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기획연재_ 공동체의 춤 신명의 춤(20)
“내가 춤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춤이 나를 선택하였다”
채희완_춤비평가

사회에 첫발을 디디는 대학춤 전공자께

살아온 인생의 1/3 이상을 춤과 함께 해 온 사회 초년생 여러분은, 대학과정을 마쳤으니, 이제는 춤은 과연 나에게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오랜만에 스스로 다시 던질 때가 되었습니다.
적어도 7, 8년이 넘도록 (찰랑거리는 시간들의 방랑과 유혹 속에서도) 나를 이끌어오던 춤은 과연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그것이 있어 살 수 있었다고 할 그 춤이란 것이 과연 나에게 절대절명의 존재인가.
나를 키워주고 감싸주던 보호장치들은 거의 거두어졌습니다. 낯선 사회 속에 나는 혼자 던져졌습니다.
내가 춤을 선택한 것은 나에게 옳았는가.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간다고 한다던가요? 온갖 가능성의 한가운데서 그것은 나에게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해 보지요..
이제는 자문자답의 질문을 옮길 때를 대비해야 할 시점입니다.
“내가 춤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춤이 나를 선택하였다.”라고 한백년을 춤과 같이 산 마사 그레이엄은 그렇게 선언하였습니다.
그것은 춤으로 다 이루었다라는 그 자신만의 마니페스또였습니다.
춤에 대한 더 이상의 자긍은 없습니다.
춤이 춤이기 위해서는, 춤을 다 이루기 위해서는, 춤이 나를 필요로 하였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또한 그것은 춤에 대한 한없는 겸손입니다.
보잘 것 없는 나를 춤이 택하였으매 거기에 따를 뿐인 것이지요.
춤의 부름을 받자옵고 춤의 제단에, 가시밭길에 한 몸 모두를 바치는 것이지요. 그것은 춤의 축복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이윽고 ‘추어지는’ 것인 거지요.
‘춤과 나’ 사이의 헌신적 교류, 그것은 춤을 춤답지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한 분노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좁게는 춤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에 대한, 춤의 살(煞)에 대한 싸움입니다.
춤의 신명은 춤이 나를 택하여 살과 싸우게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분노가 나의 춤의 목숨을 되살리는 첫디딤입니다.

─ 2002년 3월 <젊고 푸른 춤꾼한마당>에서

 

채희완

현 한국춤비평가협회 회장. 부산대 명예교수, 〈(사)민족미학연구소〉 소장, 〈부마항쟁기념사업회〉 이사, 〈창작탈춤패 지기금지〉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 『공동체의 춤 신명의 춤』, 『한국의 민중극』(엮음), 『탈춤』, 『한국춤의 정신은 무엇인가』(엮음), 『춤 탈 마당 몸 미학 공부집』(엮음), 『지극한 기운이 이곳에 이르렀으니』 등을 펴냈고, 그밖에 춤, 탈춤, 마당극, 민족미학에 관련된 논문과 춤 비평문이 있다.​ ​ ​ ​ ​ ​ ​​ ​ 

2020. 4.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