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예술가의 열정을 곰 삭여줄 촉매환경 마련돼야
이건청_한국시인협회 회장 / 한양대 명예 교수

젊은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의 죽음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순수 예술인들이 처해 있는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요즘 같은 대중화 시대에 순수 예술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나라에서 힘든 길을 가는 예술가들이 사회 안전망 속에서 창조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2008년에 발표된 어느 자료에 따르면 드라마 <에덴의 동쪽>(MBC)에 출연한 송승헌은 회당 7000만원을 개런티로 받았다고 한다. 배용준은 <태왕사신기>(MBC)에 출연하면서 회당 2억5천만 원을 받았다고 한다. 얼마 전에 작고한 젊은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이 “남는 김치와 밥이 있으면 조금 나누어 달라”는 전언



이건청 한국시인협회 회장

을 남기고 운명하였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다. ‘남는 김치와 밥’이 드라마 1회 출연료 2억5천만 원과 크로스되면서 우리를 절망에 빠지게 한다. ‘남는 김치와 밥’이 이 나라에서 예술 창조에 헌신하고 있는 순수 예술가들이 당면하고 있는 좌절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꽃말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 사루비아에게 / 혹시 병상에 드러누운 내가 / 피가 모자랄 것 같으면 / 수혈을 부탁할 거라고 / 말을 조용히 건넨 적이 있다 / 유난히 짙푸른 하늘 아래에서가 아니었는가 싶다 / 사루비아, 수혈을 부탁해.> -신현정「사루비아」

병상에 누운 시인은 ‘사루비아’ 꽃을 바라보면서 ‘수혈’을 부탁하고 있다. 신현정 시인은 외로움과 가난 속에서 천진의 세계를 노래함으로써 지고지순의 감성을 창출해 보여주고 있다. 한국어로 이뤄낸 탁월한 시적 업적의 시인은 ‘수혈’ 비용조차 마련하지 못한 채 이승을 떠났다. 지금도 이 나라엔 일신의 영달을 버리고 예술에 대한 순교자적 열정으로 하이얗게 밤을 새우는 젊은 열정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헌신이 쌓이고 썩어 비옥한 거름이 될 때 한 나라 문화발전의 튼실한 초석으로 놓이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의 뜨거운 열정을 곰 삭여줄 촉매 환경이 전혀 마련되어있지 않다는 데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라는 책이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그렇다. 무엇이 정의인가. 나는 작은 셋방에서 예술에의 열정을 불태우며 투병도 했을 젊은 지성의 죽음을 보며 이 시대의 ‘정의’가 무엇인가를 묻고 싶은 심정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등이 올바르게 분배되고, 분배된 합당한 몫이 개인 모두에게 골고루 나누어지는 사회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엔 소위 ‘정의’라는 용어가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차용되어 쓰이면서 개인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다.

드라마 1회 출연료 2억5천만 원과 시나리오 원작료 100만 원 혹은 200만 원은 어떤가? 이것도 ‘정의’인가? 참으로 위대한 예술은 백금처럼 정련된 정신의 갈피에서만 창출되게 마련이다. 모든 가치를 눈앞의 명성이나 재화로만 치환하려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싸움꾼의 나라가 되어버린 감이 있다. 끼리끼리 집단을 형성하고 그들의 욕구를 집단의 목소리로 외친다. 그래야만 활로가 열린다고 믿는다.

그러나, 안 보이는 쪽에서 예술을 떠받치고 있는 진짜 예술가들은 자기 자신 속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가 있다. 이들은 집단을 형성할 능력이 없으며, 본질적으로 집단을 혐오한다. 따라서, 이들은 집단의 목소리로 외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들은 소외의 나락으로 떨어져가고 있으며, 이들을 감싸 안아 주어야할 국가는 뒷짐을 지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이들을 소중한 존재로 발견해줄 것이며, 예술 창조에 헌신하고 있는 노고에 걸 맞는 처우를 마련해 줄 것인가.

이 나라에 ‘정의’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정의 사회’란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배려되고 격려되는 사회를 말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 나라에도 문화예술발전을 담당하는 부서들이 여럿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당장 눈앞의 치적을 위해서 쓰고 있는 막대한 비용의 얼마만이라도 ‘안 보이는 현장의 예술가’들에게 할애되어야 한다. 안 보이는 자리에서 예술 창작에 전념하고 있는 ‘현장 예술가’들을 위한 후원 시스템의 마련이 시급한 시점이다.

2011. 04.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