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원의 종소리 그쳐도, 그 소리는 그것을 머금은 꽃들로부터 계속 울려 퍼진다.
「나무들」(Arbos)이라는 작품집을 안드레이 타르꼬쁘스끼에게 바치면서 아르보 뻬르뜨(Arvo Pärt)는 그런 헌사(獻詞)를 적어 넣었다. 마쓰오 바쇼의 하이꾸(俳句)이다.
은은한 종소리는 그것만으로 아름답다. 그렇거늘 그 소리를 머금었다가 샘물처럼 흘려보낸다면 그 여운은 얼마나 무한할까. 뻬르뜨는 그 종소리에 틴티나불룸(tintinnabulum)이라는 아름다운, 너무나 아름다운 말을 찾아내어 입혀주었다. 거의 쓰이지 않은 채 묻혀 있었던 그 말은 드뷔시의 전주곡 「침몰한 대성당」의 종소리처럼 되살아났다.
이쓰(Ys)라는 전설의 섬은 아득한 옛날 깊은 바다 속에 잠겨버렸다 한다. 그런데, 짙은 안개 사이로 햇볕이 스며들 때면, 바다 속에 잠겼던 까떼드랄(대성당)이 은은한 종소리와 함께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 정적의 소리, 그것이 틴티나불룸의 여운이다.
우리는 악취가 요동치는 온갖 배설물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소화도 되지 않고 걸러지지도 않은 채 마구 쏟아지는 그 오물들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도처에 범람한다. ‘분별을 잃고 날뛰면서 소란을 피우는 얼간이’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맥베드 5막 5장)
가 모여 꾸미는 공허한 무대를 향해 ‘꺼져라, 꺼져라, 부질없는 촛불이여’
(Out, out, brief candle)
라고 외쳐본들 무슨 소용이랴. 이 배설물, 이 헛소동의 쓰나미를 걸러내기 위해 우리에게는 지금 정적이 필요하다.
‘침묵보다 더 나은 말이 있다면 이야기하라. 그럴 수 없다면 침묵하라.’
(Aut tace, aut loquere meliora silentio)
– 살바토르 로자의 자화상에 적혀있는 이 절구를 품고 피렌체는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게 된다. “나무처럼 아름다운 시를 나는 모른다”고 크세르세스는 노래한다. 나는 읊을 것이다 – 정적처럼 아름다운 음악을 나는 모른다고. 그 정적 속에서 울리는 종소리, 틴티나불룸을 나는 언제까지나 기다릴 것이다.
틴티나불룸의 향기에 끌려 나는 이따금 제주돌문화공원을 찾는다. 그곳은 구지산의 학(緱山之鶴) 아니면 막고야의 선인(仙人) 백운철 옹이 노니는 곳이기 때문이다.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에는 막고야 선인의 모습이 이렇게 그려져 있다.
막고야 산에 선인이 살고 있는데
피부는 얼음이 나 눈처럼 희고
몸매는 처녀처럼 부드럽다네.
곡식을 먹는 대신 바람과 이슬을 마시고
구름을 타고 용을 몰아
사해 천지 밖에서 노니는구나
藐姑射之山 有神人居焉
肌膚若氷雪 淖約若處子
不食五穀 吸風飮露
乘雲氣 御飛龍
而遊手 四海之外
제주도 조천골의 가장 준수한 오름의 산자락, 구름 사이에 억새가 너울거리고 있는 허름한 오두막에 홀로 기거하면서 은지(隱地)에 기암묘석(奇巖妙石)을 심어 대자연의 교향곡을 꾸리고 있는 그 분은 교교불군(矯矯不群), 도도하여 범인의 무리와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표일(飄逸)의 풍모로 구름에 떠 있는듯 하면서도 언제나 소탈하다. 그러다가 그가 하운(下雲)하여 객을 반길 때, 객은 세속의 때가 말끔히 씻기듯 온 몸과 마음이 절로 후련해진다. 그는 무능한 체 그 빛을 감추고 있는 장교어졸(藏巧於拙)의 회닉은자(晦匿隱者)이다.
곶자왈의 성주
갱상일층루(更上一層樓)의 기개가 하늘로 뻗친 관작루(鸛鵲樓)의 성주 왕지환(王之渙), 시골길을 터덜거리면서 우편물을 배달하다가 홀연히 눈에 띈 돌을 주어 모아 수십 년에 걸쳐 홀로 외로이 으리으리한 성을 쌓았던 빨레 이데알(Palais ideal)의 성주 페르디낭 슈발, 신백조관(Neuschwanstein)의 성주 루드비히 Ⅱ세, 입실론 에리다니의 별자리에 홀려 뉴욕 센트럴 파크의 아람드리 낙낙장수(落落長樹) 위에, 헐릴 때마다 다시 성을 쌓았던 하늘의 성주 레드맨, 천문학자처럼 하늘 가까운 교회의 종루에 누워, 눈이 오면 모든 문을 닫아 잠그고 꿈의 왕국(royaume féerique)을 구축하려했던 뻬이사쥬(Paysage)의 성주 보들레르… 그들 성주는 이제 자취를 감추고 없다.
성주가 사라져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노상 허전하다. 백주에 램프를 들고 내가 찾고 싶었던 사람은 우리 시대에 실종되고만 그 성주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찾아 낸 성주가 제주 돌문화공원의 성주 백운철 옹이다.
연금술사들이 궁극적으로 만들어내려 했던 대역사(大役事 Magnum opus)의 마지막 결정체에 왜 하필이면 ‘현자의 돌’(lapis philosophorumㆍStein der Weisen)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항상 궁금했다. 그러다가 몇 년 전 돌문화공원에 들어서면서 번쩍 눈이 띄었다. 돌이야 말로 하나이자 모든 것, 만물의 모태인 제5원소, 그 숨겨진 보물이 아닌가.
오꿀뚬 라삐뎀(Occultum Lapidem). 하늘이 감추어 놓은 천장(天藏)의 비석(秘石)이면서도 짐짓 아무 곳에나 흩어놓아 오히려 눈에 띄지 않은, 그래서 묻혀버리기도 하고 아무에게나 짓밟히거나 외면당해 온 것이 돌이 아니던가.
그가 수집한 돌은 페르리낭 슈발이 우편물을 배달하면서 개울가에서 주어 모았던 돌과는 규모와 차원이 다르다. 아무 눈에도 띄지 않은 채 굴러 다니던 그 돌들이 어찌 유독 그의 눈에만 띄었을까. 기적이라는 것이 매양 그렇듯이 아마 하늘의 뜻이었을 것이다.
그는 제주도가 내놓은 백만 평의 땅에 그가 수집했던 천장석(天藏石)을 요리하여 조천-함덕 곶자왈에 이 지상에서 유례가 없는 규모의 돌문화공원을 조성키로 했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으리으리한 대역사(大役事)임에 틀림없다.
돌로 화한 오백 장군의 거석이 그의 앞에 도열해 있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숙연해진다. 그 돌들의 교향곡이 땅을 울리면서 가슴으로 전해질 때 나는 우주의 신비에 접신하는 희열로 몸을 떨었다. 영겁의 세월을 품고 있는 그 돌들이 노래하는 정적의 음악, 천상의 화음, 그 지휘자가 백운철 옹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가 위대한 예술가임을 좀처럼 깨닫지 못한다.
내가 처음 돌문화공원을 찾고 나서 몇 년이 지났으니, 그간 많은 변화가 있었을테지만, 나는 공원 안으로 발길을 돌리려 하지 않았고, 그도 나를 그 곳으로 안내하려 하지 않았다. 구지산의 학 같은, 막고야의 신선 같은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가 가꾸고 있는 모든 것이 그 모습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그와 몇 차례 식사를 함께 하면서도 나는 그가 돌문화공원에 새기고 있는 시를 읽고 음미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전국 곳곳에 널려 있는 것이 식당인데도, 그와 한 끼의 식사를 하는 일은 그리 쉽지가 않다. 그림처럼 펼쳐진 한적한 찻 길을 한참 달리다가 후미진 골목길을 돌고 돌면서 제주도라는 곳이 이렇듯 아름다운 비경을 곳곳에 숨기고 있다니… 한 시간도 넘게 거듭거듭 탄성을 내쉬고 나서야 어느 구석진 식당에 이르고는 한다.
제주도가 음식의 고향이라는 말은 별로 들어본 적이 없지만, 그가 대접했던 제주 음식은 어느 것이나 틴티나불룸처럼 깊은 여운이 남는다.
그는 스스로가 예술가인 척 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영(鐘嶸ㆍ480 ~ 552)이라면, 시품(詩品)에서 시의 함축성과 여운을 음식의 맛에 견주어 이야기했던 종영이라면 대뜸 그를 알아볼 것이다.
온 세계를 그 향기로 감싸고 있는 프랑스 요리, 프랑스 문화가 메디치 가문에서 파종되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르네상스 이래 프랑스와 유럽 문화가 피렌체의 메디치 효소로 양조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메디치 가문을 솟아오르게 했던 날개는 금융업을 통해 축적한 그들의 재력이었다고 흔히 믿고 있다. 그러나 코지마가 거듭 강조했듯이 부란 언제든지 거품처럼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허상이 아닌가. 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음식의 맛을 깊이 음미할 줄 아는 그 미감(味感)으로 예술 작품을 음미하고 아낄 줄 알았고, 피렌체가 그의 딸 까떼리나를 프랑스에 파종하면서 프랑스를, 온 유럽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백옹이 안내한 미계(味界)를 탐닉하면서 나는 여기 돌문화공원에 또 하나의 눈부신 문화창조의 싹이 터오르는 빛의 서림에 취해버렸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교래리(橋來里)의 숲(La Forêt) 속에서 풍긴 차의 향기, 지상에서는 모습을 감춘 채 지하에 묻혀버린 거대한 왕궁처럼 구축될 설문대 할망 기념관, 그랑드 샤르트뢰즈처럼 정적을 머금고 있는 곶자왈의 신비 등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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