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지난 4월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수상이 타계(他界)하였다. 1979~1990년 집권할 동안 강력한 통치로 ‘철의 여인(Iron Lady)’으로 유명했던 대처 시대는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배경이 되었다.
<빌리 엘리어트>는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2000년도에 개봉한 춤 영화답게 20세기적 현상을 소재로 하였다. 빌리 엘리어트처럼 춤에 대한 몰이해를 딛고 일어서는 주인공의 모습은 춤에 대한 몰이해와 끌림이 한 세기 내내 상극처럼 종종 충돌하던 20세기를 은유하였고 그만큼 대중성도 컸다. 2010년작 영화 <블랙 스완>과 비교해보면 이 영화의 에피소드가 20세기적 현상이라는 지적은 쉽사리 납득이 될 것 같다.
잘 알듯이, 영국의 탄광촌에서 어느 소년이 춤을 둘러싼 편견과 몰이해를 극복하고 어엿한 무용수로 입신하는 영화 스토리는 말 그대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국내에서도 발레 입문생이 늘었다는 후문이 나돌 만큼 <빌리 엘리어트>는 감동을 주었다. <빌리 엘리어트>에서 이 같은 감동은 주인공의 생활환경과 무관하지 않으며, 이 생활환경은 영화에 삽입된 탄광촌 파업으로 상징된다. 1984년 대처 영국 정부가 자국의 수십 곳 탄광을 폐업하기로 결정하자 탄광 파업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고, 영화에 묘사된 파업은 바로 이 시기의 일이다.
1976년 영국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일자리도 없고 일하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복지사회는 유지해야 하는 이른바 영국병이 가중되던 시기였다. 이에 대처는 노조를 겨냥한 법질서 회복과 감세 정책, 복지 비용 등 정부 지출 축소, 각종 규제 철폐, 그리고 기업 친화 정책 등 신자유주의적 노선을 내걸어 1979년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자료에 의하면, 대처가 1990년까지 11년간 집권할 동안, 그러나 영국은 경제성장률, 실업률, 주택 보급률 등에서 답보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그 11년간은 친기업 정책을 펴면 투자가 늘고, 투자가 늘면 경제가 성장하며 고용이 증가한다는 신자유주의의 믿음이 현실적으로 한계에 부닥친 시기였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이번에 대처가 타계한 소식이 전해진 직후 그녀의 집권을 보는 상반된 시각들이 영국 현지에서 줄을 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영국 더럼 지방 이징턴 탄광촌 클럽에서 1984년 당시 탄광 파업에 나섰던 전직(前職) 광부들은 대처의 타계를 축하하는 의도를 분명히 표하면서 모임을 열었다. 이전 국가 원수가 타계한 조문 기간에 버젓이 축하 모임을 여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 여겨지면서도, 이 대목에서는 오죽했으면 그러랴 하는 의문도 들 수밖에 없다. 이징턴 탄광촌과 그 클럽은 <빌리 엘리어트>의 촬영 로케이션이 이뤄진 곳이고, 관객들은 주인공 빌리가 그곳에서 성장한 것으로 믿기 마련이다. 그러나 <빌리 엘리어트>의 소재가 된 실제 인물(로열발레단원 필립 모슬리)은 이징턴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 출신이었으며 아버지도 광부가 아니라 배관공이었다 한다. 물론 모슬리의 큰 형이 광부였고 그 가족도 탄광 폐업으로부터 무사하지는 않았다. 그 지역이나 이징턴이나 발레와 엄청 거리가 멀기는 마찬가지였고 출신 배경도 서민층이며 춤에 관한 관념도 긍정적이지 않았던 점에서 영화와 실제 현실은 유사하다.
<빌리 엘리어트>는 춤이 스토리의 핵심을 이루어 춤 영화로 분류됨 직하되, 사실 이 영화의 영상 이미지에서 춤이 차지하는 비중은 높지 않고 등장하는 춤도 보기에 따라서는 뻔하다. 춤 학원이라 하기에는 참 엉성한 공간에서 이뤄지는 몇 가지 춤 에피소드, 길거리를 미친 듯이 탭댄싱 춤으로 질주하며 배회하는 장면, 마지막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에서 발췌한 도약 이미지를 빼고 나면 <빌리 엘리어트>에서 춤은 주로 배우들 간의 대사 즉 담론으로 전달된다. 춤 영화 중에서도 춤에 관한 담론이 높은 비중, 다시 말해 결정적 비중을 차지하는 영화로서 <빌리 엘리어트>는 대표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빌리 엘리어트> 대사가 춤에 관한 고담준론을 설파하는 것도 아니다. 런던의 발레 학교 오디션 자리에서 ‘춤을 추면 몸이 변하고 어딘가 날아오르는 기분’이라는 빌리의 그 말 말고 춤을 생각해보도록 하는 대사가 이 영화에 더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춤에 몰두하는 주인공의 행로가 어떻게 귀결될 것인지 계속 긴장을 유도한다. 말하자면 이 대사 한 마디는 <빌리 엘리어트> 춤의 모든 것이며, 영화의 중심을 잡는 구실을 한다.
이징턴 탄광 파업은 1년 동안 이어졌으나 결국 탄광은 폐쇄되었다. 탄광 파업을 강경진압한 데 대한 반감은 앞서 소개된 대처 수상 조문 기간 중의 축하 모임에서 능히 상상할 만하다. 그런데 비단 탄광뿐만 아니라 대처 정부의 신자유주의 노선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영국 사회 전반에 걸쳐 폐해를 유발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영국에서 제2의 산업 혁명을 일으키려고 한 대처의 시도는 실패작이 아니었나 한다. 지난 4월 대처가 타계한 직후 일간지 더 가디언은 대처가 문화계의 우군(友軍)이 아니었다고 정리한 기사에서 다수의 문화예술인들이 그녀의 집권 시대를 재평가하는 의견들을 소개하였다. 1980년대를 대처와 함께 보낸 15명 남짓의 원로 중진 문화예술인들이 소회(所懷)를 털어놓은 이 기사를 아래에서 잠시 재구성해보면 대처의 시대와 신자유주의가 다소 명료하게 짚어질 것 같다.
가장 신랄한 소회에 따르면, 대처는 가혹한 경제 일변도의 정권을 구축하였고 영국에서 국론을 분열시켰다. 영국 여왕과는 달리 대처는 문화를 적극 혐오하였는데, 영국병 치유를 명분으로 집권해서 정부 시책을 집요하게 밀어붙이는 데 역점을 둔 대처로서는 이의를 제기하며 다른 목소리를 내는 문화가 내심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래도 대처가 진흥한 문화가 없진 않았으니 대중들에게(?) 이름난 문화(celebrity culture)였다.
집권 초에 대처 정부는 영국 예술위원회 보조금을 4.8% 삭감하기 시작해서 집권 마지막 해에 2.9%를 삭감하였다고 한다. 당시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리처드 루스는 영국 예술계가 복지국가 마인드를 벗어나 소비자 관객을 끌어모으는 데 역량을 발휘해야 할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저명 연출가로 영국 국립극장 예술감독으로 있던 피터 홀이 정부 보조금 삭감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자, 대처는 그에게 손가락을 내지르며 “로이드 웨버(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오페라의 유령> <캐츠> 등 작곡가)의 경우를 주목해보시오”라고 윽박질러 구설수에 올랐다. 대처에게 있어 공연예술의 상징이라면 단연 로이드 웨버였으며, 웨버는 사업 수완, 세계적 브랜드, 돈버는 능력 등 대처가 손꼽는 바를 구현한 인물로 부각되었다.
삶에서 예술이 차지할 위치나 의의에 대해서도 대처는 아무 이해도 없었고, 심지어는 이타주의, 연대감 그리고 타인과의 일체감 역시 이해하지 않았다고 하며,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공언하였다. 이럴 경우 각자 자신의 능력에만 의존하는 개인주의가 득세하게 된다. 얼마나 동의해야 할지 알 수 없으나, 대처의 집권 시기에 영국병이 얼마간 고쳐졌다는 진단도 없지 않다.
한때 대처는 소득 없는 실업자도 투표권을 가지려면 세금을 내야 한다는 이른바 인두세(人頭稅) 조항을 도입하려고 시도하였다. 다행히 도입 시도에 그치긴 하였지만, 기본권을 소득에 연동시키는 이런 발상은 경악을 넘어 매우 충격적이며, 대처 식의 사고방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대처는 편협한 기업가의 시각으로 세상을 재단하였다. 세상 모든 기업가가 대처처럼 편협한 것은 아니다. 아무튼 이런 풍토에서 자연히 대처 집권 시기에 영국 문화계는 물론 영국 사회를 주도한 것은 수익성과 개인주의였고 그 틈새에서 탐욕도 둥지를 틀었다. 어느 평론가는 1980년대 영국 공연예술계의 담론은 사회에 불편을 가하지 않으면서도 하이테크를 자랑하는 대중 뮤지컬의 성공담으로 점철되었다고 회고한다. 그래서 혹자는 지적하기를 지금도 대처 집권기의 폐해를 극복하는 중이라고 한다.
이징턴이라는 탄광촌, 홀아버지 광부 가정 그리고 막 시작되던 신자유주의 열풍 등 한 세대 전 영국 상황에서 빌리 엘리어트 같은 무용수가 출현한 것은 사뭇 돌연변이처럼 보인다. 이 돌연변이가 가능할 수 있은 저변의 요인으로서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온정적인 할머니와 시골 발레 교사 윌킨슨 부인,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남긴 유서를 제시한다. 할머니, 윌킨슨 부인, 어머니는 모두 여성들이며, 이 사람들 말고는 빌리를 이해한 사람은 없었다. 이 대목에 덧붙여, 세 여성은 대처의 행동 방식과는 매우 대조적이어서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대처리즘에 대한 반성적 알레고리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
어느 날 파업 불참을 무릅쓰고선 빌리를 데리고 런던의 오디션 현장에 동행하는 아버지의 결단은 빌리 가족의 가장인 중년 남성의 것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함축적이다. 아버지가 표면적으로는 빌리의 장래를 위해 결단을 내렸을지라도, 이면적으로는 모성 또는 여성이 마초의 가치관을 동요시키고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춤이나 춤 영화 스토리와 결부되곤 하는 마초적 사고방식을 <빌리 엘리어트>는 빌리의 고집과 아버지의 각성을 통해 해소하였다. 빌리의 고집에는 세 여성의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고 자식의 장래를 앞세우는 아버지의 내면은 그들의 가치관을 인정하기 시작해서 급기야 영화 결말부에서는 아버지와 형이 아마도 난생 처음으로 집을 떠나 멀리 런던에서 함께 발레 공연을 관람하게 된다.
아버지와 형의 입장에서 보면 인생관의 급변이라 할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춤을 추어서 스스로 느낀 변화가 아니라 춤추는 혈육 때문에 일어난 변화이다. 이처럼 아동을 주역으로 하면서도 <빌리 엘리어트>는 성인의 변화를 겨냥하였다. 물론 빌리의 성공 스토리는 영화를 관람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희망도 주었을 것이다. 이에 못지않게 아버지와 형처럼 성인 남성의 마초적 사고방식이 정지되도록 한 데서 이 영화의 성숙한 일면이 드러난다. 이런 성숙한 시각을 영화에서 일관되게 구현할 수 있은 것은 무엇보다 대본작가 리 홀과 감독 스티븐 달드리의 지성적인 접근 덕분이었을 것이다.
<빌리 엘리어트>는 1990년대 후반에 제작되었다. 대처가 수상 직에서 물러난 지 한참 후의 일이다. 이 영화는 영국의 예술위원회가 공동 제작에 참여한 작품이다. 영국 예술위원회가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일은 흔하다. 2000년 당시에만 해도 영화 15편의 제작을 지원하였다. 앞서 소개했듯 대처는 집권 초부터 예술위원회 보조금을 줄곧 삭감하였다. 이런 역사적 사실이 <빌리 엘리어트> 제작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궁금한 바 없지 않지만, <빌리 엘리어트>에서 탄광 파업이 담담하게 묘사되고 탄광촌 출신 청소년이 무용수로 성공하는 스토리로 미루어 이 영화는 대처 집권 시기에 대해 객관적인 태도를 취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협회 공동대표,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춤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