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악마와의 거래, 블랙리스트 그 책임을 묻는다
김채현_춤비평가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작성에 몰두하고 법에 어긋난 검열을 자행하는 자들은 무슨 마음으로 그러는 건가? 그런 혐의를 받는 자들은 언필칭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는 일, 자기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잡아떼기 일쑤다. 이런 태도는 그들도 블랙리스트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행위임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대변한다. 그런데도 그들이 그런 일을 서슴지 않는 것은 그 무엇에 홀린 탓이다. 여기서 그 무엇이 악마 같은 권력의 명령, 권력에의 협력, 권력에의 아부, 권력으로부터의 반대급부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이름: 000, 거주지: 베를린, 직업: 무용가, 신분: 1/2유태인. 이름: △△△, 거주지: 비엔나, 직업: 합창단 가수, 신분: 1/4유태인. 이름: □□□, 거주지: 베를린, 직업: 미술가, 신분: 순수유태인과 결혼. ...” 독일 아리안족이 아니면서 유태인과 결혼한 예술인으로서 독일 나치 정권의 공연예술위원회에서 배제된 명단의 일부이다. 나치 정권의 제국문화원(RKK)이 1940년 8월 작성한 이 명단은 모두 62명의 신원을 담고 있다. 해당 문건은 베를린의 기록물센터에 보관되어 있다.
 블랙리스트 역사에서 나치스 역시 악명이 높다. 히틀러의 독일 순혈주의(純血主義)라는 기괴한 망상은, 주지하듯이, 아리안족을 유일하게 가치 있는 민족으로 맹신함으로써 그 이외의 민족을 노예화하거나 멸종시키고 궁극에는 세계 정복의 명분으로 내세워졌다. 그는 집권 초기부터 최우선 멸종 대상으로 유태인을 지목하였고, 나치스가 자행한 유태인 학살로 600만의 생명이 희생당했다.
 나치스의 블랙리스트는 물론 히틀러의 집권으로 시작되었다. 독재자, 악마, 전쟁광 등 온갖 악명만이 어울리는 그는 그래도 한 나라의 정치인이었다. 그 같은 지독한 정치인의 집권 과정은 전광석화(電光石火)의 작전과 다름없었고, 당대 독일의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 나치스의 블랙리스트 작업은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은 채 마음대로 뿌리를 내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1933년 1월 독일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당시 국내 경제와 정치의 극심한 혼란상을 수습하는 타협책으로 나치 정당 대표 히틀러를 수상에 임명하였다. 수상에 임명되자 곧장 히틀러는 나이든 대통령을 압박하여 시민의 기본권을 정지시키는 긴급명령을 내리게 하고 선거를 실시하여 나치당이 독일 의회 다수당이 된다. 몇 달 동안 여러 정당들을 겁박해서 해산시켜버리고 그해 7월 그의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스)이 독일의 유일 합법 정당이 된다. 다음해 8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노환으로 죽자 그가 대통령직을 승계하고선 곧장 총통(Fuehrer)으로 군림한다. 독일에서 히틀러의 제3제국(Drittes Reich)은 이렇게 시작하였다.
 나치스가 의회 다수당이 된 1933년 3월 제국선전부가 설치되고 장관에 요제프 괴벨스가 임명되었다. 괴벨스는 일찍이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한 인물로 선동정치에 뛰어났고, 제3제국에서 문화 분야를 주무르며 히틀러와 운명을 같이 하였다. 제국선전부는 방송, 언론, 영화, 연극, 무용, 문학, 미술, 음악 등을 관할하는 정부 부서로서 쉽게 말해 오늘날 여러 나라에 있는 문화부 같은 곳이다. 그해 11월에는 선전부 안에 제국문화평의회를 설치해서 괴벨스가 의장을 맡았고, 그 2년 후 제국문화평의회를 제국문화원(Reichskulturkammer, RKK)으로 변경해서 방송, 언론, 영화, 공연예술, 문학, 미술, 음악을 제각각 장르별로 위원회가 관장하도록 하였다. 그 장르 위원회 가운데 공연예술위원회는 무용, 연극, 뮤지컬 등의 공연 활동과 단체 관리를 전담하였다.

 

 



 베를린의 독일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된 어느 문건에서는 검열의 사례가 목격된다. 1942년 11월 나치스 제국선전부의 공연예술 부문 담당자가 책임자에게 올린 보고서이다. 두 무용가의 독무 소품들로 구성된 공연을 관람한 바로 다음날 작성되었다.(무용가 인명은 모두 A, B로 익명 처리해서 인용함)
 “... A는 5년 전에 입신한 매우 인상적인 무용가이고 히틀러 총통을 위해 춤추어 온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런데 〈목매달린 자를 위한 자장가〉란 제목의 작품에서 제가 이해한 바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유산(流産)을 위한 자장가〉라고 제목을 붙이는 편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이후 공연에서는 그렇게 제시될지도 모릅니다... A는 심각한 무용가이기에 무용에서 제시된 이미지는 전적으로 비틀어진 이미지였습니다... B는 처음에 3편을 추었습니다... 간편한 일상복 차림의 그녀는 무대에 서서 젊은 여자 혹은 아내가 하는 작별 인사를 묘사하였습니다. 상상 속 외로움에 시달리는 이 여성은 지금은 없는 연인이 천신만고의 위험에 처하는 것을 상상하고 있습니다. 결론은 무대에서 완전히 쓰러짐. 저는 이런 스타일의 춤이 우리들(나치스)의 생각과 어긋난다고 믿습니다... 우리라면 그런 식의 드라마를 금지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재능에 의심의 여지가 없어도 피아니스트가 볼셰비키(러시아 공산당 경향)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우리는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그런 식의 무용 공연도 불허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저는 장래에는 무용 발표회가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점을 제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일 히틀러! 보고자 서명.”
 1933년 3월 제국선전부가 설치된 것을 필두로 독일의 학교와 대학에서 유태인 재학생 비율을 1.5%미만으로 제한하고 나치즘 반대 성향의 서적을 소각하는 것을 시작으로 7월에는 모든 무용 교사들을 나치스 교사 연맹의 산하 협회로 조직하는 것과 같이 독일에서는 모든 예술을 국가 기구 속으로 편입해서 통제하는 체제가 시작되었다. 1937년에는 ‘퇴폐 미술 전시회’를 독일 대도시에서 장기간 순회하며 열고 현대미술 600백 점과 그 작가들을 조롱하고 모독하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당대 독일 춤계를 이끌던 루돌프 라반과 마리 뷔그만은, 나치스 독일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든 아랑곳 않는다는 듯이, 나치스 체제 내에서 각자 우월을 인정받으려고 경쟁에 몰두하는 모습도 보였다.(결국 라반은 1937년 영국으로 망명하였고 뷔그만은 자신의 뜻과는 달리 끝내 나치스 우두머리들의 관심거리가 되지 못하였다.)
 나치스의 전체주의적 관리 체제는 문화예술을 철저히 통제하는 법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 법규에 의한 제재, 예술인 스스로의 자기 검열도 모자라 나치스는 유태인 혈통, 동성애자, 반(反)나치 성향의 예술, 현대 예술을 나치스 기준으로 도처에서 색출하고 추방하는 작업을 집요하게 진행하였다. 나치스 시대는 독일뿐만 아니라 인류의 천인공노할 수치이다. 지금도 그 시대를 독일인들은 말하기 꺼려하며 회피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암흑시대는 당대 예술인들 스스로 회상하고 싶지도 말하고 싶지도 않은 그래서 기록에 남기고 싶지도 않은 ‘공백기’로 비워져 있다. 당대 독일 무용인 몇 사람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봐도 그 시기 활동상에 대한 서술은 매우 허술하거나 간략하다. 이 공백기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지금, 독일에서도 과거 청산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악마와의 거래 산물인 블랙리스트와 검열은 이처럼 일국의 문화예술을 공백기로 몰아넣는다. 문화예술을 보호하고 지원하며 진흥에 앞장서야 할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놀랍게도 블랙리스트에 순응하고 이를 적극 집행했다는 증언들 앞에서 우리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누구를 위한, 어느 나라의 문화체육관광부이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인지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2016. 1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