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올 여름 <꽃보다 누나> 덕분에 한국인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는 크로아티아에 가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크로아티아 이스트리아주에 위치한 인구 8천 규모의 소도시 산빈첸티에서 열린 제15회 무용축제(Dance and Non-Verbal Theatre Festival San Vincenti)가 저희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에서 추천한 안수영무용단을 받아준 덕분이지요. 안수영무용단은 이번 축제의 개막공연 단체로 초청받아 <백조의 호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만 해도 이탈리아의 영토였고, 지금도 이탈리아 관광객들이 많아 현지어인 스베트빈체나트(Svetvincenat)보다는 이탈리아어인 산빈첸티(San Vincenti)로 더 자주 불린다는 이곳은 연중 몇 개의 축제가 열리는 그리마니 성과 그 주변의 고풍스런 건축물 몇 채를 제외하면 특별히 보잘 것은 없습니다.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고 있고 올리브와 포도주가 좋다고 하는데 맛을 볼 기회는 없었습니다. 500년이 넘었다는 이 성을 복원하기 위해 유네스코가 나섰다는 사실을 주민들은 제법 자랑스레 여기는 듯했습니다만, 사실 이 정도 건축물이야, 제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유럽 곳곳에 널려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게 사실입니다.
이런 곳에 무용축제를 만들어 춤도 살리고 지역경제에도 보탬을 제공한 사람은 크로아티아의 대표적 안무가 스녜자나 아브라모비치 밀코비치입니다. 겸손하고 예의바른 성품답게 안무작업에서도 균형과 절제미를 중시하는, 그러면서도 예민한 현대성을 놓치지 않는 춤작가입니다. 본거지는 자그레브이지만 산빈첸티에서도 무용센터를 운영하며 왕성한 무대활동을 펼치고 있지요. 이 시골 마을에 오늘날 나름 명성과 품격을 자랑하는 국제수준의 무용행사가 자리잡게 된 것은 물론 그녀의 덕분입니다. 제가 그곳에 머무는 며칠 동안 줄곧 후배 무용가들을 소개하면서 이들의 아시아 무대 진출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그녀에게서 이 나라 무용계 ‘큰 언니’의 면모를 보았습니다.
스페인의 여성 무용가 에울랄리아와의 재회도 즐거웠습니다. 성 앞 광장에서 필리핀계 프랑스 남자 무용수와 함께 2인무로 공연한 작품이 제법 괜찮다 싶었는데, 나중에 만나보니 지난 2004년 아크람 칸 무용단의 일원으로 시댄스 무대에 섰던 친구였습니다.
몇 시간이나 차를 타고 산빈첸티 공연장까지 찾아주셨던 크로아티아 주재 한국대사관의 서형원 대사님과 김득환 참사관님을 다시 만나 멋진 저녁식사도 대접받고 이 나라 사정에 대해 이것저것 들으며 발칸 지역에 대한 저의 무지를 다소나마 해소한 것은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두 분 모두 저와 외교부 문화행사를 함께한 적이 있어 화제는 자연스레 문화교류로 이어졌지요. “문화교류는 결국 이해와 소통을 위해서 하는 것 아닐까요? 자그레브 한국영화제에서 <왕의 남자>를 본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몇몇 장면을 통해 한국인의 성 관념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것은 곧 한국 전반에 대한 이해로 연결됩니다.” 대사님의 말씀이 신선한 상식처럼 귓가에 울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요즘 대한민국 문화예술계에 무슨 유행성 필수과목처럼 등장한 레지던시, 국제합작도 생각해보면 결과물로서의 작품에 앞서 상호이해를 위한 한 단계이자 방편이지요. 유달리 문화예술에 애착이 많으신 두 분과의 재회는 제게 또다시 업무의욕을 자극합니다. 에디타처럼 말입니다. 자, 말 나온 김에 조만간 발칸반도를 온통 한국의 춤과 음악으로 덮어봅시다!
크로아티아에 앞서 저희 일행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공연을 했습니다. 그 유명한 그렉 축제(Festival Grec)에 초청 받아 7월 15-16일 이틀간 꽃시장극장(Mercat de les Flors) 무대에 섰습니다. 이 공연은 작년 가을 서울공연예술마켓(PAMS)을 찾았던 이 축제 부예술감독이 안수영무용단의 작품을 보면서 성사가 되었고, 항공료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지원해주었습니다. 이틀 모두 관객들의 열렬한 갈채를 끌어냈고 일부 관객은 기립박수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안수영 무용단 외에 극단 사다리 역시 초청을 받아 우리보다 먼저 공연을 했습니다.
“스페인 현대무용의 90%가 이곳에서 만들어 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중요한, 그리고 실제로 스페인 유일의 무용 전문극장인 꽃시장극장을 운영하는 프란세스끄는 경영학도 출신이어서 그런지 경영에서도 남다른 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스페인 경제는 요즘 최악이고, 따라서 이 극장 역시 정부지원금이 40% 이상 줄었는데도 프란세스끄는 다른 곳에서 후원금을 얻어다 예년과 비슷한 수준의 예산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작은 축제 하나 운영하는 것도 버거워 늘 쩔쩔매는 저같은 사람에게 그는 정말 부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그날 저녁 레지던시 공간으로 떠나기 직전 “아직 비밀이야” 하며 일러준 이야기. 올해부터 이베로아메리카(스페인과 중남미) 안무경연대회를 자기네 극장에서 주관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축하축하! 그 얘기를 하는 프란세스끄는 정말이지 좋아죽겠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날 아침부터 “오늘 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몇 번이나 얘기하더니.
프랑스 뿐인가요? 스페인은 그렇게 경제사정이 어렵다는데, 쿠바에서 신통치 않게 굴면 그 핑계로 아예 없애버려도 될 텐데, 그래도 이베로아메리카 안무대회를 계속하겠다는 거지요.
원래 이번 여행은 바르셀로나에 앞서 아비뇽에서 시작됐었습니다. 아비뇽은 축제 구경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오는 2015-16년으로 예정된 한불교류의 해를 좀더 풍성하게 만들기 위한 양국 정부 간 준비과정의 일환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문화원(Institut Francais)과 한국예술경영지원센터가 공동 주관한 이번 일정에 어쩌다보니 저도 끼이게 됐네요. 덕분에 좋은 공연 많이 보고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났습니다.
2014년 8월 초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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