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6월 23일부터 7월 9일까지 열렸던 몽펠리에댄스페스티벌의 끝 무렵에 잠시 그곳에서 발길을 머무를 수 있었다. 파리의 서늘한 공기와는 다르게 프랑스 남부도시 몽펠리에의 후끈한 열기는 나로 하여금 바로 흥이 솟게 하였다. 시차는 잊고 레디, 셋, 고의 삼박자의 적응 혹은 출발의 원리 또한 잊은 채 페스티벌 속에 젖어들었다.
이번 해로 36번째가 되는 몽펠리에댄스페스티벌 프로그램의 서문에서 에술감독인 쟝 폴 몬타나리(Jean-Laul Montanari)는 “본 페스티벌은 다른 지중해안 국경도시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춤은 이러한 동시대 이슈에 대한 창작적 성찰에 몰두할 수 있는 ‘구실’이 되어준다”고 말한다. 이러한 시기에 왜 굳이 창작을 하겠느냐? (Why create?)라는 질문과도 함께 그 필요불충분한 춤과 플랫폼의 존재에 대해 맺음말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렵고도 드라마틱한 이슈들에 대한 페스티벌이라 해도, 이는 여전히 페스티벌이다! 눈을 뜨고 예술가를 바라보고, 함께 즐기자.”
이러한 긴장 혹은 축제의 공기는 곧 방문인의 입장, 그 응시로 인해 그 중간의 무언가가 된다. 이슈라는 구실 혹은 축제라는 구실은 선택적으로 페스티벌 속에 더 깊이 젖어들 수 있는 자율성을 의미했다. 그저 여행이라는 한시적 경험 속에 우려와 환희를 모두를 관찰자로서 또는 수집자로서 즐기고 있는 듯 했다. 이러한 근접성(proximity)의 조절 혹은 근접화라는 움직임은 표류하고 있는 상태로 작품을 감상하는 나의 시각과 또한 다른 응시구도들을 이해하는데 흥미로운 도구로 작용했다.
그러한 시각의 팁토잉(tiptoeing) 혹은 비틀거림에 대해서는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노(Dimitris Papaioannou)의 작품이 가장 좋은 예시가 될 것이다. 디미트리스는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나 화가 야니 차루치스에게 교육을 받고, 화가, 퍼포머, 안무가, 연출가 등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또한 2004년 아테네올림픽의 개막과 폐막작을 안무하였고 2010년 풀브라이트(Fullbright Artist’s Scholarship) 아티스트였다. 그의 작품 〈Still Life〉 (멈춘 목숨, 가만히 있는 목숨 - 이라고 번역하고 싶다)는 오페라 베르리오즈라는 몽펠리에의 대극장에서 공연되었다.
그리스 신화의 시시푸스를 연상시킨다는 본 작품은 영리한 재난을 꿈꾸는 듯 했다. 관객의 극장 입장과 함께 무대 끝자락 우리와 가까운 곳에서 한동안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앉아있는 그는 자신을 지지하던 의자가 제거되고도 한동안을 같은 자세로 무언가를 기다린다. 그 순간 그의 몸은 틀이고 공간이다. 그는 그의 몸으로서 그리고 몸속에서 기다리고 버티고 있다. 이미 작품의 트레일러를 보는 듯한 버티는 몸의 복선이 느껴진다.
그 버티는 몸은 곧 무대 가장 뒤편 우리에게서 가장 멀리 있는 곳으로 간다. 이 작품에 가장 주된 이미지가 되는, 계속해서 깨어지는 돌벽을 등에 지고 걷는 직립보행하는 인간으로 다시 나타난다. 은유와 재현 그 연출의 영리함은 한편으로는 나를 불편하게 하였으나, 동시에 환희하게 하였다. 구원 혹은 구출은 이미 연출적으로 그 무언가 “다른” 효과를 불러오고 있었다. 너무도 영리한 재난이다.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식별가능하지 않는 어떠한 소리는 재난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개 짖는 소리 같기도 하였다. 혹은 여러 몽환적이고 마술과도 같이 영리한 이미지들은 나로 하여금 뜬금없거나 나름 타당한 연상을 하게 한다.
이러한 재난과 영리함 사이의 팁토잉에 여전히 긴장을 하기도 하나, 재현의 재난의 오류는 일어나지 않는다. 멈춰있는 그 목숨, 삶은 계속되었다. 볼록한 하늘산은 점점 솟아오르거나 무너지고 있었고, 뜨는 것 같기도 하고 지는 것 같은 태양달, 이 모든 가상의 것들이 실재의 중력과 물체의 갈라짐 속에 일어났다 사라진다. 계속되는 돌벽 그리고 바닥의 표피와 조직의 부서짐은 그 벗겨짐이 오히려 살아있음을 닮은 듯 했다. 그 부서지는 살아가는 소리는 실재로서 우리 곁에 함께한다. 몸을 파내어 내고 다시 묻는 듯하게 움직이고 있는 그 몸은 자신의 무덤을 파는지 아니면 다른 이의 몸을 찾아내는지 앞으로 한발 한발 삽으로 본인의 다리를 들어올려 우리를 향해 전진한다.
키만 한 사다리 혹은 계단은 영리하게 천국을 향하는 듯한 사람의 몸에 의해 우뚝 서있다. 바람을 일으키는 우뚝 서 있는 투명한 관의 문은 계속해서 펄럭이며 그 뒤 숨겨진 혹은 보여진 사람의 이미지를 지운다. 한 순간 이는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듯한 이미지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듯한 이미지다. 그러한 이미지 속에, 십자가를 지듯 무너지고 깨어지고 있는 벽을 등에 지고 있는 그 몸 바로 정면 반대편에는 관객 속으로 그 사람이 출몰한다. 앞에서부터의 출몰과 응시, 그 대면은 재난에 대한 질문인 것 같기도, 사라진 그 몸들에 대한 물음 같기도 하다. 피해자도 희생자도, 바닥에 눕게 되는 버너러블한 스테이트도 겪지 않는 직립보행의 몸들이다. 그들의 등에 남긴 하얀 벽의 자국은 마치 날개와도 같이 여러 몸에서 발견된다. 죽은 시인의 사회가 떠오른다. 그 순간 나는 깨닫게 된다. 이 작품에서의 이러한 은유의 모드 속 희망은 연출적 영리함 혹은 환상에 있지 아니하고 소환과 멜랑콜리에 있다. 누군가를 자꾸 불러내고 구원한다. 그가 그린 구름이라는 구른 그늘 속 무언가 자꾸 나타난다. 그리고 정면의 절대 응시자를 대면하여 자꾸 물어보는 듯하다. 이 몸들이 다 어디 갔습니까?
이 세계가 계속되는 즈음, 나는 궁금해졌다. 어떠한 형태로 작품이 끝나게 될까? 어떠한 형식의 창작자로서의 책임감을 엔딩으로서 보여줄까? 대부분의 저녁공연 작품이 그렇듯 저녁식사 시간동안 공연된 이 작품의 엔딩은 4명의 몸이 잘 차려진 디너 테이블을 (적어도 내 눈에는 디너 테이블이었다) 무대 뒤편에서부터 머리에 이고 나와 프로시니엄 스테이지를 내려와 관객석 바로 앞에 내려놓는다. 그러고는 진짜로 앉아서 빵을 뜯고 건배를 하고 대화를 하며 그릭 샐러드를 먹는다. 중력, 깨어짐 이외의 진짜의 삶이 일어난다. 그 배고픈 배는 진짜로 채워짐을 얻는다. 공연이 끝나지 않고 여전히 러닝되고 있는 이 장면 속에서 관객들은 모두 정점에 오른 듯 박수를 친다. (다른 도시 다른 베뉴의 공연 때에도 마찬가지 반응이었다고 한다) 생명에 대한 기념인걸까. 뉴욕타임즈의 크리틱이였던 클라우디아 라 로코(Claudia La Rocco)가 말한 신체로 인한 정신적 기교가 이런 것일까? 그 순간 나 또한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편안하게 식사를 하는 그들에게 가상으로라도 무사해주어 고맙다는 팁토잉한 시각이 작동하고 있다.
특권에 대한 이야기는 알리의 작품을 구실삼아 이야기 해보고 싶다. 2012년도 〈My paradoxical knives, It shocks me but not you〉라는 작품으로 이미 이 페스티벌에서 공연한 적 있는 알리 모이니(Ali Moini)는 이란 출신 안무가로 어린 시절 음악을 공부하고 이후 연극과 작곡을 공부하다 2009년 포르투갈의 리스본 댄스 포럼(Forum Danca Lisbon)에서 2년 동안 컨템포러리 댄스를 연구하였다.
이번 2016년 작품 〈Man Anam Ke Rostam Bovad Pahlavan〉에서 우리에게 보이는 주된 장치와 이미지를 생태적 운동감각적 조각상(Ecologically kinetic sculpture)이라 부르고 싶다. 거울뉴런을 연상시키는 이 키네틱 조각상 혹은 마리오넷은 한 주체가 움직이면 반응체가 시간차 없이 함께 미러링 한다. 자율성에 대한 당연한 질문과 함께, 수직적 몸에 대한 질문, 그리고 관계 미학에 대한 질문, 피타고라스의 미학에 대한 질문과도 함께 나는 보는 내내 제스처의 이주에 관한 이론적 표류를 시작한다. 그러다 그가 위를 올려다본다. 줄이 연결된 그 곳. 컨트롤의 소스다. 코레오그래피다. 수사학, 보이지 않는 이에 대한 염원, 기억이다. 그 순간 코코 푸스코(Coco Fusco)가 다시 또 기억난다. 우리들의 것이 아닌 몸인 것인가? 이렇게 좌식하는 컨벤션에서 시간에 대한 컨트롤 없이 나는 이 작품을 소비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알리의 작품은 작가의 의도를 통해 다시 혼돈에 빠짐으로써 특권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형태로 다르게 아카이빙이 작동했다.
알리는 프레스 인터뷰에서 다른 몸을 만지지 못한 채로 안무를 해야하는 출신 국가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퍼펫에 생고기를 매어 붙였던 그의 촉각적 경험은 그 순간부터 무엇인가 다른 것이 되어 다가온다. 한참을 혼돈스러웠다. 동시대적 이론의 중심인 작가의 죽음, 관계미학, 들뢰즈의 되기는 특권(privilege)이라는 말 앞에 힘을 잃어버리는 듯하다. 모든 되기가 진정 소수자 되기라면 우리가 보고 있는 그의 몸 그리고 트렌드화 되어 읽혀지는 이 키네틱 장치를 나는 달리 읽었어야 한다. 그에게 공연예술은 정말 구실인 것일까?
이렇게 혼돈에 혼동을 더하여서도 그의 접근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어서 다음 날 몽펠리에 한 거리공원에서 한 시간 동안 일어난 Ali의 워크숍을 찾아갔다. 스팅의 Thousand Years노래에 맞추어 스스로의 몸을 태핑(tapping)하는 프랙티스였다. 팔의 길이만큼을 만져보고, 양 어깨를 만져 보고 발가락과 발꿈치로 당을 태핑하기도, 공기에 손을 흔들기도 한다. 모닝 바게트를 사가지고 가던 사람들이 자전거를 멈춰 서서 스스로의 몸을 태핑한다. 스티브 팩스턴식의 컨택 즉흥도 바디-마인드-센터링도 아닌 다른 형태의 몸과 근접성(proximity)을 측정한다. 나는 그 순간 다시 물었다. 그에게 몸은, 그리고 촉각은 무엇을 의미할까? 동시대성, 그리고 그 배경이론들은 무엇일까? 나는 한동안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Meme〉는 조금 달랐다. 한국에도 여러 번 내한하여 잘 알려진 안무가 피에르 리갈 (Pierre Regal)은 육상선수 출신이자 경제수학 학위를 받은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의 이번 작품 〈Meme〉 역시 창작과정에서의 수사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창작 스튜디오에서 일어나는 일이 죽었다 살아나는 듯 심리적 지형도의 변화에 따른 에디팅이 이루어지고, 우리는 그 스튜디오 안에서 어떤 명령어가 오고 갔을지 궁금하게 된다. 이것들이 설계되기 위하여 이야기된 것은 무엇일까? 언어가 의미를 잃고 반복을 위한 소스가 되는 이 작품에서는 재연과 재현에 대한 이야기 외에도 안무가 되는 조건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듯 했다. 첫 장면에 바나나를 까먹으면서 등장했던 그곳에서 또 다른 바나나를 가지고 온 이가 들어오며 한 시간 전 바나나 껍질을 바라보는 장면은 공연예술 매체에서의 반복 그 재연 혹은 재현에 대한 위트 있는 코멘트였다.
엔딩 혹은 퇴장 역시 굴러가 버린 고무바닥 뒤에 몸은 놓고 또 다른 몸을 입고 다른 곳에서 등장하는 방법으로 재현에 대해 이야기한다. 피에르의 시간 베이스적 라이브 편집은 가히 내가 보던 중 최고였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밤 10시 아고라의 야외극장에서 100분가량 이루어졌으며 디미트리스의 작품이 식사시간에 일어났듯이, 취침시간에 일어나는 관객의 몸의 현상을 모두 환영하는 듯 해보였다. 몽펠리에의 야심한 시각에 경험한 작품 〈Meme〉 또한 다른 두 작품들과도 같이 나의 시각을 한동안 비틀거리게 할 것 같다.
5일간의 방문을 마치고 파리행 비행기를 타던 나는 다시 한 번 지중해를 바라보았다. 몽펠리에댄스페스티벌을 축제 혹은 구실이라 부른 쟝 폴의 선언, 그리고 지중해안 도시에 대한 페스티벌의 반응에 나는 이미 함께하고 있다. 내년부터 매해 계속될 수도 있을 이 gathering과 근접성을 통해 계속해서 비틀거리는 시각으로 회귀하고 싶다. 다음을 상상하기 위해, 보다 먼 곳에서 내가 가까운 것은 무엇인지를 탐구하기에 지중해안 도시 몽펠리에는 아주 완벽한 환경이었음에, 내년이라는 먼 시간을 나는 또 다시 가까이 기대한다. Near & Far. In mo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