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무용계 내부에 존재하는 검열
정신의 억압은 곧 신체의 억압으로 귀결된다
정영두_안무가

 얼마 전 잠시 한국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동료 안무가 공영선씨의 공연 <도깨비가 나타났다>를 보러갔다 김채현 선생님을 뵈었다. 대화중에 선생님께서 그때 런던 시위에 관해 글을 써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을 하셨다(본인은 2016년 10월28일부터 11월 6일까지 열흘간, 런던 주영 한국문화원 앞을 중심으로 2015년 10월 국립국악원의 검열 파문 때 기획운영단장이었던 현 용호성 주영한국문화원 원장의 해명을 묻는 시위를 했었다).
 런던 시위에 관한 배경과 설명은 여러 매체를 통해 이미 어느 정도 전달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선생님의 제안과는 조금 다르지만, 무용계 내부에는 어떤 검열들이 존재하는지, 무엇이 자유를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하는지에 대해 글을 써보기로 했다. 제도화된 검열을 이야기하는 것만큼이나 일상화된 검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국사람들은 아직 에너지가 있네요.”
 “일본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아마 일본사람들은 조용히 지나갔을 것입니다.”
 “한국 지금 여러 가지로 힘들어 보입니다.”
 “예술가들은 괜찮습니까?”

 최근 몇 달 간 이곳 일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얘기들이다. TV와 신문, 잡지들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촛불집회, 최순실 국정농단과 블랙리스트 등… 큰 사건들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일본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왜 부끄럽고 창피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동시에 병들고 썩은 곳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정말 창피할 것 같다. 병신년과 정유년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비현실적인 일들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느끼는 요즘이다. 예술가라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정면으로 직시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가들은 사회에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반응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사회를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자들은 먼저 예술가들의 눈과 입을 막는다. 자신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수행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변호인>이나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한 연극 <개구리> 등의 작품들은 현 체제와 지배층에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권력자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달가울 리 없다. 그들이 감추고 싶어 하는 부분들을 이야기하는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 작품들이 검열을 강화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이즈음 매일 청문회와 검찰 조사를 통해 밝혀지고 있는 예술검열과 블랙리스트 사건들을 보면서 분노를 넘어 허탈한 심정마저 든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을 정치적 이념이 서로 다른 것에서 발생한 문제로 보는데, 이것은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상식의 문제이자 옳고 그름의 문제다.
 예술가들은 태생적으로 조금 삐딱한 사람들이다. 기존의 질서에 벗어나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어떤 제도나 권력에 길들여지기보다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을 가두고 있는 어떤 금기를 부수고 싶어 한다. 특히 자신과 얽혀있는 수많은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상태를 추구한다는 측면에서는 종교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예술가들의 객기와 반항, 이기적인 모습들이 불편하게 보이는 순간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일종의 몸부림이다. 몸부림이 없으면 열정도 없다. 자신의 작업을 완성하기 위한 열정은 얼마나 몸부림치느냐에 따라 뜨겁거나 미지근하다.
 사람들은 예술가들의 몸부림을 보고 위로와 힘을 얻는다. 먼저 아파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통해 자신과 체제에 대해 성찰하는 기회를 얻는다. 체제에 순응하거나 길들여지는 순간, 예술의 본질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는다. 예술가는 자신이 길들여져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길들여져 있는 상태는 아닌지 끊임없이 되돌아봐야 한다.
 지금껏 우리는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완성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니 온통 감시와 억압, 폭력이 가득한 시대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쁜 권력자들은 교묘하게 편 가르기를 유도해 자기편을 만들고 친절을 베풀었다. 그 친절은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세력들을 죽일 때, 유리한 여론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아주 사악한 짓이 아닐 수 없다. 권력이 베푼 친절에 대한 대가로 사람들은 침묵을 택했고 권력의 억압과 감시에 동조자가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검열의 주체가 아니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권력에 길들여진 침묵은 검열의 일상화를 낳았고 침묵한 사람들은 스스로 검열의 주체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검열의 문제는 국가 단위의 큰 기관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회사나 학교 등의 작은 단위의 기관에서도, 더 작게는 무용단체나 가정에 이르기까지 감시와 검열이 존재한다. 또 기관이라는 제도적 형태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검열은 주로 힘을 가진 사람이 힘을 가지지 못한 사람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고용자와 피고용자 등... 사람과 사람의 관계 안에서 검열은 어떤 형태로든지 일상적으로 존재한다. 그 안에서 누군가에게 검열당하는 대상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를 검열하는 주체가 되기도 한다.
 현 정권 아래에서 일어난 일련의 검열 사태의 경우 제도적, 조직적으로 예술가들을 감시, 통제했기 때문에 옳고 그름의 문제가 명확해 공론화되기 쉬웠던 면이 있다. 하지만 보다 폐쇄적인 작은 단위의 조직이나 관계 안에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이성적 논리가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작동한다 하더라도 자기 검열에 의해 내부 고발로까지 이어지지 못하기 십상이다.

 

 

 

 얼마 전 모 대학 교수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2년이 넘게 제자를 폭행하고 인분까지 먹이는 사태가 있었다. 제자는 교수가 되기 위해 온갖 폭행을 참아 온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교수의 폭행을 알고도 침묵하고 심지어 함께 폭행에 가담한 다른 제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었다.




 무용계의 비정상에 대한 침묵, 우리는 공범 아닌 공범

 무용계에 이 사건을 대입해 본다면 너무 극단적일까.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오는 무용계의 여러 비리 문제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예술가들에게 기존의 질서를 벗어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스승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것과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특히 도제식 교육이 이루어지는 무용 분야의 특성상 스승의 굴레를 벗어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다 보니 제자의 입장에서 부당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거기에 저항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쉽지 않다. 오히려 스승이 만들어 주는 기회를 얻기 위해, 나아가 스승의 명예와 지위, 권력을 물려받기 위해 굴레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그리고 그 굴레를 또 자신의 제자에게 대물림한다.
 한 초등학생이 무용학원에서 무용을 배우는 데 드는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무용을 시작한지 몇 개월 되지도 않은 학생에게 실력이 향상된다는 이유로 필요 이상의 공연과 콩쿠르에 참가할 것을 권하고 거기에 작품비, 레슨비, 의상비 등을 요구한다. 중고등학생이라면 입시 작품비, 콩쿠르 작품비가 더해져 수년 사이에 몇 백 만원에서부터 많게는 몇 천 만원이라는 큰돈이 들어간다. 기량전수나 실력향상은 핑계에 불과하다. 목적은 모두 다른 곳에 있다. 부당한 대가를 요구한 쪽이나 지불한 쪽 모두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학력위조, 임용비리, 입시비리, 지원금 횡령, 티켓 강매 등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일들이 불과 얼마 전까지 벌어진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해야 하는 지금의 구조는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다. 입시비리를 저지른 분들이 무용계 안에서 공식적인 사과성명을 발표한다든가, 자정하려는 노력을 본 기억이 없다. 여전히 기득권을 누리고 유지하려는 모습만 보일 뿐이다. 또 많은 사람들이 그 기득권을 중심으로 형성된 거대한 성역에 기생해 살아가고 있다.
 당장의 이익을 위해서 눈과 귀를 닫다 보니 좁은 무용계 안에서 얽히고설켜 모두가 공범 아닌 공범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모두가 잘못된 것을 알고도 말하지 않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감시하고 검열하는 상황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들은 옳고 그름의 문제를 판단하는 감각자체가 거세된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상식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배우는 무용이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한 인간이 자유롭게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려면, 신체적 자유뿐 아니라 정신적 자유를 함께 획득해야 한다.
 신체적 억압은 눈에 보이지만, 정신적 억압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부당한 요구와 대가로 전수되는 무용, 책임과 반성 없이 침묵과 회피로 창작되는 공연에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있을 리 만무하다. 비리가 횡행하고, 이에 가담하지 않은 자들마저 자기 검열로 침묵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자유는, 자유로운 예술은 보이지 않는 먼 미래의 일일지도 모른다. 정신을 물질화되지 않은 신체의 일부로 인정한다면, 정신의 억압은 곧 신체의 억압으로 귀결된다. 정신이 신체보다 더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신과 신체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특검에서는 블랙리스트 사건을 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중대 범죄로 보고 있다. 청와대를 중심으로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예술, 예술가를 검열했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여기에 분노하고 있고 저항하고 있다.
 정부가 저지른 부당함에 저항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조금은 더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무용계 내부에서 저항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 견주어 보면 말이다. 박근혜, 김기춘, 조윤선, 김종덕, 모철민, 용호성 등… 예술 검열의 원흉들을 향해 분노하는 것보다 우리들의 스승, 선배, 동료들의 억압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일상화되고 내면화된 검열 앞에서 우리 중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본인 역시 누군가에게 검열과 억압의 대상이자 동시에 주체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무용계 안에서 몇 차례 중요한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앞 다투어 덮으려 했던 것이 사실이다. 흔히 얘기하는 집안 망신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상처가 드러나는 순간이야말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번 기회를 철저한 반성과 성찰의 시간으로 삼고, 우리들의 예술이 더 이상 누군가에게 의해 유린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조금 고통스럽더라도 온힘을 다해 검열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제도적 검열과 일상적 검열에 우리는 어떻게 맞서야 할까. 언어를 매개로 하는 장르의 특성상 쉽게 검열의 표적이 되고 또 그래서 검열에 적극적으로 맞서온 연극인들의 경우, 사태 초반부터 심포지엄, 공연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검열 이슈를 공론화하고, 이를 시대의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하지만 예술 검열의 문제는 결코 특정 장르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무용계 역시 검열에 대해 스스로의 주의를 환기하고 깨어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안의 검열 기제 역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하고, 침묵하게 만드는지. 제도로서의 검열 이외에 일상에서 우리의 자유를 막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말이다.

* 이 글을 손질하는데 도움을 주신 오한솔(뉴욕 시립대 대학원, 연극학과 박사과정)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2017. 0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