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오늘, 청소년은 물론 청년들에게 탈춤은 전혀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50~60년 전에는 사정이 아주 달랐다. 당시 20살 청년은 고궁 야외무대에서 우연히 마주친 어떤 공연이 도무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몸을 떨며 보고나서 알고 보니 그것이 난생 처음 보는 우리나라 탈춤(〈봉산탈춤〉 〈북청사자놀음〉)이어서 무척 놀랐다고 지금도 강조한다. 그 청년은 곧 80세를 앞둔 세대이다.
이처럼 지난 50년 동안 탈춤은 그 위상이 엄청나게 달라졌다. 이 같은 변화는 수많은 사람들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다. 1960년대부터 탈춤의 가치에 주목한 극소수 연구작업자들, 70년대부터 탈춤을 창작 탈춤 작업으로 부흥시키려고 애쓴 현장 활동가들, 그리고 수많은 대학 탈춤 동아리들이 그 주역이다.
1960년대 이래 탈춤은 여러 용어로 지칭되었다. 가면극, 가면무, 민속극, 마당극, 탈춤, 마당굿... 지금은 주로 탈춤이나 마당굿으로 불린다. 오늘에 와서 어느 지역의 탈춤을 민속극, 가면무 또는 가면극이라 지칭한다면 어색하게 들리는 것은 물론 얼마나 촌스럽겠는가. 탈춤에 더하여 특히 마당굿이라는 용어가 지난 40년 사이에 뿌리를 내리면서 용어로서 자연스러워지게 된 이면에서는 현장 활동가들의 작업이 절대 기여하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영산3·1민속문화제, 2024. 3. ⓒ김채현 |
올해 3월 3일 ‘마당굿운동 50주년 기념행사’가 경남 창녕 영산면에서 있었다. 영산면과 마당굿운동이 직접 연관된 것은 아니지만, 연계성은 있다. 영산 지역 외부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어도 그러나 알 사람은 아는 사실로서, 창녕 영산면의 쇠머리대기와 줄다리기(줄당기기) 행사는 지난 수십년간 지역민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행사로 국내에서도 손꼽혀왔다. 두 가지 모두 국가무형문화재이고 일개 면이 국가무형문화재를 둘씩이나 보유하는 경우로서도 특이하다. 1960년대 이래 해마다 3월 1일 만세운동 기념을 겸하여 며칠 동안 영산면에서는 쇠머리대기와 줄다리기를 핵심으로 마을 축제(3·1민속문화제)가 수천명이 모이는 큰 규모로 열려왔고 올해도 마찬가지다. 3·1민속문화제는 영산놀이마당에서 열린다.(큰 운동장 규모이다.) 이들 국가무형문화재나 탈춤이나 모두 마당에서 행해지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하며, 특히 줄다리기와 탈춤은 1970년대 이래 대학축전의 주요 이벤트로 자리잡기 시작하여 쌍생아처럼 서로 공생 관계를 맺어왔었다. ‘마당굿운동 50주년 기념행사’가 올해 영산면에서 열린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고 아무튼 이런 역사적 유대를 배경으로 한다.(영산줄다리기를 보존하며 전국 대학에 전파하신 분은 고 조성국 선생이시다. 다음호 본란에 소개될 예정이다.)
영산줄다리기 줄밟기 행렬, 2024. 3. ⓒ김채현 |
00탈춤, 00별산대, 00오광대, 00야류처럼 전통사회로부터 전래된 개별 탈춤들을 통칭하는 장르 분류 용어로 1970년대에는 대체로 가면극, 민속극 등이 쓰였다. 이에 더하여 70년대 후반에 마당굿이 등장하게 되는데, 당시 마당굿의 뜻은 “탈춤을 비롯한 민속연희의 역사적 지속성 위에서 오늘의 사회문제 및 표현양식을 결합시키는 오늘의 마당굿”(채희완, 〈공동체의 춤 신명의 춤〉, 1985)으로 정리되었다. 다시 말해 민속연희를 기반으로 오늘의 시각에서 ‘창작된’ 마당극과 탈춤을 마당굿으로 수용하는 관점이 표면화되었던 것이다.
올해가 마당굿운동 50주년의 해인 것은 1974년 발표된 〈소리굿 아구〉를 기점으로 하기 때문이다. 〈소리굿 아구〉는 1974년 3월 장충동 소재 국립극장 중극장(지금의 달오름극장)에서 올려졌고, 당시 일부 일본인들이 한국에서 자행하던 속칭 기생 관광을 비판하는 주제를 한국 여성들을 괴롭히는 일본인을 한국 청년 아구가 물리치는 내용으로 묘사한 마당극이다. 네 사람이 출연한 〈소리굿 아구〉는 탈춤에 바탕을 둔 마당극이며, 그 무렵에 시도된 몇 가지 마당극 활동에 비해 전문성을 갖춘 조직적인 공연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그래서 〈소리굿 아구〉는 마당극의 효시로 회자된다.
마당극 〈강쟁이 다리쟁이〉, 2024. 3. 2. 영산놀이마당 ⓒ김채현 |
이번 영산의 3·1민속문화제에서는 〈강쟁이 다리쟁이〉 등 2편의 마당극이 올려졌다. 3월 2일 낮에 있은 〈강쟁이 다리쟁이〉는 1984년 영산면이 입은 수해 참사가 소재이다. 영산면의 수해 참사는 한 마디로 천재(天災)가 아니라 인재(人災)였다. 당시 5공화국 대통령 전두환의 먼 선조로서 임진왜란 시기 영산 현감이던 전제(그 옛날 당시에 현감으로서 문제가 있었다는 평이 따랐다 한다)의 가짜 송덕비가 갑자기 영산 현지에 세워지게 되는데, 이를 두고 들끓는 영산의 민심을 무마하려고 관청에선 저수지에 둑을 세워 상수도 설치 공사를 강행하였다. 공연에서는 날림 둑 공사로 발생한 참사를 천재지변이라 강변하는 나으리들, 피해보상운동을 벌이는 이재민들, 수해 복구보다 송덕비 보전에 연연하는 지역 유지들이 그려졌다. 다음날 3월 3일 아침에 있은 마당극은 전제의 가짜 송덕비를 옹호하는 패와 창녕 영산 지역 민중수호신의 서낭당을 지키는 패 사이에 벌어진 한 판 겨루기를 보여주었다. 두 마당극에서 축을 이룬 것은 전문 탈춤패들의 탈춤이다.
1974년의 〈소리굿 아구〉가 나오는 데 있어 견인차 역할을 한 이는 당시 대학원생(서울대 미학과)이던 채희완(현 부산대 명예교수)이었다. 그전인 1971년 그는 학부생 시절에 대학 동아리로서 서울대민속가면극연구회를 결성하였다. 그의 술회에 따르면 당시 대학가에서 탈춤은 1969년 부산대전통예술연구회가 처음 추었고, 1971년 9월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가 창립 기념 공연으로 봉산탈춤을 추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 그런데, 그 훨씬 이전부터 공연예술 가운데 연극 분야에서는 대학 재학생들의 연극 동아리가 우리 연극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무시 못 할 정도로 상당하였다. 이러던 터에 대학권에 불현듯 탈춤이 ‘민속가면극’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곧이어 마당극이 태동하게 된다. 탈춤이 현대적 극적 발상과 결합하여 마당극으로 진화하는 계기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 계기가 대학생들의 동아리 활동에서 마련된 사실은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더욱 의미심장하다.
1973년 이후 대학들에서는 탈춤연구회, 민속연구회, 가면극연구회, 민속학연구회 등의 이름으로 탈춤 동아리들이 우후죽순 등장하였다. 서울에서 시작하여 전국 도처에서 탈춤 동아리들이 출현한 이 시기는 단적으로 말해 탈춤의 질풍노도 시대라 표현되기도 한다. 춤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던 당대 대학가에 탈춤의 질풍노도는 그 의의가 막중막대했던 것으로 재인식되어야 옳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이뤄진 일들을 다시 돌이켜보자면, 대학권에서의 탈춤 활동이 비단 탈춤이나 민속문화뿐만 아니라 춤 자체에 관한 인식과 감성을 고양시키는 효과가 엄청났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대학 탈춤 동아리에 무용(학)과 재학생들의 참여 정도가 어떠하였는지 추정해보면 미미했을 것 같다. 게다가 무용(학)과나 체육과가 없는 대학의 탈춤 동아리들도 많았다. 그렇더라도 이를 계기로 대학권에서 무용인들의 한정적인 춤 의식이 점차 넓혀져갔을 개연성은 분명해 보인다.
서울대민속가면극연구회 창립공연 팜플렛 ⓒ채희완 |
1971년 서울대민속가면극연구회의 창립공연은 〈봉산탈춤〉이었다. 이 사실은 당대의 질풍노도가 ‘(우리) 민속 부흥 운동’에서 발단되었음을 나타낸다. 그것은 서구 편향 의식, 그에 편승한 특히 대학 내의 서구 편향 아카데미즘, 계층차별 의식에 맞서서 자주적 민족민속문화를 제시함으로써 당대의 풍토에 균열을 일으키려는 의지의 발로였다. 이런 점은 당시에 전국 도처에서 그리고 사회 각 부문에서 정부가 앞장서 주도한 근대화의 구호가 일상화되면서 한국의 민속을 예사로 홀대·배제하는 기이한 풍조와는 대조를 이루었다. 근대화가 대체로 서구화로 여겨졌던 당시에 현대적이지도 서구적이지도 않은 것은 일단 후진적인 것으로 밀려나곤 하였다. 일례로 민속신앙인 굿을 미신으로 매도하기 일쑤였으며 마을 축제에 해당하는 당굿·별신굿·지신밟기 등 마을굿을 낡은 것으로 대하는 시선도 만만치 않았다. 2000년대 들어 신토불이 식의 인식 교정 과정을 경유하며 성장한 오늘의 MZ세대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풍조가 당시 근대화 시기에는 드세었다.
민속 부흥(復興)은 복합적이다. 일차적으로는 전래의 민속을 보존하는 것, 이차적으로는 보존된 민속을 오늘에 되살리는 것일 것이다. 대학권의 탈춤에서 전래의 민속을 보존하는 것이 핵심 과업일 리는 만무하였으며, 민속과 탈춤 전수 단체를 빼놓으면 전래의 민속을 익히는 것도 보존 차원이 아니라 2차적 작업을 향한 전제로서 행해진 경우가 대다수였다. 대학권 탈춤 단체들이 동아리 이름에 민속, 민속극, 가면극 등의 용어를 담았어도 보존된 민속을 기반으로 오늘에 되살린 공연물을 초창기부터 마당극이라 불렀다. 그전부터의 탈춤에 이어 1971년의 가면극, 그 직후부터의 마당극을 거쳐 70년대 후반에 가면 마당굿 형식을 모색하게 된다. 오늘날에는 마당극, 마당굿을 창작탈춤으로 대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민속가면극의 창작 탈춤에서 시작하여 5~6년 사이에 마당극, 마당굿과 같은 장르 개념이 연이어 나올 만큼 당시 마당굿운동은 변화에 기민하였다. 그것은 마당굿이 처음부터 문화예술의 실천적 가치에 주목하고 그것을 사회와 삶의 현장에서 실행해내기 위한 방안들을 적극 모색한 때문이었다. 실천적 가치는 시대와 현장 여건 속에서 실행되므로 시대 상황에 따라 가치 실행 방안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마당굿이 태동하던 1970년대를 비롯 그후의 상항을 타개하는 문화예술 활동은 당대에 특히 범사회적으로 요망되었던 민주화 및 민중문화 운동과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전개되었으며, 이런 점은 마당굿의 큰 동력으로 작용하며 오늘에 이른다.
농경문화시대의 탈춤은 마당굿과 함께 산업화시대를 거쳐 디지털시대, AI시대를 맞이하는 중이다. 오늘 사회와 문명의 대변동 속에서 마당굿운동 역시 대변화에 직면하고 있다. 아울러 근래에 들어 탈춤을 보존하는 역량이 과거만 못하다는 반성이 무엇보다도 마당굿운동 활동가들 내부에서부터 들리고 있다. 자체 내에 이 같은 반성이 제기되는 것은 주목할 점이자 그 건강함의 징표이기도 하다. 민속 부흥 운동에서 보듯이 보존 역량이 창작을 뒷받침한다는 점에서 이런 문제 제기가 마당굿의 현실에 대해 시사하는 바는 필자가 보기에는 퍽 다면적이다.
동어반복으로 들릴지 몰라도 마당굿에서 마당과 굿은 공연과 연행의 요소로서 독보적이다. 마당은 천지미물로부터 우주까지 포괄할 것이며, 굿은 또 어떠한가. 이에 더하여 공동의 집단 창작 방식은 마당굿을 일반 창작과는 다르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단적으로 마당굿은 일반 춤이나 연극과는 다른 미학에 토대를 두고 있다. 전통 공동체 속의 굿이었던 탈춤이 70년대에 (마당)극으로 이행했다가 이제 다시 (마당)굿으로 회귀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간 마당굿의 원리와 지향에 관해 더러 논의되어 왔듯이, 마당굿은 인간이 맞닥뜨리는 현실적·개인적·문명사적·생명적·심령적인 갖가지 차원의 과제를 예술적 또는 비예술적 차원에서 수렴·돌파·전망할 방안을 갖춰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마당굿 50주년은 새 비전을 향한 또 다른 시작점이며, 이번의 50주년 기념식에 방점을 찍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덧붙여, 마당굿운동이 반세기 동안 수행해온 바가 그간 춤 역사 내에서 소홀히 인식되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런 점을 춤 연구가들을 비롯 무용인들도 자문해보는 바가 있기를 기대한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국립무용단 60년사>(2022년 간행, 국립무용단)의 편집장으로서 편집을 총괄 진행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