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미술관은 박물관이다
지난 해 10월부터 몇 달간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 50주년 기념전이 열리고 있다. 1969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경복궁에서 처음 개관한 것을 기념하는 전시회다. 1973년 경복궁의 국립현대미술관은 덕수궁으로 이전했다가 다시 86년 과천으로 이전하였으며, 98년에 덕수궁에 분관을 설치하였다. 2013년 경복궁 건너편에 서울관을 열고, 2018년에는 청주에 분관을 열었다. 69년 이후 50년 동안 국립현대미술관은 모두 4곳에 설치되었는데, 과천·덕수궁·서울의 3곳을 연결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회는 이번 50주년전이 처음이며 그만큼 의의가 있다. 이번 전시를 관람하려면 서울과 과천, 3곳을 오가는 발품을 들여야 해서 웬만한 성의가 아니면 다 보기도 힘들며, 그래서 좀 이색적이랄 수도 있겠다.
이번 전시회는 그 이름을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라 붙였다. 이름 그대로 한국 사회에서 미술이 보여온 궤적을 조망하는 전시회다. 광장은 공개적·사회적·공공의 무수한 활동이 수행되는 곳으로서 이 전시에서는 사회를 은유하는 포괄적 용어로 적용된다. 여기서 1900년이라는 설정은 덕수궁 분관이 1900년 이후의 한국 근대 미술 작품들을 소장해왔고 또 이번 기념전이 국립현대미술관의 1969년 개관을 단서로 하므로 그렇게 연도가 설정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광장〉전은 제1부(1900-1950, 덕수궁관), 제2부(1950-2019, 과천관), 제3부(2019, 서울관)로 동시에 진행되었다.
〈광장〉 서울전 © 2020 김채현 |
특히 서울관의 제3부는 2019년 한 해를 주제로 하는 파격을 보였다. 전시 시기로 보아 2019년 단 1년 동안의 국내 미술 활동을 조망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어서 왜 2019년이라 했는지 의문부터 낳는다. 전시를 보고 의문을 풀 수밖에 없는데, 사진, 영상, 설치 작품만으로 〈광장: 미술과 사회 2019〉은 구성되었다. 여기서 이미지들은 일례로 캐리어를 갖고 해외나 멀리 가려고 집을 나선 여러 여성의 무표정하되 긴장된 포즈를 담은 대형 독사진들이 개인과 사회 사이의 애매한 관계를 편치 않게 드러내는 경우가 대변하듯이 2019년 오늘 한국에서든 다른 나라에서든 개인과 사회 공동체 사이에서 흔히 겪고 감당하며 감당해야 하는 여러 관계들을 작가들의 시선으로 제시하였다. 다시 말해 제3부를 채운 것은 2019년의 미술이 개인주의의 시각에서 광장(그리고 공동체)에 대해 던지는 공론(公論)들이다.
〈광장〉 과천전 © 2020 김채현 |
나의 관측과 경험으로는, 한국에서 미술품이 사회를 의식하고 발언하거나 사회를 주제로 형상화한 것은 크게 보면 1980년대 이후의 일이다. 그 전에 사회를 주제로 형상화한 일부 미술은 한국전쟁 이후 용공과 불온을 빌미로 억압받기 일쑤였으며, 또 1960년대 들어 사회를 의식한 일부 전위미술인들의 행동은 당대 미술계와 한국 사회에 팽배한 보수적 관점에 의해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그러므로 사회적·공공의 활동이 수행되는 곳으로서의 ‘광장’ 개념이 미술사적 맥락에서 한국 미술에 제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1980년대 이후의 일로 보인다. 그 한 예로서, 익명의 사람들이 철새 떼 모양으로 엄청난 군집을 이루는 형상이 광장에 운집한(또는 광장에서 행동하는) 그것을 명백히 연상시키기도 하는 이응노의 탁월한 〈군상〉이 미술계에 알려진 것도 1980년대 중반의 일이다. 그 이전 시대 미술에 광장 개념이 적용된다면 그것은 그 시대 미술의 배경으로서 또는 매우 은유적인 차원에서일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의 3곳 전시회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었다.
〈광장〉 덕수궁전 현수막, 왼쪽에 이응노작 〈군중〉이 전시되어 있다 ⓒ 2020 김채현 |
1900-2019년 사이에 한국 미술이 축적한 것은 방대할 테지만, 이에 비해 이번 전시의 중추를 이룬다 할 제2부에서 주마간산 식의 전시를 본 것 같아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지난 120년 동안의 미술 흐름 가운데 이번 전시가 ‘광장’의 의미를 탐색해본 데 의의를 둔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면 아쉬움은 다소 덜어질 것 같고, 나름 가치를 갖는 전시회일 것은 물론이다. 이번 전시에서 특히 눈여겨 볼 바로서, 전시회는 각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해당 미술관의 학예실이 구성하였다. 미술관이 특정 작가나 작품을 알리는 차원을 넘어 일종의 미술‘박물관’ 역할을 한다는 점을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에서도 쉽사리 감지할 수 있으며, 때문에 공공 미술관에서 소장품의 역할은 가히 절대적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영문 표기에도 등장하는 뮤지엄은 박물관과 미술관을 동시에 의미한다.
박물관에는 양질의 자료부터
박물관에서 예술품은 부활한다. 박물관이 소장하지 않으면 부활할 확률은 떨어진다. 문학작품이나 미술품 같이 개인이 소지, 소장할 수 있는 작품은 여기서 예외일 것이고, 디지털 문명 덕택에 영상, 음반처럼 개인이 소장할 수 있는 경로는 더더욱 다변화하고 있다. 그렇긴 해도 박물관의 역할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개인의 소장과 박물관의 소장은 차원이 전혀 다르다. 박물관에서의 소장은 공공성을 전제로 최종 공인(公認)의 의미를 갖는다. 때문에 박물관에서의 소장은 ‘공적인’ 부활이라는 가치를 갖는다.
그 역할을 위한 소장을 다시 생각하자면, 박물관에서 소장의 목적은 부활에 있지 소장 자체에 있지 않다. 소장 활동은 박물관이 존재할 1차 이유이로되 박물관의 궁극 목적은 되지 못한다. 그렇더라도 소장품의 수준에 비례해서 박물관의 목적이 실현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새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즉, 양질의 작품이 양질의 박물관을 낳는 선결 조건이다.
춤자료의 재탄생을 다시 생각한다. 필자는 앞서 “창작자의 마음에서 잉태된 (춤)자료는 무대화를 거쳐 비평과 역사화에 이르기까지의 전과정을 통해 하나의 실체로 남는다. 이에 비추어 사라진 춤이 살려지지는 않으나, 종이 신문 스크랩, 포스터, 인쇄물, 의상과 무대 디자인 세부 구상도, 온갖 관련 메모, 연기, 안무, 연구자 등 무용인들의 육성과 동영상, 비평이 갖추어진다면 그 실체는 거의 완벽하게 구현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것을 집대성하는 곳이 박물관(또는 아카이브)이며, 집대성하는 데 큐레이터의 업무가 절대 중요하다는 점도 지적한 바 있다. 단순 나열과 진열에 그치는 박물관이 있다면, 그 박물관은 부활의 집은커녕 아마도 유령의 집이 되기에 안성맞춤일 것이다.
오늘날 춤박물관을 상상하는 빈도는 높아가고 있으며, 그럴 만한 이유는 많다. 20세기 전반기 이래 춤예술 활동이 완전히 정립된 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점, 그럴수록 춤자료는 사장 소멸된다는 점, 춤자료를 보존 복원하는 수단들이 늘어난다는 점, 다원 사회는 다양한 예술을 원한다는 점 등이 그런 상상을 촉진한다. 앞서 소개된 Jacob’s Pillow Dance Interactive는 춤박물관이 사이버 공간에서 가능하며 또 그것이 공유될 수 있다는 사례까지 보여준다.
제이콥스필로우 자료관 내부 © 2019 김채현 |
제이콥스필로우 댄스 인터랙티브 초기 화면 © 2019 김채현 |
2010년대 최대 빅이슈로서 유튜브는 영상의 탁월한 용도를 실증해 보였다. 실시간 범세계적 공유라는 기본 설정은 유튜브를 더욱 유튜브답게 만들었으며, 굳이 유튜브 방식이 아니더라도 영상이 모든 부문에서 절대 우위를 점할 것이라는 것은 이제 삼척동자가 더 잘 느끼고 있다. 어디서건 영상이 넘쳐나는 이른바 영상의 대홍수 시대에 춤 영상은 전세계 어디서건, 나의 잠정적 판단으로서,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경쟁력을 갖출 것으로 보인다. 춤 영상은 먼저 춤 작품의 예술 작품으로서의 실체를 담아야 하는 것이 그 첫째이고, 그리고 둘째는 춤 작품에 적절한 영상 이미지를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튜브의 압력에 밀려서인지 근래 1, 2년 사이 인터넷 포털에서 춤 작품의 영상화를 시도해온 줄로 안다. 거기서 보는 영상들은 여러 기자재를 동원하고 여러 각도에서 작품을 포착하는 노력을 기울인 흔적들이 보인다. 그렇다면 이 같은 영상화 작업이 춤(공연)에 도움이 될 만큼 효과적이었는지 묻는 것은 자연스럽겠는데, 답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왜 그럴까. 위에서 말했듯, 춤 작품의 예술 작품으로서의 실체와 춤(작품)에 적절한 영상 이미지를 담아내지 못한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또 근래 시도되는 춤영화제 등에서 춤을 소재로 한 영화(대개는 단편 영화)를 봐도 그런 한계는 다반사로 나타난다. 춤 영상이 스스로 춤을 왜곡시키고 있다. 이러한 한계나 폐단을 극복하려면 영상에 대한 인식에서 대대적인 전환이 있어야 한다.
춤영상의 유다른 속성부터 인식하라
꽃잎이 벌어지는 순간을 저 멀리 아득한 공중의 드론으로 찍는다면? 초음속으로 나는 전투기를 정지해서 찍는다면? 이런 차이는 모든 사물과 사건은 제 나름의 고유한 원리를 가지며, 그러므로 모든 사물과 사건은 제 나름의 고유한 영상을 만나야 실체가 살려진다는 것을 웅변한다.
대개는 정지한 상태의 여러 앵글로 찍은 길고 짧은 순간 이미지들을 번갈아 등장시키는 일반적 영화 편집 방식을 춤작품의 영상화 작업도 추종하는 것 같다. 영화 편집 방식에 길들여진 눈에는 그런 방식이 정상으로 보일 것이므로, 정작 영화와는 속성이 ‘다른’ 춤 작품의 고유한 영상을 놓칠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 같은 영상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영화 같은 것이지 춤 같은 것이 아니다! 영화는 언어와 일상적 몸 언어 등 많은 것의 도움을 받아 구체적 사태의 전개를 영상화한다. 반면에, 춤 영상은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작품을 영상화해야 한다는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엄청나다 못해 거의 본질적 차이라 할 만하다. 단적으로, 영화의 화면은 거의 모두 스틸의 연속인 데 비해, 춤 작품은 흐름이다. 다시 말해 영화에 적절한 영상 이미지가 곧 춤 작품에 적절한 이미지라고 믿는 편견은 속히 파기되어야 한다.
영상이 결코 춤의 실체를 담지 못한다는 인식은 상식처럼 흔하다. 그래서 영상을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는 게 무용인들 사이의 분위기인 것 같다. 안무자마저 자기 작품의 영상을 제대로 보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말도 흔하다. 안무자마저 자기 작품의 영상을 제대로 보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데, 다른 누가 보려 하겠는가. 그러면서 보존용, 기록용으로 마지못해 영상은 제작되는 실정이다. 그런 영상이 춤을 재탄생시키리라 기대하기 어렵다.
이런 풍토를 이겨내는 첩경으로서 제안하자면, 춤 작품의 예술 작품으로서의 실체와 춤(작품)에 적절한 영상 이미지를 담아내는 영상이 상식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반미학을 추구하는 춤들 말고는 거의 모든 춤은 움직임을 기반으로 하므로 이 움직임을 생생하게 포착하지 않는 영상은 감각적으로 지겨울 뿐더러 효용성이 매우 떨어진다. 영상이 춤의 실체를 담지 못하는 게 아니라, 춤의 실체를 담지 못하는 방법에 영상은 안주하고 있다. 춤으로서의 실감과 질감이 떨어지는 영상을 보는 것도 고문이다. 이런 기본(무엇보다도 움직임과 흐름을 제대로 포착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탓에 지금껏 영상은 춤의 실체를 담지 못해 왔던 것이다. 춤을 찍으면 곧 춤 영상이 된다는 착각을 벗어나라.
영상의 대홍수 시대에 오히려 춤자료가 재탄생할 수 있는 여건은 분명 호전되고 있다. 그렇다한들 춤의 실체를 잡으려는 방법과 의지가 없다면 그 모든 것은 남의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지금은 영상의 대홍수 시대인 동시에 춤예술의 위축 시대이기도 하다. 비단 춤예술이 위축되는 현상을 타개하는 한 방안으로서뿐 아니라 무엇보다 춤의 실체를 보존·부활·확대하는 유력한 경로로서 춤 영상을 포착하는 작업은 일거에 혁신되어야 한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를 비롯 다수의 논문,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