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김화숙&현대무용단사포가 창단 40주년을 맞았다. 전라북도를 베이스로 서울과 이리 남원 등 다양한 지역에서 여러 유형의 공연과 기록 작업을 펼쳐 온 이 단체의 40년 여정을 기념공연의 현장 스케치와 예술감독 인터뷰, 공연기록과 대표 작품의 분석을 곁들여 조망해 본다. -편집자 주
1. 현장 리뷰_ 군산 공감선유 〈구름이 흐르는 숲〉
장광열_춤비평가
안온했다. 
나지막한 야산과 초가집, 통 유리와 콘크리트, 소나무와 대나무 숲, 얕은 물과 녹색 잔디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갤러리 까페 ‘공감선유’의 첫 인상은 조용하고 편안했다.  
이곳에서, 9월 26일 뉘엿뉘엿 해가 넘어갈 때 쯤 시작된 김화숙&현대무용단 사포의 〈구름이 흐르는 숲〉 공연은 ‘공감선유’ 공간을 탐색하는 프로젝트로 기획되었다. 
사전에 예약된 50명의 관객들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 다섯 개 프레임을 1시간 남짓 ‘공감선유’의 실내외 공간을 이동하면서 즐겼다. 연출가는 남녀 열 명 댄서들의 움직임과 피아노 연주, 전자음악, 성악까지 다양한 음악 등을 사이사이에 배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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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화숙&현대무용단 사포 〈구름이 흐르는 숲〉  | 
멀리 바라보는 숲속 벤치 위의 남녀, 이동하면서 듣는 라이브 연주, 렌츠 클로츠의 전시실 공간에 걸린 선명한 선이 강조된 그림을 배경으로 펼쳐진 솔로춤과 2인무 등 관객들이 마주한 공간에는 어느 것 하나 공연을 위해 별도로 치장한 것이 없었다. 
좌우로 대나무 숲이, 정면으로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보이는 둔덕, 그 뒤로 보이는 흰 구름과 어우러진 푸른 하늘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무용수들의 완급을 조절하는 움직임과 대숲 사이로 울려 퍼지는 소프라노의 감미로운 음악이 더해지면서 숲과 하늘도 함께 춤추기 시작했다. 
둔덕 위에서 내려오는 숲속 계단은 꽤 가팔랐다. 조심조심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 뺨을 스치는 바람은 청량했다.  
탁 트인 넓은 잔디밭 위의 남녀 군무는 무용수들의 몸 선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안무는 무용이 몸을 매개로 하는 예술 장르임을 용감하게 강조했다. 유리 통문과 초가집 사이에 만들어진 작은 수로 안, 물을 튀기며 이루어지는 군무는 마치 여신들의 코러스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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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화숙&현대무용단 사포 〈구름이 흐르는 숲〉  | 
무대와 객석이 구별되지 않는 장소 특정 형 공연이 성공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우선 장소 자체가 극장의 틀을 벗어나 있는 데다 조명기기나 음향시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관객들이 어디서 보는지에 따라 시야에 들어오는 풍광도 각기 다르다. 선명한 이미지 창출을 위해서는 많은 것들이 세밀하게 조율되어야 한다. 
대본(한혜리), 음악(김은수), 안무(김옥 박진경 조다수지), 연출(김화숙) 등 주요 제작진들이 배열한 작품의 프레임은 세밀했다. 치밀하게 계산된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자극 그리고 보이는 형상들의 조화는 장소 특정 형 공연의 묘미를 배가시켰다.
공연은 상처받은 지구를 위한 한 편의 위무(慰撫)였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humane and more humane), 제작진들은 그렇게 따스한 감성으로 모두를 어루만졌다.
춤 공간으로 변신한 ‘공감선유’는 마치 냉동고에 보관된 질 좋은 고기가 실력 있는 쉐프를 만나 별난 고급 요리(빼어난 장소 특정 춤 공연)로 탄생했고 관객들은 그 특별한 맛을 한껏 음미했다. 3회에 걸쳐 150명의 관객들만이 별미를 즐기기에는 아쉬움이 컸다. 〈구름이 흐르는 숲〉은 대한민국에서 행해진 장소 특정 공연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아도 손색이 없다. 
김화숙&현대무용단사포는 올해 창단 40주년을 맞았다. 이번 공연과 전시는 이를 기념해 기획되었고, 대한민국 춤계에서 차지하는 이 단체의 정체성과 위상이 결코 작지 않음을 다시 한 번 입증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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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터뷰_ 김화숙&현대무용단사포 예술감독 김화숙

 
장광열: 문화 카페라고 들었지만 군산의 ‘공감선유’는 참으로 흥미로운 공간이었습니다. 어떻게 이 장소에서 공연을 갖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김화숙: 이번 군산 공연은 사포의 공간탐색 프로젝트 네 번째 작품으로 지인의 소개로 처음 방문한 ‘공감선유’는 사포 40주년을 위한 신작 발표, 출판기념, 사포춤 사진 전시회를 위한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특히 공간이 담고 있는 자연 풍경과 갤러리의 다양한 위치와 크기가 마음을 끌었지요. 바로 갤러리 관장(유우종)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자리에서 흔쾌히 수락을 해주어 네 번째 공간탐색이 시작되었지요. 
무엇보다 이 공간을 장소특정 형 공연에 걸맞게 새롭게 창조해낸 창작 작업이 매우 뛰어났고 그 만큼 인상적이었습니다. 공연을 보고난 후 정적인 공간이 인간의 몸과 어우러져 ‘살아 숨 쉬는 자연’으로 새롭게 탄생한 듯 했습니다. 전체 공연의 연출가로서 어떤 점에 가장 중점을 두었는지요?
장소를 결정하고 거의 1년 동안은 장소를 탐색합니다. 개인적인 방문 이외에 사포 모임도 주로 ‘공감선유’를 이용했지요. 야외 공연은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시간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기에 그 분위기를 직접 느껴보면서 작품을 구상했지요. 특히 ‘공감선유’를 감싸고 있는 풍경들이 시선을 멈추게 했습니다. 어머니 산 아래 고요히 일렁이는 바람, 소나무가 있는 아담한 언덕, 푸르른 대숲이 주는 의미는 ‘위안’이었습니다. 따라서 갤러리 주변 풍경이 담고 있는 깊이를 춤의 생명력을 통해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환원시키고 싶었고, 관객들에게는 함께한 시간과 풍경들이 춤을 담은 공간으로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이번이 사포의 4번째 공간탐색 프로젝트였습니다. 2023년에 공연했던 〈간이역〉도 굉장히 화제를 모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공간탐색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요?
사포는 2020년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모든 극장이 문을 닫을 때 공연을 지속하기 위해 고민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도출된 아이디어가 공간탐색으로 극장 밖에서 답을 찾고자 한 거지요. 그 결과 사포의 공간탐색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사포의 공간탐색은 사포 활동의 근거지인 전라북도의 역사와 문화가 담긴 오랜 시간 축적되어온 특정 장소를 찾아서 춤을 통해 공간의 흔적과 시간의 기억을 오늘의 시각에서 표현하고자 기획된 프로젝트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동안 사포가 추구했던 야외공연 레퍼토리와는 또 다른 공간 특정 형 작품을 만들게 된 거지요. 
한 두 번은 공연할 수 있지만 꾸준히 정례적으로 새 작품을 지속적으로 제작하는 것은 쉽지 않지요. 그동안 어떤 작품들이 만들어졌나요?
공간탐색 첫 번째는 장소는 완주에 있는 ‘산속등대’로 2020년 9월에 초연을 했습니다. 과거 제지공장이던 곳이 문화복합공간으로 재탄생한 곳이었지요. 이곳을 사포 단원들과 몇 번째 방문하면서 작품 제목을 〈기억 저편, 해월리 362〉로 결정하고 그 장소가 지닌 역사적, 문화적 의미를 되새기며 공간에 남아있는 흔적들과 기억들을 되살리며 작품을 만들었지요. 작품 내용은 프롤로그 ‘기억 속으로’, ‘낯선 시간’, ‘설렘과 두려움’, ‘마주하다’, ‘기억의 편린’, 그리고 에필로그는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라는 의미를 담았구요. ‘해월리 362’는 산속등대의 주소로 작품 타이틀에서부터 바로 그 장소의 의미를 강조했습니다. 이 작품은 초연 때의 아쉬움을 보완하여 2021년에 재공연까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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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포의 공간탐색 프로젝트1 〈기억저편, 해월리362〉 2020/2021, 완주 산속등대  | 
공간탐색 두 번째 장소는 2005년 11월 11일 근대문화유산 제213호로 지정된 곳으로 재인과 관기를 길러내던 교방으로 사용되며 변천해온 전북 유일의 풍류방인 정읍 진산동에 있는 ‘영모재’ 였습니다. 처음 이곳을 방문하면서 떠올랐던 문구는 ‘차마 그곳이 잊힐리야’. 이 생각은 그대로 작품 타이틀로 사용되었고 프롤로그 ‘시작도 없고’, ‘사라진 기억‘, ’바람에게 묻는다‘, ’그곳엔 없습니다‘, 에필로그 ’끝도 없는 그곳에‘라는 주제로 이 건물이 지녔던 역사, 문화적 의미들을 떠 올리며 작품을 완성시켜 2022년 10월에 공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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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포의 공간탐색 프로젝트2 〈차마 그곳이 잊힐리야〉 2022, 정읍 영모재  | 
세 번째 공연은 장소를 찾던 중 순천으로 겨울 여행을 떠났다가 우연히 만난 어느 책 제목 ’여긴 시간이 멈춘 것 같아요‘ 지금은 멈추어 버린, 사용되지 않은 간이역(순천 원창역) 사진과 함께 실린 글이 내 마음을 뒤흔들었지요. 여기서 힌트를 얻어 세 번째 공간탐색 장소를 남원 서도역으로 결정하고, 작품 제목은 〈간이역〉으로. 작품 내용은 프롤로그 ’떠나다‘, ’시간의 기억‘, ’보이지 않는 그곳에‘, ’돌아올 수 있을까‘, 에필로그 ’텅 빈 이곳‘! 서도역이 품은 역사의 흔적들, 만남과 헤어짐,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사연들, 삶의 모든 애환이 바로 간이역에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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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포의 공간탐색 프로젝트3 〈간이역〉 2023/2024/2025, 남원 서도역  | 
이 작품은 2024년 문화부 주최 ’대한민국은 공연중‘에 선정되어 〈again 간이역〉이라는 타이틀로 재공연되었지요. 2025년 남원시 지역대표 예술단체로 선정되어 〈다시 간이역에서〉라는 타이틀로 올해 5월에 4회 공연을, 10월에 25-26일에도 두 번 공연을 치렀습니다.    
 
공간탐색 프로젝트는 앞으로도 계속되나요? 그렇다면 향후 구상도 궁금합니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공간탐색 프로젝트-7까지 하고 싶은데, 욕심일까요? 이미 다섯 번째 지역과 장소를 결정하고 열심히 공간탐색 중입니다. 이러한 지역성을 지닌 예술작품들이 지역을 알리는 관광 상품으로도 활용되기를 바래봅니다. 전국적으로 수많은 축제들이 1회성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제는 지역을 살리는 예술작품에 투자를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말씀해 주신 대로 이번 공연은 현대무용단사포 창단 40주년 기념 공연으로, 4번째 공간탐색 프로젝트와 함께 40주년 기념 책 발간 및 사진전도 함께 개최되었더군요. 전시 공간에 비치된 자료는 사포의 40년 흔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민세기 작가의 사포의 공연을 기록한 춤 사진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창단자로서 사포 40주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지요?
지역단체 40년은 기적 같은 일입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가장 열악한 전북지역에서 무용 단체를 지속시킨다는 건 누군가의 희생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전북지역과 인연을 맺은 건 1981년 원광대 무용과에 부임하면서부터이니 44년이 되었네요. 현대무용의 불모지였던 이곳에 씨앗을 뿌리고, 가꾸고, 성장시켜 열매를 맺은 기분입니다.
사포는 2012년부터 2019년까지 〈사포, 말을 걸다〉 시리즈1-11, 그리고 2020년부터현재까지 공간탐색 프로젝트1-4, 모두 극장 밖에서 이루어진 공연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전라북도 지원금이 너무나 열악하여 극장공연은 도저히 지속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극장 밖 작품은 창작활동 지원금에서는 무대 작품이 아니리는 이유로 지원금 신청에서 제외됩니다. 지금까지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내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사포! 감사하게도 사포 40주년에 선물처럼 지역대표예술단체로 선정되어   그동안의 힘들었던 순간들을 치유해주는 것 같아 정말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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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포의 시간 1985-2015」 표지, 2016년 발간  | 
지난 40년 동안 3권의 책을 발간하는 등 아카이빙 작업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3권 책의 편집이 각기 다른 점도 눈에 띄던데, 구체적으로 어떤 차별성이 있는지요?
 
사포의 첫 번째 출판물은 1996년에 발간한 「김화숙·사포」로 사포의 10년 작업을 정리한 것이구요. 두 번째는 2016년에 발간한 「사포의 시간 1985-2015」으로 사포 30년 작업을 정리한 책입니다. 그리고 40주년 기념으로 이번에 발간된 「사포, out of the stage」는 사포의 야외공연, 즉 사포가 극장 밖에서 했던 작품 사진들만으로 구성했습니다.
 
또한 사포는 영상, 안무 노트, 대본, 작품 사진들을 수록한 광주민중항쟁무용삼부작 CD_Rom ‘오월의 눈물’을 제작, 발표(1999)했으며, 광주민중항쟁무용삼부작 중 2부 〈편애의 땅〉은 2016년 컴퓨터용 파일로 출시하였습니다. 이렇게까지 기록에 집착하게 되는 건, 아마도 순간 예술이면서 동시에 일회성 예술인 춤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 것 같습니다.       
현대무용단 사포의 공연 작업은 소극장, 대극장, 야외공연 등 각기 차별화된 컨셉에 의해 분명한 차별성을 갖고 작업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단체의 리더로서 어떤 지향점을 갖고 그동안 단체를 운영해 오셨는지요?
 
안무가 입장에서 저는 공간을 가장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공간의 힘, 공간이 담고 있는 에너지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소극장, 대극장, 야외무대 작품은 각기 안무 방법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무용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창작 정신인데, 무용 창작을 위해서는 신체 움직임의 특성을 기반으로 시·공간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작품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극장, 소극장, 야외무대의 특성에 맞는 레퍼토리를 구별하여 개발하고 있는 점이 사포의 특성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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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민중항쟁 무용 3부작 1부 〈그해 오월〉(1995년 초연 광주문예대극장, 1998년 재공연 오페라 하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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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민중항쟁 무용 3부작 2부 〈편애의 땅〉(1997년,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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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민중항쟁 무용 3부작 3부 〈그들의 결혼〉(1998년,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 
춤비평가로서 안무가 김화숙의 작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역사의식에 근거한 현실 참여적인 소재의 작업입니다. 광주민중항쟁, 동학농민혁명 등이 선생님에 의해 춤 작품으로 제작되었지요. 이 같은 작업을 하게 된 배경이나 어떤 동기로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광주민중항쟁 무용 3부작은 1994년 작품 구상을 시작으로 1999년 ‘오월의 눈물’ CD_Rom 제작·발표까지 6년 동안의 긴 작업이었습니다. 1980년 오월 아버님께서 돌아가셨고, 교통통제가 풀리던 날 들어갔던 광주 시가지의 모습, 허공에 떠있는 눈망울들, 회색빛 도시는 바로 그곳에 있었습니다. 이때 가슴에 각인된 영상들은 1995년 〈그해 오월〉이라는 무용 작품으로 탄생되었고, 1997년 2부 〈편애의 땅〉, 1998년 3부 〈그들의 결혼〉으로 이어졌고, 1998년 12월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그해 오월〉 재공연까지! 제가 추구하는 각기 다른 크기의 극장 조건을 활용하며 안무해 본 최고의 사례가 되었지요. 
  
결과적으로 이 삼부작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토월극장/오페라하우스 3극장을 섭렵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박용구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네요. “김화숙은 안무가로서 광주 삼부작 남겼으면 충분해.” 
 
원광대에 재직 중 어느 날 걸려온 전화 “선생님! 일본 북해도의 어느 대학에서 동학농민군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그 유해를 모시고 전주에 내려와 추모제를 하는데 작품을...” 전화를 받으면서 내 두뇌 속에서는 이미 첫 장면부터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102년 만에야 고국으로 돌아온 그들 〈다시 핀 그대에게〉는 바로 그들에게 헌정한 작품으로 1996년 5월 31일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해 봉환 진혼제에서 공연(전주 덕진종합회관)되었고,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주최로 전주, 공주 우금치, 정읍 황토재기념관, 정읍 천변특설무대 등 6년 동안 사포는 이 작품으로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대여, 돌아오라, 2005〉 또한 바로 동학농민혁명이 주제입니다. 사포가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한 작품은 또 있습니다. 바로 소설 〈혼불〉 작가 최명희 추모 1주기에 〈기억의 강〉이라는 작품을 안무했지요. 전주 혼불문학공원으로 이장한 최명희의 묘 앞에서 추어졌었습니다. 그때의 엄숙한 분위기가 떠오르네요.       
〈편애의 땅〉은 한국춤평론가회에서 그해 우수작품으로, 또 이 작품의 안무가로 선생님께서 공연예술 전문지 〈객석〉의 ‘올해의 예술가’로 선정된 기억이 납니다. 자유소극장의 공간을 새롭게 해체한 것도 인상적이었고 당시 파격적으로 CD-Rom 작업도 했었지요. 이 작품은 한국 춤계 전체를 통털어 ‘다시 보고 싶은 레퍼토리’로 꼽힐 법도 한데요. 개인적으로 다시 보고 싶은 작품이기도 하구요. 안무가로서 리바이벌 공연을 하고 싶은 작품을 선정한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광주민중항쟁 무용 삼부작’(1부:그 해 오월, 2부:편애의 땅, 3부:그들의 결혼)입니다. 이 삼부작은 극장의 조건(대극장/소극장/중극장)에 따른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닌 작품으로 한국 근대사 최대의 비극인 광주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사회성과 역사성이 두드러진 최초의 무용 삼부작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예술작품으로 남겨져야 가장 오래 기억되지 않을까요?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 덕분에 전세계적으로 오월 광주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것처럼, 무용 작품의 사회적 발언에도 이제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리바이벌하고 싶은 야외 공연 작품은 정읍 영모재에서 발표했던 〈차마 그곳이 잊힐리야〉입니다. 영모재 자체의 의미도 크지만, 작품의 완성도 측면에서도 〈편애의 땅〉 안무를 끝냈을 때와 흡사한 기분이 느껴졌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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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포, 말을 걸다〉 시리즈 1~11  | 
매년 새롭게 기획하는 장소 특정형 공연을 포함, 지난해 지역대표 예술단체로 선정되는 등 최근 사포의 행보가 만만치 않습니다. 지속적인 활동이 이어지는 원동력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요?
 
34년을 서울과 익산을 오가며 지냈는데, 정년 이후에도 사포를 과연 지속시킬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2015년 2월 정년했으니 이후 10년을 더 오르내렸네요. 현재 춤 출수 있는 사포 단원 7명(김옥/박진경/송현주/조다수지/문지수/박주희/윤정희)과 사포의 기획을 담당해주는 강현진 사무국장이 있어 버틸 수 있었지요. 전북지역의 열악한 환경에서 가난한 연극을 주장하는 폴란드의 예지 그로토프스키처럼 사포는 최저의 예산으로 버틸 방법을 찾아 야외무대만 고집하게 되었습니다. 장소 대여료도, 장치도, 조명도 필요 없는 자연조명 아래 오로지 작품성만을 내세우며 공연을 지속시켰던 사포의 저력이 바로 공간탐색 프로젝트로 이어진 셈입니다. 이러한 조건들은 자연스럽게 환경론자로 만들었으며, 결과적으로 생태무용으로 발전되었고, 이러한 결핍이 오히려 사포에겐 아이디어를 샘솟게 한 거지요. 덕분에 단원들도 춤의 가치와 참맛을 알아가게 되고, 저 또한 새로운 장소를 발견하고, 그 장소가 춤을 통해 살아있는 공간으로 변신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재미있게 작업하고 있으니 이 충만한 마음이 바로 사포 공연을 지속시키는 원동력 아닐까요?    
안무가로서 뿐만 아니라 무용교육자로서 한국무용교육학회의 내실 있는 운영과 무용교과 독립을 위한 노력과 수고, 그리고 공헌에 대해서도 많은 무용가들이 기억합니다. 무용 지도자로서 최근의 춤 계를 지켜보는 심정이 어떠한지 궁금합니다.
 
다른 예술 분야에 비해 무용 분야는 모든 측면에서 매우 열악합니다. 무용계 내부에서 서로를 불신하는 일은 이제 멈추고, 무용계는 하나가 되어 무용계 권익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춤은 인간 자체가 도구가 되는 가장 순수한 예술인데... 왜 무용인들이 다른 것에 욕심을 낼까요? 무용수로서 자신의 몸을 갈고 닦는 일, 안무가로서 최고의 작품을 만드는 일, 무용교육자로서 무용을 통해 문화적 인간을 배출하는 일에만 몰입한다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공감, 창의력이 중시되는 미래 시대에는 무용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무용인들이 자존감을 갖고 품위 있게 행동했으면 좋겠습니다. 
  
지역에 소재한 춤 단체를 육성하고, 적지 않은 현실참여적인 소재의 창작 작업, 분명한 콘셉트의 장속 특정 형 공연 등등, 안무가, 무용교육자로 한국 춤계의 공익을 위해 많은 희생과 수고를 해 오신 무용 지도자로 다시 한번 김화숙 선생님의 위상을 기억하게 됩니다. 긴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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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비평적 분석 · 기록_ 김화숙&현대무용단사포, 40년
이태주_단국대 명예교수. 공연예술 평론가
1. 현대무용단 사포의 창단 의미와 원동력
  
1981년 3월 무용가 김화숙은 원광대학교 무용과 교수로 부임했다. 당시 서울에 무용과는 5개뿐이었고, 전북에 처음으로 원광대(이리, 현재 익산)에 무용학과가 설치되어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더욱더 무용계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1985년 11월 30일, 원광대 학생회관에서 창단한 ‘전북가림다현대무용단’이었다. 이 단체는 1991년 ‘현대무용단사포’가 되고, 다시 ‘김화숙&현대무용단사포’로 개명되어 40년이 되었다. 이후, 김화숙 교수가 퇴임하는 34년 동안 그는 매주 왕복하는 기차 안에서 사포무용단의 공든 탑을 힘껏 쌓고 있었을 것이다. 사포현대무용단은 지금까지 142편의 작품으로 390회 공연을 했다. 
  
사포는 하루 만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분투의 역정(歷程)이었다. 사포가 고정 관객을 확보할 수 있었던 시점이 20주년을 지나서였고 근래에 놀라운 일은 사포의 관객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시대와 사람의 소산(所産)인데, 무용가 김화숙은 사포와 운명적으로 맞물려 있다.
  
김화숙 교수 둥지에서 태어난 사포는 40년 동안 수많은 우수 단원들이 거쳐 갔다. 지금도 남아서 활동하는 단원들은 자신들의 인생이 춤이 된 것을 깨닫고 행복감에 젖어있다. 이들은 1대를 지나 2대로 가고 3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 역사는 무용사에 큰 업적으로 기록될 것이다. 
  
1984년 2월 원광대 무용학과 첫 졸업생 이후, 1985년 2회 졸업생이 배출되면서 무용단 인력이 충족되었다. 김화숙 교수는 부임 후 학과에서 우수 단원 육성에 진력(盡力)했다. 전북지역에서 처음 창설된 무용과 였기에 학생들의 열기는 대단했다. 전북지역에서는 한국무용이 대세였기에 김화숙 교수는 불모지였던 현대무용의 개발과 그 활성화에 교육의 목표를 두었다. ‘김복희·김화숙무용단’ 20년(1971-1990)을 청산하고, 그는 1990년 이후 사포무용단 발전에 있는 힘을 다했다. 전북지역에서 처음으로 동문 단체를 결성해서 1990년부터 소극장 운동과 사포의 야외 춤판을 펼쳐 지역문화에 새바람을 일으키고 단원들의 창의성과 무용 테크닉 향상에 노력했다. 계속되는 끈질긴 연습을 통해 무용수의 몸과 마음이 통합되면서 사포 앙상블은 놀랍도록 개선되었다. 
  
김화숙 예술감독은 사포의 자랑스런 업적으로 광주민중항쟁 무용삼부작을 거론한다. 1부 〈그해 오월〉은 1995년 5월 31일 광주 문예회관대극장에서 초연된 후 서울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1998년 12월 3일에 재공연되었고, 2부 〈편애의 땅〉은 1997년 4월 30-5월 1일 자유소극장에서 공연되었으며, 3부〈그들의 결혼〉은 1998년 5월 13-14 양일간 토월극장에서 역사적인 공연의 막을 올렸다.
  
공간탐색 공연은 전북지역의 역사성과 문화적 명소를 알리는 춤으로 각광을 받으며 새로운 예술 형식의 작품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사포의 작품을 구상하고 만들어나가는 일에는 항상 많은 예술가들이 협조했다. 그 중에는 대본 작가 한혜리, 무대미술가 표종현 감독, 조명감독 공준택, 사진작가 구본창, 민세기, 의상디자이너 민순미 등이 있었다. 
  
  
무용가이며 무용교육자인 김화숙 교수는 안무가로서, 예술감독으로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무용가로 이끌어 준 고교시절의 스승 엄영자 선생의 영향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스승을 통해 그는 무용 기본기 훈련을 철저하게 받았다고 말했다. 대학시절에는 박외선 교수로부터 예술의 순수성, 자유로운 사상과 창의력을 전수받고, 육완순 교수로부터 정확하고 철저한 자기관리의 중요성을 터득하게 되었다. 자연과 함께 지냈던 고향 강진에서의 어린 시절의 추억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음악은 그의 예술을 탄생시키는 근원이다. 김화숙 무용의 감성적 호소력은 그의 무용을 떠받치는 특성이라고 평론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안무가 김화숙은 철저한 신체 훈련을 통해서 얻어지는 자유로운 신체 확보를 무용수들에게 강조한다. 이 일이 가능해야 창의적인 무용이 탄생되고, 그래야 자신이 원하는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용 기법, 다양한 테크닉은 자유로운 신체, 순수한 마음에서 생긴다는 점을 그는 역설하고 있다. 이런 예술정신은 무용가가 ‘진실’해야 터득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가 무용을 안무할 때 유의하는 부분은 무용 ‘공간’이다. 공간은 그를 매혹한다. 그는 무용의 제 요소들이 상호관계를 맺으며 공간 속에 ‘용해(溶解)’되는 과정을 중시한다. 이런 과제를 수행하며 작품의 주제를 표현해내는 일에 그는 집중한다. 주제는 작품을 전달하는 열쇠가 된다. 건축가가 설계도를 그리듯이 안무가는 자신의 작품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안무 스케치를 그린다. 안무가는 작품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사포 40년 이후 김화숙은 해야 하는 일이 두 가지 있다고 말했다. 사포 창작활동을 지속하는 일과 초·중등 예술교과에 ‘무용’을 포함시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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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기록  | 
ll. 업적(業績)
-사포는 무용사에 무엇을 남겼는가
  
사포무용단의 업적은 교육자 김화숙과 예술가 김화숙의 두 분야 활동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교육자로서의 김화숙은 원광대 무용학과 교수의 업적과 한국무용교육학회 회장으로서의 공로를 들 수 있다. 그는 무용교육혁신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서 교육정책과 무용교육 행정제도 개선을 주장하며 무용과 출신들이 ‘무용교사자격증’을 갖도록 하는 길을 열었다. 그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무용교육위원장 재임시 무용강사풀제 행정 및 관리체계를 조직화해서 실천했다. 무용(예술)교육 원리를 알리기 위해서 그는 초·중등 무용교수-학습과정안 및 초등학교 학년별 무용 교과서를 발간했다. 소년원 무용과 아동복지 무용교수-학습과정안, 그리고 여성 결혼이민자 무용프로그램 연구에도 적극 나섰다. 그는 또한 ‘한국무용교육원’을 설립해서 커뮤니티댄스 교육과정을 개발과 지도자 연수를 통해 일반인에게 무용을 알리고 실천하는 일도 했다. 예술가 김화숙의 활동은 독창적이다. 우리 춤을 기본으로 삼고 포스트모더님즘 양식의 무용을 모색하는 실험적인 공연을 시도하고 있다. ‘무용으로 쓰는 역사’를 주제로 하는 혁신적인 창작활동과 90여 편의 다양한 작품의 안무를 했다. 그는 또한 무용 기록의 개선을 위해 CD-Rom 〈오월의 눈물〉을 제작했다. 
  
그의 활동이 국내외에 전파되면서 “세계현대무용사전(International Dictionary of Modern Dance,1998)”과 “세계춤사전(The Oxford Dictionary of Dance,2000)”에 그의 업적이 등재되었다. 무용가 김화숙은 제1회 대한민국무용제에서 〈창살에 비친 세 개의 그림〉으로 우수상(1979), 제7회 대한민국무용제에서 〈비나리〉로 연기상(1985), 〈흙으로 빚은 사리의 나들이〉로 ‘87 최우수예술가상(1987), 제11회 대한민국무용제 〈뒤로 돌아 이 소리를〉로 안무상을 수상했다. 1997년에는 춤평론가회에서 〈편애의 땅〉으로 우수작품상을 수상했으며, 예술전문지 〈객석〉에서 ’올해의 예술가‘로도 선정되었다. 2001년 한국현대무용진흥회에서 이사도라 무용예술상과 2009년 무용교육자상을, 2013년 대한토목학회에서 토목문화대상과 한국무용교육학회 무용학술상을 수상했다. 또한 2015년 황조근정훈장(대통령상), 2016년에는 제4회 아름다운무용인상, 2023년 대한무용협회에서 대한민국최고무용가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김화숙&현대무용단사포 30주년 기념도록 〈사포의 시간 1985-2015〉(2016)을 출간하고, 그에 앞서 〈김화숙의 춤길 40년ㅡ 춤이 있어 외롭지 않았네〉는 2010년에 간행되었다. 이 모든 간행물에는 공연 사진과 관련 기록, 중요 평문 등이 첨부되어 있다. 
  
김화숙 무용창작품을 연대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중학생을 위한 작품(1972-1977) 
    
고등학생을 위한 작품(1973-1979) 
    
대학생을 위한 작품(1969-1996) 
    
연구발표를 위한 작품(1971-현재)은 김복희·김화숙현대무용단(1971-1991) 작품과 
    
김화숙&현대무용단사포(1985-현재) 작품이 포함된다.
김화숙 작품목록(1971-2024) 연도별 목록과 해설
 
 1970년대 
1. 4상의 디자인 1971.11.21. 명동국립극장, 서울
2. 어느 날 오후에 1971.11.21. 명동국립극장, 서울
3. 날아오르는 선 1971.11.21. 명동국립극장, 서울
4. 아! 여기 꿈을 찾는 인간이 1971.11.21. 명동국립극장, 서울 
5. 의식의 빛 1971.11.21. 명동국립극장, 서울
6. 함께 가야 한다 1971.11.21. 명동국립극장, 서울
7. 법열(法悅)의 시 1971.11.21. 명동국립극장, 서울
이상은 김화숙의 첫 개인 발표회. 1971년 겨울, 우리 정치와 사회는 스산하고 험난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20대 초반에 국립극장 첫 무대에 섰다. 김화숙은 순수한 열정과 용기에 넘쳐 있었다. “육체로서 오묘한 진리를 한없이 담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무용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김화숙은 이 공연 프로그램에 적고 있다.
8. 춘향 이야기 1975.11.22. 국립극장 대극장, 서울
    “우리는 오늘날 이 시대의 우리 춤을 추어야 하며 우리만의 육체언어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춘향전을 재해석하여 〈춘향 이야기〉를 만들었다. 남자 무용수가 귀하던 시절이라서 김복희가 춘향 역을 김화숙이 이도령 역을 맡았다. 변사또 역은 한양대 체육과 남학생 김광섭을 섭외했다. 
9. 벽 1975.11.22 국립극장 대극장, 서울
10. She was a visitor 1975.12.6. 크리스찬 아카데미, 서울
    이화여대 출신으로 구성된 컨템포라리 창단 공연으로 대학 동문단체 무용단의 시발점이 되었다. 
11. Three Dance Movement 1977.12.17. 국립극장 소극장, 서울
12. Cafe 1977.12.17. 국립극장 소극장, 서울
13. 빛과 그늘 1978.12.2. 세종문화회관 소강당, 서울
14. 덫 1978.12.2. 세종문회회관 소강당, 서울
15. Come out 세종문화회괸 소강당, 서울
16. 겨울 가지 세종문화회관 소강당, 서울
17. 창살에 비친 세 개의 그림 1979.10.12. 세종문화회관 소강당, 서울 (제1회 대한민국무용제 참가 작품)
 1980년대 
18. 아침 비 1980.12.13. 세종문화회관 소강당 서울(김화숙 솔로 출연) 
   〈아침 비〉는 김화숙의 어린 시절에 김기진 선생의 피아노에 맞추어 춤추던 과거를 회상하는 서정적인 작품이다. 김기진 선생과의 인연은 “서석초등학교 밴드부, 광주 KBS 합창단 단원, 피아노와 노래를 지도하신 선생님으로 성인이 될 때까지 만남이 이어졌다. 성악과 피아노에서 무용으로 변심한 제자를 위해 선생님은 무대에서 직접 피아노를 연주해주셨다”고 김화숙은 전했다.
19. 고추 먹고 맴맴 1980.12.13. 세종문화회관 소강당, 서울
    어린 시절 부르던 노래는 항상 즐겁다. 그 노래를 회상하며 춤을 춘다. 이 노래는 그에게 인생유전의 철학을 사색하게 했고 그런 춤을 유도했다. 아득한 곳을 향해 젊음은 꿈을 안고 비상한다. 남성 무용수 전용일은 당시 미술대학 학생이었다. 무용으로 돌진하던 그는 후에 미술대 교수가 되었다.  
20. 문(門) 1980.12.13. 세종문화회관 소강당, 서울
21. 징깽맨이의 편지 1981.10.15. 문예회관 대극장 서울(제3회 대한민국무용제 참가작품)
22. 앙상블 1982.5.15. 문예회관 대극장, 서울 
    당시 흔치 않았던 무대 위 라이브 연주로 화제가 되었던 이 무대는 한 번 공연 후 더 이상 공연할수 없었다. 연주자와 무용수들이 연습 시간을 맞추는 일이 어려웠기 떄문이다. 음악 연주와 무용과의 교감은 충분한 연습으로 가능한데 그 일이 여의치 않아서 힘들었다.  
23. 아버지, 아버지 1982.8.6. 한국일보 강당, L.A. 미국 
24. 비가(悲歌) 1982.8.6. 한국일보 강당, L.A. 미국
25. 호곡(號哭) 1982.10.31. 문예회관 대극장, 서울
26. 十干十二支 1983.11.25. 문예회관 대극장, 서울
27. 하늘에 있는 친구에게 1984.3.28.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서울
    이 무용에 대해서 김화숙은 짧지만 알찬 글을 남겼다. “춤은 몸으로 쓰는 시다. 줄거리를 나열해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아도 몇 마디의 단어만으로도 감정이 전달되는 시처럼 무용 또한 움직임만으로 도 관객에게 감정이 충분히 전달된다.” 조병철 시인의 ”하늘에 있는 친구에게“는 나의 속내 어디쯤을 흔들어 깨우기에 충분했다. 
28. 열마당 열두거리 1984.3.28.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서울
29. 환(幻) 1985.3.6. 소극장 산울림, 서울
30. 비나리 1985.10.18. 문예회관 대극장, 서울(제7회 대한민국무용제 참가작품)
    김화숙은 한동안 무술(기천무)에 빠져있었다. 연남동 연습실과 흰 눈 쌓인 종묘에서 수련하며 기(氣)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그 시기에 만들어졌다. 기가 넘칠 때 작품은 관객이 먼저 느낀다.  
31. 흙으로 빚은 사리의 나들이 1987.3.14. 호암아트홀, 서울(창작활성화 지원 작품)
    화엄경 읽기 3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사리‘가 세상 나들이하며 보고 무엇을 깨달았을까. 인간은 지구를 통과하는 나그네라는 것이다. 제자 김승근과의 듀엣이 호흡을 잘 맞추고 있었는데 공연 전에 주역 무용수 김화숙이 다리를 다쳐 춤이 무산되었다. 딸 김 솔이 ”엄마. 휠체어 타고 무대인사 하는 모습 너무 예뻤어요“라는 말로 그는 위로를 느꼈다.  
32. 흔적 878 1987.8.22. 국립현대미술관 분수대, 서울
33. 마른 풀 1988.4.25. 문예회관 대극장, 서울(김화숙 솔로)
    김화숙은 말했다. ”〈마른 풀〉은 나 자신이었다. 현대춤작가12인전에 참가했던 〈마른 풀〉은 다리부상 때문에 꼬박 1년을 쉬었다가 다시 서는 첫 무대였다. 무용수에게 아킬레스 부상은 다시는 춤을 출 수 없을 것이라는 예고와도 같다. 〈마른 풀〉은 무대에서 최초로 추었던 순간보다도 더 많은 불안과 두려움을 경험한 무대였다. 
34. 담배 먹고 맴맴 1988.9.3. 국립현대미술관 야외조각장, 서울
35. 요석(瑤石), 신라의 외출 1988.9.29. 문예회관 대극장, 서울 
“이 작품은 원효의 여인 요석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원효를 피계(避界)시킨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생명력을 불어넣어 원천으로 해탈의 경지까지 이르게 했던 깨어있는 여성으로서의 요석으로 형상화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국제예술제 참가작이었던 이 작품은 남자무용수의 대거 출연으로 많은 무용인들의 부러움을 샀다.   
36. 뒤로 돌아 이 소리를 1989.10.14. 문예회관 대극장, 서울(제9회 대한민국무용제 참가 작품)
 
   “종소리는 감동의 소리/어머니의 목소리/마음을 열어주는 소리/ 영원의 눈을 틔어주는 소리였다.”(1-36은 김복희와 공동 안무임)
 1990년대 
(46/54/57은 광주민중항쟁 무용삼부작임)
37. 한여름 밤의 꿈(연출) 1990.8.5.-7. 변산해수욕장, 변산 
38. 거울 속의 카르멘(연출) 1991.10.2. 원광대 노천극장, 익산
    카르멘1_ 죽음. 카르멘2_ 열정. 카르멘3_ 유혹. 카르멘4_ 만남. 카르멘5_ 사랑.
    김화숙은 말했다. “야외 공연장 주위 환경은 살아있는 무대장치다. 원광대학교 교정에 새롭게 만들어진 노천극장! 어느덧 내 뇌리에서는 무대를 그리며 춤추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카르멘이 떠올랐다. 객석의 텅 빈 계단, 그리고 탁 트인 하늘. 〈거울 속의 카르멘〉은 이 야외무대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대학 교정에 새롭게 피어난 카르멘! 카르멘의 자유로움과 열정, 그리고 깊게 감추어진 죽음의 그림자! 거울 속에 비춰진 칼멘의 내면세계를 다섯 가지 색으로 채색했다. 이 작품에서 군무는 내용 전개를 도와주고 칼멘의 감정을 반전시키기는 역할을 백분 소화해냈다.”     
39. 여자가 모자를 쓸 때(연출) 1992.3.22. 문예회관 대극장, 서울
40. 취한 배(연출 김화숙, 시 A. Rimbaud, 대본 한혜리, 안무 신용숙) 1993.3.1. 포스트극장, 서울. 
    이 공연을 앞두고 난 교통사고를 딛고 안무자이자 주역 무용수인 신용숙을 춤을 추게 만들기까지 연출자의 입장에서 김화숙은 관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다고 한다. 
41. 오렌지 꽃향기는 바람에 날리고(안무 김화숙, 조안무 강형숙·신용숙) 1993.8.26. 금호문화회관 앞뜰, 광주. 
금호문화회관 앞뜰에서 금호문화 100호 기념으로 공연되었다. 
42. 그들은 꿈꾸고 있었다(김화숙 연출, 대본 한혜리, 미술 이순종, 안무 신용숙) 1993.9.25. 우송회관, 대전  
    제2회 지방무용제 참가작으로 12단체가 참가해서 10단체가 수상했는데, 사포는 ’해당사항 없음‘이었다. 이 당시 무대 소품으로 시용했던 거대한 배를 끌고 이 작품은 ’94 상해예술제에 참가했다. 
43. 가끔씩 그 소리가 들렸다 1994.11.7. 학생회관, 전주. 
    “어느 날, 필립 그라스의 음악이 내 마음에 들어와 떠나지 않고 머물러 이 작품을 만들었다.” 김화숙의 소감이었다.
44. 사라지는 것에 대한 진혼곡(연출) 1994.11.12. 전북예술회관, 전주 
45. 춤 선(禪) 1995.4.27. 원불교 총부 반백년기념관, 익산
46. 그해 오월(안무 김화숙, 대본 한혜리, 작곡 윤명오, 조안무 강형숙·신용숙) 1995.5.31. 문예회관 대극장, 광주(광주민중항쟁 무용삼부작 1부. 1998년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재공연) 
    이 작품에 대해서 김화숙은 공연 프로그램에 글을 남겼다. “네 장면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한혜리의 대본이었다. 한혜리는 사건 당시 대학생이었다. 객관적 시각으로 작성된 대본은 안무 작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안무는 작가와 수많은 토론을 거쳤다. 1994년 상해예술제 참가를 위해 중국에 가서 작곡가 윤명오 교수(상해음악원)를 만나서 80분 대작의 작곡을 의뢰(依賴)했다. 1985년 5월 31일 오후 7시 광주 문예대극장에서 개막된 삼부작 첫 공연의 감동을 나는 잊을 수 없다. ”80년 5월 어느 날 그는 장흥에서 걸려온 고모님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내가 걸어서 광주 댕겨왓는디, 느그 아부지 돌아가셔 부렷다. 그래도 걱정 마라잉, 관은 구했응께.” 김화숙 안무는 계속 속마음을 털어놨다. “꽤 많은 작품을 안무했지만, 늘 새로운 작품을 시작할 땐 두렵다. 그 어느 작품보다도 〈그해 오월〉      은 단숨에 작품을 끝냈다. 왜 그 징한 오월을 자꾸만 들먹이냐는 광주 사람들의 깊은 탄식이 내 가      슴을 쓸어내린다. 시간이 멈춰 버린 듯, 암울한 거리!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 이제 그만 우세요’라고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나는 춤으로 풀어 보려고 한다. ‘참 좋은 세상’을 위해 목숨을 바친 모든 분들에게 그리고 아버님 영전에 이 작품을 바친다.”  
47. 9月의 신부 1995.9.14.-15. 중외공원 야외무대, 광주(제1회 광주비엔날레 초청작품) 
48. 거울 없는 방 ll (연출) 1995.12.4. 문예회관 소극장, 서울 
49. 다시 핀 그대에게(안무 김화숙) 1996.5.31. 덕진종합회관, 전주
    김화숙은 말했다. “100년이란 긴 세월 고국 땅이 아닌 타국 땅에서 떠돌았던 영혼! 이 작품은 이렇게 102년 만에 고국 땅을 밟는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해 봉환 추모제’에 진혼무(舞)로 치루어졌다. 외침과 침묵 사이를 오가며/ 긴 시간 잠들지 못했으나/오늘, 잠보다는/ 죽음의 모습으로/ 그대 앞에 선다. 
50. 여름 달(안무 김화숙, 대본 한혜리) 1996.7.7. 광안리 해변무대, 부산. 
   지평선과 넘실대는 파도. 아그네스 발차(Ballsa)의 ‘기차는 8시에 떠나네’는 바다 정경과 잘 어울린다. 남성 무용수 세 명이 관객석에서 무대로 뛰어오른다. 한혜리 대본의 무대는 아름다웠다. 해변 무대와 바다, 배, 떠도는 구름, 그리고 태양은 눈부신 배경이 되었다. 즉흥성이 빛나는 가동성 무대는 보기는 쉽고 좋지만, 무용은 즉흥성으로 더 어려웠다고 김화숙은 실토했다.
51. 겨울 태양(연출 김화숙, 대본 한혜리, 안무 신용숙) 1996.8.1. 부산무용센터, 부산 
52. 누군가 앉았던 의자(연출 김화숙, 대본 한혜리, 안무 신용숙) 1996.10.25. 포스트극장, 서울
 
   사포 대표 신용숙에게 춤의 참맛을 느끼게 해준 작품으로 연출자의 입장에서 제자 신용숙에게 최고의 찬사를 해준 작품이라고 김화숙은 회고한다. 2007년 허망하게 떠나버린 제자를 그리며 “그녀는지금 춤을 멈추고 무슨 생각을 하며 사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라는 글이 쓸쓸하게 여운을 남긴다.   
53. 불의 춤 1997.2.2. 무주 스키장, 무주(‘97 동계유니버시아드 폐막식 작품)
54. 편애의 땅(안무 김화숙, 대본 한혜리, 사진 이상일, 무대 권오진, 조안무 강형숙·신용숙) 1997.4.30-5.1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서울(광주민중항쟁 무용삼부작 2부) 
 
   무용수들에 대한 안무가의 주문은 혹독했다. “등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 등이 울음을 나타내야 해. 가슴에서부터 몸이 저절로 움직일 때까지 연습을 해야 해. 손끝 발끝에서도 감정이 피어나게 해야 돼.” 이런 격심한 연습을 겪으며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관객은 2, 3층 객석에서 안개 낀 편애의 땅을 깊은 감동을 느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춤이 펼치는 격동적인 움직임과 파란의 동작으로 편애의 땅, 슬픔의 땅, 소외된 땅이 관객들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관객들은 그 땅을 끌어안고 군무와 함께 뛰고 있었다. 특이한 무대 설정 때문에 안무와 무용수들은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김화숙의 노련한 안무의 연륜과 무용수들의 숙달된 기법으로 난관을 극복하고 감동적인 기념비적 무대를 창출해냈다. 
55. 손을 주세요(김화숙 안무, 한혜리 대본, 조안무 강형숙·신용숙) 1997.10, 25. 중외공원 야외무대, 광주.(제2회 광주비엔날레 초청 작품)
56. 겨울 강(연출) 1996.12.6. 문예회관 대극장, 서울.
 
   〈겨울 강〉이라는 주제로 3개 작품이 구성되어 각기 다른 이미지로 표현되지만, 그 이미지를 하나의 주제 속에 담도록 했다. 세 사람의 다른 안무자가 풀어내는 무용이 같은 주제로 귀납(歸納)되는 실험적 무대가 무용계와 관객의 관심사가 되었다. 이 작품은 사포의 테마 무용으로 각광을 받았다. 
57. 그들의 결혼(안무 김화숙, 대본 한혜리, 조안무 강형숙·신용숙, 미술 사이트라인) 1998.5.13.-14.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서울(광주민중항쟁 무용삼부작 3부)
    이 작품의 주제는 용서, 화해, 사랑이다. 김화숙은 망월동에 놓인 신부의 사진을 바라보는 순간 춤의 영감이 떠올랐다고 한다. 
58. 춤추기, 꿈꾸기, 춤추기 1999.10.4. 원광대 노천극장, 익산
59. 기억의 강 1999.12.19. 덕진공원, 전주(혼불 작가 최명희 1주기 추모공연)
 2000년대 
60. 춤이 있는 풍경 2000.10.13. 전북대삼성문화관, 전주
61. 또 다른 시작 2001.9.25. 솜리예술회관, 익산
62. 달이 물속을 걸을 때(김화숙 안무. 한혜리 대본. 표종현 미술. 조안무 강형숙·신용숙) 2001.12. 8-9.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서울
    김화숙 춤 30년이라는 부제가 붙었던 그의 62번째 작품은 모녀가 한 무대, 한 장면에 함께 춤을 출 수 있었던 감동적 순간을 보여주었다. 김화숙은 이 작품에 대해서 말했다. “세상에는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사진 속의 두 여자 무용수. 이 들은 딸 김 솔과 제자 신용숙이다. 이들은 딸과 제자로서가 아니라 내 모든 것을 다 쏟아부은 고귀한 작품 그 자체였다. 춤을 추면, 춤 속에 빠져 버렸던 두 사람은 구름 위에서도 춤을 추고 있을까?” 
63. 지울수 없어라-소야곡(총연출 김화숙, 대본 한혜리, 안무 신용숙·김옥·박순옥·이흥민, 판소리 조용안, 정애란) 2004.11.13.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 전주
64. 그대여 돌아오라(안무 김화숙, 대본 한혜리, 미술 표종현, 의상 엄규선, 조안무 신용숙)
65. 스치듯 속삭이듯 2005.11.8. 솜리예술회관, 익산
66. 사랑은 말하지 않아도(안무 김화숙, 대본 한혜리) 2006.7.9. 해운대 특별무대, 부산
67. Beautiful Memories(총연출 김화숙. 대본 한혜리. 안무 신용숙·박순옥·김자영) 2006.11.11.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 전주
    안무가 김화숙은 회상한다. “이 작품은 사포 창단부터 21년 동안 유일하게 단 한번도 빠짐없이 사포 무대를 지키며 대표를 맡아온 무용가 신용숙의 마지막 무대가 되었다.” 김화숙은 그의 생전 모습을 회상하였다. 
68. 길을 가다(총연출 및 대본 김화숙, 안무 김옥·김자영·강정현, 무대 표종현) 2008.11.8.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 전주 
69. 눈물 어릴 나의 사랑(안무 김화숙, 대본 한혜리, 조안무 김자영·강정현) 2009.7.4. 광안리 특별무대, 부산. 
    켜켜이 묻어둔 눈물/ 가슴에서 꺼내어/ 눈물 속에/ 저만치서 다가오는/ 내 사랑이 보인다. 김화숙은 이런 구슬픈 정감으로 눈물 속에서 춤을 발산(發散)했다. 
70. 지나가리라(연출/대본 김화숙, 안무 김옥·김지영·송현주) 2009.11.28.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 전주 
 2010년대 
71. 우리는 사랑했을까(연출/대본 김화숙, 미술 표종현, 안무 박진경·김자영·강정현) 2011.10.??.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 전주 
72. 사포, 말을 걸다 1 – 안녕하세요(연출/대본 김화숙, 안무 박진경·김자영·김정현) 2012.5.25. 봄 전주 
73. 사포, 말을 걸다 1 – 누구신가요 2012.6.30. 봄, 전주
74. 사포, 말을 걸다 1 – 아! 거기 당신 2012.7.21. 봄, 전주
75. 사포, 말을 걸다 1 – 등을 기대고 212.8.25. 봄, 전주
76. 사포, 말을 걸다 1 – 바람결 그대 2012.9.22. 봄, 전주 
77. 사포, 말을 걸다 2 2012.10.31. W갤러리 1층, 익산
78. 검은 태양(안무 김화숙. 영상 미하이 그레쿠. 출연 박진경·최은봉) 2012.12.25.-26. 아르코미술관, 서울(육완순현대무용단 50년 페스티발 참가작품) 
79. 사포, 말을 걸다 3 2013.9.30. 파라디소 페루두또, 군산
80. 사포, 말을 걸다 4 2014.7.13. 청운사, 김제
81. 시선이 머물다(연출) 2014.10.25. 솜리소극장, 익산
82. 시포, 말을 걸다 5 2014.12.27. W미술관 2층, 익산
83. 사포, 말을 걸다 6 2015.5.31. 광한루원, 남원
84. 사포, 말을 걸다 7 215.7.18. 청운사, 김제
85. 사포, 말을 걸다 8 2015.10.23. (구)시청, 군산
86. 사포, 말을 걸다 9 2016.5.31. 광한루원, 남원
87. 사포의 겨울 숲(연출/대본 김화숙) 2016.10.15. 한국솔문화의전당 연지홀, 전주
88. 사포, 말을 걸다 10 2018.1.27.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 전시장, 남원
89, 사포, 말을 걸다 11 2019.5.25.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 야외, 남원
90. 인생 Life 2019.11.13. 아르코대극장, 서울(대한민국무용제 40주년 기념 작품)
 2020년대 
91. 기억 저편-해월리 362(대본/연출 김화숙) 2020.9.26. 산속등대. 완주 공간탐색-1
92. 차마 그곳이 잊힐리야(대본/연출 김화숙) 2022.10.15. 영모재. 정읍 공간탐색-2
93. 간이역(대본/연출 김화숙) 2023. 10.14. 서도역, 남원. 공간탐색-3
  
  
사포의 소극장 공연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990년 6월 23일 전주 예루소극장에서 전북가림다춤판 강형숙의 춤 〈검은 눈 ll〉을 시작으로 2019년 9월 21일 사포소극장 시리즈 조다수지의 춤 〈비상〉(전주 우진문화회관)에 이르기까지 36편이 공연되었다. 소극장 공연에 참여했던 무용가는 강형숙, 신용숙, 신경옥, 황경숙, 김옥, 이경희, 이진호, 황희선, 조은정, 박진경, 박순옥, 유화영, 임경희, 김자영, 오미선, 이현승, 정경화, 정세라, 송현주, 이흥민, 김정철, 강정현, 박효준, 윤지애, 김유진, 조다수지, 최은봉, 김슬기 등이었다.
  
야외춤판은 1990년 7월 22일에 전주 인터체인지 총화탑 잔디밭에서 〈7월의 소리〉(공동안무)로 시작되어 2023년 10월 14일 남원 철도역 주변에서 〈간이역〉(연출&대본/김화숙, 안무/김옥·박진경·김남선·조다수지)에 이르기까지 총 31편의 공연이 이루어졌다. 사포가 찾아간 야외 공간은 변산해수욕장, 원광대 노천극장(익산), 금호문화재단 앞뜰(광주), 중외공원 야외무대(광주), 국립전주박물관(전주), 토탈미술관(서울), 공간 봄(전주), W갤러리(익산), 파라디소 페르두또(군산), 청운사(김제), 광한루원(남원), 구시청(군산),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 갤러리2(남원),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 야외, 산속등대(완주), 영모재(정읍), 서도역(남원) 등지였다.
  
특별공연과 초청공연은 1987년 6월 5일-7일 창무춤터(서울)의 기획공연 〈메주는 떠야〉(공동안무), 〈I am I〉(신용숙 안무)로 시작되어 2020념 3월 28일 우진문화공간(전주)이 기획한 우리춤작가전 신인춤판 〈다름의 모양〉(안무 윤정희)까지 62회 공연이 계속되었다. 이들 작품의 안무는 김화숙, 신용숙, 강형숙, 황경숙, 김 옥, 박진경, 박순옥, 김자영, 강정현, 숭현주, 이흥민, 김유진, 조다수지, 최은봉, 문지수, 김슬기, 박주희, 윤정희 등이 담당했다. 
  
김화숙은 1985년에서 2015년까지 사포의 지난 30년을 회고하면서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공연 활동을 했다. 공연장은 전북예술회관과 전북학생회관이 전부였다. 소극장도 없어서 지하 창고극장에서 열악한 조명시설 속에서 소극장 시리즈는 시작되었다. 이 소극장 시리즈는 35회를 기록했다. 단원들은 소극장 공연을 통해 테크닉 개발은 물론 무용 창작법을 계속 연마했다. 또한 사포 레퍼토리릐 다양화를 위해 전주인터체인지 총화탑 잔디밭에서 야외 공연을 시작했다. 조명 장치가 없어서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사용했다. 이어서 변산해수욕장에서도 공연을 했다. 원광대학 노천극장, 금호문화재단 앞뜰, 광주 중외공원 야외무대, 부산 광안리와 해운대 해변 등에서도 다양한 레퍼토리가 탄생되었다. 
  
사포는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연습실에서 연마한 무용으로 전국을 누비며 온갖 형태의 아름답고 순수한 무대를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특히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사포가 광주민중항쟁이나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한 작품을 세상에 공개한 일이었다. 그 해 5월에 일어난 일을 무용으로 보여주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치적 사건을 다루는 작품이 쉽게 용인되고 수락되고 집행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금호문화재단의 재정지원은 이 일이 가동된 계기가 되었다. 인고(忍苦)의 시간이 지나고 예술적 진통을 겪으며 1994년에 시작된 작품 제작은 1995년 5월 31일 광주 문화회괸대극장에서 광주민중항쟁 삼부작의 첫 무대로 막을 올리게 되었다. 이 공연은 무용계와 평론계, 그리고 관객의 박수갈채를 받고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3부작은 대단원(大團圓)의 막을 내렸다.
 
  
사포는 2012년 5월부터 9월까지 전주 한옥마을 까페 〈봄〉에서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사포 말을 걸다〉 5부작 시리즈 공연을 시작했다. 이 공연이 성과를 거두면서 의욕에 넘친 유능한 안무가들이 등장하고 이들의 왕성한 활동으로 사포 무용이 발전하면서 소극장 공연, 초청공연, 야외공연, 정기공연은 지속될 수 있었다.
  
창의적인 무용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김화숙 예술감독은 매우 진취적인 사상을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은 항상 새롭다. 작품마다 젊음이 번득이고 무용이 실험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랫동안 그의 관심은 무용의 창의성 연구였다. 박사논문도 그런 주제였다. 1989년 창립한 한국무용교육학회에서 2007년까지 18년 동안 회장직을 맡으면서 무용창작 이론 연구에 헌신했다. 그는 학자로서도 24권의 저서와 27편의 논문을 완성하고, 13건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또한 중·고등학교에 재직하면서(1972-1978) 13편의 중학생을 위한 작품, 고등학생을 위한 35편의 작품, 그리고 대학 강의를 맡으며 대학생을 위한 48편의 작품을 창작했다. 그리고 1971년부터 2023년까지 93편의 연구를 위한 작품을 완성했다.
 
  
김화숙&사포 무용에 대한 평론은 신문 잡지에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그 중에 일부의 평론 제목과 필자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의욕과 창의가 충만한 무대”(구자운, 무용한국,1975)
    
“현대무용을 깊게 이해한 현대무용”(이성, 무용한국,1979) 
    
“세계무대에 손색이 없는 수준”(김영태, 한국일보, 1981) 
    
“감동의 예술적 사건이었다”(이자경, LA 한국일보, 1982) 
    
“얼마쯤은 인생의 시를 느끼게....”(박용구, 중앙일보, 1982) 
    
“한국 무대예술 日서 신선한 충격”(구희서, 일간스포츠, 1983)
    
“무용의 상업화 가능성 싹터”(박영선, MBC가이드, 1984) 
    
“무용실험과 동화적 색조의 형이상학”(이상일, 춤, 1986), 
    
“꾸준한 지방 활동에 찬사”(김경옥, 예술계, 1986) 
    
“춤과 미술의 접목” 〈흔적,878 공연〉(김태원, 한국일보, 1987) 
    
“한층 성숙된 변모의 춤 세계를 보여준 수작”(김경애, 서울신문, 1989) 
    
“죽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한혜리, 무등일보, 1990)
    
“그 날, 그 거리, 숨길 수 없는 ...김화숙의 〈그해 오월〉(김재은, 금호문화, 1995)
    
”즐거운 야외 공연의 전형, 현대무용단사포 〈9월의 신부〉 공동작업의 모델“(이상일, 무용예술, 1995) ”제2회 춤비평가상 수상, 김화숙의 〈편애의 땅〉“(김태원, 예술춤의 중심과 주변, 1997)
    
”사포의 〈그들읙 결혼〉 광주소재 춤의 완결 편“(김태원, 공연과 리뷰, 1998)
    
”리바이벌 통한 완성도 높이기 작업, 화제의 무용 〈그 해 오월〉“(장광열, 객석, 1999), 
    
”진실된 몸짓, 사포무용단 〈우리는 사랑했을까〉(유인화, 춤, 2011)
    
“예술과 삶의 경계는 사라지고, 사포, 5월 어느 날 전주 한옥마을에서 말을 걸다”(정옥상, 전북일보, 2012), 
    
“공간과 움직임의 새로운 조합을 통한 영역확장, 김화숙&현대무용단사포 전주한옥마을 공연”(장광열, 춤웹진, 2012)
    
“마음을 낚은 나비의 꿈, 김화숙&현대무용단사포의 〈말을 걸다〉”(권옥희, 공연과 리뷰, 2012)
    
“자기성찰의 고요함으로 오롯이 끌어 들이는 현대무용단사포의 〈말을 걸다〉(한혜리, 춤, 2014) 
    
”춤으로 불러낸 지나친 기억들, 사포의 겨울 숲“(한혜리, 전북일보, 2016)
    
”무한한 생명력을 약동시키는 ‘사포’의 춤“(이태주, 춤, 2016), 
    
”제40회 서울무용제 개막공연- 무념무상 김화숙의 작품, 보편적 〈인생〉“(이상일, 몸, 2019) 
    
”서울무용제 40주년의 의미와 가치를 높이는 무용가들“(심정민, 춤,2019), 
    
”새로운 공간과 기억의 여정– 사포현대무용단 제33회 정기공연 ‘기억 저편-해월리 362“(윤시향, 전북일보, 2020)
   
”현대무용단사포, 새로운 공간과 기억의 여정“(윤시향, 춤, 2020)
    
”김화숙&현대무용단사포 영모재 공연“(이태주, 댄스포럼, 2022)
    
”환경무용론“(이태주, 춤, 2022), 
    
”정읍 교방(敎坊) 〈영모재〉의 낯선(異化) 정겨움, 현대무용단 사포의 공간탐색 〈차마 그곳이 잊힐리야〉(이상일, 2022)
   
“후회와 의심과 불안을 관조하게 하는 춤”(한혜리, 춤, 2023)
    
“김화숙&현대무용단사포 〈간이역〉”(이태주, 댄스포럼, 2023) 
    
“센티멘탈리즘의 극치에 이른 많은 서사(敍事)의 쓸쓸함과 원숙미”(이상일, 숙맥, 2023)
    
“춤이 만들어낸 순간의 신기루, 삶의 진실”(권옥희, 춤웹진, 2024)
    
“공간, 바람이 머문다.”(표종현, 춤, 2024) 
    
“시간과 역사의 현존(現存)이 된 무용”- 김화숙&현대무용단사포의 “Again 간이역”을 보고(이태주, 댄스포럼, 2024) 
  
  
1971년 [김복희·김화숙현대무용단]을 창단하고, 1991년 해체될 때까지 무용가 김화숙은 36편의 작품을 공동 제작하고, 안무하며, 출연했다. 또한 1985년 [김화숙&현대무용단사포]를 창단하여 현재까지 60여 편의 무용 작품을 안무, 연출했다. 그의 작품을 주제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역사적 사건을 다룬 작품, (2)유적지 탐방 야외공연, (3)한국 예술의 전통적인 미학을 탐구하는 서정적 작품, (4)철학적인 심원한 사상을 다양한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초월적 내용의 작품, (5)관객과 직접 소통하며 무대공간의 혁신을 추구하는 실험적인 작품 등이다.
     
lll. 평가(評價)
- 사포의 무용 분석과 비평
  
김재은 교수는 무용가 김화숙을 “창조적 상상력이 넘치는 무용가”라고 평가했다. 특히 무용교육자로서의 김화숙의 공로를 중요시했다. “김화숙은 학교무용교육의 목표와 방향을 정립하고, 모든 계층의 학생을 위한 예술교육의 토대를 확립했다. 이를 위해 한국무용교육학회 연구팀과 함께 개발한 무용교재(초·중고등학교 무용교수-학습과정안, 초등학교 학년별 무용교과서)는 무용교육 발전을 가속화시키는 힘”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이 밖에도 김화숙 교수는 대학무용학과 졸업생의 취업을 위해 2005년 ’예술강사지원사엄‘을 시작하면서 2009년 1.100여개 학교에 676명의 예술강사를 보낸 업적을 이룩한 사실도 언급했다. 김재은 교수는 무용가인 김화숙의 교육자로서의 측면을 강조하면서 무용 이론을 교실에서부터 무용 현장으로 옮겨 실천한 공로를 중요시했다.
  
  
평론가 이상일은 김화숙 최고의 업적은 광주민중항쟁 무용삼부작 〈그해 5월〉 〈편애의 땅〉 〈그들의 결혼〉이라고 말하면서 “김화숙의 행보는 한국현대무용의 정품예술을 다듬어 나온 시간의 정제(整齊)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이상일은 김화숙의 결정적 순간은 그가 무용교육자로서 그리고 무용예술가로서의 이중적 사명을 깨달았을 때 가능했다고 말했다.
 
  
삼부작에 대본 작가로 참여한 한혜리 경성대학교 무용과 교수는 김화숙 선생의 고등학교 시절 제자였다. 그는 김화숙 선생을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어 무용예술에 헌신하는 인생을 살게 되었다. 사포는 그의 둥지요, 과제요, 책임이었다. 그는 민감하고, 이지적이요, 날카로운 감성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김화숙 선생을 존경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음의 동행자요, 예술의 동반자가 되었다. 한혜리 교수는 “스승과의 대화”라는 글을 남겼다. 그 속에서 우리는 두 사람의 인간적이며 예술적인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사포무용단은 집중적인 연습 기간이 길어서 삼부작을 위한 준비는 충분했다. 김화숙 선생님의 안무로 그동안 수차레 무용단 공연이 진행되어 무용수들의 기량은 급격히 향상되고 있었다. 삼부작에서 어머니를 중심축으로 세우는 일에 나와 선생님은 합의하고 선생님은 어머니로 등장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상징성을 관객들과 공유하는 일은 중요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5월의 광주를 춤으로 네레이션 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미지 플롯에 따른 주제적 움직임 개발은 필수적이었다. 안무과정에서 선생님이 만들어 낸 주제 움직임이 내포한 강한 민족 성향과 그 춤이 가진 시대적 동조성, 그리고, 움직임 패턴의 반복과 변형을 군무의 구도로 풀어가는 안무법은 연습광경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감탄을 연발하게 만들었다. 
    
1부 작품 〈그해 5월〉은 70분이 넘는 장편이었는데 잠시도 느린 전개를 참지 못하는 선생님의 안무 규범 때문에 긴장과 이완을 적절히 배치하는 데 주력하였다. 선생님이 만들어내시는 움직임 패턴들, 그리고 제자 신용숙이 40여명이 넘는 무용수들에게 훈련에 훈련을 거듭시키면서 무용수 개개인을 춤추게 만들던 작업 과정은 지금도 아름답게 기억되는 시간이다.
    
2부 작품 〈편애의 땅〉은 고립을 강조하기 위해 위에서 내려다보는 무대를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 새로이 만들었으므로 선생님은 원형무대가 갖는 안무적 고충을 고스란히 극복해야 했다. 무용수들은 사방의 구별이 없는 무대에서 등, 퇴장부터 어려움을 겪었고, 무용수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2층 객석을 향한 시선 때문에 한 명씩 돌아가며 목뼈 이상을 호소했다. 〈편애의 땅〉 마지막 장면에서 솔베이지 노래가 반주 없이 흐르고 선생님이 퇴장하시며 같은 빛줄기 아래 서 있는 제자 신용숙을 바라보시는 그 장면은 돌아오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인간의 자세를 담아내려고 삽입한 부분으로 3부 작품 〈그들의 결혼〉에 대한 예고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작품이 주는 전율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아마도 스승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버린 제자 신용숙의 삶이 겹쳐져서인지도 모르겠다.
    
3부 작품 〈그들의 결혼〉은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무대를 앞뒤로 경사지게 만드느라 당시 무대미술이 아파트 기초공사와 비견되는 기초 목공작업을 하느라 리허설 일정이 하루 늦어졌다. 조명디자이너의 설치작업과 무용수들의 연습 시간 부족으로 몹시 소란스러운 리허설 시간을 보냈다. 꽃 같은 나이에 세상을 달리한 수많은 광주인들에 대한 애잔함과 그들 없이 살아가는 남은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자고 했던 것이 마지막 세 번째 작품 〈그들의 결혼〉이다. 살면서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것이 무엇일까? ’아름다운 것을 보는 일‘이라는 것으로 선생님과 나는 합의를 보았다. 무용에서 조용한 움직임에 감동을 주기위해 몇몇 부분에 염세적 폭력성 장면을 삽입했다. 경사진 무대에 4쌍의 남녀가 있고, 남자를 향해 돌진해서 업히려는 여자와 아무런 반응도 없이 벽처럼 서서 그 충격을 고스란히 받고만 있는 지친 남자의 모습은 수없이 연습 장면을 보아온 나이지만 그 장면을 보면 항상 나는 슬펐다. ’해결할 수 없는 슬픔‘을 어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고 단어 고민만 하던 나에게 무용이 언어 저 편에 있는 그 무엇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 준 또 한 번의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평론가 김태원은 사포 공연의 실체를 분석하는 평문을 남겼다. 
    
김화숙은 90년대에 들어서 현대무용단 사포의 본격적인 전문화를 위해 세 개 범주의 작품들을 스스로 안무하거나 예술감독으로서 제자이자 후배 안무가들의 작업의 전체적인 구성과 진행을 감독하게 된다. 그 세 범주의 춤은 보다 스펙터클한 대극장용의 작품, 안무자의 개인적 창의성을 더 고려한 소극장용의 작품, 그리고 대중과 친화하기 위한 야외춤이며, 현대무용단 사포는 주목할 만한 18개의 작품을 1991년 이후 선보이게 된다. 이중 여섯 편의 야외작품은 안무자가 상당히 애정을 두고 있는 양식으로서, 이것은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적 이밴트적 구조가 아니라, 그녀의 제자이자 협력자이기도 한 한혜리와 미리 설계되어진 대본과 그것에 기초한 공연이 자연환경과 어울려 춤, 인간, 환경간의 삼자적 친화성이 두드러지면서 공연과 관객과의 자연스런 교감이 행해지는 성향을 갖는다. 이것은 특히 한국과 같이 몇 세대에 걸쳐 진행된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지역 간의 문화적 향수(享受)와 격차를 줄이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이 작업은 대학 캠퍼스 안에서, 공원에서, 미술관 광장에서, 버스터미널에서, 해변가에서 수시로 펼쳐진다. 
    
그런 한편 김화숙은 10년 이상 다진 무용단의 결집된 힘을 1994년 이후 한국현대사의 망각되어질수 없는 하나의 사건에 맞춰 일련의 연작을 시도하고 있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진혼곡〉(1994), 〈그해 5월〉(1995), 〈편애의 땅〉(1997)이 그런 것으로서, 이 작품들은 1980년도의 군부 탄압으로 인해 반민주적 폭동으로 잘못 간주된 1980년도 광주민주화운동을 되새기고 기념하는 일련의 진혼곡의 성격을 갖는다. 이 작품들은 변화하는 현대사에 대한 관심의 진지성과 오늘의 예술춤이 누릴 수 있는 다 매체적 표현방식(대본, 사진, 작곡) 등에서 안무자는 한혜리, 이상일, 윤명오를 협력자로 끌어들이고, 러시아 및 동구권의 현대작곡가인 쇼스타코비치, 고리키의 음악을 활용하여 여러 방식으로 결합하는 특성을 보여주었다. 
  
평론가 장광열은 김화숙의 역사의식과 제작 방식을 큰 업적으로 평가했다. 
    
한국사에 한 획을 긋는 광주민주화항쟁 사건이 무용가에 의해 4년 동안에 3개의 연작 시리즈로 형상화되었다. 이 삼부작은 대극장, 중극장, 소극장 공연장의 특색을 고려해 안무되었다. 이것은 춤으로 광주 문제를 풀어냈다는 가시적인 성과를 넘어 극장예술로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겠다는 제작진들의 창작의지가 담겨진 것이다. 역사적인 소재를 춤 연작 시리즈로 작업한 점, 극장의 특성을 고려한 차별화된 창작 잡업,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이번 작품은 무용계뿐 아니라 메스컴의 큰 관심을 끌었다. 
  
장광열은 〈그해 오월〉을 새로운 시각으로 논평했다.
    
현대무용단 사포의 예술감독 김화숙이 광주항쟁을 화두로 삼아 3부작으로 정리하는 작업은 충분히 우리의 관심을 끈다.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 무대(1998년 12월 3일)에 오른 〈그해 오월〉은 1995년 5월 31일 광주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초연했다. 이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우선 스케일이 크다. 28명이 출연하는 대형 군무나 소품으로 활용한 드럼통이 이동하면서 차지하는 무대공간은 넓다. 2층으로 처리된 무대세트 역시 무용수들의 이동으로 입체감을 더해 주고, 다양한 악기군을 활용한 오케스트라의 풍부한 음색 역시 이 작품이 갖는 역사성을 묵시적으로 암시한다. 다음으로 이 작품에      서 사용한 춤 움직임은 상당히 다양한 형태로 변주된다. 28명의 대형 군무, 2층 세트를 중심으로 두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가 추는 트리오, 남자 세 명과 여자 2명이 추는 5인무 등 춤 언어는 때로 자극적이고 위압적으로 섬뜩한 메시지를 전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주 절제된 동작으로 응축된 이미지를 전한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것은 또 있다. 의상이나, 조명, 음악 등 극장예술의 여러 요소들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등이 그대로 들어난 의상, 단지나 드럼통을 활용한 소품, 오케스트레이션에 의한 음악 구성, 시종 어두운 톤의 색조를 유지하는 조명 등이 이 작품의 일관된 주제를 관통하고 있다. 이 작품에는 또한 리얼리티가 살아 숨쉰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과 군인들의 대무(對舞)는 광주항 쟁이 ’현실‘임을 일깨워준다.
    
〈그해 오월〉에서 어머니는 비극의 역사, 그 현장을 목도한 증인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안무자 김화숙은 어머니 역으로 대극장의 무대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며 우리에게 ’생명‘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다. 〈편애의 땅〉과 〈그들의 결혼〉에서 보여지는 어머니의 환상과는 차별화된 구상이다. 이 작품에서 어머니는 비극의 역사, 그 현장을 목도한 한 명의 증인이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주는 메시지는 우리에게 너무나 선명하게 다가온다. 안무자 김화숙은 대극장의 무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한 작업으로 우리에게 ’생명‘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다. 김형수의 튀지 않는 영상처리, 한혜리의 대본과 김화숙 논리적인 구성력은 이 작품이 서사적인 흐름으로 흐를 위험성으로부터 예술성으로 승화케 하는 구심점 역할을 해냈다. (객석, 1999,1) 
  
1990년부터 1999년까지 평론가 이상일은 전남일보, 무용예술, 객석 지면을 통해 사포 무용단의 공연을 심도있게 찬양하며 논평의 글을 발표했다. 평론가 김태원은 춤지와 공연과 리뷰에서, 김영태는 춤지에서, 장광열은 객석 잡지에서 완성도 높은 사포 무용단의 공연을 격찬했다.
  2000년부터 2009년까지 이상일, 김영태, 이근수, 김태원, 최은경, 장광열, 도휘정, 설상채 등 평론가, 시인, 기자들이 사포무용단 공연을 논평하고 언급했다. 이들의 글이 실린 전문지와 신문은 한국연극, 몸, 공연과 리뷰. 전북일보, 춤, 아름다운 소리, 문화저널 등이다. 이들이 다룬 작품은 〈달이 물속을 걸을 때〉, 〈지울 수 없어라〉, 〈그대여 돌아오라〉, 〈혼자 그리워라〉 등이다.
 
  
이상일은 “동학의 원혼들을 달래는 현대적 진혼극”이라는 제목으로 〈그대여 돌아오라〉 평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사포현대무용단 창립 20주년을 기념하는 동학혁명 1백주기 추모공연 〈그대여 돌아오라〉는 그렇게 무용예술작품이 되어 혁명 발발 1백년 뒤에 후손들, 우리와 소통의 시그널을 주고 받았다. 동학혁명 이야기를 무용으로 엮은 〈그대여 돌아오라〉는 크게 다섯 개의 이미지로 짜여져 있다. ’오래된 함성‘ ’남루한 숨결들‘ ’아무래도 나는 가야겠다‘ ‘비로서 그대 생각’ ’해돋는 나라‘ 등 다섯 이미지의 앞뒤에 북치고, 꽃 뿌리는 짧은 프롤로그와 밝은 고음의 동요 ’따오기‘ 합창 에필로그가 붙어서 전체의 구성이 짜여진다. 그러나 연극 드라마의 장편이나 막 구성과 달라서 이미지들의 연결은 흐름이 빠르고 호흡이 가파로워서 일반 관객이라면 줄거리를 따라잡기 힘들고 무용의 추상 언어를 일상적 언어로 번역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단순히 우리의 뇌리에 남는 이미지의 여운과 잔상에 아름다움이나 메지의 강도를 부각시켜 보는 것이 옳다. 이미지 하나하나를 영화나 연극의 한 장면으로 간주한다 해도 전달의 방법이 몸/육테를 매개로 삼는 추상 언어인 무용예술에서는 구체적 서술 방식이 없다. 
    
그렇게 1백 년 전의 동학꾼들이 부활한다. 그들을 위한 현대적 초혼 굿은 진혼곡에 담긴 예술적 공양(供養) 형식이 되어 그들의 원혼(冤魂)을 달랜다. 동학의 지도자들도 결코 일치단결되어 있지 않다. 이미지 1의 남성 무용수들은 그들 사이의 갈등 같은 인간적 무늬를 느끼게 한다. 이미지 3에서 표현되는 방석의 오브제는 방석이 단순한 깔개가 아니라 죽은 자들과 살아남은 자들의 멍에가 되고 삶의 무게가 되어 가로 세로, 혹은 직선이나 사선의 뜀틀처럼 백년의 세월을 건너뛰게 한다.
    
보는 사람들에 따라 감동의 진폭이 달라지고 공감의 촉발이 달라진다. 누구는 ’오래된 함성‘을 지르는 대나무 숲의 기개와 피 묻은 창날을 연상시키는 빨간 기둥 주변의 무용적 흐름에서 한숨을 내쉬었다면 나는 ’비로서 그대 생각‘의 어머니상(像)(신용숙)에서 이 작품 전체의 메시지를 읽는다. 사포현대무용단은 광주민주화항쟁을 테마로 한 3부작 〈그해 오월〉같은 역사성과 사회성 짙은 의식과 서 정성으로 감동을 만들어낸다. ’비로서 그대 생각‘은 동요 ’따오기‘의 피아노 선율에 어린이의 맑은 노래소리를 실어 여인과 전봉준의 대결 양상을 극화한다. 이 모자상은 혁명이라는 도도한 물결가운데 부침하는 강약의 두 측면, 강인한 이데올로기적 신념과 흔들리는 개체라는 두 측면을 상징하면서 결코 역사가 일방 통행식으로 흘러가지만은 않았던 모습을 이 땅의 보편적 어머니들의 상처와 아픔과 고뇌를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비극적인 이 진혼굿의 마지막은 역설적으로 밝고 맑은 ’따오기‘ 동요의 ’해돋는 나라‘의 후렴으로 마무리된다. 원래 슬픈 어조의 이 후렴은 가야금 소리의 경쾌한 선율을 따라 비단 물결처럼 고운 집단군무위 태동을 일으키며 동학의 좌절이 결코 비극이 아니라 도전과 극복의 희망의 날개짓임을 무용예술적으로 증명해 보인다. 이 작품 발표로 다시 한번 사포현대무용단은 무용을 통해 그들의  역사의식과 사회성의 예술화를 성공적으로 성취해 내었다고 말할 수 있다.(몸, 2005.8.)
  
2010년부터 2019년까지 발표된 중요 평론 목록을 보면 이상일, 유인화, 정옥상, 김도종, 장광열, 이근수, 권옥희, 한혜리, 이태주 등이 논평을 쓰고 있다. 지면과 매체는 다음과 같다. 문화저널, 아름다운 소리, 문화저널, 춤, 전북일보, 몸, 춤웹진 등이다. 〈지나가리라〉 〈우리는 사랑했을까...〉 〈말을 걸다〉 〈바람결 그대〉 〈시선이 머물다〉 〈겨울 숲〉 등 작품이 거론되고 있다. 
  
2020년부터 2024년까지 발표된 중요 평론은 다음과 같다.
    
현대무용단 사포 새로운 공간과 기억의 여정(윤시향. 춤. 2020,10)
    
김화숙&현대무용단사포 영모제 공연(이태주. 댄스포럼. 2022.11)
    
환경 무용론(이태주. 춤. 2022.11)
    
후회와 의심과 불안을 관조하게 하는 춤(한혜리. 춤. 2023.11)
    
김화숙&현대무용단사포 ‘간이역’(이태주. 댄스포럼. 2023.11)
    
센티멘탈리즘의 극치에 이른 많은 서사(敍事)의 쓸쓸함과 원숙미(이상일.숙맥.2023)
    
춤이 만들어낸 순간의 신기루, 삶의 진실(권옥희, 춤웹진, 2024) 
    
공간, 바람이 머문다.(표종현, 춤, 2024) 
    
시간과 역사의 현존(現存)이 된 무용_김화숙&현대무용단사포의 〈Again 간이역〉을 보고(이태주, 댄스포럼, 2024) 
 
   
필자는 댄스포럼 2022년 11월호에 김화숙&현대무용단사포 〈영모재〉 공연에 관해 기고했다.
  
정읍시 진산1길 25번지는 정읍 영모재(永慕齋)가 있는 곳이다. 조선조 시대 교방(敎坊)이 있던 곳이다. 건물 모양이 풍류형 누정(樓停)이어서 아악(雅樂)이 손에 잡히는 듯했다. 솟을대문과 본체 곳곳에 남아있는 문인화와 서예는 고색창연(古色蒼然)하고 긴 역사를 머금고 있었다. 나는 두이노 성(城)을 찾은 시인 릴케의 장시 “두이노의 비가”를 떠올렸다.(중략)
  
현대무용단 사포는 이번 영모재 공연에서 역사성과 시간의 기억을 찾아서 춤의 여로를 시작했다. 춤을 통해 풀숲에 잠자던 영모재를 살려냈다. 전형적인 조선조 시대 풍류와 환경을 무용으로 자연 속에 복원했다.
  
공간(空間) 문제는 영모재 공연을 성공시킨 절대적 요인이다. 영모재 발견과 활용은 연출가 김화숙의 집념과 노력의 결실이었다. 그의 전방위 활약과 예술정신은 존경스럽다. 무대공연의 첫째 요건은 공연자와 관객의 밀접한 관계이다. 극장 공간의 문제점은 무대와 관객 사이에 벌어지는 거리(E) 때문이다. 공연은 가능하면 그 거리를 없애고 축소해야 한다. 공간은 공연자에게 하나의 방편이며, 하나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공간이 예술 행위를 돕는 조력자가 되고, 적절한 환경이 되고, 유익한 배경이 되면 그 이상 좋을 수 없다. 옥내공간은 도움이 되는 것도 있지만, 방해가 되는 것도 있다, 가장 큰 방해는 관객이 무대와 멀리 떨어져서 막으로 가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공간에서는 모든 것이 조작적이요 인위적으로 보인다.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 흠이 된다. 야외공연의 이점은 테두리와 방향은 정해져 있지만 기예를 실현하는 방법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모든 것이 자유롭고 개방되어 있는 것도 예술가의 의욕을 자극한다. 즉흥성이 최대로 보장되고, 공간과 관객의 밀접한 접촉이 가능해진다. 최대의 이점은 관객이 바로 공연자 옆에 있어서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이 경우 관객은 예술에 참여하고 있다.(중략)
  
사포의 무용수들은 공간과 시간과 역동성이 하나가 되는 기술적 어려움을 해결하면서 이번 공연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었다. 무용가는 특정한 환경과 의식적으로나 시각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특히 영모재 같은 역사적 유적의 경우 무용수는 정서적으로 공간과 자연스레 교감을 한다. 이를 통해 무용가는 영모재 속에 자신을 설정하게 되고, 그 공간의 힘에 영향을 받으며 무용을 한다. 소슬대문, 잔디밭, 돌계단, 난간, 대청마루 등 모든 공간의 구조물이 무용가의 작업장으로 탈바꿈된다. 무용수가 가옥과 야외공간을 배회하다가 앉거나, 눕거나, 원통 기둥에 매달리거나, 신체를 꾸부리거나, 서거나, 공중으로 뛰어오르거나, 몸을 넘어뜨리거나 하면서 건물의 내외 공간과 시각적인 연관성을 이루게 되면 변함없이 전개되는 기하학적 그림이 형성된다. 무용수들은 이런 모든 공간의 문제를 고려하면서 완급(緩急)을 조절하고, 상승과 하강의 변화를 능숙하게 다루면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일련의 무용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번 공연은 속도감과 박진감을 더하고 열기를 뿜었다. 잔디는 푸석푸석하고, 그 아래 바닥은 고르지 않는데, 무용수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춤은 알맞게 다듬어져 리듬을 타고 계속되면서 아름다운 풍경화가 눈앞에 전개되었다. 춤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오래 머물렀다.  
  
한혜리는 “후회와 의심과 불안을 관조하게 하는 춤”의 제목으로 〈간이역〉 평문을 ‘춤’지 2023년 11월호에 발표했다.
  
란 바그노(Ran Bagno)의 ‘안티코네(Antigone), '프롤로그'로 시작을 알리는 김화숙 연출의 〈간이역〉’은 지금과는 다른 속도로 서도역을 지나던 기차의 속도로 우리네 삶의 순간을 성찰하게 한다. 혼란스러웠던 매 순간을 지나서야 비로소 당시의 판단이 삶의 이정표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 모두의 마음에 남는 그때 우리는 충분히 생각했었는지에 대한 후회와 그 판단이 내 자신의 의지였는지에 대한 의구심 그리고 삶의 속도를 자신이 정할 수 있는 날이 오게 될까? 하는 불안은 오래전부터의 꿈인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인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이 평생 풀어나가야 할 과업이다. 〈간이역〉은 각기 다른 내용으로 채워진 후회와 의심과 불안을 관조할 수 있게 해주는 방식으로 우리를 위로한다.
  
전 출연진이 함께하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세 개의 이미지(시간의 기억, 보이지 않는 그곳에, 돌아올 수 있을까?)로 플롯이 구성되어 있다. 역사와 플랫폼 사이의 깊이보다 좌우로 길게 철로가 놓여있는 그리고 지금은 기차가 다니지 않는 서도역에서의 야외공연은 리허설의 의미가 무색한 21세기 생태환경 무용(Eco-Dance)이었다. 진행 순서, 무용수의 동선, 음향 등의 예행연습 그리고 드레스리허설 모든 과정은 그 장소를 지나는 누구에게나 공개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간이역〉은 서도역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기보다는 자연 속에서 각자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도생하는 한 생명체로서 인간을 바라보게 한 작품이었으므로 21세기 이데올로기의 제시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중략)
  
본 공연 전날인 금요일(13일) 아침 첫 리허설부터 14일 오후4시 본 공연까지 전체 공연을 3번 이상을 보면서 장면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보려고 자리를 옮겨가면서 보았다. 매번 울림이 달랐고 매번 더 울컥해졌다. 처음에는 작품이 걸어오는 말을 들었고, 몇 번째부터인가 작품 안에 있는 무용수들 개개인의 인간적인 삶이 느껴졌다. 선하고 부지런하고 그리고 소박한 그들의 삶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관습적 나이를 초월해 매번 한계에 도전하는 내 스승님 김화숙 연출가에게는 삶의 모범이 되어준 것에 가슴 깊은 존경과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유를 뒤로하고 무용으로 자신을 지키고 가꾸기를 계속하는 무용수들에게는 숙연해진다고 그래서 앞으로 늘 곁을 지켜줄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특히 출연하지 않고 기획을 전담하며 즐거워하는 강현진 기획자, 그리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명장면을 선물한 김옥 안무자 겸 무용수에게 자신의 자리를 스스로 만들고 존재감을 키워가는 성숙함에 박수를 보낸다. 매해 공연을 거르지 않는 ‘김화숙& 현대무용단사포'를 내 삶 가까이 두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실험하며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도전 정신과 용기는 그 시간 그곳에 함께했던 관객들에게 크나큰 기쁨과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간이역〉은 인류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야기하고 지구 생명체들에 대한 존중과 보존의 이유를 설명하는 동시대에 무용으로 멋지게 21세기 생명 존중의 방식을 제시한 공연으로 관객의 마음에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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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기록  | 
lV. 성찰(省察)
-사포의 현재와 미래
  
이 혼탁하고 암울한 시대에 왜 무용인가. 사포 40년을 기록하면서 나는 그 해답을 얻고자 했다. 사포는 40년을 몸으로 땅과 하늘 사이에 팔을 펼치고 우뚝 서 있었다. 사포는 지금 건재(健在)하고 미래로 질주(疾走)하는 준비에 몰두하고 있다.
 
  
공연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세계를 떠받치는 일이다. 사포는 그런 자긍심(自矜心)을 지니고 있다. 무용은 사회 변화에 민감한 반응을 한다. 무용은 우리들의 일상과 특수성, 희망과 실망, 갈망과 집념의 상징이다. 그래서 무용은 중요하다. “우리는 누구인가?” 무용은 묻고 있다. 그 답변은 개인과 가족, 국가와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변동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 인생과 무용은 떼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무용은 우리들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도덕은 문란해지고 인간의 유대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면서 그 위협과 공포와 불안은 계속되고 있다. 분단의 나라 우리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개인적 이익만이 존중되는 물질 만능 풍조에 사회는 병들고 나라가 위태로운 느낌이다. 문제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것이다. 그 일은 진실을 통찰하는 예지(叡智)와 부정부패를 비판하는 능력을 우리들이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해결책은 인문학의 장려와 문화예술의 진흥이다. 그 일은 일차적으로 학교 교육의 영역이 된다. 그런데 교육은 총체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문제는 교육의 내용과 환경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이다.
 
  
김화숙 교수가 무용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이론을 제시하고 실천에 나선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무용교육의 기반을 조성하고 그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무용교육이란 무엇인가”  “무용의 이해” “무용교육의 힘” “Community Dance” “무용교육론” “춤으로 소통하는 시간” 등의 저서는 그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이론이고 실천의 지침이었다. 사포무용단은 그의 소신을 펼치는 전진 기지였다. 사포는 40년 동안 무용을 퍼뜨리는 일에 전념했다. 삼부작 1, 2부에서 표출된 분노와 반항과 격돌을 지양(止揚)하고 3부 마지막에 〈그들의 결혼〉에서 사랑과 용서와 화해를 주장한 것은 사포 활동의 원리요, 실천의 가치요, 이상이었다. 이런 확고한 철학적 사념(思念)과 예술적 신념에서 시작되고 지속된 사포 40년은 놀라운 역사적 업적이라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사포의 〈사포, 말을 걸다〉 시리즈는 극장 무용의 전통적 형식을 벗어나서 관객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시도하는 첨단적인 ‘살아있는 무용(living dance)’으로 평가되었다. 무용은 이제 사찰, 교회, 학교 노천, 까페, 역사적 유적, 섬과 해안 등 인간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공연장을 자유롭게 이동하는 환경무용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사포는 생동감 넘치는 공연을 통해 아름다움을 인지하는 희열을 관객들에게 안겨주면서 동시에 현실을 인식하는 예지(叡智)를 깨우치고 있었다. 〈기억의 저편, 해월리 362〉 〈차마 그곳이 잊힐리야〉 〈간이역〉 등 역사와 공간을 탐색하는 작품은 사포 무용의 새로운 증표가 되었다.
  
  
그로토프스키는 그의 작품 〈아크로폴리스〉와 여타 작품을 통해서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고발했다. 그의 연극은 역사극이요 사회극이지만 동시에 숭고한 예술작품이었다. 2차 대전 당시 폴란드의 55개 도시와 476개 마을이 포탄으로 소멸되는 참화를 입었는데 그는 그 현장을 목격했다. 그로토프스키는 자유와 평화를 위한 연극에 일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그의 연극은 비인도적인 살상과 인권유린의 만행을 규탄하면서도 종국에는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정화작용을 일으키는 제의와 구제의 제단이 되었다.
 
  
그로토프스키가 연극에서 한 일을 사포는 무용으로 실천했다. 사포는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독일의 연출가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1939년 5월 스톡홀름에서 “실험적 연극에 관해서” 강연을 했다. 이 강연에서 그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일”과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 연극의 목적이라고 말하면서 연극 무대는 정신적으로 마취를 당하는 곳이 아니며 역사에 눈을 뜨게 하는 경험과 교육의 장소라고 말했다. 교육적 기능이 발휘되려면 관객은 무대와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 무대와 이화(異化)되어야 한다고 그는 역설했다.
 
  
놀랍게도 김화숙은 무용에서 이미 그런 주장을 실천하고 있었다. 안무가 김화숙은 삼부작을 하면서 대본작가 한혜리에게 기대한 것은 광주사태를 직접 체험하지 못한 작가의 객관적 입장과 시각의 적용이었다. 무용으로 쓰는 역사적 사건이 역사를 읽는 자료로 평가 되려면 역사에 대한 객관적 관찰과 표현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안무가 김화숙은 숙지하고 있었다.
       
  
인간의 행위와 사회현상을 정확히 표현하고 알리는 연극이나 무용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예술이다. 연극이나 무용이 제한되거나 침체하면 문화는 위기요 세상은 암흑이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 문화예술은 침체되고 활기를 잃고 있다. 상업적인 대중문화가 순수문화를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것은 두 문화가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문화예술 분야의 재정은 어려워지고 인재 결핍은 날로 심해져서 순수예술의 앞날을 어둡게 하고 있다. 문화예술진흥 정책도 이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큰 힘이 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암담하다. 
  
  
20년 동안 현대무용단사포의 중요한 역할을 해온 신임 대표 조다수지는 사포 40년을 준비하는 글 말미에 조심스럽게 내심을 털어놨다.   
    
춤의 일상을 되돌아보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렇게 꾸준히 지속적으로 단원 활동을 하면서 보람은 있을 수 있지만, 시간과 경제력이 되지 않으면 못하는 현실입니다. 명예직도 아니며 단순히 내가 좋      아서 하는 일인데 가족들이 도와주는 상황이 되어야지만 할 수 있는 현실은 아쉽기만 합니다. 예술이 사회적으로나 일상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단원들의 경제력을 조금이라도 뒷받침할 수 있다면 조금은 더 존중받고 떳떳하게 활동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사포는 앞으로 확실한 재원(財源)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운영상의 재정비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우선, 사포무용단을 전문무용단으로 개편해서 재정지원의 수급이 가능한 체제로 조직을 바꿀 필요가 있다. 지방단체의 특성을 살리되 활동 영역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일도 추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기획진이 필요하고 다양한 실무를 처리하는 사무국이 확충되어야 할 것이다. 관객을 확장하고, 매표 수입을 올리는 전략도 필요하다. 기업체와 공사립 단체와 협조해서 후원단체를 늘리고 유대를 강화하는 방법도 찾아보고, 정부지원을 받는 묘안도 강구해야 한다. 프로듀서 시스템(producer system)의 가능성도 검토해서 사포가 재정적으로 자립하고 관 주도 문화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행보를 모색하는 것은 더욱 더 바람직하다. ‘펀딩’(funding)의 길도 모색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더 깊은 곳에 있다. 다양성 사회의 다양화 문화의 시대에 우리는 이미 들어섰다. 전자미디어와 AI가 전방위로 작동되는 복합문화 시대에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이 이반(離反)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나 기성문화를 발전시키는 원천으로서의 소극장 문화가 이 나라에서 치츰 사라지면서 순수예술은 점차 발판을 잃어가고 있다. 문화통합의 시대가 열리면서 무용에서 ‘내러티브’(narrative)가 살아나고 공연기술이 향상될 가능성이 보여 주목된다. 문화풍토가 변하면 무용 활동의 영역도 넓어질 것이다.
   
외국에서는 유튜브를 통한 무용공연이 시작되어 수백만의 시청자를 확보하고 있다. 커뮤니티 댄스의 보급으로 무용이 점차 일상화되면서 그 추세는 더욱더 확산될 것이다. 이미 산과 바다로, 거리로 뛰쳐나간 사포 공연이 영상 카메라에 담겨져서 방영되면 어떤 반응이 일어날지 국금하다. 이런 일은 자체적으로 유튜브를 시작하든가, 기존 유튜브와 계약을 맺고 시작해 볼 수 있다.
 
  
사포는 이 일로 큰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시대는 무섭게 변하고 있다. 사람도 사회도 변하고 있다. 사포는 그 변화를 받아들이고 준비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포 존재의 기본 원리와 실천의 미덕은 잃지 말아야 한다. 현재 사포가 하는 일,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가상한 일이요, 우리가 염원하는 일이 되는 것은 확실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