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지난달(2월) 초순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에 대한 지원심의를 받으러 청계천7가 서울문화재단에 갔다가 대기실에서 조남규 신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을 만났다. “이사장이 이런 델 다 오시고, 웬 일?” “아, 당연히 와야지요. 심사를 받으려면 단체 대표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조 신임 이사장은 한국무용협회가 주최하는 서울무용제에 대한 지원심의를 받기 위해 온 것이었다.
나도 심의를 받으러 해마다 서울문화재단에 가지만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이 온 경우는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 실무자들만 와서 부실하기 짝이 없는 행사계획을 발표하고, 심의위원들로부터 수치스런 핀잔을 듣고도 그게 핀잔인지 칭찬인지 구분조차 하지 못한 채 동문서답하다 가버리는, 때로는 다른 신청단체들의 심의과정까지 참관하고 가라는 재단측의 권유조차 싹 무시하고 제 순서가 끝나기 무섭게 사라져버리는 모습만 보아온 나에게 한국무용협회라는 단체의 대표자가 출현했다는 사실은 신기하기까지 했다.
서울무용제의 면접 순서가 되어 헤어지기까지 불과 몇 분 동안 조 이사장은 엄청난 의욕을 펼쳐보였다. 이미 사무국 직원부터 모조리 바꿨다면서 앞으로 반드시 하겠다는 사업 목록을 속사포처럼 쏘아 날렸다. 이제부터 그가 이끄는 한국무용협회가 어떤 진로를 항행할 지는 지켜볼 일이지만 어쨌거나 일단은 실로 ‘사반세기만에 처음 보는 개혁의지의 표명’이었다.
‘사반세기’라고 표현한 것은 무엇보다도 1991년부터 지금까지 26년 동안 두 이사장이 차례로 장기집권을 하는 동안(조흥동 14년, 김복희 12년) 무용계의 발전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이루지 못한 채 답보와 퇴행만을 일삼으면서 협회 자신은 물론 우리 무용계 전체의 위상마저 추락시킨 참담했던 상황이 싫어도 자꾸만 상기되는 탓이다.
또 ‘개혁의지의 표명’이라고 한 것은 그 사반세기 동안 두 이사장이 연임해가며 여러 차례 취임을 했었으나 ‘개혁’이라고 부를만한 공약 하나 변변히 제시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천 여부는 둘째 치고 구두약속조차 인상 깊게 공표한 적이 없었으니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그들에 비해 조남규 이사장은 어쨌거나 무용계에서 오랫동안 목말라했던 희망사항들을 여러 가지 실현하겠다고 약속했다.
사실 그 희망사항 혹은 공약이란 게 사회일반의 기준에서 보자면 소박한 상식에 불과한 것들이다. 가령 명실공히 우리 무용계를 대변하는 단체가 되겠다는 것, 협회가 주관하는 각종 대회의 수준을 높이고 수상자 선정에 공정을 기하겠다는 것, 한 차례 이상은 연임하지 않겠다는 것 등등인데, 그 정도 당연하고 상식적인 공약을 내세워 돌풍을 일으켰다는 것은 그만큼 지금까지 한국무용협회가 기본상식조차 지키지 못했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지난 2005년 1월 김복희 씨가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협회의 변모를 기대했던 게 사실이다. 조흥동 이사장 시절은 우리 무용계가 전반적으로 큰 변화와 발전을 체험하던 시기였음에도 협회가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는데, 이와 관련해 사람들은 조흥동 이사장이 전통예술 출신의 ‘점잖은’ 성격이라서 개혁을 주도하기엔 한계가 있다고들 했었다. 따라서 현대무용가인 김복희 이사장이 취임하면서 출신 장르의 특성상 뭔가 개방적이고 전진적으로 변화하지 않겠는가 기대하는 것이 무용계의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당시 나의 뒤를 이어 한국춤평론가회 신임 회장이 된 김경애 씨는 취임일성으로 한국무용협회를 비판하는 성명서를 내자고 제안했는데 나를 포함, 일부 회원들이 반대를 할 정도로 신임 집행부에 대한 다소간의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무용협회가 비판 받을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지금은 14년 만에 새 이사장이 취임했으니 한동안 지켜본 뒤에 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 반대자들의 요지였으나 결국은 성명이 채택됐고, 이를 계기로 협회와 평론가들의 관계는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비판을 주도했던 김경애 씨는 오히려 김복희 이사장의 최측근(?)이 되어 한동안 밀월관계를 즐기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를 보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기대는 곧장 실망과 좌절로 바뀌었고 집행부의 무능과 폐쇄성, 비정상성은 저 아까운 12년 세월을 간단없이 소진시키고 말았다. 한 마디로 ‘그들만의 리그’였던 셈인데 그 ‘그들’이 조금만 수준 있는 그들이었더라도 그나마 참을 만했겠지만 도대체 협회 중심부 면면들의 됨됨이가 ‘수준’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그들 가운데 예술가나 교육자로서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 몇이나 되는지도 말하기 거북하거니와 글과 말로 대변인(이라기보다는 하수인) 노릇을 하던 평론가 몇몇도 안목과 의식수준은 차치하고라도 기본 문장력 미흡에 사실관계(팩트) 확인조차 없이 제멋대로 써대면서 제 맘에 안 드는 사람들을 물어대는 주구(走狗) 노릇에 골몰했으니 협회의 얼굴이 얼마나 추악하고 빈궁해 보였을지는 모두가 공감할 터이다.
그동안 한국무용협회가 드러냈던 초라하고 무능하며, 비정상적이고 몰상식하며, 아무런 비전도 없는 구태의연한 모습을 실례를 들어 일일이 열거하고 싶지는 않다. 그들의 체면을 지켜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나하나 거론하기에는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뜻있는 인사들 가운데는 한국무용협회로는 더 이상 가망이 없으니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으나 이 역시 뚜렷한 구심점의 부재 등으로 인해 실현을 보지는 못했다.
이토록 끔찍한 배경과 맥락에서 신임 이사장이 된 조남규 씨는 할 일이 태산이다. 그러나 의외로 모든 것이 쉽고 명쾌하다. 어째서? 이제까지 협회가 하도 엉망이었으니 그 반대로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하기가 어렵다면 최소한 전임자처럼 하지만 않아도 좋은 평가를 받게 돼 있으니 조 이사장은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그에게, 본인도 이미 잘 인식하고 있겠지만, 한국무용협회가 글자 그대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할 수 있는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싶다.
1. 한국무용협회를 진정한 무용계 대표 단체로 만들어야 한다.
한국무용협회는 한국의 모든 무용인들을 아우르고 대변하는 단체인가? 물론 아니다. 현재 우리 무용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거나 실력이나 인품을 인정받는 사람들 가운데 무용협회에 가입한 사람이 도대체 몇이나 되는지 확인해 보라. 협회의 대표성이 얼마나 희박한지 자명해질 것이다. 인접 분야인 연극과 비교해보자. 한국연극협회는 무용협회와는 위상이 전적으로 다르다. 그곳은 대부분의 연극인들이 ‘우리 협회’라고 인정한다. 공동의 현안이 있을 때는 함께 모여 격론을 벌이며 필요하다면 장관도 함께 만나러 가고 거리에도 함께 뛰쳐나간다. 하지만 언제 무용협회가 그런 모습을 보여준 일이 있던가. 그나마 무용교과목 독립이나 본격적인 국제교류 등 무용계를 통틀어 몇 안되는 의미로운 성과들은 대부분 협회와는 무관한 사람들의 노력이 빚어낸 것이다.
또한 무용의 모든 부문을 아우른다는 것이 한국무용협회의 대외적 명분이지만 과연 그러한가? 발레협회, 현대무용협회, 현대춤협회, 전통춤협회 등 장르별로 많은 협회가 있는데, 한국무용협회는 과연 이들 조직과 긴밀히 손잡으며, 혹은 그들을 끌어안으며 무용계 전체의 현안을 주도해 나가는 조직인가? 물론 전혀 그렇지 못하다. 게다가 평론이나 기획 등 무대실기 이외의 분야는 존재 자체가 미미하다.
2. 한국무용협회를 관변단체의 체질에서 탈피시켜야 한다.
정부부처나 산하기관들은 기본적으로 한국무용협회와 같은 관변단체들을 해당 분야의 대화/협력 채널로 삼는다. 정부로서는 그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라 믿을 것이다. 특정 분야의 현장을 철저히 관찰하고 파악하는 공무원은 사실상 거의 없으며 따라서 편리하게 예총이나 민예총 산하단체들을 대화상대로 삼게 되는데 바로 거기서 얼마나 많은 부작용이 생기는지 공무원들은 아마도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관변단체들이 모두 유능하거나 정직하거나 대표성을 지닌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무용 분야의 경우는 예총/민예총 산하단체 말고도 무수히 많은 (그리고 실력있는) 예술가, 평론가, 기획자들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담당 공무원들이 현장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협회만이라도 정확하고 정직해야 해당 분야의 여론을 반영시키고 필요한 사항들을 전달할 것 아닌가? 그러나 한국무용협회는 그럴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집행부와 그 친위대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고 그들과 거북한 관계에 있는 ‘적’들을 매도하기에 급급했다.
그 결과 아무것도 모르는 채 현장에서 일만 하던 무용인들이 (단지 협회가 싫어하는 인물이라는 이유만으로) 문체부 공무원들에게 ‘찍히는’ 터무니없는 일들이 발생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이익을 당하는, 이를테면 ‘또 하나의 블랙리스트’를 협회가 만들어 문체부에 넘겨주고, 담당 공무원들은 확인 한번 해보지 않고 ‘그 나쁜 자들’을 찍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서글픈 피해 사례들은 무용계 일부 인사들에 대한 협회의 집요한 악의와 별 생각없이 모든 판단을 관변단체에 의지하는 공무원들의 안일주의가 만들어낸 한심하고 서글픈 합작품이다. 신임 집행부는 부디 이 야비하고 저질스런 유착관계를 포기하기 바란다.
3. 한국무용협회의 업무능력과 도덕성을 대폭 향상시켜야 한다.
한국무용협회를 비롯한 관변단체들은 정부 돈을 받아 여러 사업을 하는데, 과연 그것이 바람직한 행태인가? 다른 분야는 몰라도 무용협회가 그럴 자격이 전혀 없음은 이미 드러날 만큼 드러났다.
협회가 주최하는 서울무용제와 대한민국 무용대상, 코리아국제현대무용콩쿠르 등 여러 행사가 워낙에 질이 떨어지고 평판이 나빠 지원금의 부분 또는 전액 삭감이라는 수모를 당했고, 수상자 선정을 놓고도 공정성 시비가 끊이질 않는다. 병역면제와 관련한 수상 의혹 역시 하루 이틀 된 이야기가 아니다. 누가 봐도 수준 이하인 작품들에 철판 깔고 뻔뻔하게 큰 상을 안겨주니 의혹의 눈길이 일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터이다. 나 개인적으로도 한국무용협회의 국제행사에 참가했던 외국 무용가들의 비아냥과 손가락질을 여러 차례 받아 주어야 했다.
이처럼 ‘나랏돈으로 나라 망신시키는’ 행사들에 대한 정부 지원은 전면 재고해야 한다. 어째서 정부 돈으로 치르는 행사를 예총 산하단체가 맡아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기본 취지와 방향만 확립해 놓고 시행은 공모를 통해 사업자를 선정하든가, 어떤 방식으로든 좀더 경쟁적인 구도를 도입해 질적 수준을 높여야 한다.
당장 올해부터 협회가 해야 할 일은 더 이상 그런 지적이 나오지 않도록 각종 행사를 ‘정상적이고 수준있게’ 치러야 한다는 마음가짐과, 실제로 그럴 수 있도록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아마도 신임 이사장은 나 같은 외부인이 지적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아주 잘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조흥동 전임 이사장과 김복희 직전 이사장을 모시면서 성장했고 김 전 이사장과의 경쟁에서 이겨 협회를 이끌게 된 사람이니 누구보다도 협회의 문제점을 잘 알지 않겠는가. 그러한 개인적 배경 때문에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비아냥도 나왔던 것이겠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협회를 탈바꿈시킬 최적의 인물일 수도 있는 것이다.
정답은 너무 쉽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제까지 협회가 굴러왔던 것과 반대방향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혹은 최소한 협회가 지금까지 저질러왔던 이상한 짓들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얼마나 좋은가. 조남규 신임 이사장, 이 쉽고 명쾌한 길을 신나게 달려가시기 바란다.
한국춤평론가회 회장, 연합뉴스 상무를 역임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무용축제인 서울세계무용축제 예술감독을 맡아 활발한 국제교류 활동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