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최근 몇 년간 한국은 북유럽풍 아이템이 대세입니다. 세련된 컬러와 모던하면서 유행을 잘 타지 않는 감각적 디자인. 흔히 ‘북유럽 감성’, ‘스칸디나비아 스타일’ 등으로 불리며 실내 인테리어는 물론 패션과 가전, 심지어는 노르딕 워킹이라는 운동법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북유럽의 브랜드 혹은 스타일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용 분야에서는 어떨까요?
저는 지난 11월 30일부터 12월 4일까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노르딕 무용플랫폼 아이스핫(ICE HOT, http://www.icehotnordicdance.com)에 참석했습니다. 아이스핫은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 5개국의 대표적인 무용기관 혹은 무용전용극장이 그들의 무용가와 무용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만든 플랫폼으로 2010년 스웨덴, 2012년 핀란드, 2014년 노르웨이에 이어 올해 코펜하겐이 네 번째입니다.
아이스핫에 참석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저에게 북유럽 무용은 매우 친숙합니다. 아마도 지난 2004년부터 지금까지 시댄스에서 일하면서 꽤나 많은 북유럽 무용가들과 일해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참고로 시댄스는 2004년과 2005년 핀란드 테로 사리넨을 시작으로 토미 키티(핀란드, 2007), 수잔나 레이노넨(핀란드/노르딕 포커스, 2010), 키트 존슨(덴마크/2007 및 노르딕 포커스 2010), 파르스 프로 토토(아이슬란드/노르딕 포커스, 2010), 글림스 앤 글롬스(핀란드, 2011), 쿨베리발레단(스웨덴, 2012), 잉군 비외른스고르(노르웨이, 2013), 아우라코 댄스시어터(핀란드, 2013), 덴마크 댄스시어터, 돈 그누, 그란회이무용단, (덴마크/덴마크 포커스, 2014), 그리고 제브라무용단 (스웨덴 2015)까지 꾸준히 이들 무용을 한국에 소개해왔습니다.
아이스핫은 지난 2009년 여름 매우 우연치 않은 계기로 시작되었습니다. 스웨덴 스톡홀롬 댄스하우스의 한 관계자가 업무 차 방문한 핀란드 댄스인포핀란드(핀란드 무용을 국제무대에 프로모션하기 위해 만들어진 민간기관)에서 담소를 나누면서 그들 사이에 뭔가 얘기가 참 잘 통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안무가들이 같은 아시아에서 활동하기보다 이왕이면 유럽 쪽으로 더 진출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들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지리적으로 가깝고 문화적 배경도 비슷하지만 이들도 서로가 서로를 모르고 교류도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무용은 어딜 가나 표 팔기 힘든 장르이다 보니 서로의 고충과 하소연들을 하면서 이 어려움을 함께 모여 헤쳐 나가보자, 이왕이면 함께 즐거운 이벤트를 한번 만들어 보자고 해서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아이스핫입니다.
그 해 가을, 노르웨이 댄스하우스와 덴마크 댄스핼러네가 이 특별한 움직임에 가세했고 2010년 첫 번째 아이스핫이 스웨덴에서 개최되었습니다. 당시에는 행사를 치를 만한 예산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타이트한 일정으로 일종의 시범무대를 가진 셈이었습니다. 첫 단추에 대한 내부적 성과로 고무된 아이스핫에 최종적으로 아이슬란드가 합류하며 지금의 5개국 네트워크 연합이 완성되었습니다.
아이스핫의 5개국 5개 기관은 돌아가면 격년제로 행사를 치릅니다. 스웨덴 댄스하우스, 핀란드 댄스인포핀란드, 노르웨이 댄스하우스 그리고 올해 2016년 덴마크 댄스핼러네를 중심으로 네 번째 행사를 치렀고 2018년에는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마지막 행사를 치르면 처음 이들이 약속한 5번의 임무는 완수를 하는 셈입니다. 물론 아직 그 다음은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계속 이어갈지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바꾸게 될지 누구도 그 다음을 확정지어 얘기하지 못합니다.
아이스핫은 스스로를 조직체(Organization)가 아닌, 프로젝트라고 지칭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다른 어떤 국가의 기관이나 단체보다 그들의 일은 매우 조직적입니다. 일을 참 잘한다는 얘기입니다. 1회 행사는 각자가 역할 분담을 해서 소박하고 단촐하게 시작을 했지만 이후 노르딕 펀드로부터 지원금을 확보하며 행사의 규모를 늘리고 지난 6년간 전 세계 무용시장에서 ‘아이스핫’이라는 위트있는 이름을 브랜드화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시아로 북미로 또 유럽으로 꾸준히 그들의 무용가들을 국제무대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를 물어보면 공통적으로 ‘파트너십’을 말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각자의 경험과 능력을 존중하며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스웨덴의 오랜 지배를 받은 노르딕권에도 여전히 민감한 정서적 이슈들이 존재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공통의 언어적 문화적 연대, 아울러 사회적 연대까지도 가능하게 하는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실질적으로 이들 행사가 노르딕 펀드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행사가 존속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아이스핫은 공모를 통해 각국에서 참가자를 모집합니다. 그리고 각국에서 합의하에 선정한 심사위원들이 이를 선정하고 (3회까지는 노르딕 외에 다른 지역의 심사위원이 참가했으나 올해부터는 노르딕 권역에서만 심사를 했다고 함) 최종 프로그램을 결정합니다. 다른 플랫폼과는 달리 참가 공연팀에게는 공연료도 지급한다고 합니다. 마켓의 기능성과 함께 참가자들도 함께 즐기는 축제성의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최종 프로그램을 선정하는 것 외에 A부터 Z까지 다른 모든 것은 호스팅을 맡은 국가가 전적으로 알아서 진행합니다. 다른 파트너들은 호스팅 파트너의 모든 것을 존중하고 이를 밀어준다고 하니 서로의 서로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습니다.
아이스핫 코펜하겐은 댄스핼러네(Dansehallerne)를 중심으로 Dansekapellet, Baltoppen Live, KU.BE 등 4개 공연장에서 총 21편의 공연과 15개의 워크숍/토론/네트워킹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유럽과 북미, 오세아니아, 아랍 그리고 아시아 등에서 400여명의 델리게이트가 참가했는데, 한국에서는 시댄스의 이종호 예술감독, 아시테지 코리아의 김숙희 예술감독, 스파프의 오선명 무용프로그래머 그리고 예술경영지원센터의 김신아 실장 등 총 7명의 인사가 참석했습니다. 참석자 수는 지금까지의 아이스핫 중에서 가장 많았지만 프로그래밍에 대한 전반적 평가는 솔직히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했던 작품은 현재 유럽 무용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메테 잉바르센(Mette Ingvartsen)의 〈69 Positions〉였습니다. 2013년 코펜하겐을 방문했을 때 조명과 셀로판지를 이용해 환경 문제를 다룬 그녀의 작품이 인상적이었는데 매우 심하게 비싼 공연료가 더 강렬해서 시댄스 초청을 포기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녀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증명이라도 하듯 공연은 일찌감치 매진, 예약을 미처 못 했지만 현장에 가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몇몇 프리젠터들도 결국 헛걸음을 하고 만.
안무가 메테가 직접 투어 가이드가 되어 과거 있었던 성적 공연 (Sexual performances)을 기록한 전시와 영상을 설명하고 직접 몸으로 재현하며 현대사회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문제점, 인식의 한계 등을 다룬 작품이었습니다. 솔직히 중간에 나왔습니다. 아직 한국에서는 이런 작품은 보여주기 어렵다라는 핑계도 있었지만 스스로도 성에 대한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받아들이고 공론화시켜 이야기할 수 있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불편함을 야기하는 안무가의 표정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봤던 작품도 16명의 프로페셔널 댄서와 30명의 일반인들이 나체로 등장해 무대에서 달리고 낙하하며 자연 그대로의 육체를 사용해 다양한 질문을 던지는 꽉 채웠던 Mia Habib의 〈A song to…〉라는 작품이었습니다. 사회적, 철학적 안무적 의도를 넘어 다양한 인간 군상의 벌거벗은 모습에서 의외로 연약함과 동시에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올해 아이스핫에서는 한국의 시댄스, 중국/홍콩의 시티 컨템포러리 댄스 페스티벌 그리고 일본의 요코하마 댄스컬렉션이 지난 2년간 준비해온 동아시아댄스플랫폼(EADP)의 론칭 소식을 알리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동아시아댄스플랫폼은 사실 여기 아이스핫의 친구들이 부추겨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중일이라는 결합이 사실 신선하지도 않고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각국의 정치적, 사회적, 행정적 환경도 많이 달라서 뭔가를 함께 도모하기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시아 3국이 각자 축제와 플랫폼 성격의 프로그램을 통해 그 동안 쌓아온 노하우와 네트워킹을 바탕으로 아시아 무용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가길 기대해볼 수 있었습니다. 서양 무용계의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커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 출발과 과정을 알고 지지해준 노르딕 플랫폼의 친구들 그리고 이 소식을 궁금해 하는 많은 무용 관계자들의 축하를 받아 더욱 든든했습니다. 제1회 동아시아댄스플랫폼은 2017년 11월 21일부터 26일까지 홍콩에서 개최되며 한국에서는 김보라, 김보람, 이경은, 정철인, 최영현 등이 참가할 예정입니다.
아이스핫 코펜하겐을 마치고 2018년 아이스핫이 열리는 레이캬비크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아이스핫 레이캬비크를 주도적으로 맡고 있는 Åsa Edgren를 만나 내후년의 아이스핫이 개최되는 몇몇 극장과 공간을 방문했고 아직은 우리에게 매우 생소한 아이슬란드의 무용계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이들이 하나같이 얘기하는 것은 노르딕권은 ‘Process based’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결과보다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과정, 한 명 한 명의 의견을 묻고 여러 가지 예상되는 효과와 문제점, 결과들을 끊임없이 추측해보고 이야기하며 보내는 그 과정. 그 시간을 쓰는 것이 아깝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몇몇 마켓에서 아이스핫의 부스를 방문하고 이들의 네트워킹 모임에 참석하면서 느꼈던 것도 역시 친화력 있게 다가와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듣는 모습이었습니다. 지금의 아이스핫은 그러한 과정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이번 방문에서는 흔히 말하는 ‘건질만한 공연’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일의 과정의 중요성’을 한 번 더 느꼈습니다. 2018년의 아이스핫에 대한 기대가 더 큰 것은 아마 그것이 되어가는 또 하나의 과정, 2016년 아이스핫 코펜하겐을 함께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 이번 방문은 한국공연예술의 해외진출과 국제교류 활성화, 전문기획자의 국제교류 역량증진과 국내외 네트워크 구축을 도모하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설계된 예술경영지원센터의 ‘해외아트마켓 홍보지원’ 참가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