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올림픽이랍시고 또 한 번 온 세계가 들썩거리고 런던의 경기장은 함성으로 떠나갈듯 했다. 오직 이기기 위해서만 혈안이 되어있는 선수들이 싸우는 모습에 열광하는 관중을 보고 있으면 로마시대 아레나를 메운 관중이 떠오른다. 로마의 황제들은 백성의 불만을 마비시키고 사그라지게 하려고 격투사와 격투사 또는 격투사와 사자가 목숨을 걸고 혈투하는 잔혹한 구경거리를 끊임없이 먹이처럼 던져주었고, 관중은 굶주린 이리떼처럼 그 먹이를 탐식했다. 그리고 피에 굶주렸던 그 관객의 후예들이 오늘날의 경기장에도 득실거린다.
해가 지면서 풀잎이 잠들고 적막의 베일이 드리워져 별들이 하나 둘 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면 나는 뜰을 거닐면서 다시 나의 객석, 별들의 무대를 찾는다. 쯧쯧...... 저것들은 언제나 제대로 진화하고 언제나 철이 들까...
올림픽의 소란은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라는 쥬베날의 수수께끼를 잘못 푼 자들의 망동에서 시작되었다고 별들은 이야기한다. 그 말을 예사 사람들은 지금도 ‘건전한 육체에만 건전한 정신이 깃들 수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완전히 빗나간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 엉뚱한 해석이 육체 지상주의, 정신 따위는 육체의 어느 구석에 처박아 놓은 쓰레기 같은 잉여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급기야는 ‘체육학과의 학위논문은 표절을 해도 관대히 봐주어야 한다’는 해괴한 말이 나오기도 한다. 그걸 풍자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모르겠는데 정색을 하고 표절자를 옹호하면서 내뱉은 발언이니 해괴한 일이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으로 되돌아가 보자. 이것은 라틴어의 mens sana in corpore sano 또는 영어의 sound mind in sound body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유럽의 언어에는 토씨가 없지만 토씨가 있는 우리말로 옮기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그 하나는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이고 또 하나는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도’이다. 그리고 토씨 하나 때문에 그 뜻은 정반대로 달라진다. 그런데 토씨가 없는 유럽의 언어에서는 ‘이’인지 ‘도’인지를 그 문장의 흐름에 따라, 서술문인지 아니면 소망을 내포시킨 원망문(願望文)인지 판별하게 된다.
쥬베날의 mens sana in corpore sano가 서술문이 아니라 원망문이라는 것이 명백한 이유는 한 두가지가 아니다. 우선 그는 도덕군자인 체하는 설법자가 아니라, 꼬집고 경구를 쏟아내는 풍자가였다. 그리고 이 말도 그의 풍자 시집 제 10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가 활동했던 1세기 후반에서 2세기 초반은 로마가 심하게 썩어가면서 차츰 악취가 진동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그는 그 시대의 로마를 가리켜 ‘역사상 유례없이 뇌물이 판을 치고 썩어 문드러진 시대’라고 개탄했다. 2천여년 후 한국의 꼴을 보았다면 차마 그런 말을 못했겠지만.
그가 개탄했던 로마의 부패상(腐敗狀)은 그 무렵 쓰여진 싸띠리꼰(Satyricon)이라는 소설(쥬베날보다 한 두세대 앞서 태어났고 네로의 신하였으면서도 네로를 계속 꼬집다가 목숨을 잃은 Gaius Petronius가 그 저자)에도 여러 모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충격적인 것은 귀족들이 밤낮없이 주지육림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일이다. 하루종일 쉬지 않고 처먹기 위해서는 계속 위장을 비워야 했다. 그들의 연회장에는 언제나 양쪽에 목욕탕이 줄지어 있었다. 한 접시에 수백 마리가 소요되는 공작새의 혓바닥 요리로 배를 채우고, 배가 차면 목욕탕으로 들어가 공작 깃털로 목구멍을 쑤셔 먹은 것을 다 토해낸 다음 다시 먹었다. 처먹고 토하고 토하고는 다시 처먹기를 되풀이하고만 있었던 로마가 어떻게 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할 일 없는 몇몇 사학자들은 지금도 로마가 왜 멸망했는지 엉뚱한 곳에서 그 원인을 찾느라고 골몰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로마가 기울기 시작한 또 하나의 원인은 그리스 정신을 망각한데 있다고 쥬베날은 생각했다. 그리스는 인간의 마음과 머리를 가꾸는 Academy 또는 Museum과 육체를 도야하는 Gymnasium이라는 두 바퀴가 제대로 갖추어질 때 인간은 날개 돋친 수례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특히 Gymnasium에서는 육체를 가꾸는 이상으로 마음과 머리를 가꾸는데 힘써, Gymnasium 바로 옆에는 언제나 도서관이 있었다.
그런데 헬레니즘의 계승자임을 표방하면서도 로마는 헬레니즘을 팽개쳐버렸다. 육체를 가꾸어도 정신이 뒤받쳐 주지 않고서는 육체란 살덩어리로 전락할 뿐이라는 신념과 그 신념을 바탕으로 지상선(至上善)을 추구하던 헬레니즘은 로마시대에 붕괴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육체는 있고 정신은 깡그리 비워진 괴물이 득실거리기 시작했다. 쥬베날이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도 깃들어 주었으면’하고 간절히 바랐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흔히 mens sana in corpore sano라는 구절만 떼어내어 자주 인용되고 있지만, 쥬베날이 썼던 풍자시집을 보면 그의 뜻이 더욱 명백해진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도 깃들어주기를 기도하라
orandum est ut sit mens sana in corpore sano.
쥬베날의 소망이 성취되는 날, 우리의 육체는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며, 올림픽은 기록경신을 위한 혈투라거나 승자만을 위한 축제라는 파행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쥬베날이 소망했던 그 육체의 모습을 노발리스는 이렇게 찬미한다.
이 세상에는 단 하나의 성전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이다. 이 고귀한 형상보다 더 성스러운 것은 없다.
Es gibt nur einem Tempel in der Welt und das ist der menschliche Körper. Nichts ist heiliger als diese hohe Gestalt.
그 성전이야 말로 쥬베날이 꿈꾸던 육체, 우리의 춤으로 꽃피는 육체, 그리고 먼 훗날 언젠가는 올림픽을 새롭게 날아오르게 할 우리의 육체이다.
올림픽의 부정적인 측면을 보완하기 위해, Museum과 Gymnasium의 두 수레바퀴를 양립시키려 했던 그리스의 꿈을 구현하기 위해, 델픽 올림픽이 시도되어 왔으나 그 존재는 아직 너무나도 미미하다. 더군다나 올림픽이 지금 모습대로 존재하면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마비시키고 비워버린다면 델픽 축제가 성장한다 해도 헛된 일이다. 쥬베날이 육체의 변신을 바랐던 것처럼 우리는 올림픽 자체의 변모를 기원할 수 밖에 없다.
이번 올림픽에서는 사소한 오심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려내고 산 자를 죽여버리는 심판의 황당한 오심, 메달을 사냥하는데만 혈안이 된 선수, 그리고 ‘독일이여 모든 것 위로’ (‘Deutschland über alles!')를 외처대면서 날뛰던 나치 독일의 미치광이들처럼 오직 제 편의 승리에만 집착하는 응원자들이 법석대는 가운데 아름다운 풍경도 더러 있었다. 몇몇 종목에서는 승자가 패자를 위로하고 패자는 승자를 축하해주기도 하고, 손연재의 경우처럼 메달을 따지 못했는데도 갈채를 보내는 것 따위는 흐뭇한 광경이었다. 인간이 진심으로 원한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세계를 꾸밀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이다. 그런 흐름이 축적된다면 올림픽 또한 아름답게 변모할 수 있을 것이다.
변모와 변신...... 그것이 우리들의 지상 과제이다. 그리고 그 변신의 의식(儀式), 그것이 여러분의 춤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