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2015년 8월 15일 전후로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전국에서 잇따라 행해졌다. 일찌감치 ‘광복7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조직되어 8월 15일 당일의 경축식 뿐만이 아니라 국제포럼, 기념학술대회, 경원선 복원 착공, 통일박람회, 독립운동가 인명사전 편찬, 각종 기획전, 사진전, 한중 자전거대장정, 공모전, 아리랑대축제, 경축음악회, 창작 오페라 공연, 청년 세대 분단 극복 프로젝트, 국민화합대축제 등 다양한 행사와 사업이 정부의 부처별로 진행되었고 진행되고 있다. 또 전국의 지자체들도 독자적인 경축행사를 벌리며, 불꽃축제와 더불어 전국이 떠들썩했다.
이러한 행사와 사업들이 ‘광복 70주년’이란 타이틀 하에 치뤄진 특별하면서 당연한 연례행사로 느껴질 수 있다. 해방 이후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의 상처를 딛고 기적 같은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경제와 문화의 한류(韓流)로 세계를 향해 도약하면서, 광복의 의미와 감흥이 흐릿해질 수 있는 70년의 세월이 흐르며 거의 3세대를 넘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방 당시의 감격과 흥분은 달랐을 것이다. 삼천리 한반도를 들끓게 하고, 삼천만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예술가들은 억압과 감시의 체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예술활동을 꿈꾸며 해방의 함성을 외치고, 분주히 움직였다. 춤계도 마찬가지였다.
해방이 선포된 지 3일 후, 8월 18일에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가 조직되자, 그 산하에 신진무용가 중심으로 조선무용건설본부가 9월 3일에 조직되었다. 이들은 ‘새조선무용건설’을 목표로 10월부터 한달 간 전국 순회공연, 11월에는 수재민돕기 기금모금 공연과 조선무용건설본부 자체 공연도 했다. 한편 9월 30일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이 조직되었다. 그리고 부산에서는 일본 패망 후 조선으로 속속 귀국하는 동포의 구제를 위한 모금공연이 ‘예기대표가무대회’라는 타이틀로 10월 26일에 열렸다.
그렇게 당시 춤계는 해방을 맞아 스스로 역할을 찾았고, 조선의 새로운 춤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1946년 6월에 신무용계 중심으로 전 무용가들이 조선무용예술협회를 결성했다. 이 협회는 수재민(水災民)을 위해 예술계가 총 망라하여 행한 7월 7일의 ‘수해구제야외연예대회’와 11, 12일의 ‘수해동포구제무용음악회’에 참여했다. 그리고 8월 5-7일에 국도극장에서 창립공연을 올렸다.
이 공연 팜플렛에 조선무용예술협회의 활동방향에 대한 글이 실렸다. “배양토도 없고 조직도 없는 곳에 혜성처럼 혹은 의붓자식처럼 나타나 고고히 자라난 조선의 신무용계는 어언 20년이란 세월을 열(閱)하였다. 해방 제 2년을 맞이하야 전조선의 무용가를 망라한 역사적 조직체인 조선무용예술협회에 집결한 모든 무용가들은 어린이와 같은 겸허한 정신에 돌아가 모든 혼란을 버리고 오로지 굳건한 건설의 초석을 하나하나 다시 놓아갈 것이다. 세계예술사에서 동떨어진 조선의 신무용을 역사의 정당한 궤도 위에 올려놓고 조선의 민족무용을 현대인의 혈액으로 씻어 다시 꽃피게 하는 길. 그것은 필시 곤란(困難)한 길일 것이다. 그러나 무협은 이것을 모든 노력을 기우려 감행하려 한다.”고 했다. 즉 조선무용예술협회는 해방 1주년을 맞아 조선 무용의 건설을 위해, 조선의 신무용을 세계무대에 뒤떨어지지 않게 하고, 조선춤을 현대화하여 조선민족의 무용이 꽃피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그리고 민속예술 계통에서도 8·15기념 1주년 행사를 열었다. 대동신문 주최 민족통일총본부와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후원으로 ‘민족예술대제전’을 창경원에서 거행했다. 전통춤 뿐만이 아니라, 탈춤, 농악, 판소리 등이 함께 했다. 1947년에는 진수방이 자신의 신작무용발표회를 8·15 2주년을 맞아 경향신문사 후원으로 9, 10일에 뜻 깊은 기념공연으로 꾸몄다.
이처럼 해방의 기쁨은 해방 공간의 역동적이며 생산적인 예술활동의 가능성들을 보여주었다. 무용가들은 춤 단체의 조직과 활동 뿐만이 아니라 춤에 대한 예술적 고민들을 피력했다. 조용자(趙勇子)는 “춤은 민족성의 발로이며 민족의 대언자인 만치 춤을 예술 문화에 공헌이 될 것이요, 춤이 애국 헌신, 이상, 희망, 문화의 애정가튼 높고 아름다운 정신을 가질 때, 무용 예술은 아름답게 꽃필 것이다. 따라서 무용은 민족성을 내포한 조선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을 만듦으로서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인 조선의 전통을 부활시키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여긴다. … 다른 자매 예술보다 더욱 고난의 길을 걷는 것은 현 조선의 무용가들이 각오하고 돌진하여야할 것이다.”(『조선일보』1946년 2월 18일)라며 해방을 맞은 무용가의 자세를 발언했다.
최승희(崔承姬) 역시 귀국 후 일간지에서 조선민족의 예술전통은 세계예술사에 거대한 광채를 가질 수 있다고 확신한다며, “오늘 날 일제는 이미 파멸되었고 우리 민족에 빛나는 발전의 대로는 열려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해방된 조선의 예술의 기수의 한 사람으로써 세계예술사에 찬란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 이것이 우리들에게 주는 엄숙한 사명으로 생각합니다. … 해방된 조선의 예술가들이나 나는 우리 민족예술 전통을 계승하고 우수한 외국예술문화를 섭취하여 참으로 찬연한 민족형식을 통한 조선예술문화를 건설하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일보 』1946년 7월 21일)라고 천명했다.
이와 같이 해방 공간의 무용가들은 민족무용의 건설을 모토로 하여 해방된 조선에 새로운 춤 문화를 건설하리라는 각오를 했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와는 전혀 다른 생동하는 활동들을 보여주었다. 조선교육무용연구소는 무용이 각 학교의 교육과목이 되어야 하며, 신체와 정신을 함양시킬 수 있는 예술교육이어야 한다고 했고, 한동인이 창립한 서울발레단은 서양의 발레 레퍼토리가 아닌 한국적 소재를 작품화하여 올렸다. 신무용가들은 무용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춤의 역할을 고민하며, 조선춤들을 소재로 다양한 소품들을 창작했고, 현대사회의 여러 개념을 추상화시킨 전위무용도 시도하였다. 국악원은 전통 공연예술들을 한 무대에 선보이는 대규모 공연과 대중강습을 시도했다. 해방공간 무용가들의 이러한 고민과 활동들은 20세기 후반 춤계 발전의 싹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춤계는 70년 세월을 때로는 역동적으로 때로는 지난하게 때로는 겪으며 성장했지만, 광복 70주년을 맞는 한국 춤계의 활동은 현재 다른 분야들에 비해 참으로 빈약하다. 세 건의 활동이 있었을 뿐이다.
한국춤협회(회장 백현순)가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며 6월 현충일에 독도에서 <천고독도한령(天告獨島韓領)>이라는 공연을 펼쳤다. 현충일에 순국선열을 독도로 초혼(招魂)해 춤판을 펼치며,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천하에 고하는 춤을 춘 것이다. 다음 사업도 기획하며 한국춤협회가 춤 단체로서 사회적 관심을 기울일 것이라 했다. 그리고 한국춤문화유산기념사업회와 연낙재가 주최한 대한민국전통무용제전 중에 학술대회가 8월 12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렸는데, ‘광복 70주년기념 한민족무용가포럼’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또 한국넋전춤연구보존회와 극단 각시놀이가 8월 28-30일에 대학로 오르다극장에서 <통일결혼굿>을 올렸다. 분단된 해방으로 인해 이어진 희생과 상처를 보듬고 통일된 해방을 기원한 결혼굿이었다.
그 외 광복 70주년을 되새긴 사업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특히 한국의 대표적 춤 단체들인 한국무용협회, 한국발레협회, 한국전통춤협회, 우리춤협회, 한국현대춤협회 등이 이에 준하는 어떤 구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 단체들은 1946년 ‘조선무용의 건설’을 당면과제로 세우고 조직된 조선무용예술협회의 후신들인 셈이다. 70년 전과 비교해 현재 춤계의 상황이 수량적으로 넉넉해졌다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2015년 현재 춤에 있어서 공연, 교육, 학문, 비평 등이 균형적인지, 충분한 사회적 역할과 발언을 하고 있는지, 미래지향적 전망을 갖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광복 이후 척박한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역동적이고 생산적으로 고민하고 시도했던 해방공간의 춤계를 다시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21세기에 들어선지도 15년이 지났고, 근대춤이 시작된지도 어언 100년이 넘었다. 춤계는 광복 70주년을 어떻게 맞이할지, 어떻게 의미부여할지, 미래의 한국춤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 다음 세대를 위해서 이제라도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