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구름에 달가듯이 - 烘雲托月 (홍운탁월)
뜰을 거닐면서(7)
이순열_본 협회 공동대표

 너무도 무더워 유난히 길었던 올해 여름, 그 기나 긴 폭염의 터널을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싶었는데 가을은 잊지 않고 다시 찾아왔다. 계절이 평정심을 잃고 비틀거린지 오래라 언제 뒤틀어져버릴지 아슬 아슬하기는 해도 아직은 제철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그지없이 고맙다. 한낮은 여전히 찌는 듯이 더워도, 아침 저녁은 가을이 깊은 듯 서늘하다. 어둠이 서서히 깔리고 그 가을의 숨결이 온 몸을 구석 구석으로 파문처럼 물결쳐 올 때, 밤 이슬이 내리기 시작하는 뜰을 한 발짝 한 발짝 가만히 내딛어보는 것은 언제나 황홀하다. 그리고 교교한 가을 달은 구름에 살짝 가리워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때조차 적막 속에서 더욱 환하다. 성성적적(惺惺寂寂) — 그것은 엘리어트의 ‘빛의 심저(深底)에는 오직 정적 뿐’ 이라는 절구와도 통한다. 적막과 빛으로 가득찬 가을 하늘에는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가 그린 은자의 모습이 가득하다.

 

 

  

참으로 정숙한 아가씨는 깊은 밤,
그 모습을 달에게만 슬쩍 보여준다 해도 화사하기 그지 없다.
(The chariest maid is prodigal enough
If she unmask her beauty to the moon.)

 ‘불행한 사람은 물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리라’ 고 가스똥 바슐라르는 이야기한다. 우리는 달과도 해야 할 이야기가 아직도 많지만, 정적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안된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라는 작품에서 연주자는 연주하지 않고, 무용가도 춤추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그것은 이른바 퍼포먼스라거나 신기(新奇)를 추구하고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며 존 케이지가 한 때 시도했던 우연성 음악과도 그 류가 다르다.
 그것은 청중이나 관객에게 소리와 정적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보도록 케이지가 제시한 화두이다. 그것은 혀끝이나 날름대면서 건성으로 핥고 내던지는 1회용 종이컵이 아니라 케이지가 에릭 싸띠의 오지브즈와 선(禪)의 세계에 푹 젖었다가 얻은 계시(啓示)의 소산이었다.
 악보에는 1악장 침묵(Tacet), 2악장 침묵(Tacet), 3악장 침묵(Tacet)이라 적혀있고, 어떤 악기 또는 악기군이 연주해도 좋다고 되어있다.특정 악기로 한정하지 않고 어떤 악기라도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는 것은 악기 이외의 행위자 무용가나 성악가 또는 화가등도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던 셈이다.
 1952년 8월 데이빗 튜터가 악장이 시작되고 끝날 때마다 피아노 건반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할 뿐 연주는 하지 않고, 그 후의 공연에서 머스 커닝햄이 춤을 출듯하다가 의자에 앉아 있는채, 끝나고 마는 이색적인 공연을 보고 비평가들은 ‘스트라빈스키의「봄의 제전」 이후 가장 큰 충격의 격랑을 일게 한 작품’ 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편 대부분의 청중은 ‘소리가 없는 음악 연주회, 춤이 없는 무용공연이라니, 참 별꼴이네’ 라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케이지는 이렇게 항변했다.
 “그들은 핵심을 놓치고 있다. 정적 같은 것은 없다. 들을줄을 몰라서 정적이라고 느낄 뿐이지 사실은 그 정적에도 소리로 가득차 있다. 첫 악장의 정적이 계속되는 동안 여러분은(상상의 귀가 열려 있다면) 밖에서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고, 2악장에서는 빗방울이 극장의 지붕 위에서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를, 그리고 3악장에서는 청중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참다 참다 객석에서 뛰쳐나가는 발걸음 소리 등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케이지는 여기서 소리와 정적의 이율배반성과 그 뒤섞임을 이야기하는듯 하면서도 그 바탕에는 소리로부터의 탈출, 소리의 홍수에서 정적을 갈구하는 목마름을 깔아 놓고 있다.
 지금 우리 춤의 큰 병폐 가운데 하나는 흥과 신명이 아니라 지랄 발광이 판을 치고 멈춤과 정적이 질식 상태에 있다는 점이다.
 모든 것이 들어나 버려 공허한 춤, 말 춤, 메뚜기 춤, 원숭이 춤 따위 끊임없이 촐싹대면서 빙빙거리는 춤의 홍수속에서 구름에 달가듯이 한적한 풍류로 유유자적하는 춤도 좀 있었으면 좋겠다.
 소용돌이치고 불타오르는 유수(流水·lotic)의 엑스타시스(extasis) 못지 않게 깊이깊이 침잠하는 정수(靜水·lentic)의 엔스타시스(enstasis)의 춤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음악은 궁극적으로 정적을 지향한다고 쇼펜하우어는 이야기한다. 춤은 멈춤을 지향한다고, 우주의 춤과 같이 멈춤속에도 춤이 가득찰 수 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아주 오래 전 어느 콩쿠르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을 때의 일이다. 한 참가자가 무대에 등장해서 춤이 시작되기도 전 준비동작으로 숨을 가다듬으면서 객석을 등지고 멈춰 서있는데 어깨가 바르르 출렁이면서 춤이 넘실 거리고 있었다. 아직 춤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온 무대가 저렇듯 춤으로 가득 찰 수 있다니! 그런 황홀경에 젖어들면서 백거이(白居易)의 「비파행」 한 구절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여전히 얼굴 반쯤 가리고 다소곳이 비파 끼고 앉아
축을 조이고 현을 튕겨 두 세번 소리 내는데
곡조도 타기 전에 정이 먼저 가득 넘치네.
(猶抱琵琶半遮面
轉軸撥絃三兩聲
未成曲調先有情)

 
 

 

2012. 09.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