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오늘은 한국 근대춤, 근대시기의 여명기라고 할 수 있는 신무용의 시대, 그때의 춤의 개념이 어떻게 일본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 그리고 그것에 영향을 미친 일본사람들, 같은 시기 중국의 선구자들, 거기에 대응한 신무용 초기 사람들이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는 결국 한국춤의 역사에서 신무용이 어떠한 역사적인 위상에 놓여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지금까지 어떠한 의미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등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새로운 춤
신무용이라 함은 말 그대로 새로운 춤, 영어로는 뉴댄스(New Dance)이고, 독일어로는 노이에르탄츠(Noier Tanz)입니다. 그것은 ‘무용시’(舞踊詩)라는 용어로 대신하여 쓰이기도 하여, 새로운 춤의 의미와 내용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1926년 3월 21일, 이시이 바쿠, 石井漠이라는 일본인이 우리나라에 처음 내한공연을 하면서 신문에 인터뷰한 내용에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나는 나의 예술을 마음에 이는 내적 감회를 시적 영감으로 받아들여서 이를 육체로 표출하는 무용시라는 모토 아래 정진하고 있소.” 몸의 움직임으로 시를 쓴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그만큼 내면적인 마음의 풍경을 그려내는 것으로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춤은 일찍이 20세기 초반 독일의 루돌프 라반(Rudolf Von Laban, 1879-1958)과 그의 제자인 마리 뷔그만(Mary Wigman, 1886-1973)의 새로운 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런 분들은 나중에 표현주의 춤의 선구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내면의식의 과학적인 표현과 현실세계의 자기반영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여기에 대응하고 대립되는 경우가 영미계통의 뉴댄스입니다. 특히 맨발의 이사도라 덩컨((Isadora Duncan, 1878-1927)과 달크로즈(Emile Jaque Dalcroze, 1865~1950) 등으로 대표되는 자아의식의 각성과 자유로운 육체표현활동인데, 이런 경향과 독일 표현주의 경향이 초기 뉴댄스의 두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춤은 발레라는 것이 동작을 규식화해서 지나치게 몸을 억압하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나타났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자유운동, 자연운동을 통해 보통 정상인이라면 누구나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서, 자아의식의 각성, 현실세계에 대한 자기반영, 창조적 자기개성의 추구, 이것이 예술에서의 근대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춤은 이때에야 예술일반이 지닌 근대성을 띠게 되었습니다. 한 100여년 다른 예술장르에 비해 늦은 감이 있지요. 아무려나 그것은 춤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이었고, 춤의 혁명이라고까지 얘기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춤 창작을 한다하면 무엇보다 현실세계에 대한 자기반영으로 자기세계를 구축한다고 하지요. 유니크한 표현들, 이것이 근대춤의 한 정신이기도 한데 그러한 흐름이 이때부터 구축되었습니다. 안제승선생은 신무용의 세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이념, 새로운 체제로 형성되어가는 새로운 춤이라고 명명한 바가 있습니다.
일본 신무용의 대두 과정
이러한 근대춤의 세례는 일찍이 일본의 개화론자이면서 새로운 문화예술의 운동을 벌이는데 선구적 구실을 한 쓰보우치(平內逍遙, 1859~1935)선생의 저서『무용론』 중 「신악극론」(1904년)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하겠습니다. 쓰보우치선생은 세익스피어 연극을 일본어로 완역한 영문학자입니다. 영문학을 통해 서양의 선진적인 문화사조를 받아들여서 일본의 뒤쳐진 문화와 예술을 과감하게 혁신하고 새로운 시대, 새로운 예술을 만들자는 주장을 폈는데 그 대표적인 글이 「신악극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신악극론」의 서문에서 그는 재래의 가부키춤이 갖는 불합리성, 외잡성을 과감하게 제기합니다. 외잡성이란 외설스럽고 너저분한, 이를테면 퇴폐적인 표현들인데 불합리한 표현이나 퇴폐적인 표현은 제거시키되, 가부키 춤이 지닌 전통적인 아름다움만은 그대로 이어받아 이를 새로운 구상 아래 형식과 내용이 우수하고 예술적 향기가 물씬 풍기는 새로운 춤을 창조하자는 거지요. 이러한 지향점을 실제로 실천에 옮긴 사람은 일본 시인 하세가와입니다. 그는 1911년 〈신무용연구소〉라는 연구소를 제국극장과 함께 개관하면서 본격적인 신무용운동을 했습니다. 이들이 벌이는 새로운 춤운동, 신무용운동은 두 세 가지 성격을 지니는데, 한쪽은 구무용에 해당되는 전통춤을 일체 배제하자는 움직임이고, 다른 한 쪽은 일본의 전통춤을 일단 수용하면서 이를 토대로 새로운 춤을 추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신무용은 전통춤을 어떻게 받아 들였는가, 혹은 어떻게 거부했는가를 살펴볼 때도 일본의 사례가 참고가 될 것입니다. 일본에서의 초기 신무용의 성격은 그렇다는 거지요. 양식에서 동양춤이든 서양춤이든 가릴 것 없이 새로운 경향을 추구하는 일본 국내의 모든 춤 활동이 신무용입니다. 서양식의 것을 빌려왔든 일본의 전통적인 것을 내림받았든 새로운 경향을 추구하는 일본춤, 이 모두를 신무용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고전무용 계열과 대립되는 새로운 일본풍의 무대무용을 일컫기도 합니다. 일본에서 춤은 그들의 표기대로 ‘무용’이라는 용어를 그 당시 재조립하여 썼는데, 거기에 ‘신’이 앞에 붙어 고전무용계열과 대립되는 새로운 일본풍의 무대무용, 극장무용을 가리키게 된 것입니다. 이럴 때 신무용은 일본 전통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가. 하나는 일체 구애받지 않고 완벽한 표현의 자유를 누리자 하여 전통에 대한 적극적인 부정파가 있는가 하면, 또 하나는 전통춤에 가능한 한 관심을 기울여서 전통춤의 아름다움을 살려내자는 소극적인 긍정파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받아들여진 일본의 신무용은 어떠하였는가.
안제승선생은『한국연극무용영화사』(한국예술원, 1985)에서 신무용은 “사조의 바탕을 현재적 감각에 둔다” 라고 하였습니다. 현재적 감각이란 20세기적 감각이겠지요. “현대무용운동으로서의 새로운 이념’은 현대무용운동, 즉 자유운동, 자연운동, 내적 예술욕구를 갖추면서 현실세계에 대한 자기반영으로 창조적인 자기세계를 표현하고 구축하는 그것이 바로 새로운 이념입니다. “현대무용운동의 이념을 앞세우고 거기에 합당한 방법으로 새로운 한국무용을 창조해나가려는 활동이자 그 자체이며, 그 활동의 결과로서 나타난(‘顯現되어진’이란 말을 썼습니다) 실체”가 신무용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한국에서의 신무용을 그야말로 서구에서의 노이에르 탄츠, 뉴댄스와 같은 차원으로 안제승 선생은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과연 실체가 그런 것인가? 일단 안제승선생의 규정대로 두고 가겠습니다. 이것이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한국의 신무용의 내용과 성격입니다.
중국의 새로운 춤운동
다음으로 중국에서의 새로운 춤운동은 어떠했는가?
중국에서의 근대, 현대춤의 시기는 왕커펀(王克芬)이라는 중국의 춤역사학자의 『중국의 무도발전사』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중국춤의 시기구분을 세 시기로 나누는데 근대, 현대, 당대입니다. 중국은 근대시기를 1840년부터 1911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정치, 사회, 경제적 시대구분론입니다. 1840년에 아편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억지로 개항하여 서구제국주의 침탈이 시작되는 해로부터 1911년 손문에 의해서 중국 초기의 공화국이 설립되는 때인데, 이를 근대라고 합니다. 손문에 의해 공화국이 설립된 때에서 1949년 중국인민공화국, 마오쩌뚱에 의해 새로운 국가가 설립되는 1949년까지를 현대라고 보고, 1949년 그 이후부터 오늘날까지를 당대라고 하고 있습니다. 특히 당대라는 표현에 우리가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대, 바로 그 당시라는 뜻이고 영어로 하면 컨템퍼러리입니다.
여기서 우리와 비교해보면 중국에서 근대라고 하는 이 시기는 개항, 인천의 옛 이름인 제물포라는 항구를 개항하는 1860년때부터 1910년 한일합방까지를 거기에 맞춰볼 수 있겠고, 한일합방에서부터 1945년 해방공간까지를 현대라고 할 수 있겠죠. 그로부터 오늘까지를 당대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1945년부터 오늘날까지를 현대라고 합니다. 문화적으로 보면 1984년 갑오동학농민전쟁 또는 1919년 3 1운동때부터 해방공간까지를 근대시기라고 합니다. 아무려나 근대의 개념은 정치경제사회의 의미로서나 문화예술의 의미로서나 역사관, 세계관과 연관된 중차대한 개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적어도 제국주의의 침탈을 받은 경험이 있는 지역이나 민족 사이에서는 봉건사회해체기를 넘어서 국제역학적 민족생존의 위기와도 연관된 개념이기도 합니다.
중국 근대춤의 선구
중국 근대춤의 선구자로 여러 사람을 꼽을 수 있는데 그중에서 획기적인 활동을 한 두 사람을 먼저 얘기해 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의 활동시기를 보면 우리나라 최승희와 조택원 등한국신무용가의 초기 활동시기와 비슷합니다.
우샤오팡(吳曉邦·오효방, 1906 -1995)을 먼저 들겠는데, 그는 1929년부터 1935년까지 3차에 걸쳐 일본에 유학했습니다. 최승희는 1926년부터 1929년까지 이시이 바쿠의 제자가 되었죠. 비슷한 시기입니다. 거기서 오효방은 독일 표현주의 춤인 노이에르 탄츠를 습득했습니다. 그리고 이사도라 덩컨, 방정미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이사도라 덩컨은 영미계열의 신무용의 선두주자로서 발레의 토슈즈의 굴레에서 벗어나 맨발이 주는 자유, 해방의 의미를 강조해서 보게 되는데, 러시아와 유럽에서 그의 춤 세계가 인정받아 세계적인 뉴댄서로서 큰 족적을 남깁니다. 다음으로 방정미는 박영인이란 이름의 한국 사람이고 이 분도 독일 계통의 표현주의 모던댄스의 영향을 받은 사람인데 이 사람들과 같이 활동을 했습니다.
더욱 특기할 일로서 우샤오팡은 그 당시 중국 땅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본제국의 침략 속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항일독립투쟁에 춤으로 참가했다는 사실입니다. 항일투쟁에 춤으로 참가하면서 신무도운동을 벌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는 새로운 모던 댄스를 일본에서 배웠지만 자국에 돌아가 조국의 민족적 현실, 곧 일제와의 투쟁에 직접 참가하면서 새로운 춤운동을 벌였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우리나 일본과의 차별점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우샤오팡은 자유주의적인 경향의 춤도 강조했습니다.
1953년에 북경무도학원을 설립하는데 크게 이바지했고 그러면서 중국무도가협회 수석으로서 중국춤을 이끄는 가장 앞선 지도자였습니다. 그의 주요작품들은, 특히 일제치하 때 항일투쟁의 일선에서 싸우면서 공연을 한 작품들입니다. 〈의용군행진곡〉, 〈유격대원의 노래〉와 〈기화(飢火)〉 라든가 〈사범(思凡)〉 등 100여편의 작품을 창작하였습니다. 일본에서 모던댄스를 배웠으나 그는 항일투쟁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고 또 한편 자유주의적인 표현의 발랄함을 강조했습니다. 수많은 책을 써서 중국춤의 이론정립에도 이바지했습니다.
다음으로 다이아이리엔(戴愛蓮, 1916-2006)이라고 하는 분입니다. 이분의 가장 획기적인 업적은 발레를 중국에 도입해서 중국춤의 과학화, 이론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입니다. 중국춤을 해외에 소개해서 중국춤이 국제화하는데도 이바지했습니다. 그리고 중국 소수민족의 춤을 찾아 자신의 춤의 창조적 원천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중국 땅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인도의 어느 섬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 영국에 있는 오톤돌린 발레학교를 졸업했어요. 마리램버트 발레학교를 나오면서 마가렛 테스크로부터 발레를 배웠습니다. 그런가 하면 독일 표현주의 춤을 이끌었던 마리 뷔그만 학교의 일원으로도 참가했습니다. 독일 표현주의 경향의 춤에 영향을 받았다는 거지요. 루돌프 라반은 라반노테이션(labanotation)이라 해서 춤표기법을 개발해서 운동역학, 몸 움직임의 과학성을 논증한 최초의 인물인데 루돌프 라반의 제자가 마리 뷔그만이고, 마리 뷔그만의 동료이자 제자가 쿠르트 요스입니다. 쿠르트 요스의 춤패, 무용단에 직접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쿠르트 요스는 잘알려져 있듯이 피나바우쉬의 부퍼탈발레의 창단을 이끈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의 〈그린테이블〉 녹색테이블은 고전발레가 아니라 모던 발레의 효시가 되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선진적인 모던발레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할아버지의 조국인 중국에 돌아와서, 이 분도 항일투쟁의 일선 현장에 참가하면서 춤을 공연하고 그의 예술을 진작시켰습니다. 그의 대표작은 〈사향곡(思鄕曲)〉 〈동강(東江)〉 〈화화무(荷花舞)〉(연꽃춤) 〈비천(飛天)〉 등이 있는데 거의 모두가 소수민족의 춤을 바탕으로 발레양식을 개발한 춤입니다. 소수민족의 춤을 현장답사로 자료화하여 라바노테이션으로 표기하여 전세계에 알리는 춤인류학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는 한편 또 하나 주목할 일은 또 하나의 가르침으로 ‘人人蹈’(런런따오)라는 춤운동을 벌인 점입니다. 이는 그의 획기적인 독창성이자 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춤은 누구나 출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을 펼치고 있어요. 댄서만이, 발레리나나 발레리노만이, 전문무용가만이 춤을 출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춤은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네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귀천을 불문하고 각기 자신의 몸의 운동을 펼칠 수 있다는, ‘춤의 일상 나눔’이라 할 그런 운동이 바로 런런타오입니다. 그는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 지역에 가서 그들의 춤을 발굴하고 그것을 체계화시켜 한편 전문무용가에게 알려주고, 또 한편 그것을 개발해서 작품세계를 구축하면서, 또 한편으로 오늘날로 치면 스포츠댄스나 포크댄스와 같이 춤을 전 인민이 더불어 출 수 있는 내용으로 바꿔냈습니다. 90이 다된 노인의 몸을 이끌고도 전 세계에 중국춤을 알리고, 중국춤의 체계화와 소수민족의 춤의 표기와 역사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던 분입니다.
중국에서 1949년 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에 오늘날까지 7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는데 거기에서도 여러 세대의 활동이 구분해서 논의되고 있습니다. 1세대는 항일투쟁과 더불어 중국 전통춤을 바탕에 두고 신무도운동을 펼쳤습니다. 우샤오팡 같은 분은 자연운동을 중심으로, 다이아이리엔은 소수민족춤과 발레를 중심으로 새로운 춤운동을 펼쳤습니다. 그 다음 2세대는, 1세대의 첫 제자급이 되는 사람들이지요. 중국무도학원이 1953년에 설립된 이후에 소련의 안무가들과 춤 교사들이 대거 무도학원에 배치되는데 바로 이런 러시아의 발레를 중심으로 훈련받은 세대들이 제 2세대인데 극적인 스토리가 있는 무도극, 춤극을 창출하는데 기여했습니다. 지금은 연배가 70대, 80대를 넘겼습니다. 그 다음의 3세대는 바로 2세대의 후예라 할 수 있지요. 1966년부터 76년에 이르기까지 중국에 한 십여 년 사상투쟁이자 권력투쟁이라 할 수 있는 이른바 문화혁명의 시기가 있었는데 문화혁명 이후에 좀더 적극적으로 개방적인 분위기가 이루어지면서 서방의 춤문화가 적극 도입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전통문화도 지금 사는 생활에 적합하게 개조되면서 춤에까지도 이러한 경향 속에서 오늘날의 사회적 삶을 반영하는 그런 춤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습니다.
중국에서의 발레나 모던댄스는 1980년대 후반이후 한국에도 일부 소개되어서 중국근현대춤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것으로서 항일투쟁과 더불어서 중국 근대춤 운동이 벌어진 예를 몇 가지 들어봤습니다. 이에 비하면 같은 시기에 한국 근대시기의 춤의 선구자들은 일본에서 학습을 하고, 전세계에 조선춤을 알리는데 이바지한 바 적지 않지만은 민족의 당대 현실에는 눈 감았습니다. 항일 투쟁에 참가하기는커녕 황군의 위문공연에 수없이 동원되었고, 황군을 위한 군자금 모금 공연에 나서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몇몇 사람은 ‘내선일체’라고 하는 일본의 정책에 동조하는 춤내용을 가지고 거침없이 공연을 했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같은 시기에 중국 근대춤의 선구자들의 행적과 우리의 행적은 크게 대비됩니다. 우리로서는 요근래까지도 그 암울한 영향 속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점이 신무용시기가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부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전통춤시대에서 근대춤시대로 이행
우리춤의 근대 여명기에 이르러 신무용이란 이름으로 외래의 것이 수용되기 시작했는데 그 시기는 어떤 시기인지, 어떤 내용은 어떠하였고 이를 두고서는 어떻게 평가를 내릴 수 있는지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춤의 역사에서 고대, 중세, 근세, 거기까지를 전통시대라고 합니다. 신무용시대는 전통춤 시대에서 근대춤 시대로 옮겨오는 이행기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춤에서 근대성, 근대예술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입니다. 바로 이 신무용 시대가 역사적으로 일제강점기, 일제치하에 있던 시기여서 일제를 통해서 새로운 춤이 우리에게 도입되었기 때문에 문제를 안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자생적인 변화과정 속에서 자생적인 힘으로 근대춤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면 문제 상황은 달랐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일제강점기에 근대춤 시기를 맞이하게 되어서 바로 그것이 역사적 암울함과 함께 놓이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그 시기의 실상을 살펴보기로 하지요.
채희완
현 한국춤비평가협회 회장. 부산대 명예교수, 〈(사)민족미학연구소〉 소장, 〈부마항쟁기념사업회〉 이사, 〈창작탈춤패 지기금지〉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 『공동체의 춤 신명의 춤』, 『한국의 민중극』(엮음), 『탈춤』, 『한국춤의 정신은 무엇인가』(엮음), 『춤 탈 마당 몸 미학 공부집』(엮음), 『지극한 기운이 이곳에 이르렀으니』 등을 펴냈고, 그밖에 춤, 탈춤, 마당극, 민족미학에 관련된 논문과 춤 비평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