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좋은 우리춤은 춤을 ‘춘다’라기보다는 ‘추어지다’ 라고 하는 것이 좀더 알맞은 표현이라고 봅니다. ‘추어지다’는 수동태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그야말로 ‘저절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부러 크게 꾸미지 않은 것이란 뜻이 있겠고, 그래서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이라는 의미를 떠올리게 합니다. 무위(無爲)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자연이 그러하므로 그러그러하게 흘러서 그리 되어진 것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합일(自然合一)로서 자연이 운행되고 있는 모습을 닮은 상태의 것을 뜻하지요.
무위적인 자연합일은 우리의 자연주의입니다. 그것은 무위는 무위이되 ‘인위(人爲)적 무위’, 즉 애써 하지 않는 ‘적극적 무위’입니다. 춤추는데 추어지는 것으로 나아가 춤의 ‘없음’으로 ‘있음’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지요. 노경(老境)의 세계가 그러할 것입니다. 그것은 또 ‘춤이 마땅히 그러한’ 춤의 본체를 추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사라지다’라고 하는 것은 형체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인데, ‘살다’, ‘살아가다’라는 말의 수동태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삶을 살다, 살아가다의 능동적인 것을 수동태로 하면 ‘살아지다’, 곧 ‘사라지다’라는 겁니다. 50대 후반에 이른 윤후명씨가 어떤 소설집을 냈는데 그 주제가 그러합니다. 삶의 근원적인 세계를 천착하는 소설인데, 바로 ‘사라디다’라는 우리말을 근저로 해놓고 삶에 본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수동형으로 살아감, 사라지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사는 삶인데 사라지는 삶을 산다는 것이 가능하다면, 추는 춤인데 추어지는 춤을 춘다는 말도 가능하겠지요.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인데, 그 어떤 하지 못할 바도 없다는 거지요(無爲而無不爲).
“사람은 왜 춤을 추는가”는 “사람은 왜 사는가”와 같은 질문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살아있기에 춤추는 것이지요. 죽은 것은 춤출 수 없습니다. 여기서 ‘살아있음’의 의미 폭만큼 춤의 의미 폭이 생겨납니다. 춤은 여지없이 삶의 자기충일이고, 삶의 궁극을 향한 도정입니다.
미국 현대춤의 대모라 일컫는 마사 그레이엄은 절창이라 할만한 한 마디를 했습니다. “내가 춤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춤이 나를 선택했다”입니다. 이는 춤에 대한 대단한 자긍심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춤의 ‘부름’에 이를 받잡고 그리된 것입니다. 지극한 겸양의 자긍심이지요. 이렇게 해서 춤은 ‘추어진다’라는 단순한 수동태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은 저절로 자기 본연의 모습 그대로 자기 생긴대로 욕망하는 바를 제 마음대로 제 멋대로 해도 큰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고(從心所慾不踰矩), 아무 데도 걸림이 없는 사람은 삶과 죽음에서 한길로 벗어난 (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 진속일여(眞俗一如)의 인위적 무위의 경지이지요.
채희완
현 한국춤비평가협회 회장. 부산대 명예교수, 〈(사)민족미학연구소〉 소장, 〈부마항쟁기념사업회〉 이사, 〈창작탈춤패 지기금지〉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 『공동체의 춤 신명의 춤』, 『한국의 민중극』(엮음), 『탈춤』, 『한국춤의 정신은 무엇인가』(엮음), 『춤 탈 마당 몸 미학 공부집』(엮음), 『지극한 기운이 이곳에 이르렀으니』 등을 펴냈고, 그밖에 춤, 탈춤, 마당극, 민족미학에 관련된 논문과 춤 비평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