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촛불혁명의 산물, ‘문화비전2030’
정부가 새 문화정책의 청사진 ‘문화비전2030’을 지난 5월 발표하였다. 현 정부가 출범한 지 1년만에 선보인 이 청사진은 2030년까지 추진할 중장기 문화정책 방향과 의제를 담았다. ‘문화비전2030’이 제목으로 내건 ‘사람이 있는 문화’는 이 청사진의 핵심 비전으로 보이고, 여기서는 2030년까지 그 같은 문화를 전국 도처에서 꽃피운다는 의지가 읽혀진다.
청사진에서는 3가지 가치 구현(개인의 ‘자율성’ 보장, 공동체의 ‘다양성’ 실현, 사회의 ‘창의성’ 확산)과 또 가치마다의 3가지 목표 의제를 정해서 모두 9가지 목표 의제가 설정되었다. 일례로, 개인의 자율성 보장을 위해 3가지 목표 의제(개인의 문화권리 확대, 문화예술인 및 종사자의 지위와 권리 보장, 성평등 문화 실현)가 설정된다. 이들 목표 의제 각각은 3~5가지의 세부 과제를 통해 실현될 예정이다. 예컨대, 개인의 문화권리 확대라는 목표 의제를 실현하기 위해 세부 과제로 제시된 것은 문화권 확산, 문화권 실현을 위한 여가친화적 사회환경 조성, 문화권리 실현을 위한 문화예술교육, 생활 속 인문정신문화 고양, 지역 간 문화 격차 해소의 5가지이다.(해당 자료 사이트 참조: http://www.mcst.go.kr/search/search.jsp#redirect > 통합검색 > 문화비전2030)
정부(특히 정권)가 바뀌면 으레 정책과 정무직 공무원이 교체된다. 새 정부는 촛불혁명에 의해 탄생한 정부여서 그 같은 교체가 대대적으로 있을 것은 물론이었고, 그 교체는 사실상 범국민적 관심사이기도 하였다. <춤웹진>에서도 작년 대선 무렵부터 시작해서 11월의 한국춤비평가협회 주최 새 정부 정책을 주제로 포럼을 열기까지 누차 관심을 환기한 바 있다.
문체부는 새 정부가 탄생한 직후인 작년 6월 이후 여러 형태의 포럼과 토론회 등과 같은 ‘새정부 예술정책 토론회’를 통해 3100여명의 현장 목소리를 경청하였고 10월에는 민간 전문가들로 ‘새문화정책준비단’을 구성해서 ‘문화비전2030’ 수립 작업에 착수하였다 한다. 12월에 문화비전의 기조로서 위의 3가지 가치를 설정하고, 올 연초부터 현장토론회, 포럼, 지역인 집담회 등 8,000여 명이 참여한 소통과 공론의 장을 거쳐 해당 의제와 세부 과제 및 사업을 구체화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고 밝혔다.
1990년 1월 신설된 문화부(지금의 문화체육관광부) 설립 준비 작업으로서 문화부의 업무와 그 정책에 관한 공적 토론회가 근 1년간 이어진 바 있다. 그때 이래 문화(예술)정책에 관해 이번만큼 긴 시일에 걸쳐 대규모로 정책 토론회가 진행된 적은 없는 듯하다. 이런 점에서, ‘문화비전 2030’ 수립 과정은 새 정부를 탄생시킨 역사적 배경뿐만 아니라 빠르게 변동하는 시대정신과 문화 환경을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문화비전2030’은 일례로 문화권 확산을 위한 세부 과제로서 예컨대 누구나 어디서나 언제나 국민이 참여와 향유의 주체가 되는 문화예술 정책을 비롯하여 상당히 많은 구체적 정책과 방안을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만 보면, ‘문화비전2030’이든 이전 시기 정부 또는 정권 교체기에 흔히 모습을 드러내곤 했던 새 정책 모음집 같은 것이든 무슨 차이가 있겠는지 의문이 들 만하다. 그러나 관료적으로 온갖 정책과 사업 방안을 장황하게 동원하고 나열하여 장밋빛 꿈이나 부풀리고 홍보하는 데 치중해서 외려 텅 비어 보이는 이전의 정책 모음집들과는 달리 ‘문화비전2030’은 기본적으로 한국 사회가 직면하는 삶을 진단하고 이를 문화적으로 실질적으로 해소할 방안으로서 문화비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차이를 보인다.
장밋빛 꿈이나 늘어놓고 결국 정부 임기 말에 가서는 실행 여부나 실현 성과도 묻지 않았을 정책 모음집들에 비하면 ‘문화비전2030’은 상당히 실용주의적인 청사진 같아 보인다. 아무튼, ‘문화비전2030’에서 현 단계 우리 사회는 경쟁과 효율을 중시하는 일 중심의 사회이자 상호 신뢰가 부족한 사회로 요약되며, 2030년에는 ‘사람이 있는 문화’가 ‘경쟁과 효율보다 사람과 생명이 먼저인 문화’ ‘젠더불평등에서 젠더평등의 문화’ 등 7가지 문화비전을 통해 우리의 삶을 바꿀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문화부 창설 이래 첫 문화정책 손질 작업
‘문화비전2030’은 현장에서의 목소리를 축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여론을 수렴한 결과로서 정부도 최초로 민간이 의제를 주도해 내용을 구성하고, 제안된 정책의 구체화를 정부가 지원하면서 완성한 새로운 방식의 정책 비전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동안 각종 중장기 계획 수립 시 공식적・비공식적으로 행정이 주도해왔던 사례와는 차별화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문화비전2030’은 현장의 요구와 제안에 부응해서 민관 협치 방식으로 완성된 셈이다. ‘문화비전2030’이 제시하는 무수한 정책과 사업 방안은 앞으로 추진될 예정이고 사안에 따라서는 실제 시행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수정도 따를 것이므로 지금 그 결과를 예단할 일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제시된 정책과 사업 방안들이 내실 있게 추진되면 성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것은 문화정책의 시발점을 근원적으로 삶과 현장의 구체적 요구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되었듯이 민간이 정책 의제를 주도해 내용을 구성하고, 제안된 정책의 구체화를 정부가 지원하면서 완성하는 것은 문화부 설립 이후 지난 30년 동안 처음 있는 일이다. 문화부가 자리잡고 3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한국 사회도 빠르게 변동하고 한국 사회가 직면하는 삶의 왜곡상 또한 누적되고 돌출해 왔던 현실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문화정책을 이번처럼 손질한 경우는, 다시 말하지만, 처음 있는 일(史上初有)이다. 비단 촛불혁명이 아니더라도 문화정책이 삶과 현장의 구체적 요구에 기반을 두는 것이라면 진작 이런 손질들이 있었어야 하였다. 문화부 설립 초창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더라도 지난 20년간 문화정책을 마음 먹고 손질한 경우는 사실상 전무하였던 것이다.
‘문화비전2030’은 말미에 ‘실행력 제고 방안’을 제시하면서, 그 기본 방향으로 국가 중심의 ‘진흥 육성’에서 민간 현장 중심의 자율적 ‘지원 조성’ 체계로 전환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 세부 방안으로는 문화행정 혁신, 변화된 사회 환경과 새 패러다임을 반영할 법률 제개정, 행정주체별 역할 재정립, 재정 운용 방향이 간략히 적시되었다. 여기서는 참여적 문화행정제도 개발, 참여와 협치에 기반한 문화행정 평가 체계 구축 같은 방안이 주목을 끈다.
이 시대에 이르러 문화행정에서 참여와 협치에 기반한 제도와 평가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방안이긴 하다. 그러나 그간의 문화부 문화행정 체질에 비추어 보면 사뭇 의미심장한 진전으로 주시할 필요가 있다. 참여와 협치가 전무했거나 미약한 문화행정에서는 그동안 문화정책에 관한 공론 수렴이 미흡하였음은 물론 정책에 대한 평가가 전무했을 정도였다. 그런 관행이 굳어진 결과로서, 지난 20여 년 정부 문화정책에 대한 만족도는 낮았던 것으로 관측된다.
지난 11월 한국춤비평가협회가 열은 ‘새 정부 춤정책 포럼’에서 필자는 ‘문화정책 백서’ 작업을 문화부 내에 의무 사항으로 정착시켜야 할 필요성을 환기한 바 있다.(<춤웹진> 사이트 http://koreadance.kr/board/board_view.php?view_id=207&board_name=plan 참조) 이 자리에서는 새 정부가 출범하면 으레 발표되는 청사진에 따라 정책들이 수행되지만 정책들의 공과를 묻는 백서가 사실상 부재하는 현상 역시 일종의 적폐로 지적되었다. 여기서 백서는 정책에 대한 다양한 공적 평가들을 두루 상징하는 개념으로 보아 무방하다.
더 미룰 수 없는 문화정책 평가 작업
정책은 있으나 공적 평가가 부재하는 현상은 기업에서 경영은 있고 결산보고서는 없거나 부실한 것과 흡사하지 않은가. 문화정책 같은 전문 분야의 정책은 일반 사회 및 생활의 정책처럼 일반인이 이해관계에 놓이거나 또 누구나 관심을 갖고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럴 필요성을 느끼기도 어렵다. 그래서 결산보고서에 비유되는 공적 평가가 없어도 시중 여론이 의아하게 여기는 경우도 없는 편이다. 이런 특수성에 비추어 문화정책이 문화부 내부에서 일방적으로 추진될 가능성은 쉽게 상정된다. 문화정책으로 분류될 수도 없는 것이지만, 블랙리스트 작업이 청와대와 국정원의 지시로 문화부 내에서 버젓이 자행된 저변에는 공적 평가 체계가 작동하기 어려웠던, 그리하여 임의적인 정책 집행도 드물지 않았을 문화부의 체질이 자리잡고 있은 것은 아닌지 자문해볼 일이다.
문화부 예산이 불어날수록 문화정책의 영향력은 커지기 마련이다. 소소한 지원을 외면한다고 하더라도 누군들 그 영향권을 벗어나기가 어려워진다. 문화정책이 문화생태계에 끼치는 파급력은 문화부 설립 초기에 비해 상상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하여 ‘문화비전2030’에서는 문화정책이 우리 사회의 삶을 업그레이드시키는 데 개입할 의지까지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문화를 통해 사회와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자는 것은 권장할 일이며, 이와는 별개로 예술계 또한 이른바 고급예술이 삶에 초연하는 듯하는 고답적 자세를 지양해야 한다.
이 시점에서 공론화하고 싶은 과제는 근본적으로 문화행정의 손질을 요하는 2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문화정책의 수렴과 집행 방식의 개선이고, 또 하나는 문화정책 평가 작업이다.
먼저, ‘문화비전2030’ 청사진을 완성하기까지 여러 토론회 등을 통해 현장의 여론을 수렴하였으나 앞으로는 현장의 여론을 어떤 경로로 수렴할 것인지 분명치 않다. 즉, 참여적 문화행정 제도를 어떻게 개발 정착시킬 것인지의 과제가 숙제로 남겨진다. 또 정책 실행을 위한 지원에 있어 민간 현장 중심의 자율적 지원 조성 체계가 내세워지고 있으나 이 역시 분명치 않다. 현장의 여론 수렴은 있으나 정작 지원 방식은 별 손질 없이 문화부로부터 일방적으로 행해지는 그런 식을 여전히 고수한다면 여론 수렴의 의의는 무산(霧散)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문화정책 평가 작업은 (세부 정책에 관한 평가와는 별도로) 1년이면 1년 일정 기간의 문화행정과 문화정책을 평가하는 작업으로서 정례화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2가지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관련 법제화가 수행되어야 할 것이고, 법적 뒷받침 없는 문화행정의 손질이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다.
민간이 정책 의제를 주도해 내용을 구성하는 것을 이번에 문화부 스스로 강조한 것은 거꾸로 그러지 못한 이전 시기의 문제점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것으로 보인다. 창설 30년을 앞둔 문화부는 체질 개선으로 창설 30년을 당당히 맞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제 문화부의 정책 의제 구성에 못지 않게 정책 실행과 행정 및 정책 평가에서도 민간과의 실질적이며 자발적인 협치가 요구되고 있다. 춤계에서 문화부의 생동하는 기운을 느끼고 싶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를 비롯 다수의 논문,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