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해외춤기행_ 뉴욕·필라델피아 〈Drifting Body〉 프로젝트
괄호적 표류기 (Parenthetical Drifting)
장혜진_안무가

 1월 1일에 시작되어 지구 반대편에서 또 다른 1월 1일을 선물해 주었던 이번 2017 뉴욕·필라델피아 〈Drifting Body〉 프로젝트는 나로 하여금 다시 전체와 부분의 감각(The sense of W/hole)에 대해 알게 한다. 이러한 전체와 부분에 대한 사유와 프랙티스를 나는 ‘괄호 ( )’에 관한 이야기로 풀어나가 보고자 한다.
 이번 미국행 프로젝트는 필라델피아 Knowing Dance More 렉처/퍼포먼스 시리즈의 초청으로 진행되었고, 비슷한 시기 뉴욕의 Movement Research at the Judson Church에서의 공연도 확정되어 약 두 달 남짓 그 여정이 지속되었다.
 신년 아침 미국행 비행기를 탑승하기 전 2016년 말, 내게 큰 화두는 ‘없이 살 수 있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생활의 일부 (혹은 그 이상을)를 소거해보고, 이 없이 살아지는가 하루를 지켜보는 프랙티스였다. 그 무엇 혹은 일부는 괄호와도 같이 열려 있었고, 기타 여러 가지를 대입시켜 보며 ‘하루를 살다’라는 회로도의 운행형식을 내 스스로 바라보았다. 이에 저드슨 처치에서 공유할 작업에 관해서도, ‘저드슨 처치에서 공연하는 것’에 관한 무게중심에서 벗어나서 ‘저드슨 처치 없이 잘 사는 법’에 대한 개인적 그리고 사회적(social, societal, sociological) 리서치를 공유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작업의 제목은 living without ( )에 저드슨을 대입한 〈living without (Judson)〉으로 결정되었고 이와 함께 새해의 표류는 시작되었다.

 마치 ‘괄호 ( )’와도 같이, 이 두 달간의 경험과 배움들은 뭉클하고 찬란하게 내게 기울어지고, 열려지고, 닫혀 진다. 행복이란 혹은 보람이란 보기 흔한 단어의 네 귀퉁이를 잡아 늘리고 뒤집어보아도 또 다시 괄호( )에 도달한다. 물론 늘 웃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걱정 혹은 실망, 애도 이상의 아픔이 스쳐가기도 한다. 그래도 다시 괄호 ( ). 그리고 대입. 정치적 난국에서도 감정과 표류의 격정에서도 나는 다시 괄호를 열고 닫는다. 그 괄호 안에 몇 가지 표류하는 것들을 당신과 나누려 한다. 이 주관식 괄호, 주석적 표류, 기호적 감각에 또 그 비어진 자리 ( )에 당신을 초대한다.

 




 괄호에 남겨진 실험실, (Open Lab)

 괄호는 둥지이다. 실제 영어에서 괄호에 대입하거나 포함하다라는 단어로 nest(둥지)를 사용한다. 두 달 여정의 표류 동안 실천적 둥지가 발생하게 해주던 참여 워크숍이 있었는데, 이는 바로 브루클린 Center for Performance Research(이하 CPR)에서 진행되었던 Open Lab이었다. 나의 대학원 동문이자 브루클린 베이스 안무가, 다이아나 크럼(Diana Crum)이 인솔한 Open Lab은 약 두 달간 매주 수요일 오후 6:30~8:30에 열렸던 공개 실험실이다. 각 아티스트들이 모여서, 그날 하루 실험실을 어떻게 진행할지, 또한 무엇을 실험할지 방향성을 결정하고 그날의 프랙티스를 전개하는 방식이다. 내가 참여했던 1월 둘째 주의 경우 약 7-8명 내외가 모였고, 우리는 다이애나가 진행하는 워밍업에 참여하고 각 아티스트 마다 각자가 실험하고 싶은 것들을 제안하여 모두가 서로를 위해 피실험자가 되어 주었다.
 나의 경우 역시 ‘live without (Judson) – (무엇 – 혹은 저드슨) 없이 살다’에 대한 실험을 진행하고자, “What does it mean to live without (CPR) while we are at CPR (CPR에 있으면서 CPR 없이 잘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관한 스코어 워크를 제안하였다. 이에 따라 옷을 챙겨 입는 듯 떠나는 준비를 하는 피실험자도 보였고, 천장을 떠받들고 서 있는 듯해 보이는 이도, 또한 “Do you have any upcoming? –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프로젝트 등이 있어요” 등의 현실적 질문이 오가며, 보다 삶에 가까운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결국 무언가 없이도 살아가는 연습을 할 때에는, 그 곳을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 또한 “외”의 것을 생각하는 것, 혹은 현존하는 건축물과 더 소통하려고 하는 것 (기념비적으로든 비기념비적으로든)과 결속되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같이 Open Lab을 통해 서로 실험대상이 되어 주는 이와 같은 열린 프랙티스의 형태는 동시대 공연예술 교류에서 매우 흥미로울 수 있는 실천의 방식이라 생각한다.
 나 또한 이와 같은 프랙티스를 BYOP(Bring Your Own Practice)라는 이름으로 미국 및 유럽의 몇몇 기관과 레지던시에서 진행해 보았고, 이번 사례를 통하여 한국에서도 확장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Open Lab)은 이와 같이 둥지를 열게 하고, 또 앞으로를 상상케 하는 실험이었다.

 

 



 괄호에 남겨진 공연, (Mercurial George)

 지난 2017년 1월 5일부터 1월 12일까지 개최되었던 American Realness는 미국 동부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하고 지켜보게 되는 컨템포러리 댄스 페스티벌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큰 여운을 남긴 작가는 나의 2011 DanceWeb 동료이자 캐나다 몬트리올 출신 안무가, 데이나 미첼(Dana Michel)이다. 그녀는 2014년 솔로작 〈Yellow Towel〉로 ‘뉴욕타임즈’를 비롯 세계 무용계 및 언론에서 주목할 만한 여성작가 중 한 명으로 손꼽혔고, 그 작품이 세계 여러 도시를 투어하며 2014년 가장 중요한 10개의 작품 중 하나로 선발된 바 있다.
 올해 2017년 솔로작 〈Mercurial George〉는 American Realness에서는 미국 초연이었으나 이미 ImPulsTanz, Tanz Im August, CDC Atelier de Paris-Carolyn Carlson 등에 의해 협력 제작되고 공연된 작품이다. 〈Mercurial George〉는 장면과 의미의 ‘생성’ 그리고 그 안의 행위의 나열에 엄청난 응집논리를 가진다. 또한 그 안의 데이나의 수행성(performativity)은 재생되는 동시에 그 값이 무효화 되는 듯 형태와 의미를 증발시켰다가 바로 결집시키는 연금술(alchemy)을 가지고 있다. 이는 마치 주사위 여러 개가 내 앞에 미묘한 시차를 가지고 던져지고, 이에 대한 전체 값이나 펼쳐진 순서, 혹은 관계성을 깨달을 즈음 그 주사위가 다시 거두어지는 것과도 같은 감각이었다. 이와 같은 구성법은 콜라쥬라기 보다는 대상이나 상징의 의미를 비관례적인 배치를 통해 변형시키는 브리콜라쥬에 가깝다고 본다. 구조와 산출이 그녀의 수행성을 통해 ‘괄호 ( )’가 되어간다.
 런타임 55분 중 작품 도입부에서 그녀는 침대의 대체물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누우려는 듯하기도, 일어나려는 듯하기도 하다. 그러다 앞으로 나와 이것저것 무엇인지 모를 것들을 일으켜 세운다. 알아들을 법한 말들과 그렇지 아니한 소리들이 동시에 그녀의 목청을 통해 발화된다. 자그마하고 나지막하다. 오목조목 세워질 즘 얼굴들을 발견한다. 스프레이 통처럼 생긴 그 작은 원통의 머리, 혹은 뚜껑은 각 동물 캐릭터의 모양들. 그녀가 그것들과 눈높이를 함께 하는 순간 아! 그렇구나를 머리 속에 입력하게 되는데, 그 즈음 바로 무언가 다른 것으로 비워지고 변이된다. 또 알 수가 없다. 그 옆에 물체는 (그녀에게) 이불인지 검은 천막인지 역시 식별이 가능치 않다. 다만 우리는 그녀가 그것들과 어떻게 관계하는 지에 대해 지켜본다. 그렇게 단서 없는 단서들이 하나 둘씩 흘러가다 “알게 되는” 시점이 다시 발생한다. 아! 커다란 생강과 커다란 포크, 작은 삼지창이구나. 그 무렵 이는 다시 괄호로 변하고, 흘려보내진다.

 



 여정을 통해 업스테이지 코너에 도착한 그녀. 어느 덧 조합된 그림 속 그녀의 몸에는 털로 만든 코트가 걸쳐져 있고, 양손에는 햄버거빵 봉지와 장난감 트럼펫이 들려져 있다. 이것을 입력할 즈음, 나는 내 귀에 들려오는 음악이 트럼펫 행진음악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녀의 손에는 런웨이의 팝스타와도 같이 마이크가 들려져 있으나, 그 어떤 노래도 불러지지 않는다. (노래해도 됩니까?) 사각형의 스텝을 밟으면서 나오는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햄버거 봉지가 붙들려 있다. 순간, 이 봉지는 가득 차있지 않음을 인지하고 결핍이 스쳐간다. 남은 음식이라도 처리할 수 있다는 반가움이다. 혹은 따뜻한 무언가라도 입을 수 있다는 다행스러움이기도 하다. 비워지게도 채워지게도 보이는 이 의상과 소품들은 그녀의 작품에서 괄호적으로 존재한다.

 작품의 중반부가 지나가고 그녀가 중앙의 검은 텐트에 들어가 무언가 되어버리는 그 순간을, 나뿐만 아니라 많은 동료예술인이 기억하고 환호한다. 어느덧 그 손에는 하얀색 목장갑이 끼워져 있었고, 마치 지휘대 위의 정치인과도 같이 우뚝 선 그녀. 혹은 지성소와 같은 신비한 장막 안의 그녀이다. 그 손은 뚫어진 천장 위로 내밀어 올려지고 이와 함께 지휘봉이 흔들린다. 조명이 바뀌고, 마치 천둥이 치는 작은 인형극과도 같은 모습이 되었다가도, 흩어진다. 그 순간 그녀는 여전히 식별가능하지 않는 어떠한 종류의 연설을 진행한다. 그렇게 듣다 보면, 한 순간 이 모든 것이 “Milk. Shake. Milkshake” 라는 단어의 반복과 유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정치와 Milkshake. 이는 권력을 무력화하는데 가장 적절한 텅 빈 수사학이다. 괄호적인 것이다.

 



 이는 또한 작품의 후반부에서 그녀가 바퀴달린 테이블을 들어 올리는 잠시의 순간과도 비슷한 쾌감의 괄호이다. 바퀴는 테이블을 들어 올릴 필요 없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물체이다. 그럼에도 이 소집합(바퀴)는 그녀에 의해 잊혀 지고 대집합(테이블)은 들어 올려 진다. 효율성의 영역과 비효율성/비경제성의 영역 그리고 마찰계수의 영역까지 한순간 그녀가 괄호 속에 밀어 넣는다. 잠시 뚜껑이 열리듯 들어 올려지는 그 테이블의 장면을 통해 다시 한 번 그 의미생성은 환기되고 산출값이 리셋된다.
 그렇게 작품의 마지막에 도달할 때 즈음 그녀는 한참을 봉지를 들고 바깥 원을 그리며 걷는다. 그녀의 걸음걸이 속에는 배회 혹은 생존의 욕구가 보이기도 하고 그러한 원심력 혹은 구심력의 운동에너지를 통해 괄호는 닫히고 열리고를 반복하는 듯하다. 이와 함께 흐르던 음악은 점차 그 원형에너지와 함께 고조되고, 조명이 암전된다. 암흑 상태에서도 한동안 음악은 계속되다가 다시 조명이 켜짐과 동시에 음악은 진공적으로 빠르게 페이드아웃 (vacuum out) 된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오프스테이지가 존재하지 않는 이 극장에서 그녀는 어디에 갔을까. 그렇게 십여 초가 흘렀을까. 텐트 뒤에 그녀가 한걸음 앞으로 나와 간단하게 인사한다. 그렇게 〈Mercurial George〉는 사라진다. 극장은 환희, 감동, 놀라움의 집합체가 되어 박수를 치고 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55분간 그녀가 홀로 이끌어가는 분열된 세계는 작품이 끝나는 순간 더 굳게 응집하여 우리에게 빨려들어 온다.

 



 두 달이 지난 지금 아직까지 그 공명이 남아있는 〈Mercurial George〉에 대해 상기하고자, 프로그램 노트를 살펴보았다. "우리가 평생 피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냄새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몸으로 무엇을 합니까?”라는 질문과 함께 "이 솔로 작업은 단편적인 제스처, 거리의 기호체계, 그리고 소리와 음악을 통해 인간의 신원과 피부 검열의 관계성을 알아보고 있다.” 라고 적혀 있었다. 곧 다시 이 작품을 보았던 그 때와 같이 내게 주사위가 던져 졌다. 아! 노숙자의 모습. 그리고 그들의 피부자아에 관한 것이 작품 안에, 괄호 안에 nest 되었었구나. 작품이 다시 나를 바라본다.
 작품의 도입부에서 작은 동물얼굴들을 올려 세워 마주했던 그녀의 모습과 함께 들뢰즈의 말도 떠오른다. “Form is a face looking at us. 형식은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다.” 이 작품만의 고유한 형태와 구조는 끊임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형태발생/의미발생의 무한대적 지연(delay)은 나로 하여금 이 작품을, 그 괄호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 (Mercurial Georgy)는 그것의 응집력(Cohesion)으로 괄호 속에서 나를 바라본다.

*참고:
2017 American Realness – Dana Michel 영상 https://vimeo.com/198501209
〈Mercurial George〉 트레일러 영상 https://vimeo.com/177600463




 괄호에 남겨진 운동, (J20 Art Strike)

 뉴욕을 방문하는 동료 아티스트에게 올해 1월 셋째 주에 이렇게 말한 것이 생각난다. “이번 주말 뉴욕의 예술 현장은 특별히 아름다울 것이에요.” 2017년 1월 20일은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이었다. 이를 전후로 뉴욕에서 내가 입체적으로 발견하고, 또 참여할 수 있었던 운동·시위들은 다채롭고 예상대로 아름다웠다. 이즈음 미국 전역에서 일어난 예술계의 움직임은 J20 Art Strike(https://j20artstrike.org/)라 불린다. 취임기념일에 대한 불응낙 행동(An Act of Noncompliance on Inauguration Day)이 본 시위의 목적이었으며, 트럼프주의─백인우월주의, 외국인 혐오주의, 군국주의 및 과두 정치주의─의 평범성(The normalization of Trumpism)에 투쟁하기 위한 여러 전략 중 하나이다.
 이와 같은 운동은 다른 어떤 전술과도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끝이 아닌 미래로 흘러들어가는 중재·간섭·개입으로 보고 있다. 이 중에서도 내가 있었던 뉴욕과 필라델피아에서의 무브먼트 중에 가장 성공적인 모델로 목격하고 참여한 것은 댄스페이스 프로젝트(Danspace Project)의 ‘I dream of the elections’, 휘트니 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을 비롯한 미술관들의 점령시위, 또한 여성 대규모 거리 행진(Woman’s March) 등이 있다.
 댄스페이스 프로젝트는 뉴욕의 세인트 마크 교회(St. Marks Church)를 베뉴로 지난 40년간 안무가들을 위한 공간을 제공해주는 기관으로 Danspace Project’s Choreographic Center Without Wall(CW2)이라 불리기도 한다. 댄스페이스는 지난 1월 19일부터 20일 양일간 ‘I dream of the elections(선거에 관한 꿈을 꾸다)’라는 행사를 무료로 진행하였다.
 첫째 날 저녁 8시에는 〈Sleep w/Me〉(2016)와 〈Sleepers〉(2017)라는 설치 작업들과 렉처 퍼포먼스가, 둘째 날은 오후 3시부터 9시까지 릴레이의 형식으로 꿈낭독, 상영회, 가가 워크숍, 무용 및 음악 공연 등이 개최되었다. 이스라엘계 미국인 예술인 루쓰 파티르(Ruth Patir)는2016년 9월 혼란스러웠던 대선기간 중 세인트 마크 처치에서 촬영되었던 영상과 오바마 전 대통령과 힐러리 전 대선후보자에 관한 꿈이야기들을 채집하여 융합시킨 〈Sleep w/Me〉와 〈Sleepers〉를 감독하였고, 이를 중심으로 이와 공존할 움직임 워크숍과 작품들이 함께 괄호에 묶여졌다. 욕망과 두려움을 반영하는 매체로서의 꿈과 꿈해석의 경제성 그리고 대중관찰적 방법론에 대한 실험이기도 했던 댄스페이스의 ‘I dream of the elections’는 사회의 잠재의식은 잠이라는 행위를 통할 수 있다 보고, 우리로 하여금 간밤의 꿈을 정치적 개입의 도구로 변환시킬 수 있도록 초청하고 있었다.
 




 1월 20일 방문했던 휘트니 미술관의 경우도 J20 Arts Strike에 적극 참여 중이었다. 이 날 휘트니는 아침 10시 30분에서부터 밤 10시까지 그 누구든 원하는 가격만 지불해도 입장할 수 있도록(pay-what-you-wish) 함으로써 필요한 담화에 대한 시민 참여를 높이고, 다양성을 열어두려 노력하였다. 특별 프로그램으로는 “My America”라는 가이드 투어를 통해 이민, 민족, 인종 등 미국의 복잡한 정체성을 인지하는 휘트니의 컬렉션을 투어하는 프로그램이 있었고, 이는 6회에 걸쳐 회당 한 시간동안 소개되었다. 또한 오후에는 “Speak Out on Inauguration Day(취임날에 선포하라)”라는 3시간가량의 선언문 낭독, 그리고 열린 토론회 등이 마련되어 있었다. 태업이 아닌 점령을 통해 휘트니 미술관을 비롯한 뉴욕의 여러 미술관들은 민주 사회의 조건 형성에 비판적 의견과 행동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 문을 더 활짝 열고 업무시간을 연장하겠다는 휘트니와 타미술관들의 움직임은 열려있는 괄호 속 민주 운동이다.
 




 1월 21일 대규모 여성 거리 행진 Woman’s March는 메인 도시 워싱턴 D.C. 외 뉴욕에서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사실 이때의 경험이 뉴욕에서 가장 따뜻하게 기억되는 순간 중 하나이기도 하다. Woman’s March는 여성이슈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여성비하발언을 포함 취임대통령의 가치관을 저항하는 복합적 움직임이다.
 이때 발화되었던 슬로건들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동양인 고등학생들이 외쳤던 “This is what democracy looks like.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모습이다.)” 그리고, “Education not deportation! (추방이 아닌 교육!)” 또한, 여자들이 외치고 남자들이 따라 외쳤던 “My body My Choice, Her Body Her Choice! (나의 몸은 나의 결정, 그녀의 몸은 그녀의 결정!)” 마지막으로는, 아직도 나로 하여금 지치거나 무너질 때 마다 떠오르게 하는 "Don't agonize, organize. (고뇌하지 말고, 조직하라.)" 등이 있다. Woman’s March를 지지하기 위해 뉴욕 미드타운의 수많은 상점들은 화장실 등을 개방함으로써 열린 괄호적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J20 Art Strike는 내게 얼마나 많은 형태와 방법으로 저항과 민주화운동이 가능한지, 그 상상과 행동의 괄호가 얼마나 확장될 수 있는지 그 사례를 무수하게 제공해주었다. 그 어느 때보다 몸과 행동, 비판적 사고 그리고 공적기관에 대한 질문과 담론을 날카롭게 해야 할 때에, J20 Art Strike는 다원적으로 그 둥지와 괄호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예술시민들 각각의 자율적 시위 뿐 아니라 기관차원에서의 개방론적 움직임 그리고 그 방법론의 창의성 등은 대통령의 취임이 갖는 기념비적 성격을 이겨내고 더 큰 동원력(mobility)를 일렁이고 있었다. (J20 Arts Strike)는 동원되어지는 괄호이다.

 

 



 마지막으로, 괄호 안의 괄호 안의 감사

 위와 같은 워크숍, 공연관람, 시위참여의 1월을 지나, 보다 심도 있게 작업했던 2월을 거쳐 드디어 〈living without (Judson)〉의 공연과 이의 엄브렐라 프로젝트인 〈Drifting Body〉의 렉처 퍼포먼스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위의 작업들이 어떠한 과정과 방법론 그리고 구현력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다음 기회에 다른 괄호적 글쓰기로 더 심도 있게 나누어 볼 예정이다.
 괄호적 표류기를 써내려 가는 동안 여러 번 감사하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이번 2017 뉴욕·필라델피아 〈Drifting Body〉 프로젝트를 항공편 제공과 함께 초청해 준 미국의 Knowing Dance More와 University of the Arts에 감사하고, 렉처 퍼포먼스 후 눈물로서 마음을 전달해준 KDM의 큐레이터 Lauren Baskt, 그 다음날 아니 내가 귀국한 이후까지도 〈Drifting Body〉에 대한 감동을 나누어줌으로써 그 형태에 얼굴을 마주해준 UArts 무용학과의 학과장 Donna Faye Burchfield, 또한 렉처 퍼포먼스 90분을 함께 살아주고 질문해준 200여명의 관객들, 함께 Co-location해주기 위해 렉처 퍼포먼스 시간 동안 새벽녘의 서울길을 표류해준 나의 드라마터그이자 동역자·동행자 현지예에게, 그리고 〈Drifting Body〉의 첫 구현의 협업자 김지원 작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또한, 2년간의 레지던시를 통해 가족으로 거듭난 Movement Research와 저드슨 처치를 일구어 내는 스태프, living without ( )의 하우스 쇼잉을 호스트 해주었던 동료 아티스트Ursula Eagly, 또한 투병을 마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대에 올라와준 나의 퍼포머 Jessica Juyun Lee에게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 〈Drifting Body〉가 그간 연구될 수 있었던 플랫폼과 지원을 제공해주었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무용과학회, 아르코 융복합 해양예술랩, 예술경영지원센터 Next Step, World Dance Alliance Asia Pacific에도 감사의 말씀을 전달하고 싶다.
 다시금 하루를 사는 법을 배웠고, 표류 속에서 둥지를 짓는 법, 또한 둥지 속에서 표류하는 법을 배웠다. 괄호적 감사 속에 나는 다시 전체와 부분을 본다. W/hole. 〈Drifting Body〉 렉처 퍼포먼스가 끝나고 가슴깊이 몰려 왔던 그 말은 with or without. 있더라 해도, 없더라 해도. 그대로 나는 하루를 살아간다. 전체에 더 가까이 부분에 더 가까이 살아간다. This is parenthetical drifting.





 

장혜진
multicity-based 안무가, 무용수, 드라마터그, 큐레이터, 교육자이다. Movement Research의 Artist-In-Residency 및 Faculty('09-11)를 비롯 ImPuls Tanz 의 DanceWebber('11), 루마니아 Moving Dialogue Residency Artist('11), Hollins University 무용과 Assistant Professor('11-14), New York Foundation for the Arts 안무 멘토('14),  New York Live Arts의 Fresh Tracks 안무가('15) 등을 역임하였고, 한국에서는 예술가를 서포트하는 예술가로서의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2017. 04.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