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주소를 물어 알려 주었더니 K기자가 물었다.
“nabulum, 무슨 뜻이죠?”
“꼭 무슨 뜻이 있어야 될까? 그 어감만으로도 향긋하지 않아?”
“그래요. 그래서 궁금하고 그래서 그 뜻이 알고 싶어요.”
하기사 뜻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은은한 종소리의 여운’ − 그것이 내가 부여한 나불룸(nabulum)의 함의(含意)이다. 나불룸(nabulum)은 라틴어 틴티나불룸(tintinnabulum)에서 뒤쪽을 잘라내서 내가 만든 조어이다.
‘틴티나불룸’(영어로는 tintinnabulation)이라는 말은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은, 『침몰한 대사원』(La Cathedrale engloutie)의 종소리처럼 아득한 옛날 사라져버린, 그러나 우리의 꿈속에서 노상 되살아나는 먼 종소리이다. 그것을 되살려낸 것은 아르보 뻬르뜨(Arvo Pärt)였다.
사원의 종소리 그쳐도, 그 소리는 그것을 머금은 꽃들로부터 계속 울려 퍼진다.
(The temple bell stops, but the sound keeps coming out of the flowers.)
『거울 속의 거울』(Spiegel im Spiegel)이라는 작품으로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뻬르뜨는 『나무들』(Arbos)이라는 작품집을 안드레이 따르꼬쁘스끼에게 바치면서, 그 첫장에 마쓰오 바쇼의 하이꾸(俳句)를 그렇게 적어 넣었다.
우리는 악취가 요동치는 온갖 배설물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소화되지도 않고 걸러지지도 않은 채 마구 쏟아지는 그 오물들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도처에 범람하고 있다. ‘분별을 잃고 날뛰면서 소란을 피우는 (소음과 분노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얼간이’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맥베스 5막 5장)들이 모여 꾸미는 공허한 무대를 향해 셰익스피어가 ‘꺼져라 꺼져라 부질없는 촛불이여’라고 아무리 외쳐본들 무슨 소용이랴. 이 소음의 쓰나미를 걸러내기 위해서도 우리에게는 우리를 아늑하게 감싸줄 공간과 정적이 필요하다.
‘침묵보다 더 나은 말이 있거든 이야기하라. 그렇지 않거든 차라리 침묵하라.’ (Aut tace, aut loquere meliora silentio.) 살바토르 로자의 자화상에 적힌 이 절구는 피렌체가 르네쌍스의 새로운 시대를 창조하는 묘상(苗床)이기도 했다. ‘나무처럼 아름다운 시를 나는 모른다’라고 크세르크세스는 노래한다. 나는 읊을 것이다. 정적처럼 아름다운 음악을 나는 모른다고. 머뭇거림과 멈춤처럼 아름다운 춤을 나는 모른다고. 그 정적, 그 멈춰버린 공간에서 울리는 종소리, 틴티나불룸을 나는 언제나 기다릴 것이다.
정적의 소리로 가득 찬 공간, 시간이 묻혀버린 공간은 언제나 아름답다. 텅 비고 나면 그지없이 쓸쓸해질 공간을 누군가 꽉 채우고 있을 때도 그 공간은 아름답다.
막이 내려버린 후의 객석은 파장처럼 삭막하다. 조금 전까지도 열풍이 몰아쳤던, 아니면 은은한 훈기로 가슴을 저리게 했던 무대를 잊은 채 관객이 웅성거리며 자리를 떠날 때 그 객석의 공간은 더욱 허전하다.
하지만 슬퍼하지 마라. 모두가 시궁창에서 텀벙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는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듯이 그 텅 빈 공간을 응시하는 어떤 시선 속에서는 까마득한 옛날 내렸던 막이 먼지를 털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 다시 서서히 올라갈 것이다.
원하노니, 경건하게 나의 목가를 짓기 위해 천문학자처럼 하늘 가까이 누워…
보들레르의 『풍경』(La Paysaģe)이라는 시는 그렇게 시작된다. 그 목가를 위해 그는 드높은 종루(鐘樓)에 오른다. 그리고 그는 또 다시 노래한다. 눈으로 온 천지가 뒤덮이는 겨울이 오면 꿈의 궁전을 짓기 위해 모든 창을 닫아 잠그리라고.
눈처럼, 백지처럼 펼쳐진 빈 공간은 언제나 우리에게 우리의 목가를 다시 노래하도록 유혹한다. 그리하여 막이 내릴 때마다 객석의 어떤 시선 속에서 무대는 다시 열리는 것이다.
그 ‘어떤 시선’으로 잃어버린 무대를 되찾아 보려고 시도하면서 국립현대무용단은 <우회공간>이라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우회공간은 과거 속으로 사라진 공간사랑(空間舍廊)과 여러 줄로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공간사랑에 대해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오래 전 잃어버린 낡은 수첩, 보존 상태가 썩 좋지 않아서 군데군데 좀 먹고 퇴색한데다 낙장도 적지 않지만,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공간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추억의 앨범과도 같을 것이다. 이 앨범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이 남정호의 춤이었는데, ‘공간’이라는 주제와 가장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무대 위에서 느린 페이스로 반추하듯이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겨 작은 공간을 그려 가면서 남정호는 우리의 추억 속으로 매몰되어버렸던 ‘공간사랑’으로 우리를 이끌어 갔다.
소도구 하나 없이 텅 빈 무대에 등장한 남정호는 ‘ 하나… 둘… 셋…’ 가로 세로 한 걸음씩 발로 재어 제법 넓직한 무대에서 겨우 두 세 평을 잘라내어 ‘이것이 내 춤판이 펼쳐질 공간’이라고 선언한다.
‘넓직한 무대를 휑그렇게 텅 텅 비워 놓고 웬 옹색이야’라고 투덜댈 관객도 있겠고, ‘참 욕심도 없네’라고 흠칫하면서 반(反)탐욕주의의 소박함을 찬미하는 관객도 있었을 것이다.
휴브리스(hubris)로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발악의 볼륨을 증폭시켜가는 잡귀들로 세상이 들끓고 있거늘 주인 없는 공간이 곁에 널려 있는데도 저 비좁은 궁색한 공간에 만족하다니… 허나 그 비좁은 공간에서 그의 날개, 상상의 깃은 무한한 공간으로 날아 오른다. 그가 짐짓 비워둔 공간, 종소리의 파문과 여운이 길고 넓게 번져갈 여백은 얼마든지 넉넉하니까.
우리가 과거 속에 묻어버린 공간사랑을 향해 회상의 역류를 시도하면서, 세월의 이끼와 함께 무거워졌음직한 남정호의 몸은 놀랍게도 마치 탈리오니처럼, 요정이나 임프(imp)처럼 사뿐거렸고, 지난날 공간사랑에서 그가 공연했던 <대각선> <안녕하세요> 등이 이야기와 춤을 통해 신선하게 되살아났다. 그리고 위트와 유머를 얼기설기 엮어 지워져 가는 기억을 그물처럼 투사하면서 그 위에 시와 음악을 꽃피워갔다. 그것은 갖가지 등을 하나씩 켜가는 점등의식(點燈儀式)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점등의식 속에서 그가 움직일 때마다, 그가 멈출 때마다 그 작은 공간에서는 공간사랑과 함께 이미 사라져버린 아득한 종소리가 한 겹 한 겹 울려 나왔다.
무대 위에 남정호가 그려 놓은 작은 공간은 그 종소리의 여운과 함께 꽉 차 있으면서도 비어 있었고, 비어 있으면서도 꽉 차 있었다. 그 공간에서 사라져간 종소리, 꽃들이 품었다가 흘려낸 종소리의 여운이 파문처럼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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