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박외선 선생님을 회상하며
남정호_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박외선 선생님이 돌아 가셨다.
선생님은 1953년부터 1977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무용을 가르치며 한국 사회에 최초로 현대무용을 소개한 무용가이다.
본인은 1971년 이화여대 무용과에 입학한 후 4년간 박외선 선생님의 문하에서 실기와 이론,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배우는 행운을 가졌다.

입시를 위한 면접에서 처음 대하는 선생님의 인상은 화려하였다. 무슨 옷을 입든 어떤 장소에 있든 어김없이 보통사람과 구별되는 예인의 아우라를 지닌 타고 난 화려함이었다. 질문도 하지 않고 얼굴을 물끄러미 보시더니 그 다음으로 몸을 한번 훌어 보시고는 시선을 거두셨다. 그 만하면 볼 건 다 보았다는 자신감과 무심함이 섞인 표정이었다.

입학하자마자 발레에서 현대무용으로 전공을 옮기면서 나는 박외선 선생님 곁에 조금 다가갈 수 있었다. 내가 가톨릭신자라는 것, 선생님이 엄마와 같은 세례명 세시리아라는 것, 선생님의 부군인 마해송 씨의‘떡배단배’를 어릴 적에 가톨릭소년지에서 읽은 것이 내가 가진 선생님과의 통로였다. 자기의 것을 업신여기는 떡배의 사람들이 달콤한 외래문명문화인 단배로 몰려드는 내용이, 그리고 그 비유가 나에게 깊이 와 닿았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원고정리를 해 달라고 하셨다. 매달 생활비와 함께 엄마가 보내주시는 편지에서처럼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무시하며 쓴 원고였다. 그러나 내용은 참으로 솔직하고 이지적이었다. 그 원고는 1971년 문예진흥원에서 발행한 ‘무용’이라는 매체에 ‘무용가가 되기 전에 참된 인간이 되자’라는 제목으로 실렸고 본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하루의 절반 이상을 학교에서 지내게 됩니다. 그러나 가만히 따지고 보면 집에서도 강의준비, 혹은 실기시간의 교재를 위해 나머지 절반도 보내는 셈입니다. 밤에도 학생들과 무용에 맞는 음악을 찾으러 다니거나 그밖에 개인적으로 찾아와 지도를 받으려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의 자유시간은 잠자는 때 밖에 없는 수가 많습니다. 그래서 집안일도 내가 해야 할 일, 혹은 내 힘으로 해야 할 일들의 거의가 뒤로 미뤄지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런데서 불평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이에서 나는 나대로 얻는 수확이 꽤 많기 때문입니다. 한창 청춘을 추구하는 발랄한 여대생들, 꿈이 크고 감정이 풍부한 그들과 같이 호흡하고 어울려 생활하다 보면 어느새 나도 내 젊었을 때의 기운을 다시 찾은 듯 쌓였던 피곤이 확 풀려 버리곤 합니다. 또한 조용하고 아늑한 캠퍼스, 걸을 때 마다 사철 그 모양을 달리하는 나무들, 담장의 덩굴을 보면 나의 마음은 따듯해지는 것 같아 식사 후의 작은 산책은 나의 일과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점에서 나는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지식의 전달자로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좀 더 가까이 그들의 어머니와 아주머니로서 또한 여성대 여성으로서 존재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는 해마다 신입생들이 무용에 뜻을 두겠다며 들어올 때 이런 말을 합니다.

그것은 ‘우선 무용가가 되기 전에 참된 인간이 되도록 힘을 기우려라”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폭넓은 교양과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단지 무용의 기술만 알아서 써먹으려는 사람은 기계에 불과할 뿐입니다. 무대에서 안무가에 의해 창작된 무용을 보이는 무용수도 되어야겠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창조자가 되어야겠습니다.’

강의시간의 첫 내용과 내가 정리한 원고가 같은 내용이라 말 따로 행동 따로 하는 어른이 아니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무용가라는 특수한 역할에 기대어 자만심을 가지거나 이기적이거나 배타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가져야하는 덕목이 무용가라고 제외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아무리 춤을 잘 추고 작품을 잘 만들어도 인성이 부족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약삭빠르고 천박한 수 얕은 주위 무용가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였을 것이다.
동경의 문화 중심저널 ‘모던 일본’ 잡지의 사장인 마해송 씨의 반려자로서 당대 최고의 문화적인 배경에 둘러싸여 보호받으며 살아 온 순진한 박외선 선생님,‘폭넓은 교양’과 ‘겸손한 마음’을 미덕으로 여기는 순수한 박외선 선생님이 한국에 돌아와서 많은 마음고생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주위에 대한 불만보다는 자신의 일에 감사하면서 쓴 이 글은 한국의 무용계에 널리 알리고 싶은 글 중에 하나이다.

선생님은 무용창작론을 강의하셨다. 교재는 ‘현대무용창작론’[박외선 저, 보진제. 1977년]. 이 책의 후반부는 도리스 험프리의 ‘The Art of making Dances'를 간추린 것이었다. 그 후반부를 자세히 보면 본인이 공감하는 부분들이 잘 발췌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박외선 선생님의 현대무용미학은 그레이엄적이라고 하기보다는 험프리적, 뷔그만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도리스 험프리의 제자였던 호세 리몽이 메리 뷔그만의 제자인 헤롤드 크로츠버그의 춤을 뉴욕에서 보고 무용의 길을 가기로 결정한 것, 메리 뷔그만 계열의 일본 무용가 다까다 세이코의 제자였던 박외선선생님이 동경에서 헤롤드 크로츠버그의 춤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고 직접 찾아가 대화를 하고 자신의 예술세계에 가장 영향을 끼친 예술적 우상으로 신봉한 것을 보면 초록은 동색이듯이 미적 철학적 가치를 공유하는 이들이 서로에게 끌려서 의식하지 않은 가운데에 영향을 주고받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선생님은 무용을 사랑하셨고 학생들을 사랑하셨고 가르치는 것을 사랑하셨다. 본인의 일생에서 가장 기뻤던 일은 이화여대에 무용과가 생긴 것이라고 하셨다. 부군을 여이고 혼자가 되시고 자녀들이 모두 미국으로 떠난 후에 선생님은 더욱 더 학교에서 학생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여서 선생님 연구실에는 학생들이 부담 없이 드나들 수 있었다. 가족을 떠나 지방에서 올라 온 학생들, 이러저러한 일로 문제를 가지고 있는 학생들에게는 그 존재만이라도 위안이 되는 선생님이었다.

1974년 12월 21일, 국립극장에서 문화예술진흥원 후원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인 박외선 무용공연에 참여 것은 나의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준비한 공연이었다. 그해 봄에 캐스팅이 되어 조금씩 준비를 하다가 여름방학부터 본격적으로 연습을 했다. 그 작품에 참여한 이들은 이운철, 서진은, 김영순, 남정호, 정귀인, 양정수, 한향란, 손영은 김경혜, 김명수, 신정희, 장정윤, 황문숙, 김헤경, 신은경, 안신희 최명희 등이었다.

나는 모든 작품에 다 투입되었다. 대지의 무리에서 김수영씨의‘풀’이 낭송되는 장면에서는 멋진 드레스 위에 연두색의 하늘거리는 조끼를 걸치고 우아함이 요구되는 절제 된 춤을, 비틀즈의 헤이 주드[Hey Jude]에 맞춘 재즈풍의 춤에서는 오렌지빛 타이츠를 입고 군무를 리드하는 대담한 춤의 중앙 앞자리에도 배치되었다. ‘고별’에서는 슬픔에 겨운 몸짓을 하는 검은 드레스팀을 하고 싶었는데 애석하게도 천상장면의 흰 드레스팀에 들어갔다. 당시의 많은 무용계인사들, 평론가들(조동화, 김경옥, 김영태등)이 공연연습장을 들락거리고 웬만한 문화예술지에 공연이 소개되었고 주간지의 컬러화보란도 장식하였다.

연습은 매일, 방과 후에 무조건 모여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선생님으로부터 언제 누구에게 어떤 동작이 떨어질지 모르니 출연자 모두가 항상 대기하여야 했다. 어느 날은 한 번도 움직이지 못하고 대기만 한 날 도 있었다. 아주 나중에 안 것이지만 일본무용계의 작품연습장에서 같은 현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학생들의 불만이 나왔다. 특히 기숙사에 거주하는 학생들은 저녁식사시간을 놓치면 밥을 굶게 되는지라 불만이 컸다. 또한 교회나 성당에 나가는 아이들은 일요일에도 하는 연습을 힘들어 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 두 가지에 다 해당되는 학생이었다. 모두들 투덜거렸지만 정작 선생님 면전에서는 상냥한 미소를 짓는 예의바른 학생들을 대표하여 그들에 떠밀려 학생조합의 대표가 되어 선생님께 건의를 드렸다. 불쾌하신 표정을 지으셨다. 믿었던 학생이 한 말이라 더 기분이 상하셨나보다. 덕분에 밥은 챙겨 먹을 수 있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맹목적인 정열을 갖지 못하는 이기적인 학생을 자처하면서 선생님의 곁에서 조금 물러나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공연이 끝나고 나의 대학시절도 끝났다. 나는 부산으로 내려갔고 취직준비를 하여 고등학교 무용교사가 되었고 그리고 일 년 반 후에 대학원 진학을 하러오니 정년을 삼년 남겨놓고 퇴직금을 장학금으로 내놓고 선생님은 이미 미국으로 떠나셨다.

멋진 분이다! 그러나 서운하였다. 그리고 후회스러웠다. 나의 마음을 표현도 못한 채 선생님을 떠나 보내버렸다. 첫 솔로‘자화상’의 마지막 장면은 선생님이 주신 선물이다. 수업의 마지막에 항상 끝이 없는 것 같이 오랫동안 인사들을 해 주신 선생님을 기억하면서 이제 어른이 되어 조금이라도 그 뜻을 헤아리면서 빌린 장면이다.

1987년 가을에 박외선선생님은 잠시 방한하여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하셨다. 거기에‘무용수는 물론, 관객 등 무용인구가 참 많이 늘었어요. 무용발표회의 양적성장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이제 현대무용도 외국 것의 모방에서 벗어 나 나의 예술, 우리나라의 것을 창작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고 기사에 나와 있다. 양적인 성장에 대하여 언급하셨지만 질적인 것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셨다. 아직도 본인의 까다로운 심미안을 만족시키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본인이 자국을 떠나 살면서 한국무용계의 성장에 대한 객관적 조언으로 ‘나의 예술’을 강조하신 것은 아직도 유효하다.

다행스럽게도 선생님을 다시 뵐 수 있게 되었다. 안식년을 맞아 1992년 UCLA에 객원교수로 한 학기 있으면서 같은 동네에 사시는 선생님과는 매주 일요일 미사를 함께 보러 다니게 되었다. 학생시절에 못다 한 정을 드리고 싶었는데 흔쾌히 받아주셔서 참으로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제자가 아니라 한사람의 여자,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게 대해주시는 품성을 나도 조금 배우게 되었다.

언젠가는 제일 첫 강의시간에 선생님처럼‘무용가가 되기 전에 참된 인간이 되자’를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어른이 아쉬운 한국무용계에 또 하나의 별이 졌다. 만약 우리무용사에 박외선이란 존재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발전보다는 더 느려졌을 것임은 분명하다. 부고소식을 듣자마자 기도를 하게 되었고 그 기도문을 따르다가 나온 이 편지를 선생님께 바치며 급작스러운 글을 마무리한다.

하늘로 가신 우리 선생님,
선생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그 사랑이 임하시며 선생님의 가르침이 저에게 뿐만이 아니라 저의 제자들에게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날 저에게 춤을 추게 하여 주시고 선생님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게 하시었습니다.
이제 제가 버릇없는 제자들을 용서하듯이 저의 버릇없음 또한 용서해 주시옵소서.
은총이 가득하신 선생님,
기뻐하시어요.
모든 제자가 함께 있으니 스승 중에 복되십니다.
제가 추는 춤에도 항상 함께 하여 주시고
선생님의 아름다운 영혼이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제자 남정호 드림

 (전재: 몸, 2011. 10.)

2012. 09.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