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서울무용제는1979년 ‘대한민국무용제’로 시작된, 한국의 여러 무용 축제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행사이다. 2018년 제39회를 맞이하는 서울무용제는 ‘무.념.무.상(舞.念.舞.想)’ 이라는 제목의 개막공연을 시작으로 본 축제가 열렸다. 이 제목은 불교 용어인 무념무상(無念無想)을 가지고 말장난, 구체적으로 영어의 Pun(다의어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언어유희)을 시도한 것이다. 일반인들도 자주 사용하는 이런 언어유희는 아마도 인간이 언어를 사용할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된 유머의 형태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런 말장난은 종종 진지한 문학적 의도도 있다.
이러한 말장난(pun)의 사례는 동서고금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유명한 예로 마태복음 16장 18절에 예수가 그의 제자인 베드로에게 한 말을 들 수 있다. 베드로가 예수에게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자, 예수는 “너는 베드로(Pedros)이니 이 반석(petro)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라고 한 말씀이 그것이다. 이 말씀은 제자 이름인 ‘베드로’와 그리스어로 ‘반석’을 뜻하는 ‘베드로(Πέτρος)’를 가지고 한 말장난의 일종이다. 그런데 단순하고 멋진 이 말장난은 나중에 카톨릭의 중심인 성 베드로 성당이 지어지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개신교에서도 교회의 근거를 바로 이 말씀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이 말장난은 단순한 말장난을 넘어서 역사적 사건이 된다.
말장난을 통해 문화적 예술적 깊이를 더하는 사례도 많이 있다. 유명한 예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와 연극 작품들을 들 수 있다. 그의 작품이 지금까지도 유명하고 인기가 있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특히 그는 말장난을 자기 작품에서 기막히게 잘 사용하기 때문이다. 연극 〈리처드 3세(Richard III)〉의 1막 1장에서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Now is the winter of our discontent made glorious summer by this sun of York(이 요크의 태양에 의해 불만의 겨울이 가고 찬란한 여름이 도래했다)”라는 대사가 바로 이런 것 중 하나다. 이 대사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춥고 암울한 겨울이 지나가고, 이제 찬란한 여름이다”라는 뜻으로 극의 시작을 알리는 것인 동시에 연극의 시간적 배경이 여름임을 알려준다. 그런데, 셰익스피어는 이 대사에 영어로 발음이 똑같은 ‘son(아들)’과 ‘sun(태양)’을 가지고 말장난(pun)을 구사하고 있다. 이를 충분히 즐기기 위해서 관객들은 약간의 영국 역사를 알고 있어야 한다. 이 대사에서 ‘불만의 겨울(the winter of our discontent)’은 15세기 영국에서 랭커스터가(House of Lancaster)와 요크가(House of York) 사이에서 있었던 왕위쟁탈을 위한 내전인 장미전쟁(the Wars of the Roses, 1455-1487)을 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대사는 보는 관객에 따라 ‘불만의 겨울’이 ‘요크의 태양(this sun of York)’에 의해 ‘찬란한 여름(glorious summer)’이 되었으니, ‘태양(sun)’으로 풀이할 수도 있고, ‘요크가의 아들(son of York)’인 에드워드에 의해 ‘불만의 겨울’로 상징되는 내전이 끝나게 되었으니, 이 경우 이 단어는 ‘아들(son)’로 들릴 수 있다. 말장난으로 탄생한 서술로도 혹은 은유(隱喩)로도 해석할 수 있는 미묘하고 기발한 이중적 표현 덕분에 이 대사는 즉시 시적(詩的)인 표현이 된다. 이러한 말장난을 갖고 하는 시적 표현법을 희곡 연구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말장난(Shakespeare Pun)’이라고 한다. 그의 세련된 말장난들은 영어에 풍부한 표현력을 불어넣으면서, 단순히 상거래에서나 사용되던 언어로 치부되던 영어가 서구에서 문화어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한편 말장난이 만들어낸 은유 하나에 생각이 뒤집히기도 한다. 선불교의 대선사로 소위 ‘덕산방(德山棒, 덕산의 몽둥이)’을 휘둘러 유명한 덕산(780-865)의 일화가 그 예이다. 금강경에 해박하여 ‘주금강(周金剛)’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그의 자부심은, 딤섬(點心·점심) 좀 얻어먹으려다, 딤섬 파는 노파의 “금강경에 보면 과거의 마음도, 현재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고 하는데, 스님께서는 어느 ‘마음(心)’에 ‘점 하나를 찍으려 하시오(點)’?”라는 말장난 하나에 일거에 무너진다. “마음에 점을 찍는 것” 즉 ‘점심(點心)’과 ‘딤섬(點心)’을 가지고 한 노파의 말장난 몽둥이에 한방을 크게 얻어맞은 덕산은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이 짊어졌던 경전들을 모조리 불태웠다.
이러한 예들에서 알 수 있듯이, 말장난은 종종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단계를 뛰어 넘어, 춤이 자주 그러한 것처럼, 이성(理性)이 이르지 못하는 신비를 만들어내곤 한다. 그런데 불교 용어인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언어유희를 통해 만들어진 서울무용제 개막공연 제목인 ‘무.념.무.상(舞.念.舞.想)’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쉽사리 납득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불교용어 ‘무념무상(無念無想)’은 ‘일체의 분별과 상이 끊어진 삼매의 진경’으로 ‘아무 생각을 하지 않음’의 상태로 자신을 잊는 경지에 이르러 일체의 생각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이를 글자 그대로 번역하여 보면, “생각이 없고, 생각이 없다” 혹은 “생각을 없애고, 생각을 없앤다”라 할 수 있다. 한편 서울무용제 개막공연 제목인 ‘무.념.무.상(舞.念.舞.想)’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춤이 생각이다” 혹은 “춤을 생각한다” 정도의 뜻이 된다. 또 마침표를 고려해서 번역을 하면 “춤. 생각. 춤. 생각”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염(念)’과 ‘상(想)’의 의미이다.
‘염’과 ‘상’이란 두 한자어로 이루어진 단어에 ‘상념(想念)’이 있다. ‘상념’이란 단어는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여러 가지 생각’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와 유사한 말로는 ‘근심(憂)’ 혹은 ‘걱정(慮)’과 같은 단어들이 있다. ‘생각 상’과 ‘생각 념’의 뜻을 가진 한자어 ‘상념’은 ‘생각’이라는 표면적인 뜻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그리 긍정적인 뜻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이를 불교식으로 간략히 살펴보면, ‘상념’ 즉 ‘생각’은 바로 ‘환영(幻影)’ 이다. 또 다른 말로 나의 생각 즉 욕망이 만들어 낸 것이 ‘환영’이라는 뜻에서 ‘집착’이라는 말과도 통한다. 더 나아가 가장 큰 집착은 바로 자기 자신(我想, ātma-saṃjñā)이라는 의미에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는 바로 무아(無我, anātman)의 경지가 된다. 여기서 ‘염’과 ‘상’은 영어에서 ‘deceit(속이기)’ 혹은 ‘illusion(환영)’로 번역하고 있는 산스크리트어 ‘마야(Māyā)’에 해당하는 말로 그 의미가 매우 부정적이다.
한편 ‘상념’과 비슷한 또 다른 불교식 표현으로 일본에서는 ‘우키요(浮世)’라는 말이 있다. 이 단어가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데에는, 일본 에도 시대에 목판화로 제작된 풍속화들이 서구에 소개되어 드뷔시(Claude Debussy나 고흐(Vincent van Gogh)와 같은 많은 예술가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이 그림들을 우키요에(浮世繪)라 부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키요(浮世)’는 ‘떠다니는 세상’ 혹은 ‘표류하는 세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도 똑같은 발음의 다른 말인 '우키요'(憂き世, 근심어린 세상)라는 표현의 말장난(pun)으로, 우키요에(즉 표류하는 세상에 대한 그림)라는 것은 불교의 극락정토와 대비되는 우리의 집착이 만들어낸 생노병사가 전개되는 근심스러운(憂) 세상을 경계한다는 의미가 숨어 있다.
다시 서울무용제 개막공연 제목인 ‘무.념.무.상(舞.念.舞.想)’의 뜻을 풀이하여 보면, 이 말은 “춤은 집착이다” “춤에 집착한다” 혹은 “춤은 속임수이다” “춤을 속인다”라는 의미가 된다. 마침표를 고려해서 풀이를 해보면, “춤. 집착” 또는 “춤. 속임” 쯤의 뜻이다. 그리고 일본식 표현을 적용해 보면, “춤은 근심이다” 혹은 “춤은 표류한다”로 해석할 수도 있게 된다.
그렇다면 서울무용제의 ‘무.념.무.상(舞.念.舞.想)’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몇 가지 추정을 통해 해석을 해보자. 우선 현대 예술적 입장에서 보면, 이 제목은 “춤은 속임수이다”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니,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입니다. 속이고 속는 거지요. 사기 중에서도 고등 사기입니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입니다."라고 백남준이 1984년 기자회견에서 말해 한국 사회에 파란을 일으킨 ‘사기’와 같은 의미일까? 그런데 누가 ‘무.념.무.상(舞.念.舞.想)’을 이런 식으로 생각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기까지 그 절차가 복잡하다. 또 “춤은 근심이다” 혹은 “춤은 표류한다”도 말장난이라 하기에는 그 뜻이 너무 심하고 또 대번에 알아 보기도 어렵다. 아니면 좀 단순하게, 한글과 한자 모두를 사용하였으니, “춤은 무아(無我)의 경지이다”라고 표현하려 한 것은 아닐까? 그런데 그런 의미라면 이건 논리적으로 오류이다. ‘무(無)’를 ‘무(舞)’로 바꾸어서는 이런 의미가 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원 연구의 입장에서, 어렵사리 갑골문까지 보이며, 무(無)와 무(舞)는 그 어원이 같은 것으로, ‘무.념.무.상(舞.念.舞.想)’과 ‘무념무상(無念無想)’도 이런 차원에서 같은 뜻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무(無)는 곧 무(舞)이다”라고 주장한다고 가정 해보자. 그렇지만 이 주장도 제법 궁색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갑골문은 거의 상나라(商朝) 시대의 것들로 그 수도였던 은허(殷墟)가 20세기 들어 발굴되면서 비로소 그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20세기 이전에는 갑골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주나라(周朝) 시대 사용된 금문(金文)에서부터는 ‘무(無)’와 ‘무(舞)’를 혼돈해서 쓰는 법이 없었다. 여기에 ‘무념무상(無念無想)’은 북위(北魏) 시대에 시작하여 당송(唐宋) 때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선불교에서 주로 쓰는 어휘라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주로 당송 시대에 등장하는 이 어휘에 최근에야 그 존재를 알게 된 갑골문에서의 어원을 근거로 ‘무(無)’자를 대신하여 ‘무(舞)’를 넣는 것은 그 논리가 참으로 빈약하다.
이런 점들을 억지로 이해해 본다손 치더라도, 이렇게 되면 애초에 말장난의 효과는 없게 된다. 말장난은, 앞선 예들에서 알 수 있듯이, 어부였던 베드로도, 연극을 구경했던 런던 서민들도, 길거리에서 딤섬을 팔던 노파도, 바로 이해하고 구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온갖 추정들을 다 해보고, 이해해 보려 애써 보아도,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서울무용제의 ‘무.념.무.상(舞.念.舞.想)’이라는 제목을 보며, 암만 봐도 표류하고 있는 것만 같은 한국 무용계가 심히 근심스럽다면 괜한 기우(杞憂)일까? 아니면 이 제목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해 난감해 하며, 이 불만의 겨울, 춤계에 든든한 반석이라 할 만한 것을 점점 찾아보기 힘들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과연 상념이고 환영일까? 이러다가 덕산의 방망이에 한 대 얻어맞는 건 아닐는지 모르겠다.
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이론과 교수. 태국 Mahidol 대학교 국제대학 강사, 국립대만대학교 초빙교수, 런던대학교 SOAS 연구원을 역임하였다. 한국춤 연구를 통해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및 중앙아시아의 문화 교류에 대한 역사 연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