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뒤셀도르프에서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탄츠메세(Tanzmesse)는 여러 나라의 현대무용 작품을 모아 보여주는 댄스마켓으로는 사실상 유일한 행사입니다. 세계 각국에는 무용, 연극, 음악, 서커스, 복합예술 등 공연예술 분야의 국제교류를 촉진하기 위해 생겨난 많은 마켓들(Performing Arts Market)이 있고, 이 가운데는 무용만을 전문으로 하는 마켓도 제법 많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한 나라 혹은 같은 권역에 속하는 몇몇 나라의 작품을 모아 보여주는 행사인 반면, 탄츠메세는 지역적 한계를 넘어 많은 나라의 수준 높은 무용을 엄선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확실한 차별성을 갖습니다. 세계 각국의 무용가와 무용기획자, 프로그래머들이 가장 많이 찾아오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국제 무용계의 ‘실세’들이 대거 몰려드는 이 무대에서 속된 말로 한번 ‘뜨면’ 이곳저곳으로 소개돼 나갈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저희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도 탄츠메세에서 주목받은 작품을 이따금 초청합니다.
이 만만찮은 무대에 한국 안무가들의 작품이 한꺼번에 다섯 편이나 오르는 즐겁고 흐뭇한 사건이 드디어(!) 벌어졌습니다. 탄츠메세 창설(1994년) 이래 처음입니다. 지난 8월 27일부터 30일까지 진행된 제10회 탄츠메세에서 <한국특집>이란 공식 명칭을 달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특집행사가 마련된 것입니다.
최영현(작품명 Not I), 이인수(Modern Feeling), 김보라(A Long Talk to Oneself), 고블린파티(I GO), 박순호(Balance and Imbalance) 등 다섯 무용단 모두가 관객과 평론가, 기획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고 유럽의 몇몇 프로그래머는 당장에 얘기(한국 무용작품을 유럽에 초청하거나 한국무용가와 유럽무용가의 공동작업을 추진하기 위한)를 시작하자고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폐막일인 30일 저녁 탄츠하우스(Tanzhaus)에서 박순호무용단의 공연이 끝난 뒤 로비에서 열린 한국예술경영지원센터(약칭 예경)와 베를린 한국문화원 주최 리셉션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한국무용의 독특한 미학과 예상외로 높은 안무/연기 수준에 대한 찬탄을 쏟아놓고 갔습니다.
제게도 많은 사람이 찾아와 이야기를 거는 바람에 음식 먹을 틈이 없었습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교수라는 한 중년 여성은 제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정열적으로 한국 현대무용의 미학을 나름대로 분석했습니다. 그녀가 열변을 토하는 동안 제 두 뺨은 그녀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포말로 걷잡을 수 없이 젖어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흐뭇하고 즐거웠습니다.
이 즐겁고 뿌듯한 사건은 그렇지만 결코 손쉽게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과거 탄츠메세에 초대받아 참관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바쁜 직장 일로 포기해야 했던 기억이 있던 저는 언젠가 탄츠메세에 한국무용 특집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자는 욕심을 갖게 되었고 2012년 탄츠메세 책임자인 카요 넬레스에게 이를 제안했었습니다. 이제 한국 창작무용도 그런 호사를 누릴만한 때가 되었다는 판단에서였지요.
처음에 반신반의하던 카요는 결국 기분 좋게 동의했고 일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복병. 참가자들의 항공료 등 경비를 지원하기에 가장 적합한 기관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예경 모두 지원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입장에서야 세계 최고의 댄스마켓에 한국특집을 만들어 주겠다는데 지원을 못해주겠다?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들은 그들대로 생각과 사정이 있었겠지요. 결국 포기해야 했고 카요에게 저는 다소 무능하거나 실없는 친구로 보였을 겁니다.
다음번에는 두 기관이 아니면 다른 데서라도 지원금을 얻어 성사시켜야겠다는 오기가 발동했고 다시 카요에게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마침 작년 가을 시댄스와 서울공연예술마켓(PAMS)을 보러 온 탄츠메세의 프로그래머 캐롤렐린다 디키를 끌고 다니며 이 작품 저 작품 보여주었고 이후 11월 제가 ADA(American Dance Abroad)의 초청으로 샌프란시스코에 갔을 때 그녀를 다시 만나 이인수, 김보라, 고블린파티, 최영현 4개 단체를 초청하는 걸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박순호무용단은 별도로 참가신청을 했고, 따라서 한국특집은 5개 무용단으로 짜여지게 되었습니다(지났으니 말이지만 한때는 탄츠메세 측에서 한 국가에 다섯 단체는 너무 많으니 하나를 빼자면서 아예 4개 단체명만 들어간 홍보물을 만들어 뿌리는 등 저를 애 먹이기도 했습니다).
다섯 편 모두 시댄스에서 초연됐거나 시댄스의 네트워크를 통해 외국에 소개해온 작품이니 저야 기쁠 수밖에요.
경비 문제요? 걱정하던 지원금이 이번엔 너무 쉽게 풀렸습니다. 연초부터 예경이 탄츠메세와 시나르(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종합 공연예술마켓) 등 주요 마켓에 대한 참가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표명했기 때문입니다.
예경은 탄츠메세 참가비용은 물론 이들 5개 단체 가운데 4개 단체의 오스트리아 추가 공연에 필요한 경비도 제공했습니다. 예경은 탄츠메세의 본부격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포룸(NRW Forum)에서도 가장 좋은 곳에 부스를 차려놓고 한국무용 소개와 유통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행사가 모두 끝난 뒤에 만난 캐롤렐린다. “실은 나도 애 많이 먹었어, 미스터 리. 한국 작품을 무대 실연으로 본 사람은 나밖에 없었잖아. 근데 DVD로만 본 다른 선정위원들이 나더러 책임질 수 있느냐고 몰아대는 거야. 이젠 발 뻗고 자도 돼”
카요 넬레스에 이어 올해부터 감독 역할을 이어받은 크리스티안 바티에게는 2016년 탄츠메세에서 또다시 한국 무용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한 모종의 제안을 했습니다. 무슨 일이든 일회성으로 끝나면 의미가 없으니 어렵게 일으킨 ‘한국 춤바람’을 계속 회오리치게 해야지요. 크리스티안과 얘기가 잘되면 그때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마켓은 물건만 팔고 사는 곳이 아닙니다. 탄츠메세의 부대행사로 열린 세미나에 발표자로 참석해서도 그런 점을 강조했습니다만, 적어도 제게는 작품의 발견보다도 사람의 발견 혹은 관계의 발전이 더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켓의 기능 가운데 작품의 발견을 더 중시하기도 합니다. 특히 녹화된 영상물을 믿지 않고 반드시 무대 실연을 보고난 뒤에야 초청 여부를 결정한다는 프로그래머들은 더욱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그 수많은 작품을 일일이 직접 보고나서 결정한다? 충분한 예산과 인력을 가진 조직이라면 몰라도 저같이 영세한 예산으로 제법 규모 있는 축제를 운영하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오히려 비디오로 보고도 실제 공연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선지 저는 마켓이나 축제에서 작품 못지않게 사람 만나는 일을 매우 소중히 여기는 편입니다.
물론 이번 탄츠메세 역시 저에게 ‘사람 만나는 즐거움’을 듬뿍 안겨주었습니다. 그것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말입니다. 우선은 ICE HOT(북유럽 5개국 공동 무용플랫폼)의 아시아 버전 창설을 권하고 있는 북유럽 친구들과 카렌(중국 광둥현대무용축제 및 베이징현대무용축제 예술감독)을 함께 만나 아시아와 북유럽이 협력할 수 있는 범위와 방안에 대한 1차 논의를 가졌습니다.
최악의 경제난을 근근이 견디고 있는 스페인 친구들은 작년 서울의 PAMS에 이어 이번 탄츠메세에도 대거 몰려왔습니다. 자국 공연상품의 해외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랍니다. 제 생각에는 뮤지컬이나 서커스처럼 상업성이 있는 것도 아닌데 현대무용이 무슨 돈벌이에 도움이 되겠다고 저럴까 싶지만, 하여튼 그들은 열심이었습니다. 스페인 무용협회장은 시댄스에서 스페인 무용단 셋 정도를 불러 ‘미니 스페인 특집’을 만들어주면 어떻겠냐고 물어왔고, 바스크 문화원장인 고에나가 여사는 수 년 전 바스크의 젊은 안무가 나초 몬떼로가 춘천마임축제에 초청받아 공연한 사실을 상기시키며 적극 교류를 제안해 왔습니다.
카탈루냐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의 일부이면서도 늘 독립과 분리를 주장하는 바스크인들은 그들의 고유문화를 알리는 데 매우 적극적입니다. 이미 그들과 우호적 관계를 지니고 있는 저로서는 반가운 만남이었지요.
호주 시드니 무용단의 행정감독은 한국인을 객원 안무자로 초청할 수도 있다는 뜻을 비쳤고, 싱가포르 예술축제 감독에서 홍콩 서구룡(웨스트 쿨롱) 문화예술센터로 자리를 옮긴 로키홍은 한국 예술가를 단순 초청하기보다는 양측간 공동창작을 선호한다는 방침을 알려주었습니다.
언제 보아도 침착하고 명석한 일레인 응(싱가포르 예술위원회 팀장)은 근래 단기간에 놀라운 발전을 이룩한 한국 무용계가 부럽다면서 “그 비결을 알고 싶어“ 인터뷰를 요청하더군요. 한 시간 동안 계속된 인터뷰에서 제가 강조한 부분은 간단합니다. 기성 제도권의 눈치를 보지 않는 젊은 안무가들이 늘어나면서 창작의 질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민간 전문가들의 국제 네트워킹 향상과 정부의 지원이 한국의 창작무용을 세계 무대에 내보내기 시작했다.
스톡홀름 댄스하우스의 신임 예술감독인 아넬리 가르델도 한국 작품들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10월 하순에 제가 스웨덴 무용 플랫폼에 초청받아 스톡홀름에 갈 예정이니 그때 다시 만나 양측간 교류방안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의논하려 합니다.
중동 지역에서 어렵게 현대무용 보급운동을 펼치고 있는 오마르 라제는 당분간 안무가로서 작품에 좀 더 몰두하기 위해 그가 운영해오던 베이루트 현대무용축제의 예술감독직을 후배에게 넘겼더군요. 현대무용의 불모지인 그곳에서 나이 서른도 되기 전에 무용축제를 창설하는 등 맹활약을 펼쳐온 그가 잠시 예술가의 본분으로 돌아가겠다는 거지요. 2016년 쯤에 어떤 방식으로든 상호교류를 하기로 의기투합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별로 유쾌하지 않은 일도 있었습니다. 공연장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한 여성 기획자가 혹시 시댄스의 미스터 리 아니냐며 제 옆자리로 옮겨왔는데, 얘기를 나누다보니 몇 해 전 내한공연을 일방적으로 취소한 이스라엘 갈반의 매니저였던 것입니다.
17년 동안 시댄스를 해오면서 프로그램 북에까지 공고된 공연이 취소된 유일한 경우가 바로 스페인의 정상급 플라멩코 무용가 이스라엘 갈반이었는데, 그 원인은 전적으로 아주 무례하고 무책임한 프랑스인 여성 매니저에게 있었습니다(그 여성은 지금 어떤 주요 축제의 감독이 되어 여기저기 활보하고 다니더군요. 참!). 그런데 그 문제의 매니저의 보조 역할을 하던 ‘새끼 매니저’가 바로 이 여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별 책임이 없었겠지만 어쨌거나 그때의 불쾌한 기억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나 지금은 독립 프로모터로 일하고 있는 그녀가 아무리 좋은 공연물을 권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의 한 유망 안무가의 매니저도 지난 4월 스웨덴에서 처음 만난 이후 다시는 만나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이번 탄츠메세에서 또 만났네요. 이 중년 여성은 이번에도 오다가다 부딪칠 때마다 집요하게 앞길을 가로막으며 막무가내 그 무용가를 한국에 초청하라고 늘어졌습니다. 그 심줄같이 질긴 무례함 때문에 그녀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얼굴’로 제 마음 속에 등록되었습니다.
얼마 전 은퇴한 뒤셀도르프 탄츠하우스의 설립자 베르트람 뮐러는 이번 탄츠메세에서 만난 오랜 친구 아트 후게(네덜란드 출신의 무용행정가로 유럽 무용계의 거물급 인사입니다)에게 말했답니다. “내 비록 은퇴했지만 자네 부인이 탄츠하우스에서 공연하고 싶어 한다면 그건 얼마든지 해줄게”(저도 전해들은 이야기라서 정확한 표현은 아닐지도 모릅니다만...). 아트 후게의 부인은 러시아의 현대무용가 올가 포나입니다. 시댄스에서도 공연한 적이 있는데 뛰어난 안무가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러시아에 현대무용단이 워낙 드물다보니 소개 차원에서 초청했던 것이지요. 유럽에서도 그다지 높이 평가받는 안무가는 아닙니다. 이런 경우 두 거물의 우정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금년 탄츠메세는 장기간 이 행사를 이끌어온 카요 넬레스의 은퇴무대이기도 했습니다. 세대교체인 셈이지요. 일각에서는 후배들이 밀어냈다는 얘기도 들리는데, 그쪽 속사정까지야 이방인이 어찌 알겠습니까. 국제교류도, 축제도, 세대교체도, 그저 모든 것은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진다, 혹은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라는 평범한 상식을 다시 한 번 되뇌었을 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5개 무용단 중 4개 무용단은 탄츠메세가 끝난 뒤 오스트리아의 운치있는 산중 극장에서 그곳 주민들과 공연 전문가들을 모아놓고 아주 분위기 있는 공연을 선사하고 돌아왔습니다. 저는 시댄스 준비 때문에 함께하지 못하고 일찍 귀국했구요.
시댄스는 9월 25일 마기 마랭의 신작 <징슈필>로 시작되었습니다. 축제는 10월 18일까지 계속됩니다. 공연장에서 뵙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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