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뜰을 거닐면서(14)
모든 물줄기가 모여들고 온갖 샘이 솟아 오르는 곳
몇 회를 피렌체에서 어슬렁거렸으니, 이제는 떠나야 하리라. 나그네는 끊임없이 떠나야 한다. 내 뜰이 아무리 작다 해도 새로운 역, 새로운 공간, 새로운 시간으로 향한 고통편은 무수히 많거늘, 어찌 피렌체에만 머물랴. 그런데, 그런데...
한 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은, 피하고 싶은 곳이 있는가 하면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곳도 있다. 떠나려 해도 우리의 시선을 자꾸만 다시 그곳으로 끌어드리는 곳, 베아트리체가 없으면 천국조차도 허전하다고 우길만큼 단테의 넋을 빼앗아 버렸던 그 베아트리체가 그라디바(Gradiva)처럼 사뿐거리면서 꿈처럼 스처 지나가던 곳, 스땅달 신드롬으로 우리를 아찔하게 하는 피렌체가 그런 곳이다. 그러니 피렌체를 떠나기 전 한 사람만 더 만나면서 석별릐 아쉬움을 달래 보기로 한다.
꼬지모가 뿌린 아름다운 씨
희귀품을 수집하는데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 비용을 충당하는데 별로 어려움이 없을만큼 부유했던 니콜리였지만, 그의 알찬 수집품이 늘어날수록 그의 재정상태는 궁핍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어려움을 해결해준 것은 피렌체의 지배자 코지모(Cosimo de Medici:1389-1464)였다.
귀족들의 견제를 받아(메디치 가문은 그 때 귀족이 아니었다.) 한때 피렌체에서 추방되기도 했지만 유럽 최강의 금융업자라는 막강한 재력을 활용하여 그는 표면에 나서지 않은 채 막후에서 피렌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름만 제왕이 아닐 뿐, 모든 면에서 제왕’이었다고 일컬어졌던 그는 ‘피렌체의 아버지’(Pater Patriae ∙ 국부)로 추앙되기도 했다.
예로부터 돈을 번 자는 많지만, 그것을 탐욕이라는 더러운 시궁창속으로 움켜 쥐려할 뿐, 아름답게 쓸 줄 아는 자는 드물다. 코지모는 피렌체 시민들의 신망에 걸맞게 돈을 아름답게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흑사병이 피렌체를 휩쓸었을 때 그는 지체하지 않고 매머드 병원을 세웠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민복지를 위해서였다.
공공시설에 대한 재정적인 후원 못지 않게 문예진흥과 예술가 개개인에 대한 코지모의 후원 또한 상상을 초월할만큼 눈부신 바가 있었다. 불세출의 화가 리삐(Fra Filippo Lippi), 조각과 금속공예의 명장 도나텔로(Donatello:본명은 Donato di Niccolo di Betto Bardi)등 미술가들을 아낌없이 뒷받침해 주었고, 좌절감에 빠져 있었던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²가 위대한 건축가로 날아 오르도록 도왔던 것도 코지모였다. 그의 도움으로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의 랜드마크인 두오모 성당(Santa Maria del Fiore)의 거창한 돔을 완성할 수 있었다.
코지모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평생 돈을 벌고 쓰는데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돈을 벌 때 보다 그것을 보람있게 쓸 때가 훨씬 더 행복했다.”
코지모가 그 첫 씨를 뿌렸던 메디치 DNA, 예술과 문화창달을 위해 피땀 흘려 모았던 돈을 아끼지 않았던 메디치 DNA는 코지모의 손자 로렌쪼에 이르러 눈부시게 피어난다.
니콜리가 희귀 고문헌을 수집하면서 재정적인 위기에 휘몰리자 코지모는 유럽 곳곳에 산재해있었던 그의 금융기관에 긴급 지령을 내렸다. 니콜리가 대출을 신청할 경우 조건없이 무제한으로 대출해주라고 그것은 회수할 의향을 처음부터 포기한 파격적인 대출이었다. 그리하여 니콜리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크고 알찬 개인 도서관을 가질 수 있었다. 니콜리는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모든 도서를 메디치가에 기증해서 코지모의 은덕에 보답하게 된다. 그 도서는 훗날 건립하게되는 로렌쪼 도서관³에 옮겨져 지금도 피렌체의 빛나는 보물로 남아 있다.
니콜리가 수집한 고문헌은 보존상태가 극히 열악했기 때문에 수집하는 족족 필사했고, 브라치올리니도 마찬가지였다. 로마 문자의 수많은 서체 중에서도 기본은 로마체, 이탤릭체, 고딕체 등 3종이다. 그 중 두 가지가 피렌체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니콜리가 필사하면서 사용했던 서체가 이탤릭체, 그리고 브라치올리니의 서체가 로마체로 굳어진 것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모든 것은 피렌체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누구보다도 기억해야 할 인물 중 한 사람인 삐꼬가 왜 피렌체로 갔는지 이야기가 좀 길어졌지만 이제는 우리가 왜 삐꼬를 기억해야 하는지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삐꼬는 17세때 처음 피렌체를 방문해서 뽈리찌아노, 베니비에니, 싸보나놀라 등과 친교를 맺고, 1484년(21세)에는 아예 피렌체에 주저앉았다. 그는 곧 피렌체의 지배자 로렌쪼(Lorengo il magnifico:1449-1492)의 총애를 받게 되고 헬레니즘 연구의 대가이자 플라톤 아카데미의 주관자이며, 로렌쪼의 개인교수이기도 했던 피치노(Marsiloficino:1433-1499)의 문하생이 되어 피렌체 성군(星群)의 빛나는 별로 떠오른다.
피렌체에서 그는 르네상스의 이정표가되는 저술을 쏟아낸다. 그 중에서도 「헴타플루스(7일간의 창조에 대한 담론)」, 「인간 존엄성에 대한 담론」 (Oratio de hominis dignitate)등이 특히 빛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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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ncordia는 보통 명사로 ‘통합’, ‘조화’의 뜻이지만, 고유명사로는 아버지가 지배하는 땅의 이름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Concordia의 왕자’라는 말 속에는 그 두 가지 뜻이 함께 함축되어 있다.
2) 도나텔로와 부루넬레스키의 생애는 서로 엉키면서 한쪽은 조각, 한쪽은 건축분야에서 피렌체를 빛낸 불멸의 예술가로 그 흔적을 남겼다.
3) Biblioteca Medicea Laurenziana ∙ 성 로렌쪼 성당 구내에 세워진 당시 유럽 최대의 공공 도서관. 미켈란젤로의 설계로 1525년 착공되어 1572년 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