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지난 겨울과 봄을 거쳐 최근까지 매우 충격적 사실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문화예술계, 무용계의 ‘권력형 성착취’를 발생시킨 구조를 바라보는 과정에서 이 모든 것들이 보다 심각하게 느껴진 것은 미투와 무관하지는 않다. 그래서 미투는 일시적 사건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를 반증하는 하나의 현상이며 적폐청산이라는 시대 요구의 신호탄으로 보인다. 지금까지의 관행으론 이 문제를 처벌하고 쉽게 해결해 갈 수 없기에 미투는 시원하게 해결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사그러질 듯 보이나 사그러지지 않고 있는 착종된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 과정이 지루하고 답답한 것일지 모르지만 과거의 여느 문제처럼 잠시 있다가 사라질 문제와는 다르다.
심사와 평가에서 새로 확인된 사실은 지원금을 중심으로 거대하게 혹은 속속들이 얽혀 설탕이 있는 곳을 향하는 개미떼처럼 양식, 양심, 윤리, 체면 등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수단과 목적을 전도시킨 채 강한 ‘양성 지원금성’이 보이는 다양한 작태들이다. 숱하게 인용한 바 있는 돈이 앞문으로 들어오면 예술이 뒷문으로 나간다더니 현명하지 못하게 유출되는 돈의 그 맛은 참으로 달콤하고 그 대열에서 서로는 반갑게 형제의식을 형성하는 것 같다. 놀란 것은 그 행태의 한가운데 무용계의 5, 60대 이상의 교수, 예술감독, 비평가들이 요체를 형성하고 지원금 나오는 수도관 앞을 여지없이 빠꼼하게 지키며 물줄기를 장악했으며 그것이 그들이 사람을 모으고 무용인을 다루는 수단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무용계의 장년층, 어른들이 예술과는 무관한 공적지원금을 자신의 권력을 쌓고 유지하는 연료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윗세대 무용가들은 관청을 쫓아다니며 지원금을 달라고 떼쓰고 조르고 담당자에게 고마워하고 향응하면서 반 정도는 비공식 지원금을 받아 작품을 해왔다. 그래서 그 과정은 비밀스럽고, 그만큼 소리 소문 없이 집행되었으며 질투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 후 자치단체마다 재단이 생기고 문예지원금 분배의 큰 흐름이 잡힌 후부터는 심사가 까다로워진 편이고, 공적지원금의 공공성이 강조되어 교수 중심으로 돌아가던 지원금의 형태는 많이 교정되었으나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은 지금 교수들은 역시 유리할 때는 교수임을 드러내고 그렇지 않을 때는 제자나 무용단을 내세워 지원금의 수와 양을 늘려가는 방식을 찾아냈다. 그런 과정에서 교수들에게 정보를 주면서 서로 편의를 봐주는 공연, 축제, 기획과 관련된 인물들은 자신의 기획공연으로, 자신의 축제로, 다른 교수가 받은 덩어리 지원금에서의 강사나 다른 명분으로, 다양한 얼굴을 한 지원금을 다양하게 받으면서 돈과 권력을 모으는데 가속도를 내고 있었다.
몇 개의 사례 중 가장 큰 덩어리는 공적지원금을 13억이나 받는 기관이다. 기관의 정체성조차 정립 못하는 사업의 주체들은 당연히 사업 계획이나 사업의 결과보고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살림은 주먹구구로 수십 명의 이사를 놓고 이사들에게 사업과 혜택을 나눠주면서 ‘형제자매’의 정을 나누고 있었으며, 자신의 측근을 중심으로 오붓하게 측근지원을 하면서 공적지원금을 사적으로 훌륭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공적지원금이 요구하는 증빙서류는 차마 들여다 볼 수 없을 정도로 빈약하고 혼란스러워 대학생이 과제로 내는 수준도 안 돼 보였다. 그런 인력 5-6명에 1년에 1억이 넘는 급여를 쓰고 있고 있었다. 적절한 경영관리조차 이뤄지지 못하는 사업취지, 목적, 경영의 총체적 부실이었다.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명분이 되는 기관과 교수 주변엔 그것에 일조하면서 공생하는 관계로 기관이나 교수가 나서지 못하는 부분을 나서서 해주는 ‘우리의 5, 60대’들이 있다. 그 덩어리 전체가 조직의 속성을 가졌다면 그들은 브로커이자 행동대인 셈이고 교수나 기관장과 이들은 파트너 손발이 잘 맞는 거 같다. 문제는 그들이 비평가, 언론인 행세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인데 그들은 멀쩡히 대학강의도 나가고, 기관에도 존재를 걸치고, 축제도 하나 둘씩 가지고 있으며, 매체를 가진 저널리스트이기도 하고, 비평가로 행세하는 등 만능기술자의 모습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공통적으로 “돈을 못 벌고, 돈이 없는” 약자인 체를 하고 피해자 코스프레와 저마다 무용계의 소수자임을 토로하면서 다닌다.
문제는 좁은 무용계에서 수십 년씩 서로를 알고 있는 교수, 안무가, 무용가, 기획자, 예술감독, 비평가인 이들은 서로 얽히고 설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데, 자연스럽게 무용계의 중심축이 되어 그들의 생각과 행동이 무용계에 미치는 영향이 가히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크며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폐쇄적 소집단 사회는 그들이 반(半)다리만 건너도 다 손이 닿는 (그들을 거쳐 기획을 배워 기관에 취직한 후배, 제자뻘) 관계 속에서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바로 이들이 중심에 있고, 이들의 방식으로 운영되는 곳이 무용 생태계의 현재이다.
지원금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고 지원금 주변에 예술가들이 있는 것도 너무 당연한 현상이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지원금을 썩게 만드는 지원금 수도꼭지 근처의 주변환경이다. 양식 있는 사람들이 부패의 ‘본류’일 때 그 작은 사회가 받는 피해는 더욱 심각하다. 그들은 입으론 무용계를 걱정하지만 행동으로는 무용계 부패의 주인공으로 이런 이중적 존재 행태로 인해 개인의 착란과 병리현상 뿐 아니라 주변과 후배, 제자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매우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용계의 속설 중 무용계에 오래있으면 사람이 이상해진다는 말이 있는지 모르겠다.
올해 벽두부터 미투가 터지면서 무용계는 과거의 방식대로 힘 있는 놈은 힘을 동원해 언론을 덮고 뻔뻔하게 아무 일 없던 듯이 행동하며 자신의 사회적 반경을 손톱만큼도 정리하지 않았다. 그 주변은 뻔히 보면서도 손가락질은커녕 방관해주고 있었다. 문화재를 내놓겠다는 사람도, 문화재를 관리하는 사람도 어느 누구 하나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뻔뻔함으로 버티고 있으며 그 뻔뻔함을 잡을 사람들도 그리 투명하지는 못한 듯 대응행동을 하고 있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 사회의 남성중심 문화, 문화를 잘 활용하는 남성 방식에 익숙한 여성들이 모두 카르텔을 짜고 이 변화 앞에서 뻔뻔함과 현실 무시 태도로 일관하는 작태를 보인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여전히 미투의 한가운데서 관여도 한다. 게다가 안타깝게 그들 역시 무용계에서도 교육과 언론과 현장을 두루두루 장악하고 교육은 깡통으로, 언론은 사이비로, 축제는 엉터리로 무한 복제해내고 있는 것이다.
무용계는 그들이 카르텔을 짜고 소속감을 느끼며 안도하는 사이에 그들의 안방이 되었고 그 이상을 원하지 않는 곳이 되었다. 새로운 인물도 싫고 자기들이 추천하고 자기들이 인정하는 나름 까다로운 인선을 거친 재생산만 하면서 부패를 전수한다. 젊었을 때는 그들도 그러지 않았던 듯하지만 5, 60대가 되자 앞세대에 뒤지지 않을 만큼 잘하고 있다. 좁다는 것과 폐쇄적이라는 것과 부패했다는 것은 이제 하나의 의미로 확인된다. 조금은 진보적이라는, 이었다는 그들의 착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그래서 자신이 변하지 않은 채 이 사회에서 뭔가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 그것이 그들의 착란 지점 아닐까... 이제 은퇴하셔도 된다. 좋은 모습으로. 박수칠 때 떠나는... 손목을 수건으로 가리는 일 없이...
춤전문지의 공모를 통해 춤비평가로 등단했다. 2011년 한국춤비평가협회의 정회원이 되었으며, 최근 비평집 『춤에 대하여』를 출간했다. 현장 춤비평가로 왕성한 비평 작업과 함께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강사, 서울무용센터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