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내한공연과 국제 협업공연 현장에서
대한민국은 더 이상 춤의 변방이 아니다
장광열_<춤웹진> 편집장
 신선하고 빼어났다.
 11월 한 달 동안 내한공연을 가진 외국 아티스트들의 작업은 창의적이었다. 그들과 함께 작업한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국 무용수들의 공연은 성장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한국을 찾은 세계 정상급 안무가들의 최신 장편들은 원작의 해체, 스토리를 대체하는 음악선곡, 작품을 풀어내는 아이디어,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움직임과 새로운 캐릭터의 창출을 통해 인체를 매개로 하는 무용예술의 진미를 선사했다.
 여기에 5년 만에 고국무대를 찾은 일급 무용수의 귀환은 한국 무용수들에 대한 자긍심을 한껏 더해주었다. 또한 한국과 독일 아티스트의 협업 작업은 태동에서부터 공연으로 이어지는 과정자체가 춤 국제교류에 있어 진일보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1월 내내 서울에서 목격되었던 이 같은 일련의 흐름들은 국제 춤 시장에서 대한민국은 더 이상 변방이 아님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크리스티안 슈폭(Christian Spock)의 〈안나 카레니나〉(국립발레단, 11월1-5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요한 잉예르(Johan Inger)의 〈카르멘〉(스페인국립무용단, 11월 9-12일 LG아트센터) 안무는 오늘날 컨템포러리댄스 안무가들에게는 ‘콘셉션’(conception)이란 용어가 ‘안무’(choreography) 보다 더 적합하다는 주장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만큼 그들의 작업은 신선하고 치밀하고 창조적이었다.



 국립발레단 〈안나 카레니나〉 & 스페인국립무용단 〈카르멘〉

 1997년 유명 고전발레 작품의 2인무에서 추어지는 춤을 조합해 코믹한 터치로 구성한 소품 〈Le Grand Pas de Deux〉를 국내에 선보여 범상치 않은 안무 감각을 선보였던 크리스티안 슈폭(취리히발레단 예술감독)은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톨스토이 원작의 방대함을 드라마 발레와 컨템포러리 발레를 절충하는 것으로 재창조하는 재치를 보였다.
 그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극단적인 장면 축약을 통한 생동감 부여, 안나와 브론스키의 열정적 사랑과 대비되는 키티와 레빈의 지난한 사랑의 상반된 배치, 주요 배역들의 캐릭터를 다면적인 측면에서 해석했다. 러시아 출신의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에 폴란드 출신 비톨트 루토스와프스키의 음악을 대비시켜 등장인물들의 상반된 캐릭터를 상징하는 도구로 활용하는 빼어난 음악적 감각도 보여주었다.
 아쉬운 점도 있었다. 강수진 예술감독 이후 다양한 레퍼토리 수용을 통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국립발레단 주요 댄서들의 〈안나 카레니나〉에서의 캐릭터 해석은, 더 섬세하고 더 내밀했어야 했다. 

 
 

 스페인국립무용단이 공연한 요한 잉예르의 〈카르멘〉은 안무가가 얼마나 창조적인 예술가인지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도발적이고 관능적인 매력으로 자신의 욕망을 성취해 가는 카르멘의 설정은 그렇다 치더라도 돈 호세와 투우사 에스까미요 외에 ‘소년’이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설정, 이들 사이에서 펼쳐지는 치명적인 사랑과 욕망, 안타까운 운명의 비극성을 더욱 강화시키는 콘셉트는 관객들의 의표를 찔렀다. 소년 역으로 출연, 춤과 캐릭터의 심리적인 묘사를 끌어낸 박예지의 순발력도 작품의 완성도에 힘을 보탰다.
 안무가는 조르루 비제의 음악과 이를 새롭게 해석한 로디온 세드린의 ‘카르멘 조곡’, 이 작품을 위해 새로 작곡한 마크 알바레즈의 음악을 접목하고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를 통해 사랑과 질투, 살인으로 이어지는 큰 전개 과정을 상상력으로 가득 채웠다.

 
 

 사각형의 프리즘 9개를 움직이는 무대세트로 활용, 장면변환을 통해 공간의 상징성을 극대화하는 연출은 극장예술로서 무용예술이 갖는 강점을 적절하게 융합시킨 시도였다. 1막에서 카르멘이 돈 호세, 에스까미요 사이를 번갈아 오가며 서로 다른 2인무로 변환시킨 구성, 2막에서 카르멘과 돈 호세의 파드되 대신 소년과의 3인무로 치환한 구성,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정 의상으로 치장한 남성 무용수들의 코러스는 압권이었다.
 몸통을 비틀고, 머리를 분절시키고, 공중에서 춤추는 팔의 움직임, 선명하게 노출된 탄탄한 하체의 근육까지 분출하는 에너지와 고양되는 몸의 융합은 춤 보는 재미를 더했고, 무대미술과 조명, 음악과의 세밀한 밀착을 통한 인상적인 비주얼과 심리묘사, 상징성을 극대화 하는 연출가의 감각은 내재된 감성을 물밑까지 자극했다.

 


 마린스키 프리모스키극장 발레단 & 김기민 내한공연

 차이코프스키 음악과 어우러진 마리우스 프티파 안무의 〈백조의 호수〉는 이를 뛰어넘을 수 있는 작품은 불가능하다고 할 만큼 명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백조의 호수〉 전막 공연은 발레단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이다. 주역 무용수들의 기량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24명의 백조들이 만들어내는 군무의 앙상블과 솔리스트들의 다양한 춤 때문이다. 웬만한 기량의 무용수들을 보유하지 않고는 이런 모든 것들의 조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만만치 않고 그런 점에서 마린스키발레단의 〈백조의 호수〉는 발레 마니아들의 감상 1순위 작품이다.
 지그프리드 왕자 김기민과 오데트 공주와 흑조 오딜을 춤춘 빅토리아 테레시키나의 앙상블은 뜨거웠다. 김기민의 오랜 체공과 유연한 팔의 움직임, 빅토리아 테레시키나의 손끝까지 감정을 담아내는 부드러운 상체의 울림과 흑조에서 스피드를 동반한 요염함과 카리스마, 그리고 두 사람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파트너십은 압권이었다.
 한동안 발레 댄서의 평가 기준은 더 많이 돌고 더 높이 뛰는 기교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비평가들은 얼마나 자신 만의 독창적인 캐릭터를 창출해내는가에 더 높은 점수를 준다. 안무가들 역시 기교적인 무용수보다 자신의 안무의도를 춤으로 더욱 고양시킬 수 있는 상상력을 갖춘 무용수를 더 선호한다.
 그런 점에서 깃털 같은 가벼움과 함께 주인공의 심리를 담아내는 섬세한 감정표현을 끌어낸 김기민의 성장은 주목할 만했다. 그러나 두 무용수의 빼어난 춤과 뜨거운 파트너십이 군무의 앙상블과 솔리스트들의 다양한 춤과 어우러지지 못한 점은 그 만큼 안타까웠다. 마린스키극장이 수용한 블라디보스토크 프리모스키극장 소속 발레단 무용수들의 군무와 솔리스트들의 춤은 여러 면에서 〈백조의 호수〉의 온전한 매력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했다. 

 

 
 한-독 합작공연 〈당신이 그것에 대해 알고 싶었던 모든 것〉

 독일 함부르크를 베이스로 활동하고 있는 안무가 정다슬과 뉘른베르크 출신으로 연극을 중심으로 크로스오버 작업을 하는 요하네스 칼(Johannes Karal)의 협업 공연인 〈당신이 그것에 대해 알고 싶었던 모든 것〉(11월 17일, 플랫폼엘 컨템포러리아트센터 라이브홀)은 텍스트와 움직임, 그리고 시각적 이미지의 융합이 빼어났다. 여러 쏘스(source)들이 과하지 않고 정제되어 맞물린 한 편의 잘 빚어진 컨템포러리 아츠였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성(性)을 언어와 몸을 사용해 변주한 이 작품은, 퍼포머 정다슬과 요하네스 칼이 여자로, 때론 남자로, 때론 배우이면서 무용수로, 배경이자 주인공으로 계속해 상태를 변환시키며 성에 관한 관객들의 상상을 증폭시킨다. 벽에 투사되는 문자와 발화된 말, 느리고 조용한, 사이사이 약간의 런닝을 가미한 움직임 배합은 관객들로 하여금 감각적으로 성에 대한 담론을 잠재적으로 이끌어내는데 일조했다. 이 과정에서 관객들은 자신이 규정해오던 성에 대한 개념들이 서서히 충돌되는 경험을 갖게 된다.
 〈당신이 그것에 대해 알고 싶었던 모든 것〉은 정다슬 안무, 정다슬·요하네스 칼이 공동연출을 맡은 한-독 합작 공연으로 올 2월과 3월에 걸쳐 서울무용센터에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작업을 시작, 쇼케이스와 피드백라운드를 거쳤다. 이후 6월 독일 기센의 Theatermaschine과 10월 함부르크의 Eigenarten 페스티벌에서 공연되었다. 그리고 서울문화재단 다원예술부문 지원을 받아 이번 국내 공연으로 이어졌다. 아이디어 정다슬, 발전 및 출연 정다슬과 요하네스 칼, 드라마투르그 양은혜, 아웃사이더 아이 안나 세미노바 간즈가 제작진들이다.
 한국과 독일 아티스트의 합작물이 한국에서의 레지던시를 통해 태동되고 해외에서 초연에 이어 한국에서 재공연 되는 과정이나 쇼케이스와 피드백을 통해 더욱 업그레이드 된 작업들이 공연을 통해 레퍼토리로 유통되는 일련의 과정들은 이제 한국이 국제 춤시장에서 창작의 원산지로서 기능하고 있음을, 국제교류에서의 질과 양상이 다양해지고 있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3월 있었던 쇼케이스 때의 작업에 비해 이번 공연은 한층 업그레이드되었고 예술적인 완성도에서나 관객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면에서 진일보 했다.



 

 외국 메이저 무용단의 최신 작품이 선보여지고 일급 안무가들의 최신작이 국내 발레단의 레퍼토리로 채택되고, 국가간 협업 작업이 한국에서 인큐베이팅 되는 일련의 현상들은 변모된 대한민국 춤 환경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의 춤 문화를 지탱하는 춤 마니아들의 수준 역시 클래식 발레를 뛰어 넘어 컨템포러리댄스를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진화되었다. 〈백조의 호수〉 공연을 제외한 두 개의 컨템포러리 발레 작품은 공연 내내 매일 만석을 이루었다.
 이제 한국의 공연기획사들도 해외 예술단체 초청 시 이 같은 변모한 한국 관객들의 눈높이에 맞출 수 있어야 한다. 외국의 메이저발레단들도 온전한 작품과 무용수로 한국의 관객들을 만나야 한다. 곧 한국에서 공연 할 때 정예 멤버들을 제외시키는 관행은 이제 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 달에 김기민과 빅토리아 테레시키나이가 소속된 마린스키발레단이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 함께 일본 투어를 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반쪽 공연 논란에 휩싸이며 드문드문 빈자리가 있는 모습으로 금의환향한 한국인 아티스트를 맞은 현실이 그래서 더욱 안타까웠다.
 일 년에 3천 건 이상의 춤 공연이 행해지고 외국 무용단의 내한공연이 2백여 건에 이르는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 춤시장에서 더 이상 변방이 아니다. 
장광열
1984년부터 공연예술전문지 〈객석〉 기자, 편집장으로 20여년 활동했다.  춤비평집  『변동과 전환』 , 『당신의 발에 입맞추고 싶습니다』 등의  저서가 있으며, 〈춤웹진〉 편집장, 서울국제즉흥춤축제 예술감독 등을 맡아 춤 현장과 소통하고 있다. 한예종 숙명여대 겸임교수로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
2017. 1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