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춤생태계 건강한가?
이지현

 예전에 쓰레기 공포증을 앓은 적이 있다. 어줍지 않은 솜씨로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면서 물건을 사면 담아주는 검정봉투가 등장하기 시작하던 때였으니 아마 90년대 초반쯤이었던 것 같다.
 장을 봐온 날이면 검정봉투가 쌓이기 시작했고, 그 봉투가 곳곳에 검은 산을 만들면 그 당시 나의 환경에 대한 지식으로 그것은 500년간 썩지 않는 비닐류였기 때문에 쓰레기로 버릴 수 도 없고, 그냥 집안에 안고 있을 수도 없는 갈등 속에서 끙끙거렸다. 문득 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사용하고 버린 이것들이 썩지 않고 땅속이나 땅 위를 점령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 후 몇 가지 대안-시장에 할머니에게 고이 접어서 갖다 드리기, 장바구니 이용하기..-등을 통해 나름의 해결을 찾긴 했으나 지금 내가 공포증의 상태가 아닌 것은 둔감해진 것이지 환경을 위한 더 좋은 해결방법을 찾아서 인 것은 아닐 것이다.



배타적 속성으로 변화속도 따라잡지 못하는 춤 생태계

 현대 소비사회 속에서 숨쉬고, 먹고 마시는 것과 관련해 건강과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환경에 대한 관심과 문제의식은 응당 따라올 수 밖에 없는 문제의식이고 그것에 대한 해결은 자본을 중심으로 한 소비사회 전체의 문제와 얽혀있기에 사회적으로 만족할만한 해결점을 찾기는 쉽지 않은 속성을 갖고 있다. 우리는 방사능과 핵의 공포라는 극한의 오염 속에서 개인의 삶을 완전히 방어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에도 자신을 지키는 책임은 대부분 개인의 몫으로 넘길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 살고 있다.
 춤을 만나고 산지가 40년이 다 되어가면서 난 무용계가 하나의 독립된 생태계로 보이기 시작했다. 춤을 중심으로 그 끈질긴 중독성과 인연들의 집합체인 춤생태계, 그런 속성 때문에 뜨내기가 많지 않은 반면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이 세계는 외부와 분리된 채 폐쇄적 관계를 형성하기에 적절하고 서로에 대한 애증도 더 깊다.
 이 춤생태계가 내가 지켜봐 온 바로는 많은 변화가 있다고들 하지만 나에게 더 비극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세상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가운데 과거의 폐습들은 대를 이어 가는 행태를 보인다는 것이다. 공연 시장은 국제적인 접촉면이 많으므로 새로운 경향들이 민감하게 작용하기에 그나마 외부에 민감하나 그것도 일부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춤이 몸에서 몸으로 전수되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무용계의 인간관계는 너와 나의 구분이 선명하지 못하고 파벌의 생사가 개인의 영역보다 우선시 되는 집단성과 원시성을 강하게 갖고 있다. 그런 속성이 다시 그런 경향에 잘 맞는 사람들을 그 사회에 존속시키고 재생산시키면서 대를 이어 나간다. 바로 그런 구조적 속성이 반증하는 것이 무용계에서 소문이 전달되고 전달되는 속도와 경로를 보면 아주 잘 드러난다.
 서로 피곤해 하면서도 이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과 파벌의 이해관계만을 중심에 놓고 사태를 바라보는 ‘견해 학살적’인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 환경은 결국 서로의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들 뿐 아니라 결국 스스로 건강하지 못한 관계망 속에 꼼짝없이 갇히게 만든다. 진지한 바라봄과 사실 확인의 마음은 고갈되고 천박한 욕망과 이해가 환경과 사람을 지속적으로 오염시킨다.



지원금 심사 택배, 심사위원과 사업 주체자 모두 문제
 

 비평가로써 공연을 보고 비평하는 일 뿐 아니라 또 하나의 중요한 책무는 여러가지 평가와 심사를 공정하게 해야 한다는 것에 있다. 몇 년간 심사와 평가를 다니면서 나는 무용생태계를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었고 이 생태계의 구조와 생리, 심리구조를 고통스럽게 체감할 수 있었다.
 지원금이 오가고, 지원금을 다시 줄 것인지를 평가하고 검토하는 가장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놓여 있는 심사와 평가의 자리는 그래서인지 긴장감이 돌게 마련이고 심사자들에게 많은 책임감이 부여되는 상황인 것이다. 더군다나 지원금이 지속적으로 늘고 대개의 공연이 지원금의 수혜 속에서 이뤄지다 보니 창작자들은 더욱 예민해 질 수 밖에 없다.
 많은 예술가들은 조금은 예민해 질지 언정 그런 조건 속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잘 유지하고, 탈락 역시 좋은 성장의 기회로 삼으며 지원금에 의존하는 자신의 모습을 살피며 순수한 예술적 의지를 다지는 것도 많이 보았다.
 오히려 내가 문제로 보는 것은 심사의 주체들이다. 심사의 주체라 함은 지원금을 나눠줘야 하는 각 기관들이 분야 전문가를 모아 심사를 치뤄야 하는 상황에서 볼 때 기관과 심사자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의사결정이 이 두 주체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에 당연히 표면적 책임의 비중도 크다고 할 것이다.
 심사를 다니면서 가장 큰 문제로 보인 것은 4-5명 안팎의 심사위원들이 의사를 결정하는 과정이었다. 일개 심사자의 입장에서 볼 때 심사자들은 개연적으로 모인 사람들이고 많지 않은 사례비를 받고 그 자리에서 서류검토나 면접을 통해 수혜자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분야 전문가라 할 지라도 짧은 시간 안에 사업의 특징과 목표를 잘 숙지하여 심사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각 기관이 심사위원을 위촉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당일 가보면 한숨이 나오거나 김이 샐 때가 많으니 사업과 심사자의 적합성 여부를 따지는 것은 호사스러운 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경험이 많은 심사자들은 아주 쉽고 간편하게 의사결정을 하고 나머지 심사자들이 적절한 타협과 동의를 하면서 결과가 결정되어 진다. 그런 와중에 기관은 전혀 사업의 주최자로써 중심이 되려는 생각이나 책임성은 희미한 채로 분야 전문가라는 허울 속에 본인의 책임까지 떠넘기는 속편한 자세로 임하는 수준부터 나름 힘의 역관계를 파악하여 심사자를 구성했다는 회심의 미소를 품고 안도의 숨을 쉬면서 책임은 심사자에게 떠넘기는 경우까지 다양하다.
 나는 몇 번의 심사 경험을 하면서 무용계의 어른들이 의사결정에서 공적인 심사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본인의 계파와 지인의 이해관계에 맞춰 심사를 하는 모습, 그 자리에서 서류를 처음 봤음에도 몇 분 안에 미리 준비 한 듯한 결정을 하는 초스피드의 신속함, 심사자들끼리 서로 바꾸어 밀어주는 식의 팀 플레이 혹은 어떤 견해나 생각도 없는 무능력함 등 여러 가지 행태를 보았다. 그렇게 해서 정책적 정교함 없는 사업과 이런 심사의 과정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되어 익숙한 사람끼리 익숙한 방식으로 나눠 갖는 천박하고 졸속한 사업이 되고 그 결과 인맥없는 창작자들은 무용계의 진입장벽 앞에서 무력해지고 누구라도 그 장벽을 뚫으려면 많은 결탁을 해야 하는 오염의 악순환이 형성되는 것이다.
 심사과정을 통해 내가 발견한 것 중 하나는 기관이나 심사자나 심사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서로 기피한다는 것이었다. 의사결정의 순차와 합리적 과정을 밟아가는 데는 적당한 시간적 여유가 중요하다. 심사기준이 있는 경우 적합성을 점검하거나, 기준이 없는 경우(도 태반이다) 사업의 성격에 맞게 기준을 도출하고 그에 맞도록 수혜자를 선택하는 과정은 시간이 꽤 걸린다. 이 과정이 쉽지 않은 것은 기준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현실에서의 문제의식이 기본적으로 필요하며 사업의 방향과 의도에 대한 배경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헌데 갑자기 전화 받고 온 심사자들이 마음속으로 지인 챙기기도 바쁜데 어떻게 이런 공적인 준비가 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는가? 또 자기의 의견을 개진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가는 토론의 힘은 또 어떤가? 거기에 담당자들의 편의주의까지 합쳐지면 심사는 졸속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나는 사소해 보이나 생태적 환경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심사의 문제’를 놓고 모두 모여 대 토론하는 자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뼈아픈 양심선언과 고해성사와 해결책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생태계 정화에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 자리가 금방 마련되지 않는다면 그 사이 심사와 관련된 세 주체-지원자, 시사자, 기관-가 각자의 자리에서 이 문제에 어떻게 임할 것인지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한다.



책임의식, 심사 과정의 체계를 세워나가는 것이 중요
 

 개인적으로 나는 심사절차와 과정의 체계를 세워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담당기관은 성의와 책임성을 갖고 사업의 전 과정을 주관하고 그 안에서 심사위원 선정위원회를 통해 심사자를 선정하고 심사자가 전문성을 발휘하여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심사회의에서 지속적인 역할을 해내야 한다.
 그들은 월급을 받고 그 일을 하는 담당자이므로 사업의 전 과정에 책임을 갖고 임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기관 담당자는 적절한 전문성과 책임성(둘 중 책임성이 더 중요하다)을 갖춰야 하고 그 안에서 심사자는 숙고와 토론의 힘을 갖고 의사결정과정을 진행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 안에는 책임성없고 게으른 담당자를 질타할 수 있는 자유도 포함되어 있어 서로를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심사절차와 과정에 체계가 세워져야 한 축으로는 게으르고 무책임한 담당자, 다른 축으로는 전문성을 무기 삼아 협잡하고 담합하는 심사자를 서로가 통제하며 심사를 완성할 수 있고 그 때에야 지원금은 공적으로 제기능을 하게 된다고 본다.
 지원에서 탈락 후 실망하고 좌절하고, 마음에 상처가 남는 것은 인지상정의 일일 것이다. 그럴 때 ‘창작자’는 자신의 예술에 대한 초발심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고 돈을 목적으로 예술을 수단시하고 있지 않은 지, 예술과 돈은 어떤 관계인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심사자’는 지원자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며 마땅히 자신의 이해관계를 버리고 정당하고 묵직한 결정을 해야 할 것이다. ‘기관’은 건조한 하나의 일로써 문제없이 끝나기만을 바라는 편의주의에 빠지지 않고 인큐베이터의 심정으로 예술적 불씨를 성의있게 다루는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생태주의의 관점으로 보면 춤생태계가 오염되면 결국 그 폐해는 그 안에 살고 있는 개인의 정신적 예술적 건강을 침해하는 것으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 오게 되어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상황은 우선 각 개인이 자신의 역할에서 문화적이고 인문학적인 ‘깨어있음’으로 구조적 결함의 틈을 메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우리의 건강한 생태계를 위해 계파의 이해만을 생각하는 내 마음을 청소하고 공적인 지원금을 자기 돈 챙겨 준 것 마냥 착각하는 마음은 분리수거 하자. 생존을 두려워 하며 돈 앞에서 무너지는 마음이나 지원금의 액수가 자신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글쎄…독극물로 신고 해야하나? 

본 협회 회원, 춤비평

2013. 1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