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유니버설발레단의 〈심청〉을 아직도 못 보았다면... 기회가 되면 보기를 권하겠다. 말하자면 한국인의 머스트씨 발레. 1984년 창설된 유니버설발레단이 2년 후 첫 창작물로 내놓은 발레가 〈심청〉이다. 초연 이래 지난해까지 잦은 공연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확인한 발레이다. 올해로 유니버설발레단은 40주년을 맞았고 발레단의 으뜸가는 수확은, 내 판단으로는, 〈심청〉이라 이름이 붙여진 이 창작발레일 것이다.
유니버설발레단 <심청> 제3막 8먹중춤 장면 ⓒ유니버설발레단 |
3막으로 전개되는 〈심청〉의 제3막, 온나라 안의 노인 맹인들을 모시는 잔치에서 봉산탈춤의 8먹중춤이 등장한다. 아버지 심봉사를 애타게 찾는 왕비 심청이 마련한 잔치에서 추어지는 여러 축하무 가운데 하나가 8먹중춤인데, 겹사위와 연풍대 등의 춤사위를 발레화한 대목이다. 먹중탈을 쓰고 긴 한삼을 천지사방에 뿌려대면서 8먹중들의 황소걸음, 외사위, 겹사위, 연풍대, 까치걸음 같은 움직임들을 활용 연기하였다. 이 대목은 그 자체로도 캐릭터 댄스(이름짓자면 코리언 몽크 댄스?)로 성립할 것이고, 〈심청〉에서는 잔치 분위기를 돋우는 아주 중대한 역할을 한다. 〈심청〉에서 8먹중춤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그래도 무방할지 모른다. 하지만 8먹중춤이 등장하는 〈심청〉을 본 다음에는 8먹중춤이 등장하지 않는 〈심청〉은 용납하기 힘들 것이다. 국민발레라 불러 무리도 아닐 〈심청〉을 그렇게 호칭할 만한 요소들은 한 두 가지가 아니고 8먹중춤 대목도 그런 요소들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어야 옳다.
〈심청〉에 8먹중춤이 활용된 동기는, 추론컨대, 〈심청〉 대본 작가 박용구 선생의 제안이었을 것이다. 20세기 후반 문화비평가로서 폭넓은 안목을 전개한 선생의 제안을 충실히 수행한 유니버설발레단의 의지가 국내외 무대에서 빛을 발했던 것이고, 한국이 내세울 국제적 레퍼토리가 되었다. 비유컨대, 러시아에서 〈백조의 호수〉가 만들어졌다면 한국에서는 〈심청〉이 만들어졌다. 이 레퍼토리 속에 탈춤이 녹여져 있다는 사실은 오늘 다시금 상기할 만한 일이다. 국내 춤 창작물에 탈춤이 등장해서 진가를 발휘한 경우가, 과문의 탓인지 몰라도, 잘 떠올려지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보자면 더더욱 그렇다. 출연자들의 한복 차림이나 색감, 갓, 심청 설화의 소재와 충효의 세계관, 그 무엇보다도 〈심청〉이 한국 발레라는 것을 실질적으로 웅변(雄辯)하는 것은 8먹중춤이 아닐까.
1970년대 전반기 이래 탈춤 부흥 운동이 개시되어 50년이 흘렀고 그 전부터 전국에서 갖가지 탈춤 전수가 진행된 터에 탈춤을 익힌 사람들은 부지기수이다. 그리고 마당극, 마당굿 등으로 오늘의 탈춤을 모색하고 창작하는 작업도 꾸준히 전개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의 창작춤이나 무대춤에서 탈춤을 활용하는 경우가 사실상 드물(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탈춤 사위들을 부분적으로 응용한 창작춤이 없지 않을 듯해도 전반적으로 일정한 창작적·예술적 의지를 갖고 활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탈춤이나 민속연희를 비예술적인 것으로 하대하거나 창작춤·무대춤과 무관한 것으로 경계짓는 시각이야 각자의 소관 사항이라 하겠지만, 그간의 무심함을 돌이켜보려는 창작자들에게는 탈춤과 민속연희가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전래의 탈춤을 전수하는 작업은 오늘도 전국 도처에서 이뤄진다. 그럼에도 탈춤을 활용한 창작춤·무대춤은 드물다. 탈춤을 과거의 문화유산으로 타자화해버리면 탈춤이 품은 오늘의 깊이를 포착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탈춤의 인간학적·인류학적·민족학적·미학적·예술적·철학적·사회사적·현실적... 깊이를 한마디로 압축하기가 가능한가. 탈춤에서 우선 해학을 떠올린다. 그런가 하면 비장감도 떠올리게 된다. 밝은 면이 있는가 하면 침침한 면도 있다. 한 편의 탈춤 연희 속에서 대조적인 감성들이 복합적으로 공존하면서 특히 마당판의 속성에 따라 확장되고 급기야 화해를 지향하고 수렴된다. 천지사방 전방위로 열린 마당에서 양반과 상놈의 경계는 해체되고, 뿐더러 연희 전개의 축이 있다지만 자기대로 떠들어대는 광대들은 분산과 해체를 일삼지 않는가? 한 편의 탈춤 연희는 개별 분산된 속성이 다시 전체의 속성으로 재연되는 프랙털 구조를 띤다. 탈을 쓰면 또 다른 자아·에고가 되기 마련이어서 마당에서는 사방치기가 거행된다. 이뿐인가? 판은 마침내 살판으로 일변하고 자기 회귀와 치유 및 해방이 일거에 이뤄지는 것이 탈춤이다. 이를 강조하여 성스럽다 할 것이다. 단편적인 드라마투르기 안목에서는 놓치기 일쑤인 탈춤의 깊이. 그래서 탈춤의 우주를 그 마당 속의 몸 움직임과 함께 탐색하라는 뜻이다. 탈춤 연구자들 가운데 특히 채희완·김지하·조동일님들의 견해를 경청하자면, 탈춤을 한마디로 어찌할 수 없는 사정은 이러하다. 디지털 시대, AI 시대에도 탈춤의 깊이는 결코 엷어지지 않는다. 아니 새 시대 탈춤에서 깊이는 오히려 심화될 잠재력마저 있다.
나는 우리 탈춤이 우리가 추구하는 창작춤·극장춤·현대춤에 기력을 줄 수 있다고 본다. 이미 〈심청〉에서 부분적으로나마 확인된 일이자 사실이다. 앞으로 그 기력이 엄청날지 소소할지는 추구하는 사람에 달린 문제로되, 분명한 것은 그렇게 기력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들 곁에 있는 탈춤을 새삼 정색하고 보아야 할 것이고, 그럴 수 있는 계기가 특히 대학 교육 과정에서 강력하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내 대학에서 탈춤 교육을 정규 교과 과목으로 개설한 곳은 얼마나 있을까.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연희과에 교과목들이 개설되어 있으며, 그 외 무용(학)과들을 더러 조사해보아도 뚜렷이 짚어지는 곳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국내 대학에서 탈춤 교육이 위치한 현주소인 것 같다. 전국의 무용(학)과들이 폐과되는 사례가 속출하는데, 웬 탈춤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더 이상의 폐과 사태를 막기 위해서도 무용(학)과들의 편식을 막아야 할 것이고 탈춤 교과들을 고려해볼 필요성이 절실해 보인다. 대학의 무용(학)과는 탈춤 전수소와는 역할이 다르며 탈춤 익히기 교과들은 탈춤을 춤 창작과 연구의 소재로 삼는 역량을 키워내는 방향으로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 1970년대 이후 대학들에서 탈춤 연행 관련 특강들이 더러 진행되었다. 지금도 특강들이 더러 행해질지 모른다. 그러나 특강으로 그러한 역량을 함양하기에는 단편적이고 아주 역부족이라 생각되며, 보다 적극적인 제도적 장치로서 탈춤 관련 정규 교과가 개설되는 것이 원칙이다.
현대무용과 발레 전공자들에게도 그런 교과가 제공되어야 할 이유는 얼마든지 제시될 수 있다. 하물며 한국무용 전공자들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현장에서나 교육에서나 한국무용 레퍼토리 하면 언필칭 승무·살풀이·태평무·한량무를 떠올리기 마련이어서 단조롭다 못해 빈약하기 그지없는 현상황은 타개되어야 옳고, 그 선도 방안으로서 탈춤 관련 정규 교과의 개설과 교육을 힘주어 제안한다. 현장에서나 교육에서나 편식은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다. 게다가 편식을 벗어날 자산이 탈춤, 마을굿, 마을축제, 어깨춤, 솔개춤, 막춤 등으로 우리 곁에 널려 있는 데도 놓치고 있다. 올 3월 며칠 영산놀이마당에서 시종일관 나를 따라다닌 생각들은 그러하다. 너나없이 눈뜬 봉사가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국립무용단 60년사>(2022년 간행, 국립무용단)의 편집장으로서 편집을 총괄 진행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