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에세이_ 뜰을 거닐면서(19)
천사들이 하늘 높이 날아올라
이순열_춤비평가

 허리가 나날이 구부러져가는 이 나이에 내 길조차 제대로 찾지 못해 노상 방황하고 있는 터에 하루는 정아가 내 곁에 앉아 훌쩍거리고 있었다.
 “선생님, 전 어디로 가야 할까요”

 난들 어찌 알랴, 눈부신 5월의 한낮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말은 고작 이랬다.
 “이렇게 화사한 날씨에 할일 없이 울고 있다니.”
 생뚱맞은 그 대답에 정아는 더 답답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모두 ‘열어 주시오, 열어 주시오, 울면서 두들기는 이 문을 열어주시오’라든가 ‘우 알레, 우 알레(ou aller)라고 목메어 중얼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도처에 길이 막히고, 도처에 문이 닫혀버린 그 막다른 골목에서 멍들지 않는 가슴이 어디 있으랴. 허나 네들 젊은이들에게는 날개가 있지 않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페-지가 딕슈내리 넘어가듯 번득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 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이상: 「날개」


 암흑과 빛이 교차하면서 숨이 턱 막혔다가 툭 터질듯한 글이다.
 현란을 극한 정오에도, 칠흑 같은 깜깜한 밤에도 우리에게는 날개를 펼쳐 날고 싶은 별들의 아득한 하늘이 있다.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 별들을 향해 날아오르던 무수한 날개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그러나 누군들 ‘한번만 더 날자꾸나’고 외치고 싶지 않으랴. 정아야 너는 아직도 젊디 젊다. 그리고 네게는 아직도 싱싱한 날개가 있다. 설령 그 날개가 비에 젖어 축 늘어졌다 해도 날려고 하는 의욕의 불씨만 살아 있다면 너는 다시 날아오를 것이다. 네가 춤에 매달려 왔던 것은 날기 위해서가 아닌가.
 ‘날개가 있으면 아무것도 무겁지 않다’(Alis grave nil.) - 그것은 리우데 자네이로 P.C. 대학의 모토이다. 그렇다. 날개만 있다면 네 비상(飛翔)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꺾인 날개를 아무리 새롭게 돋아나게 한들, 언제인가는 그 날개가 영영 꺾여버린 채 다시 돋아오를 낌새조차 사라져버릴 때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즐거움’의 날개만 있다면 어떤 고통도 초극할 수 있다고 믿었던 에피쿠루스(Epicurus 341-270 BC), 표일(飄逸)의 아르카디아, 아타락시아(Ataraxia)의 선경에서 유유자적하던 에피쿠루스 조차 ‘죽음에 맞닥뜨리면 대책이 없다’(When it comes to death, we human beings all live in an unwalled city)고 말한다. 허나 마침내 네 날개가 꺾일 때도, 마지막 순간이 우리 삶의 고단한 문을 노크할 때도 이 세상에는 여전히 우리를 날아오르게 하는 무수한 날개가 있다.
 어둠의 모든 장막을 환하게 녹여내는 미소, 미미의 싸늘한 손을 녹여줄 루돌프의 따스한 손길, 무거운 가슴을 촛불처럼 허물어지게 하는 음악의 빛, 그것은 모두 아타락시아와 아포니아의 날개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대위법」(Point Counter Point)이라는 소설에는 모리스 스팬드렐이라는 좀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가 죽어갈 때의 모습은 내 기억 속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은 가장 인상 깊은 라스트 신 가운데 하나이다. 너무나 아름답고 환한 음악의 날개가 그의 죽음을 반주하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을 떠나려 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려고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자들에게 자신의 거처를 알려주어 남의 손을 빌려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려는 일종의 간접자살이라는 방법을 택한다.
 죽음을 기다리면서 들으려고 그가 마련한 레코드는 베토벤의 현악 4중주곡 15번 a단조의 3악장 몰토 아다지오였다. 하늘이 감추어 놓은 천장(天藏)의 음악, 성성(惺惺)의 맑고 환한 그 축복은 질곡과 어둠이 칙칙하게 깔린 이승을 떠나면서 듣기에 참으로 어울리는 음악이 아닌가. 보이토(Arigo Boito)는 그의 오페아 「메피스토펠레」의 에필로그와 프롤로그에서 천사들의 합창으로 파우스트의 구원을 희구했다. 그 합창의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베토벤의 음악은 시작된다. 보이토가 합창으로 그리려 했으면서도 좀처럼 얻을 수 없었던 세계가 여기에 있다.

 음악: 조각의 호흡, 아마도 정적의 초상.
 너는 말이 끝날 때 비로소 입을 연다.

 (Musik: Apem der Statuen, Vielleicht
 Stille der Bilder. Du Sprache wo Sprachen enden.
)

             -Rilke/ An die Musik

 엘리어트의 황무지를 읽으면서도 우리는 베토벤의 몰토 아다지오를 듣는다.

 빛의 심저(深底)에는 오직 정적 뿐.
 (In the heart of light, Only silence.)

 그리고 그 정적은 빛으로 가득차 있다. 베토벤의 몰토 아다지오에는 흐르면서도 멈춰버린 시간 속에 소리로 응고된 정적이 충만하다. 그리고 그 정적 속에서 별안간 폭발하는 빛의 환무(歡舞). 그 정적, 그 무한, 그 빛, 오로라처럼 춤추는 그 빛의 넘실거림.

 햄릿이 숨을 거둘 때도 나는 이 몰토 아다지오를 들려주고 싶었다. 아니, 호레이쇼가 그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을 때는 하늘 가득히 그 음악이 흐르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제 남은 것은 정적뿐’(The rest is silence)이라고 말하면서 햄릿이 숨을 거둘 때 정다운 벗의 최후를 애통해하는 호레이쇼의 기도는 음악처럼 아름답다.

 천사들이 날아오르면서 그대의 안식을 노래하기를!
 (The flights of angels sing thee to thy rest.)

 그 천사들의 노래야말로 이 몰토 아다지오였을 것이다.

 얼마 전 우리 집 강아지가 세상을 떠났다. 벨라(Bella)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예쁘고 귀여운 그리고 심지가 깊은 녀석이어서, 그 녀석을 쓰다듬을 때마다 ‘천하절색 우리 벨라’라고 추켜세우곤 했다.
 그 녀석을 쓰다듬거나 껴안으면서 말을 바꾼 것은 단 한번, 녀석이 숨을 거둘 때였다. 조용히 임종하는 벨라를 껴안으면서 나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천사들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면서 네게 안식을 노래하기를’ 그 때도 내 가슴에 복받쳐 샘솟는 눈물과 함께 하늘 가득히 넘쳐흐르는 음악은 베토벤의 몰토 아다지오였다. 그것은 참으로 빛나는, 눈부신 날개가 아닌가.

2014. 09.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