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학교에 왔더니 휴강이네요.”
지난 목요일 정주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 몇 해 전, 전문사 과정을 마치고 나서 지금은 내 강의를 청강하고 있는데 그날은 입시 때문에 강의가 없는 것을 모르고 왔다가 허탕을 쳤다는 것이다.
“맛있는 떡을 사왔는데 어떻게 해요. 댁으로 찾아 갈까요?”
시골길을 한참 헤매고 와야 할텐데 괜찮겠느냐고 했더니, 가을 나들이 할 핑계가 생겼으니까 지금 곧 달려 오겠단다. 이윽고 집 앞에 와있다면서 전화 벨이 울렸다.
“머나 먼 시골길을 찾아오느라 애썼네.”
“웬걸요. 너무 아름다워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에요.”
하기사 올해는 유난히도 단풍이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을 음미하지 못하고 놓쳐버린다면 지척에 놓인 참으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셈이 될 것이다. 강변로를 따라 단풍으로 곱게 물든 미사리의 꿈길을 거쳐 팔당을 끼고 강변을 굽이 굽이 휘돌아 가을 정취에 젖을 수 있어서 강의가 없는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밤 하늘의 으리 으리한 우주 무대를 감상하는 객석이 어디에요?”
“우리 집 구석 구석이 모두 그 객석이지. 이것도 내 객석이고.”
작은 항아리 두 개를 엎어놓고 그 위에 널빤지를 올려놓은 의자에 앉으면서 정주에게도 앉도록 권했다. 엉거주춤 앉으면서 “참 좋네요” 라고 말하면서도 정주의 눈가에는 약간 실망한듯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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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하늘의 우주 무대를 감상하는 으리으리한 객석’(‹‹뜰을 거닐면서-1››)이라는 내 처풍에 취해, 그게 무슨 가르니에 궁전(Le Palais Garnier. 빠리 오뻬라 극장의 본명)처럼 휘황할지도 모른다는 환상에 젖어 있었던 듯하다. 그 때 정주의 눈에는 하늘에서 오롯이 내려와 있는 연못이 비쳤나 보다.
“어머 여기 연못이 있네요”
너무 작아 눈에 잘 띄지않는 연못, 일부러 숨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숨어있는 연못 — 그 은지(隱池)에 나는 에리다누스(Eridanus)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주(城主)의 이름도 에리다누스라는 것을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에리다누스는 그리스 신화속의 강 이름이기도 하고 밤 하늘의 가장 아름다운 성좌(星座) 이름이기도 하다.
에리다누스는 모든 것을 포용한다. 겁 없이 하늘로 태양을 향해 치솟다가 추락했던 파에톤(Phaeton)을 가슴속으로 품어주었던 것도 에리다누스였다. 에리다누스는 콸콸 흐르는 유수(流水 ‧ lotic)이자 조용하게 숨을 죽이고 그 깊은 품에서 모든 것을 삭여내는 정수(靜水 ‧ lentic)이기도 하다. 비너스 아나디오메네(Vinus Anadyomene), 몸을 더럽힐 때마다 비너스는 에리다누스의 정수(靜水)로 몸을 씻어낸다.
나를 마시려고 몸을 기울일 때
네 눈이 하도 깊어, 나는 보았다.
모든 태양이
그곳에 제 모습을 비취려 모여들고
절망한 모든 사람들이
다루어 그곳에 투신하는 것을...
(Tes yeux sont si profonds en me penchant pour boire,
J'ai vu tous les soleils y venir se mirer,
S'y jeter a mourir tous les desesperes...)
루이 아라공(Louis Aragon)의 시 ‹‹엘자의 눈›› (Les Yeux d'Elsa)의 첫 연이다. 모든 태양이 스스로의 모습을 비추어 보려고 모여들고, 절망한 모든 사람들이 그곳에 투신하는 깊이를 지닌 것이 엘자의 눈이라면, 이 지상의 추악한 모든 것을 씻어주는 정화의 샘이 에리다누스의 강, 아리다누스의 연못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어쩌구 하면서 우리가 마치 문화민족인양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가슴이 쓰리다. 예술이 존중되고, 모든 사람들이 그 성스러움을 경배할 때만 문화는 꽃필 수 있거늘, 우리의 처지는 영 뒤죽박죽이니 말이다. 어느 지방에서 국제 무용제가 열렸을 때, 예술계 인사는 수쩨 제외된 채 그곳의 국회의원, 시장, 시의원등이 인사말이랍시고 나부랑거리면서 설쳐대는 통에 그것이 문화행사라는 그림자 조차 지워져 버렸다.
비슷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오래전 일이지만, 어느 무용단의 단장 한 사람이 공연 후의 리셉션에서 보여준 추태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리다. 그 자는 권력기관인지 재계인지 조금 연줄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사람을 소개하면서 ‘우리 무용계에 참으로 큰 공헌을 한 무용계의 거성에게 큰 박수를 보내자’고 알랑거렸다. 그 아내가 무용계 인사라는 것 이외에는 무용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인데도 무용계의 거성으로 둔갑시키다니 기가 막힐 일이다. 그 자리에 끌레망소가 있었다면 얼마나 기겁을 했을 것인가.
예술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는 자들이 권력의 시종, 권력의 노예로 전락하여 알랑거리는 풍토에 무슨 문화가 있겠는가. ‘너 성스러운 예술이며, 모든 것 위에’(Du holde Kunst uber alles)라고 날아 오르지는 못할망정, 정치나 권력, 재력의 끈을 농락하는 나부랭이들 앞에서 노예처럼 꼬리를 저어대는 추잡배들이 널려있다면 슬픈 일이다. 예술이라는 견장을 깡통처럼 주렁 주렁 달고 세도자들의 꽁무니에서 허리를 조아려대면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 잡배들이 범람 할 때마다 나는 에리다누스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럴 때 또 생각나는 것이 끌레망소이다.
제1차 대전 당시 프랑스의 수상이었던 끌레망소(Georges Clemenceau 1841-1929)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 빠리 평화회의(1919년)에 전쟁당사국의 수뇌들이 모였을 때, 낯선 사람을 보자 비서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어느 나라 수뇌인가?”
“폴란드의 수상 파데렙스키(Ignacy Jan Paderewski ‧ 1860-1941)입니다.”
“파데렙스키라면 그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폴란드 수상입니다.”
그러자 끌레망소의 눈가에는 연민의 정이 서렸다.
“가엾은 사람, 이 무슨 추락이란 말인가.(Pauvre homme. Quelle chute!)"
프랑스가 문화국가로 칭송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예술가임을 자처하면서 수상은커녕 수상의 시중꾼이거나 그 밑에 널려있는 감투 하나라도 얻어 챙기려고 침을 질질 흘리면서 눈이 벌겋게 달아 올라있는 자들이 득실거리는 우리나라에서라면 어떨까? 피아니스트가 수상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가엾게 생각할 사람이 있을까?
끌레망소처럼 예술가를 존중하려 해도 스스로 노예의 탈을 고수하면서 꼬리 젖기에 얄광하는 저주받은 노예도 있다.
“황제 만만세! 폐하를 위해 곧 목숨을 잃게 될 자들이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Ave Imperator! Moritori, te salutanti!)
로마의 검투사들은 곧 죽게 되면서도 자신들을 주검으로 휘모는 악귀에게 그렇게 알랑거리도록 강요되었다. 그러나 가끔 그것을 거부하는 당당한 노예도 있었다. 그것을 거부하는 순간 그는 이미 노예가 아니다.
노예는 신분의 문제가 아니다. 신분은 노예인데도 귀족보다 훨씬 더 고귀한 분도 있는가 한면, 신분은 노예가 아닌데도 먹이 한 조각 더 얻어먹기 위해서는 기꺼이 노예의 탈을 둘러쓰고 시도 때도 없이 꼬리를 저어대는 노예도 있다. 그런 잡배들은 이제 우리 예술계에서 사라져야 마땅하다. 그들의 목욕을 위해 에리다누스의 정지(淨池)가 있지 않은가.
“정주, 넌 여기서 목욕을 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렇게 묻자 정주가 대답했다.
“그래도 목욕했어요. 단풍에, 그리고 이 뜰에 가득 핀 가을 정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