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4-6일 동안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국내 초연된 강수진 & 인스부르크발레단의 <나비부인>(안무_Enrique Gasa Valga)은 컨템포러리 발레 공연으로는 드물게 전석 매진이란 기록과 함께 공연 후에도 그 관심이 계속 이어졌다. 공연 후 언론에서는 발 빠르게 공연 리뷰 성격의 후속 기사를 내보냈다. 평소 무용예술에 매우 인색했던 관례에서 보면 이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물론 올해 국립발레단의 새로운 수장으로 부임한 강수진이, 무용수로서 출연하는 데다 안무가가 오직 강수진을 위해 만든 발레 작품이고, 그 작품이 오페라로 유명한 <나비부인>이란 점에서 충분한 뉴스거리가 될 만 했다.
기사는 공연 리뷰 성격을 띠긴 했지만 대다수 중요 논점은 작품의 완성도와 함께 이 작품이 국립발레단의 내년 정기공연 레퍼토리로서의 적합성 여부에 맞추어져 있었다. 매체마다 다소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 “지나치게 일본 색이 강해 작품의 완성도에 문제가 있으며, 따라서 국립발레단이 공연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2015년 국립발레단의 공연 일정과 레퍼토리가 무엇인지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간지의 기사로 마주친 발레 <나비부인>의 내년 3월 국립발레단 공연 소식은 당혹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다. 후에 확인한 바로는 발레 <나비부인>과 관련된 기자회견에서 강수진 예술감독이 <나비부인>의 주인공을 국립발레단의 새로운 무용수가 맡아 공연하게 될 것이고 이는 무용수의 발전을 위한 기회가 될 것이다라는 취지의 발언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공연이 끝난 한참 뒤인 7월 23일 국립발레단은 내년도 일정과 공연작품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배포 자료엔 발레 <나비부인>은 빠져있었다. <나비부인>을 공연할 것이라고 했던 3월 정기공연 작품으로는 <지젤>이 명기되어 있었다.
이를 발표하면서 언론은 하나같이 새 작품의 라인업 보다 강수진 단장이 <나비부인>을 포기하고 <지젤>을 선택했다는 것을 헤드라인으로 뽑았다. 그만큼 발레 <나비부인>의 국립발레단 공연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음을 언론 스스로 인정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왜색이 공연작품의 예술적 완성도를 판단하는 잣대가 될 수 있는가?
공연 작품의 예술적인 완성도와 작품성에 대한 평가는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좌지우지 되어서는 안된다.
발레 <나비부인>은 인구 11만의 작은 도시 인스부르크에 베이스를 둔, 20여명의 단원들이 활동하고 있는 인스부르크발레단의 공연 작품이고 이 발레단의 예술감독인 안무가가 무용수 강수진을 위해 특별히 안무한 작품이다. 한 무용수를 위해 만든 작품이라고는 하지만, 강수진 이외의 무용수는 결코 춤출 수 없다고 선언한 점도 바로 여타 작품의 제작배경과는 확연히 다르다.
‘발레단’이란 명칭이 붙어있지만 유럽에서 ‘Ballet’는 ‘Dance’의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정작 이 단체는 클래식 발레가 아닌 컨템포러리 발레를 공연하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현대무용 작품도 공연하는 단체이다. 이는 이 단체가 우리나라의 현대무용 안무가 신창호의 〈No Comment〉와 〈Platform〉을 공연했던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그리고 안무가 엔리케 가사 발가는 2012년 발레 EXPO때 내한, 아르코예술극장대극장에서 자신이 안무한 <카르멘>을 통해 뛰어난 안무력을 보여주었고 인스부르크발레단의 댄서들 역시 만만치 않은 기량을 선보여 예술성 등에서 검증을 받은 단체이다.
작품이 갖는 다양한 양식과 안무가의 자유로운, 독창적인 해석의 여지를 즐기는 컨템포러리 발레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일본 색채가 너무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작품의 예술성에 문제가 있고, 따라서 국립발레단의 레퍼토리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단정하는 것은 오늘날 동시대의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보면 지나치게 편협한 사고일 수 있다.
원작이 갖는 예술작품의 배경은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일본색이 강하니까 작품에 문제가 있다는 논리는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을 통해 삶의 질을 높이고, 다른 나라의 고유한 문화를 존중하는 문화다양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는 결코 득이 되지 않는다.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정신 만큼이나 그 예술을 감상하고 즐기는 관객들의 시각도 성숙되고 유연해져야 한다.
오페라 <나비부인>과는 또 다른 해석이고, 시작부터 한 무용수를 염두에 둔 컨셉트로 제작한 유럽 안무가의 작업이란 점을 감안하면 발레 <나비부인>은 안무가로서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예술성이 스며든 작품이다.
국립발레단의 정기공연 작품으로 발레 <나비부인>이 적합하다,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은 다른 잣대가 필요하다. 대한민국과 일본이 갖고 있는 역사적인 문제, 두 나라 국민들이 갖고 있는 민족적인 정서가 작품 선정시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한 편의 예술 작품은 초연으로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소품이 아닌 한 시간이 훨씬 넘어가는 작품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재공연을 통해 부족한 점이 보완되고 또한 새로운 것들이 더해지면서 하나의 완성된 ‘상품’으로 자리잡아 간다. 장대한 오페라와는 다르게 90분 남짓의 컨템포러리 발레 작품으로서 <나비부인>은 일본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관객들이 본다면 대한민국의 관객들이 보인 반응보다 훨씬 덜 민감할 수 있다.
발레 <나비부인>을 대한민국 뿐 아니라 일본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나라에서 공연하기 위해 마음만 먹는다면 안무가는 두 가지 다른 버전으로 무대에 올리는 방안을 생각할지도 모른다.
강수진이 내년 3월 발레 <나비부인>을 공연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한 것은 단장으로서의 유연한 리더십을 보여준 것이고 그것은 옳은 선택으로 보인다. 예술을 정치적인 논리로 재단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예술감독으로서의 고집을 내세우는 대신 강수진은 국립발레단의 운영을 책임지는 단장으로서 쉽지 않은 결정을 한 셈이다.
예술과 행정 모두를 아우르는 강수진의 이같은 탄력적인 리더십은 국립발레단 수장으로서의 앞으로의 행보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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