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지난 6월말 〈신새벽 술을 토하고 없는 길을 떠나다〉 마당극을 부산에서 보았다. 여기에 스트릿댄스 장면이 삽입되어 얼마간 이채를 띠었다. 그냥 그럴 수 있는 일로 넘길 법도 하겠으나, 시사하는 바가 큰 장면이고 또 그런 순간으로 다가왔다. 〈신새벽...〉이 올려진 극장은 부산의 ‘극단 자갈치’가 운영하는 신명천지소극장(부곡동 소재)이다. 극단 자갈치는 부산을 거점으로 마당극 운동을 근 40년간 지속적으로 펼쳐온 단체다. 이 마당극은 채희완 선생의 연출작으로서 1996년 초연 이래 종종 올려졌고, 특히 올해가 마당극 운동 50주년(춤웹진 올해 3월호 참조)인 것을 기념해 이번에 재공연되었다.
〈신새벽...〉에서 신새벽은 원효(元曉·첫새벽)대사 이름의 한글 뜻풀이 말에 해당한다. 원효대사가 당나라로 구법(求法) 유학길에 나섰다가 해골물을 마시고선 돌아섰던 일화를 우리는 잘 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불현듯 토하고 저자거리 민중들 속에서 한평생 무애가무행(無碍歌舞行)의 구도를 수행한 원효대사의 행적이 〈신새벽...〉 저변의 라이트모티브를 이룬다.
이 공연작의 소재는 여느 산사(山寺)에서든 있을 법한 일상사이다. 어느 절에 맡겨진 소년이 미륵불 점안식을 앞두고 사라지자 절집 사람들이 소년을 찾아 나서던 때 인근 동네 어느 농가 부부가 잃은 소를 찾아 전전긍긍하는 사건 아닌 사연이 〈신새벽...〉의 줄거리를 이룬다. 마침내 사람들은 소년을 찾았고 부부도 소를 찾았고 미륵불 점안식은 관심권에서 밀려났고 모두들 없는 길을 떠난다. 공연에는 스님, 보살, 학승, 불목한(허드렛일 하는 사람), 공양주(밥하는 사람)에 더하여 불교 신도회회장, 고시생, 신원불상의 식객 그리고 절에 소풍온 아이들까지 등장한다. 그런 사람들과 사람들의 행동과 말 곳곳에 불가에서 일컫는 진리와 미망, 분별심과 분별 없음, 일체무애 그리고 원융회통 등을 시사하는 요소들이 스며 있다. 말하자면 〈신새벽...〉 전편에 걸쳐 원효대사의 큰뜻이 묻혀 있어서 공연은 일테면 암유(暗喩)의 기법으로 구성된 편이다.
〈신새벽...〉에서 스트릿댄스가 등장하는 대목은 절에 소풍온 아이들이 스님과 나누는 다음의 대화 부분이다.
어느 아이: 원효 스님이 술바가지 들고 길거리에서 골목길에서 노래하고 춤추었다고 하는 무애가무가 뭐예요? 스님, 우리한테도 춤 한 자리 보여주세요.
스님: (빙긋이 수긍한다)
어느 아이: 길바닥에서 춤추었다면, (스트릿댄스를 재빠르게 시전하고 나서) 그게 스트릿댄스 아닌가?
어느 아이: 천삼백년 전에 우리나라에도 (비보잉을 재빠르게 시전하고 나서) 브레이크댄스가 있었나? 그런 거는 거리에 애들이나 추는 건데, 높으신 원효 스님이...?
어느 아이: 원효 스님이 한 잔 하신 거 아닌가?
어느 아이: 떨거지 광대들하고도 추고 깡패들하고도 추고 다리 밑에 도둑놈들하고도 추고, 온 천지에 춤추고 노래하고 다녔다 카더라.
스님: 호리병 치켜들고, 아미타불 노래도 부르고... 갈 곳 없는 노인들도 다 나와 보고... 천지사방 돌아다녔다 카더라.
극단 자갈치 <신새벽 술을 토하고 없는 길을 떠나다> ⓒ김채현 |
〈신새벽...〉은 1996년 경주에서 있은 원효문예대전에서 처음 추어졌고 2003년까지 종종 재공연되었다. 이번에 21년 만에 재공연되었고, 스트릿댄스가 짤막하게 삽입되었다. 28년 전 관람했을 적에 스트릿댄스가 안 보였던 데 비하여 그간 세상이 변하였음을 실감한다. 90년대 말 국내에서 스트릿댄스를 소수 청소년들이 추기 시작했을 무렵 그들을 불량시하기 일쑤였던 데 비하여, 이번 올림픽에 브레이킹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고 한국도 출전 중이다. 2000년대 초입 한국이 세계 최대 비보잉제전 BOTY에서 해마다 상위 입상하면서부터 급부상한 한국 스트릿댄스의 열풍은 우리 주변에서 봐서 아는 대로이다. 이번 〈신새벽...〉이 그러한 흐름을 반영한 아마도 꽤 드문 공연이었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주목된다. 무애가무행과 스트릿댄스를 동등시하는 저 아이들 말이 재미나지 않은가. 어느 시대 어디서나 아이들은 열려 있다. 스트릿댄스의 신라 시대 버전이라 할까 스트릿댄스의 원조(?)로서 무애가무행...
극단 자갈치 <신새벽 술을 토하고 없는 길을 떠나다> ⓒ김채현 |
무애가무행을 모른다면 스트릿댄스에 머물 것이다. 반면 무애가무행을 안다면 스트릿댄스와 연결짓는 것은 상식적이고 자연스럽다. 만약에 스트릿댄스인들이 무애가무행을 재인식하는 그 순간 스트릿댄스에서 새로운(심지어는 혁신적인) 차원이 열릴지도 모르겠다. 아니 열릴 것으로 확신한다. 〈신새벽...〉에 스트릿댄스가 가세하자 힙하며 시크한 느낌부터 받게 된다. 〈신새벽...〉이 힙한 느낌, 시크한 느낌을 능가하는 것은 그 저변의 원효 사상 때문이겠다. 모순과 대립을 끌어안는 원효의 화쟁 사상은 그 폭과 넓이가 엄청나서, 일상 삶의 도처에서도 막힌 것을 돌파하되 아우르도록 결기를 북돋우는 힘이 있다. 스트릿댄스가 굳이 스트릿댄스에 머물 필연성은 없을 것이다.
극단 자갈치 <신새벽 술을 토하고 없는 길을 떠나다> ⓒ김채현 |
극단 자갈치 <신새벽 술을 토하고 없는 길을 떠나다> ⓒ극단 자갈치 |
뿐만 아니다. 스트릿댄스는 물론 한국무용, 현대무용, 발레, 재즈, 다원예술 등등 온갖 춤 장르들에서도 막힌 것을 돌파하고 아우르자는 무언의 요구가 들이닥치고 있는 오늘이다. 이런 시각에서 이른바 케이 댄스를 강구하는 작업은 어떨까. 어디를 향해 무엇으로써 뚫어내야 할지 막연하다면, 구체적 실례로서 스트릿댄스와 원효 사상이 서로 스미는 것을 눈여겨 볼 것을 강권하겠다. 우리에게 춤 유산과 현대적 자산이 넉넉하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비단 원효 사상뿐 아니라 이 땅의 사상들 또한 그렇다는 점도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그 유산, 그 자산, 그 사상을 현대와 합쳐서 길을 열고 춤을 다듬는 일이다. 모순과 대립이 조장하는 분별상, 그 좁은 테두리를 떨치고 중생들과 함께 가는 춤에 길은 어딘가 있을 것이다. 길 떠나지 않는 이들이 길을 만들 리는 만무하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국립무용단 60년사>(2022년 간행, 국립무용단)의 편집장으로서 편집을 총괄 진행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