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2012 런던올림픽에서 양학선이 도마에서 한국 체조 역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한국 언론이 양학선의 쾌거에만 집중한 탓에 보도되진 않았지만 당시 일본은 남자 체조 단체 은메달과 개인종합(우치무라 고헤이) 금메달을 따냈다. 전통적으로 남자 체조 강국인 일본은 1990년대 들어 스타 선수들의 은퇴로 급격히 체조의 인기가 떨어지고 수준도 하향세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19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남자 체조 평행봉에서 금메달을 딴 모리스에 신지를 모티브로 한 만화 <플라이 하이>가 1994년부터 연재를 시작해 폭발적인 호응을 얻으면서 체조의 인기가 다시 높아지고 체조 선수를 희망하는 학생들이 늘면서 오늘날 체조 강국의 위상을 되찾게 됐다.
<플라이 하이>처럼 일본 스포츠 만화 가운데는 해당 종목의 인기를 견인한 작품이 꽤 많다. 1990년대 농구 불모지였던 일본은 물론 한국에까지 농구 붐을 일으킨 <슬램덩크>나 자동차 경주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린 <카페타> 등은 대표적이다.
스포츠 만화뿐만이 아니다. 예술을 소재로 한 만화 역시 해당 장르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곤 했는데, 발레 만화는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에는 발레 만화가 한 편도 없지만 일본에는 발레 만화가 100여종 나와 있다. 심지어 최근엔 발레 만화 전문 잡지까지 출판돼 발레의 인기를 견인하고 있다.
이들 발레 만화는 장편의 경우 주인공이 발레에 대한 열정과 재능으로 좌절을 극복한다는 뻔한 구도로 되어 있다. 하지만 주인공의 치열한 성장과정이 독자들을 감동시킨다. 그리고 단편들의 경우엔 발레를 처음 체험하고 배워가는 과정이나 발레사의 에피소드 등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이들 만화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실제 작품과 테크닉 등 발레에 대한 지식은 발레를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 나아가 일본 발레의 역사까지도 읽어낼 수 있다.
일본 발레 만화의 양대 산맥을 꼽으라면 단연 야마기시 료코(山岸凉子)의 <아라베스크>(8권)와 아리요시 교코(有吉京子)의 <스완>(12권)이다. 일본에서 발레 붐을 일으키는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는 두 작품 모두 1980년대 해적판으로 번역돼 국내에서도 읽혀졌다. <스완>의 경우 당시 제목을 <환상의 프리마돈나>로 바꿨는데,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전이다 보니 주인공 이름도 한국식으로 바꿔놓았다. 2001년 한국에서 정식으로 발매될 때 원작에 충실하게 번역됐다.
일본의 발레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22년 불세출의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의 8개 도시 순회공연을 계기로 발레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 당시 제정 러시아에서 발레리나로 활동했지만 소비에트 혁명 때문에 일본에 피난왔던 엘리아나 파블로바와 나데지타 파블로바 자매가 1927년 일본 최초의 발레교습소를 세우면서 일본에서 발레가 정착됐다. 아즈마 유사쿠(東勇作), 다치바나 아키코(橘秋子), 가이타니 야오코(貝谷八百子), 시마다 히로시(島田廣) 등 일본 발레의 1세대는 모두 이 교습소 출신이다. 게다가 제정 러시아의 영향이 강했던 하얼빈 발레학교 출신으로 상하이 발레 뤼스에서 춤을 췄던 고마키 마사히데(小牧正英)가 2차대전 직후 귀국하면서 <백조의 호수> 음악 악보를 가져왔고, 1946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백조의 호수> 전막 공연이 이뤄지는 등 일본 발레의 뿌리는 러시아 발레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철의 장막’ 속에 있던 소련이 1956년 볼쇼이 발레단을 처음으로 영국에 파견해 세계 무용계에 충격을 줬는데, 이것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57년 볼쇼이 발레단의 도쿄 공연은 일본에 소련 발레의 경이로움을 알려주기에 충분했다. 이후 일본 발레계는 러시아 발레 교사를 일본에 초청하거나 일본 무용수를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유학보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