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안녕하셨는지요? 저는 지난 6월 6-17일 우리 무용가들과 함께 콩고(브라자빌 콩고)와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에서 공연을 치르고 돌아왔습니다. 한국국제교류재단과 유네스코 국제무용협회(CID-UNESCO) 한국본부,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의 공동행사로 진행된 이번 순회공연은 한 마디로 대아프리카 무용교류의 제2단계 진입을 알리는 의미 있는 행보였습니다.
그동안 아프리카 무용가들을 꾸준히 서울로 불러들여 우의를 다져온 시댄스가 이제는 그런 관계를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우리 무용가들의 아프리카 진출을 도모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당초 나이지리아까지 포함해 3개국 공연이 예정돼 있었으나 테러와 납치 빈발 등으로 치안문제가 우려되는 나이지리아는 결국 마지막 단계에서 빠지게 되었습니다. 저희들도 섭섭했고, 오래간만에 저희들과 한번 어울려보겠다고 신나서 채비를 하던 그곳 친구들에게도 몹시 미안했지만, 가까운 장래에 다시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먼저 콩고에서는 그곳의 대표적 현대무용가 플로랑 마우꾸가 주관하는 제5회 콩고 거리춤축제(Rue Dance Congo)에 참가했습니다. 거리춤축제답게 공연은 물론이고 워크숍, 리허설도 모두 옥외에서 열렸습니다. 이경은, 이재영 등 우리 무용가들도 콩고 무용수들을 상대로 저희가 머물던 호텔 건너편 잔디밭에서 워크숍을 진행했고 마멜라 니암자(남아공), 파투 시세(세네갈) 등 다른 나라에서 온 안무가들도 공터 나무 그늘이나 인근 문화센터 앞마당에서 워크숍과 연습을 했습니다.
한국 4개팀의 공연은 수도인 브라자빌의 아르샹보 거리, 한때 치열하고 비극적인 콩고 내전의 현장이기도 했던 그 거리 114번지의 아담한 공터에서 9-10일 이틀간 열렸습니다. 조명과 음향이 열악한 건 기본이고 비포장도로 위로 하루 종일 풀풀거리는 먼지는 수시로 우리의 숨을 멈추게 했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포기하고 들이마실 수밖에 없었지만요. 옆집 아낙들이 아기에게 젖을 물리거나 저녁 준비를 하면서 낯선 동양인들을 쳐다보는 동안 우리는 부지런히 공연 준비를 했습니다. 급하게 프랑스어로 만들어간 프로그램은 동네 주민들과 아이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순식간에 동이 났습니다.
한국팀 공연에 앞서 9일 오후에는 소니 라부 탄시 문화센터에서 아르샹보 거리까지 이동하면서 춤판을 벌이는 카니발이 열렸습니다. 한쪽 옆에 ‘Rue Dance Congo 2014’라는 현수막을 걸친 작은 용달차와 함께 행진하면서 콩고 무용수들은 중간중간 신나는 춤으로 행인과 주민들을 유혹했습니다.
아이들은 용달차에 매달리고 까르르 웃고 소리 지르고, 그러다 어른들이 야단치거나 옆으로 다른 차량이 지나가면 우르르 옆으로 떨어져나가고...그러면서 우리 모두는 한 시간 가량을 함께 걸었습니다. 물론 그 피할 수 없는 먼지를 줄곧 흡입하면서 말입니다. 브라자빌에서 며칠 동안 마신 먼지만 해도 서울의 몇 년 치는 될 것 같은데, 게다가 일부 비호의적인 차량들의 신경질적인 경적 소리까지 감내해가며 신나게 춤을 추는 무용수들. 도대체 우리는 왜 춤을 추는 걸까요. 아니, 춤이야 뭐 춘다 치고, 왜 이리 힘들게 무용축제라는 것까지 하는 걸까요.
이틀에 걸친 우리 무용가들의 무대는 인상적이었습니다. 반응도 좋았습니다. 안무가 이경은의 리케이댄스의 <랑랑>과 시나브로 가슴에(안무 이재영)의 <휴식>은 흔히 갖기 쉬운 편견, 즉 현대무용은 재미없고 난해한 것이라는 선입견을 일거에 날릴만큼 흥미로운 작품이었고 심주영, 배유리의 솔로작품 <염>과 <부초>는 한국 전통춤의 사위를 십분 활용한 현대무용이어서 관람석에 있던 아프리카 각국 무용가들의 깊은 관심을 유발했습니다. 동네 주민 등 일반관객에게는 꼬레(한국)라는 이름을, 전문관객들에게는 한국무용의 실력을 입증해보였으니 비행기를 세 번씩 타고 이 먼 곳까지 찾아온 보람은 있었던 셈입니다.
독일 빌레펠트에서 무용극장과 축제를 운영하는 첵포 단 아그베투는 이경은의 작품에 흥미를 보이면서 초청 의사를 밝혔고 다른 무용가들도 한국 무용가들과 공동작업을 하고 싶다는 뜻을 적극적으로 전해왔습니다. 가봉에서 온 무대미술가 말랑다 루무아무는 현대무용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은 가봉에서 한국 무용가들이 좋은 교사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내가 한번 다리를 놓아보겠다”며 제법 상기된 표정을 지었습니다.
(참고로 말씀 드리자면 아프리카의 현대무용은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닙니다. 아프리카 전통춤의 기반에 서유럽 선진국에서 배운 현대무용을 접목한 경우가 많은데 전체적으로 무용가들의 숫자가 많지 않아 그렇지 수준은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제 개인적 의견으로는 적어도 중남미의 현대무용보다는 한 수 위입니다.)
이번 행사는 공연 뿐만 아니라 그동안 저희가 교류해온 아프리카 무용가들과의 재회를 통해 향후 본격적인 중장기 교류 계획을 논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동반자 사업을 통해 한국에서 수개월을 머물며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했던 콩고의 삐에르 아르놀드 마우꾸와 말로 나니뗄라미오를 비롯해 세네갈 무용계의 주요 인물인 파뚜 시세(그녀는 남편인 안드레야 왐바와 함께 서울세계무용축제에서 공연한 바 있습니다) 등 여러 구면들을 만나 하이파이브를 했습니다. 역시 시댄스에 초청받아 공연했던 콩고 안무가 오르지 은자바는 아쉽게도 이번에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시댄스 때 서울서 알게 된 이경은 안무가를 2009년 콩고에 초청한 바 있습니다.
참고로 말씀 드리자면, CID 한국본부는 2006년 남아공 무용가 빈센트 세콰티 코코 만쭈이를 시댄스에 초청한 이래 문화동반자사업, 아프리카문화축전 등 각종 행사와 프로젝트를 통해 지금까지 10여개 아프리카 나라의 무용가들과 관계를 맺었고, 사실 이번 공연도 그들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아프리카 무용예술가들과 이 정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는 중국, 일본, 인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를 통틀어도 찾아보기 어렵더군요. 제가 왜 아프리카와의 교류에 관심을 갖는가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어디서나 무용은 찬밥이지만 콩고의 경우도 몹시 심하더군요. 석유도 나고 경제사정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데, 바로 옆나라 콩고민주공화국의 난민들이 몰려오는 걸로 봐서는 살만한 것 같은데, 거리춤축제에 대한 정부 지원금은 아예 없고 유럽의 한 재단, 그리고 옛 식민지배국이었던 프랑스의 문화기관(앵스띠뛰 프랑세) 등의 도움을 받아 꾸려간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씩씩하고 영리한 플로랑은 벌써 5년째 이 행사를 이끌고 있고 니제르와 가봉 등 인접국 동료들로 하여금 같은 이름의 축제를 만들도록 이끌었습니다. 한 가지 궁금해서, 왜 축제 이름을 프랑스어와 영어를 섞어서 ‘Rue(프랑스어) Dance(영어) Congo‘라고 만들었는지 물었더니 매우 음운학적인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프랑스어로 Rue Danse(뤼 당스)라고 하면 같은 발음의 dense(빡빡한, 짙은)가 연상돼 거리의 춤이라는 ’움직임’의 느낌이 살아나지 않아서 그랬다는군요.
이어진 남아공에서 한국 무용가들은 12일 오후 요하네스버그 넬슨 만델라 광장에서 수 백 명의 관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연을 가졌습니다. ‘만델라’라는 이름이 갖는 정신적 무게에 비해 정작 광장은 쇼핑타운의 느낌이었습니다만, 어쨌거나 덕분에 많은 현지인들에게 우리 현대무용을 보여줄 수 있었지요.
요하네스버그 뉴타운에 있는 댄스 스페이스에서 사흘 동안(13-15일) 우리 안무가 4명과 남아공 안무가 4명이 가진 워크숍은 앞으로 두 나라 무용가들의 본격적인 공동작업을 예고한 자리였습니다. 각자 다른 기반과 취향을 지녔으면서도 현대무용의 창조성이라는 철학을 공유하며 진행된 이번 워크숍은 아프리카 대륙 최고의 현대무용축제로 평가받는 댄스 엄브렐라의 조지나 톰슨 예술감독을 비롯해, 데이비드 에이프릴(무용가 출신 기획자), 애드리엔 시첼(평론가) 등이 꼬박 지켜보았습니다.
애드리엔은 언젠가 ADF(아메리칸 댄스 페스티벌)에서 김태원 평론가를 만난 적이 있다며 인사를 전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구요. 마지막 날에는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서 비교적 치안이 좋다는 멜빌 지역 저희 숙소 인근에서 진하게 한 잔들 했습니다.
아시겠지만 요하네스버그는 위험지역으로 악명 높습니다. 한인들의 피해도 종종 보고되고 있고, 몇 년 전에는 배우 김태희가 교민 집에 초대받아 가 있는데 강도가 침입한 적도 있었다는군요. 두 나라 무용가들의 사흘 짜리 만남은 머지않아 실질적인 공동창작 등 중장기 교류로 이어질 것으로 확신합니다.
유명한 흑인 빈민지역이자 남아공 민주화의 성지로 불리는 소웨토에 멋진 공연장이 있다는 뜻밖의 사실에 놀랐고, 그곳에서 본 판출라(Pantsula) 춤이 남아공, 특히 소웨토를 발상지로 하는 독특한 힙합이라는 설명을 듣고 춤 역시 사회문화적 배경과 무관할 수 없다는 상식을 다시한번 상기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전형적인 아프리카 토속 단어일 거라고 굳게 믿었던 소웨토(Soweto)가 South Western Townships의 약자라는 이야기를 현지인 운전기사에게서 들었을 때는 다소 당혹스러웠습니다. 과거 기자생활을 할 때 국제뉴스 분야에서 일한 기간만 8년이 넘는 내가...하면서 말씀입니다.
우리 일행 가운데 누군가가 ‘검은 말들의 질주’라고 이름 붙였을만큼 물살 험한 콩고강을 건너 공연 현장을 찾아와 주신 콩고민주공화국(킨샤사콩고) 주재 한국대사관의 김재하 서기관님(브라자빌 콩고에는 한국대사관이 별도로 있지 않고 민주콩고 주재 대사관이 겸임한다고 합니다), 남아공의 이윤 대사님, 김기한 문화홍보관님, 류일형 연합뉴스 특파원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계속 먼지와 벌레에 시달리면서도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보고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던 우리 무용가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에피소드 하나. 처음 아프리카로 떠나던 날, 홍콩에서 요하네스버그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무려 11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어서 현지에서 사업을 하시는 황 사장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뜻밖의 연락에 놀라고 반가워하시면서 저희 일행에게 멋진 저녁식사를 내주셨는데, 식탁의 화제는 물론 현대무용에 관한 것이었지요.
무용을 워낙 좋아하셔서 홍콩과 서울은 물론 일부러 유럽까지 날아가 무용축제와 공연장을 섭렵하시는 분이니 저희 무용단 일행의 갑작스런 출현이 큰 결례는 아니었을 겁니다. 사업가가 현대무용의 추상성에 대한 나름의 일가견을 설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묘한 즐거움이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많이 계시다면 힘든 작업을 되풀이하는 무용가들에게 큰 힘이 될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황 사장님은 올 여름에도 유럽을 돌며 좋은 무용공연을 보시고 싶다 하셔서 저희들이 알고 있는 무용축제 정보를 총망라해서 알려드리기로 했습니다. 혹시 올 여름 유럽에서 뵙게 되면 이번엔 제가 한 잔 사지요! 모두들 건승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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