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내가 비평가로써 정체성을 갖고 활동한지도 13년째가 되어간다. 고등학교 때부터 <춤>지를 읽고 자란 나는 특히 비평글을 관심을 갖고 읽었었다. 당시 안국동에 있는 ‘공간’에서 매주 ‘현대무용의 밤’이 펼쳐졌고, 안국동 거리를 걸어 자발적으로 혼자 공연을 보러 다니면서 그 공연에 대한 글이 다음 달 <춤>지에 실리는 게 신기했고, 내가 본 것과 글의 내용을 맞춰보는 재미에 빠졌었다. 그러다가 나는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춤과 사람들>이 생기면서 첫 번째 비평상을 수상하고 평론계에 등단하게 된다. 11살 때부터 무용을 시작해서 36살 즈음에 평론가가 된 것이니, 춤 공부 25년 만에 실기 현장에서 떠나 춤글쓰기의 현장으로 옮긴 것이다.
내가 오늘 이 글을 쓰게 된 연유는 최근 한국춤비평가협회가 주최하는 한국춤비평아카데미를 진행하면서 비평에 관심을 갖는 지망생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이 춤비평계의 전모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부족하고, 그 때문에 많은 착각과 오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상황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착각과 오류가 두려운 이유는 무지하고, 무책임한 비평가가 양산되어 지는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물론 나 역시 그리 훌륭한 비평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비평가가 직업이 될 수 없다는(원고료만으로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즈음에야 절감하고 있을 만큼 직업적으로 비평에 덤벼든 적도 없다. 현학적인 취미에 빠져 현실적인 문제보다는 예술이라는 정체도 모를 환상에 갇혀있기도 자주했으며, 그저 한달에 한번 취미삼아 멋진 글을 쓰는 것에 치기어린 목표를 두기도 했었다. 춤실기를 하다가 비평가가 된 나는 무용가들과도, 기존의 비평가들과도 어떤 관계를 맺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평론가는 외로운 건가보다 하면서 외딴 섬에서 춤에 대한 공상으로 밤을 지새는 ‘글쓰기가 춤에 대해 숙고하기에 좋고, 개인적인 수양에 좋은 도구’라고 생각하는 그런 수준의 비평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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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비평가는 멋진 직업?
2009년 말 춤평론가회에서 한국춤비평가협회가 분리되어 독립하게 되는 과정(이 사건에 대한 경위는「춤비평」, 2009. 12. vol. 25을 참조)에 운좋게 비평가협회에 신입회원 자격을 갖고 활동을 하게 되면서 많은 비평가 선배들을 만나고 무용계를 바라보는 공식적인 하나의 시선을 갖게 되었다. 나는 협회활동을 하며 선배 비평가들로부터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글쓰는 일 외의 무용계를 대상으로 춤웹진과 춤비평지 발간, 신춘포럼, 비평아카데미, 춤비평상 선정심사 등 협회의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보다 폭넓은 시선을 갖게 된 것이 가장 큰 행운이었다. 또 협회에서 작년부터 한국춤비평아카데미를 개최하고 이번 10월에 제3기를 배출하면서 그들 중 구체적으로 비평 활동에 뜻을 두는 지망생들을 만나게 되고 ‘비평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미 무용학 관련 분야에서 박사학위 중이거나 학위를 가진, 상당한 춤에 전문적인 인력들이 비평에 관심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평에 대한 적절한 호기심과 탐구심의 수준과 질(質)은 많이 떨어지는 것을 확인했고, 비평 자체에 대한 치열한 고민보다는 비평가로서 활동을 먼저하고 있거나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어떤 분야에 대한 호기심과 건강한 관심이 발전을 하여 구체적인 활동으로 이어지는 건 모든 일에 접근하는 자연스러운 순서이다. 그럼에도 영역에 대한 필요충분조건을 갖추는 것보다 명패에 관심을 갖는 이런 현상이 왜 있는걸까? 내 생각에 첫째는 비평을 학문적으로 접근하여 비평과 관련 있는 논문을 쓰거나, 지도교수가 비평가일 경우 그 밑에서 박사과정을 하면 자연스럽게 비평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고, 둘째는 그들이 비평가로 충원되길 원하는 기존의 비평가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난 그 양측 사이에 무엇이 오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 비평가를 인큐베이팅하고 어떻게 비평가가 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양측의 고민 모두가 부족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 하나 그렇게 어설픈 과정으로 비평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배경에는 비평이 상당히 매혹적으로 보여 과정과 역할에 대한 고민보다는 결과적으로 비평가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비평이 가지고 있는 본래적 권위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용계에서 뭔가 권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매력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무용가들이 창작을 하고 그 창작물을 놓고 비평을 하는 행위는 2차적인 행위이자 가치판단으로 작품을 평가를 하는 행위가 주요한 역할이기 때문에 마치 무용가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을 부정할 순 없지만 무용가와 비평가의 관계가 상하관계로 비춰지는 건 우리나라에서 비평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생긴 다분히 한국적 특성을 담은 측면일 것이다.
내 앞 세대의 비평가들은 춤실기를 전공한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이화여대를 나온 선배 중 문애령씨가 90년대 부터, 후배인 심정민이 2000년대에 주로 활동하였으며, 200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장지원, 김예림 등이 현장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대부분의 78학번 이전의 비평가들은 남성이 대부분이자 춤실기를 하지 않고 문학, 미학, 영화비평 등의 분야나 기자 출신이 영입된 경우가 많다. 이렇게 뚜렷하게 나뉘는 데에는 해방 후 70년대 후반부터 춤비평계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과정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춤>지를 중심으로 비평가가 된 분들은 발행인의 강한 의도에 따라 적극적으로 영입된 분들이며, 그들은 별도의 등단과정이 없이 발행인의 인허가를 통하여 비평가가 되었다. 발행인의 의도에 대해서는 직접 확인한 바가 없지만 무용계를 측은히 여겨 무용계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려는 좋은 의도와 더불어 무용인들과의 세력관계를 염두에 두었다는 말을 전해들은 바 있다. 그러다보니 <춤>지를 통해 형성된 춤평단은 어떤 권위를 스스로 창출하여 비평가-무용가를 서열구도로 두는 틀을 갖게 되었고 2009년 몇 가지 갈등이 붉어진 <춤>지 중심의 평단은 서로 분리되기에 이르게 된다.
그 역사적 흔적이 비평을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기반을 갖고 발전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무용가들과의 세력관계에서 우위를 중심으로 하여 발달하게 된 가장 큰 배경으로 보인다. 거기서 비평가가 하나의 직업으로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지 못하면서도 권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밖에서 보면 그 거품은 더욱 환상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 거품이 춤공부를 하는 학생들에게는 달콤한 것으로 비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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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 인큐베이팅 과정의 문제
지금 춤비평계의 가장 큰 문제는 제대로 된 등용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비인기 분야가 되기도 했고, 더 이상 평론가들이 후학의 재생산에 신경쓰지 않는다. 기업에서 주는 후원금이 건강한 재생산에 투자되기 보다는 남겨서 자신들의 구호품이 되길 원한다. 물론 그런 이유는 비평이 직업이 될 수 없다는 자괴감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래서 비평가의 인큐베이팅의 기본 전제는 생활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부잣집 아들이나 부유한 아줌마들의 취미생활 정도에서 적정한 타협이 이루어진다. 그런 조건을 가진 사람이 비평가가될 확률이 높아진다. 그 결과는 전문적이고 직업적이지 않은 비평가가 만들어 지고 비평의 수준은 낮아 질 수 밖에 없다. 취미로 하는 사람이 문제를 보려 하겠는가? 비판적 사고를 애써 하겠는가? 그저 교양이 되거나 교수가 되기 위한 경력이 되는 데 소용된다.
그렇다고 기본적으로 비평에 대한 학문적 접근이 가능한 대학에서 비평과목이 개설되고 거기서 학생들이 비평에 대한 기본 교육을 받는지도 의문이다. 대부분의 비평수업은 현장평론가이거나 박사학위가 있는 강사들이 주로 하게 되는데 개설강좌 수도 물론 적으려니와 충분한 교육을 받기에는 실기중심의 대학 무용과의 수준이 아직은 학문적 풍토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한국 춤평단의 형성과정과 실기중심 대학의 부실함이 종합적으로 진정한 실력과 학문적 기반은 약하면서 상대적인 권위를 가진 것 같은 거품을 양산하여 야릇한 한국춤비평계의 현재의 모양을 만들고 있다. 게다가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무용계에 만연해 있는 ‘도덕 불감증’과 ‘윤리의식의 실종’이 비평계에도 무차별적으로 스며있으며, 바로 도덕적 결함이 지금 활동 중인 비평가들이 헤어 나오기 어려운 함정이 되거나, 피해갈 수 없는 심판 지점이 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 도덕적 결함은 물론 무용인들과 공동협업의 결과이며, 모든 무용계 관계뿐 아니라 이 사회의 총체적 문제와 얽혀있다고 위로해 본다. 그렇다고 문제가 아닌 것은 아니다.
한국춤비평가협회 역시 회원 충원에 대해 많은 고민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2009년 분리 이후 한국춤평단의 새로운 전환에 의욕을 내고 있는 협회로써 비평가뿐 아니라 연구자까지 포함하는 협회가 되려는 생각은 발전적이다(영문명에 드러나 있듯이 The Korean Assosiation of Dance Critics & Researchers). 허나 공식 명칭이 우리말로 비평가협회이고 보면 비평가 인큐베이팅이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관행을 벗어날 정확한 체계를 갖추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권위 있는 공동대표의 추천과 더불어 그것을 보완할 종합적 등용 방식이 필요하다. 비평가협회에 회원이 된 이후의 여러 지면에 비평을 쓰게 될 것을 예상한다면 회원이 된다는 것은 비평가로서의 권위를 인정해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현실적 결과를 염두에 둔다면 아무리 필진이 궁색한 우리의 현실이지만 비평가를 주먹구구로 양산해서는 안 될 일이다. 게다가 무용계 전체를 사고하고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은 기본이고 어찌보면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작금의 무용계에 훌륭한 처방을 내고, 열정적으로 생명활동을 할 열정과 도덕성을 겸비한 인성을 갖춘 비평가가 더 필요해도 너~~~무 필요한 시점이다.
이미 <춤>지에서 등단한 평론가들은 발행인의 인허가와 지금은 한국춤비평가협회의 공동대표가 된 분들을 통해 등단한 사람들이다. 그들 중 무용계에 중요한 도덕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평론가들이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런 결과는 모두 비평가 인큐베이팅 과정에 스며있는 비체계적 방식, 거기에 도덕적 불감증이 더해지고, 무용계 사람이 아니면 실력이 낫거나 뭔가가 우월할 것이라는 주먹구구식의 무책임한 생각이 한몫을 해서 만들어 낸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비평가로써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렵다. 원고료가 장당 1000원에서 최고 5000원정도로는 한달에 100장을 써도 용돈도 되지 못한다. 이는 다른 나라에서도 예외는 아닌가보다. 미국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상위 7%로 정도가 비평가가 직업이 되어 생계가 되고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호주의 그 넓은 대륙에 20명 남짓한 비평가만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아직도 무용계가 활황인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교수를 직업으로 하는 소수의 비평가를 빼놓고 나머지 비평가들은 자괴감에서 놓여날 길이 없다. 그래서 스스로 거품을 만들고 그 거품을 무용가들에게 팔아 무용가들과 서열관계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아래에 놓이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춤비평가가 춤과 관객대중 사이를, 춤과 사회 사이를 이어주고 소통시키는 역할을 떳떳이 하기에는 이미 많은 자존심을 팔았다. 목에 힘은 들어가 있을 지언정 마음에 힘은 빠진지 오래다. 무용계의 고립과 폐쇄를 해결하기는 커녕 야릇한 무용계 관행을 고수하고 비호한다. 새로운 춤문화를 만드는 데 생각이 미치기도 전에 전문적인 견해에서도 힘이 딸리고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다. 먹고 살기 위해 기획이나 제작을 하면 고의가 아닌, 어쩔 수 없는 피해를 무용가들에게 입힌다. 체면이 말이 아니다. 무용가와 비평가는 먹고 사는 일에 엉킨 애증의 관계가 된다. 악순환구조에 서로가 묶인다.
우리가 이러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은 춤에 애정이 식는다. 그들이 떠난다. 무대는 경력쌓기용으로 채워지고, 객석은 우리가 하는 짓거리와 유관한 사람들만이 채워준다. 우리에 갇힌 채 주는 먹이에 길들여지는 동물처럼 우리는 스스로 먹이 찾을 줄도, 찾을 이유도 잊어간다. 조금 주는 지원금이 목줄을 죈다. 공허한 춤과 춤에 대한 글들이 그 쓸쓸한 거주지를 메운다. 우리의 거주지가 이런 모습이다.
그대라면, 적절한 타협 속에서 탄생하는 춤비평가를 위해 박수를 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