기고오지의 대담
19) 오자와 준코 증언(조택원의 춤파트너)
20) 최봉성 증언(중국 조선족 무용 평론가)
21) 정병호, 『춤추는 최승희』, p.380.
22) 오마사 부로(大庭三郞)최승희 무용 조명가 증언
23) 군지 마사가쓰(郡司正勝)무용학자 증언
24) 다가시마 유사부도(崔承喜 저자) 증언
25) 정병호 앞글 p. 382.
26) 상사오원(尙小雲) 중국 경극 배우, 그는 북경에서 최승희와 함께 경극 무용을 체계화 했다.
27) 정준재 “첫 천연색 예술영화 ‘사도성의 이야기’를 끝내고” 조선 예술 1월호 pp.106~109.
28) 정병호 앞글, p.270.
29) 김백봉(최승희와 동서간인 최승희 제자)증언
30) 군지마사가스(郡司正勝)무용학자 증언
31) 공휴일의 페스티벌 댄싱 타임즈 1939년 12월 29일
32) “최승희의 동양 무용에 대하여” 최승희 장기공연 팜플렛 제국극장
33) “최승희의 새로운 시도 데이고꾸 극장에서 장기 독무 공연” 아시히 신문(朝日新聞)1942년 12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