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뜰을 거닐면서(12)
이순열

 모두가 잠든 깊은 밤에 홀로 깨어있다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별들이 성성(惺惺)하게 반짝이고 있는 적적(寂寂)한 밤에 홀로 뜰을 거니는 것 또한 황홀한 일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발길을 옮길 때마다 가슴 가득히 차오른 적막의 숨결이 온 몸을 감싸는 그 전율을 한 밤중이 아니라면 언제 맛보랴. 밤 하늘에 총총한 저 별들처럼 빛나는 것을 지상의 특정한 공간에서 찾는다면 어느 곳이 적격일까. 아마도 피렌체일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 라는 뜻의 르네상스가 ‘그리스 사상과 문화의 부활’을 지칭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리고 그 문화의 구심점이었던 휴머니즘(Humanism)에서 ‘인문학’(Humanities)이라는 말이 유래했다는 것도. 그런데 중세의 늪속에 매몰되었던 휴머니즘을 건져내 르네상스의 꽃은 피웠던 주체야말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며, 그 선봉에 섰던 전위가 비치(Giovanni di Bicci)였다는 사실은 곧잘 간과되고는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는 도처에 중점이 있다’ (C'est une sphere dont le centre est partout.)라는 빠스깔의 혜안에 현혹되어서인지, 사람들은 피렌체가 르네상스의 중점중 하나일 뿐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눈을 조금만 더 크게 뜨고 살펴본다면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중점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단 하나의 에피센터(epicenter)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메디치 가문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고 대체로는 무용사에 기록된 겨우 몇 줄을 통해 그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서양문화와 예술의 거의 전부가 메디치가의 샘에서 솟아났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메디치 가문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스와 로마 초기의 문화는 중세의 늪에 매몰되어버렸고, 그 유적을 지키려 했던 것은 극소수의 수도승과 신부, 그리고 비잔티움과 아랍권의 학자들이었다. 꺼져 슬어질뻔 했던 그 불씨를 살려, 한 때 영광스러웠던 세계 그 사라진 문화의 아틀란타를 탐색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던 것이 메디치 가문의 비조 비치였고, 그 관심이 누대에 걸쳐 메디치 가문에 전승된 메디치의 DNA였다.
 그 우물을 죠반니 디 비치 홀로 건져내 소생시켰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페트라르카(Petrarch)를 비롯한 선각자들이 유독 피렌체에 몰려 있어 그 기운이 그를 자극했다는 사실을 과소 평가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코 앞에 있는 보물을 아무나 알아차린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참으로 소중한 것도 노예인들(천리마를 알아보지 못한 중)에게는 언제나 ‘돼지 발톱의 진주’(Caviar to the general)일 뿐이다. 천리마를 알아보는 백락(伯樂)이 없다면 그 천리마가 무슨 소용이랴.
 우리가 죠반니 디 비치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소중한 것을 판별해내는 그의 미각과 후각, 그의 혜안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백락의 안목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데 이바지하려고 했던 그의 열망이다. 역사는 그의 증손자 로렌쪼(Lorenzo di Medici)에게만 ‘위대한’(il Magnifico)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수여했다. 그러나 죠반니 디 비치 또한 모든 면에서 그 칭호를 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그의 아들 코지모(Cosimo di Medici)가 알렉산드리아 이래의 획기적인 도서관을 건립하여 그리스 문화의 수집에 힘썼던 것도 아버지의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훗날 로렌쪼(1449-1491)가 보여준 예술에 대한 사랑, 문화창조에 대한 열정도 증조부로부터 전승된 것임에 틀림없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요람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예술에 대한 사랑은 죠반니에서 코지모로, 그리고 코지모에서 피에로(Piero The Gouty)를 거쳐 로렌쪼로 이어졌다. 꽃이 만발하면 벌들이 모여들 듯이, 인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메디치 가문 주변으로 모여 들었고, 브라치올리니(Poggio Braciolini)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코지모 주변의 친 휴머니즘 서클의 중심인물이었던 그는 스위스의 갈렌(St Galen) 수도원 지하실에서 엄청난 분량의 그리스 문헌을 찾아냈고, 그 중에는 데모크리투스(Democritus), 에피쿠루스(Epicurus) 등의 자필 원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니콜로 니콜리(Niccolo Niccoli)는 몸소 수집한 방대한 양의 그리스 문헌(약800권)을 코지모의 도서관에 기증했다. 니콜리는 원래 집안 형편이 넉넉한 명문가 출신이어서 처음에는 고문헌을 수집하는데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재정적인 부담이 점점 커져 마침내는 파산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자 그 소식을 전해 들었던 코지모는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메디치 가문의 금융기관에 특명을 내렸다. 니콜리가 고문서를 수집하면서 재정적인 도움이 필요할 때면 아무런 조건없이 무제한으로 대출해주라는 지침이었고, 그것은 설령 대출금의 회수가 불가능하드라도 개의치 말라는 뜻이었다. 분에 넘치는 이 특혜를 니콜리는 피땀 흘려 수집했던 귀중한 고문헌의 조건없는 기증으로 보답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거래였다. 그리고 조금만 더 방치했다면 흔적없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었던 고문헌의 발굴과 보존이라는 이 풍부한 자원이 피렌체의 르네상스를 꽃피우는 귀중한 효소가 되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스 문화와 인문학에 대한 관심에서 꽃핀 귀중한 결실 가운데 하나는 오르페우스의 부활이었다. 아코포 페리(Jacope Peri),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폴리찌아니(A. Poliziani) 등 르네상스 시대의 오페라 및 극작품이 한 결 같이 그 소재를 오르페우스에서 찾았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오르페우스가 리라를 켜거나 피리를 불면 야수와 나무, 그리고 바위조차도 더덩실 춤을 추었다는 그리스 전설이 사람들을 열광케 했다. 그것은 음악의 마력이라든가 꽃피는 문화가 인간의 마음속 깊이 자리잡은 저속성과 야만성을 순화시키고, 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드높일 수 있다는 변신과 탈각(transmutation)의 꿈이 담겨있는 연금술의 개가였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메디치 가문이 문화 예술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했다.
 이러한 인문학과 예술의 번성, 그리고 새로운 문화가 꽃피는 비옥한 토양에서 보티첼리(Sandro Boticelli : 1444-1510), 다 빈치(Leonardo da Vinci : 1452-1510),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 1475-1564) 등이 태어날 수 있었다. 그들이 모두 피렌체 출신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불멸의 예술가들이 이렇듯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쏟아져 나온 예는 역사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 놀라운 현상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술가들이 군락을 이루어 함께 꽃필 수 있는 토양을 메디치 가문에서 가꾸어 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메디치 가문의 융숭한 후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젊은 시절 그 집안에서 함께 기거하고 함께 식사를 하면서 미천한 하인으로 천대받았던 것이 아니라 귀한 손님으로 또는 같은 식구로 대접받았고, 예술가들의 위상이 보잘것없었던 시절에 그들의 위상은 메디치 가문에 의해 크게 격상되고 있었다.

 

 



 훗날 세 사람은 모두 로마에서 활약하게 되지만 그것도 메디치 가문의 주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처음 로마에 진출했을 때, 로마는 허당처럼 황량한 곳이었다. 교황청과 산 안젤로(San Angelo)성을 중심으로 하는 제한된 지역에만 사람이 살고 있었을 뿐(그 무렵 로마의 전체 인구는 5만명에도 훤씬 미치치 못했다.), 광활한 유적지는 폐허로 화하여 늑대들이 들끓고 있었다. 그 유령 도시 로마가 다시 활력을 되찾아 살아 숨쉬는 도시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던 것은 보티첼리,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 피렌체 군단이 로마에 등장했던 것과 때를 같이했다. 로마의 르네상스 시대가 이들의 의해 꽃필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온 세계로 번져나갔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피렌체가 역사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표면적인 일각(一角)일 뿐, 피렌체와 메디치의 빙산은 아직도 살펴보아야 할 구석이 너무나 많다.

본 협회 공동대표, 춤비평
2013. 05.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