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정순영 선생은 6.25 때 피난하여 대구에 자리를 잡은 후 84년간의 생을 마칠 때까지 그곳에서 활동하셨습니다.
1. 대구지역 춤문화의 산실
춤과는 인연이 다소 먼 공학도로서 1947년 <조선교육무용연구소>에서 함귀봉 선생과 문철민 선생에게서 춤교육을 받은 이래 독학으로 춤이론을 다잡고, 1953년 부산극장 종군극작가단 신작무대에 <인어의 정설>로 출연하고서는 이듬해 대구중앙국립극장에서 첫 개인발표회를 열어 춤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61년 <대구바레아카데미>를 창설하고 부인 김기전 선생과 함께 지역에서는 좀체로 보기 드문 현대춤과 발레를 교습하여 지역춤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선생은 춤실연자이자 춤연출, 안무가로서, 그리고 춤교육, 이론가로서 대구, 경북지역 춤문화의 구심체이셨습니다.
2000년대에 이르러는 (사)대구시민문화연구소를 차려 대구지역 춤문화를 비롯하여 시민문화향상에 매진해 온 일은 중앙중심의 문화편중에 대한 대항마이기도 하였습니다.
2. 한국현대춤의 한 기폭제
20년 가까이 대구에서 창작춤의 집념 끝에 1970년 4월 대구와 서울에서 <산하억만년>이란 작품을 공연함( 4.18~20 대구 KG홀, 4. 24, 25 서울 국립극장)으로써 한 결실을 보았고, 이윽고 이는 선생의 바램대로 한국현대춤의 역사에 한 에포크를 찍었습니다.
그것은 몇 가지 점에서 한국춤 역사에 선도적 위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근대춤에서 현대춤으로 옮겨가는데 하나의 깨침을 준 쾌거이기도 하였습니다.
첫째로는 당시 문화공보부가 실시하는 창작지원제도의 첫 작품으로 선정된 것인데 이는 지역춤활동이 스스로 이땅의 중심활동의 하나임을 입증한 것이고, 둘째로는 오늘날 춤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삶에 대한 인식을 깊고 넓게 해주는 육체언어의 것임을 주창한 것이고, 셋째로는 예술이란 감성적인 것을 토대로 하되 그것의 형상화과정에는 이성적 작업과 함께 치밀한 과학성이 갖춰진 예술공학의 산물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대본, 안무, 무대공학을 하나로 엮어내는 분담, 재조립식의 과학적 시스템을 도입하고, 이에 공연설계 및 연출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작품구성은 제1부로 다섯 개의 컴포지션(김기전 안무)을 구성하여 짧은 호흡으로 현대춤의 맛을 돋구고서는, 제2부로 컴퓨터 시대 현대인의 삶의 모습을 근원적 시점으로 포착하여, ‘생명의 기원’, ‘풍운의 산하’, ‘현대의 체온’, ‘구원의 빛’ 등 4장으로 엮었습니다. 여기에는 당시에 무용사 및 미학 전공의 부산 한성여대 강이문 교수가 대본작가로, 교육춤과 창작춤을 가르치는 중앙대 정병호 교수가 안무가로 참가함으로써 선진적 아카데미즘을 졀집해내었습니다. 튼튼한 이론과 실제의 긴밀한 결집은 선생의 기획과 연출의 주도아래 이루어져 무겁고 침침한 주제가 재밌고 아름다운 형상으로 감상되도록 경쾌한 중량감으로 치밀하게 공연을 설계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의 건축물을 지을 때에 건축가의 예술적 예감과 상상력, 그리고 이를 보장하는 치밀한 설계도가 밑받침이 되듯이 춤공연에서도 기획, 대본, 안무, 무대공학, 음악, 조명 등 인접매체들을 총괄하는 설계도를 치밀하게 구성하여 이를 예술공학으로 반영하였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예술공학의 시스템은 2000년 7월 22일 대구 경상감영에서 장애인과 함께하는 춤 퍼포먼스 <저 별은 나의 별>에도 구현되었고, 2003년 12월 29,30일 대구 스페이스콩코드에서 대구의 민족시인 이상화의<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작품동기로 한 옴니버스스타일의 <피고지고... 피고>에서도 실현되었고, 2007년 5월 29일 대구 봉산문화회관대극장에서 공연된 <봉산희곡, 산에 오르다 돌아본 풍경>에도 구현되었습니다. 특히 이 작품은 개발의 그늘아래 고심에 찬 젊은이들과 뿌리뽑힌 이들의 어두운 삶이 이윽고 밝은 빛의 세계로 옮겨진다는 소망을 담아 전 7경으로 내용을 구성하여 이를 대구의 원로, 중진, 중견 등 7명의 안무가로 하여금 안무하고 또 출연하게 한 것도 그러하려니와 <대구무용협회>의 대안세력으로 구축한 <(사) 대구예술무용협회>의 이사진과 정회원 50명 전원이 총출연한 것으로도 대구 춤역사의 한 중대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춤작품 생산과 실연에서 과학적 시스템을 가동하는 것인가 하면, 또한 이로써 춤문화를 둘러싼 인적 결합의 한 시스템을 구축하여 이를 대항세력으로 부각시킨 대사회적 발언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현대삶의 어둠 속에서도 낙천적 세계관을 보유하고, 이를 예술공학적인 치밀한 설계 아래 춤으로 사회적인 실천을 수행해온 선생의 행적을 살펴보게 됩니다.
3. 춤 비평문의 과학적 기술을 향하여
선생은 “무용가로 먼저 알려진 공학박사”로서 부산의 경성대학교 이공대 교수, 학장, 교무처장으로 강단에 서면서 대학 행정직에도 종사하셨습니다. 정년퇴임 이후에는 본업으로 되돌아와서 춤과 관련한 활동을 하던 중 <춤>지 1999년 1월호에 대구시립무용단 34회 공연평 게재를 기점으로 늦깎기 춤평론가로 등단하셨습니다. 춤 대본과 안무와의 관계를 다룬 내용이었습니다만, 선생은 일찌기 1955년 3월20일 대구일보에 <무용과 음악과 시>라는 글을 실린 후 1960년까지 대구 지역 신문에 9편의 춤 글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선생의 춤평론은 이념주입식 재단비평이거나 서정시적 인상비평과는 거리가 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춤현상의 기술(記述)로서, 말하자면 과학비평의 한 사례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춤생산과 유통과정에서 구현한 예술공학적 시스템을 춤비평에도 도입하여, “의미미분법(semantic differential)의 관능검사(sensory test)”를 통해 통계학적 기법을 제시하는 ‘과학적 평론방법’을 제안한 것입니다.
춤비평이란 예술창작 다음의 ‘부차적인 작업’으로서, 작품의 가치평가와 함께 분석과 해석을 통해 ‘의미부여’하는 행위라는 점을 선생은 인정합니다. 그리해서 예술가와 미학자와 비평가 사이를 연결해주는 매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하게는 예술가와 대중 사이, 예술가와 비평가 사이의 소통매체로서, 결국엔 좀더 나은 춤생산을 위해 ‘사유의 향방’을 이끌어내는 효용가치를 중시한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권위나 규범으로 규제하거나 제압하지 않고 하나의 제안 또는 대안으로서 평론이란 생산적 사유활동임을 몸소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선생은 공연장에 가기 전 팜플렛에 실린 작가의 인사말이나 작품의 의도와 구성, 내용 등을 음미하고 그의 춤이력 사항을 여러 정보를 통해 숙지한 다음 메모지와 망원경과 플랫쉬를 갖추고 실전에 임하셨습니다. 때맞춰 리허설도 보고 뒤풀이에도 참여하여 공연을 둘러싼 여러 정황 속에서 작품전개과정의 매단계마다 감성적 시선을 통해 감지되어 오는 바를 메모하였다가 세밀하게 서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대목조차 가치평가를 될수록 유보한 채 마치 연출자의 작품 메모처럼 전체적으로 또 부분적으로 자신의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형상화 방법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이는 선생 스스로 춤교육의 중요 교과로서 춤작품연구(Work Research)를 제안한 바와 통합니다. 작품연구란 작품을 해부대에 올려놓고 부검하듯이 작품텍스트를 분석하여 작가의 생각과 의도를 검토하고 작품 줄거리를 비롯하여 춤언어 구사 상 문법과 문장구성법도 치밀하게 검토하는 일입니다. 과학적 평론문은 이러한 춤작품 연구의 일차자료가 되는 셈입니다. 물론 영상매체를 통해 기록된 바를 대동하여 더불어 한 장면씩 검토하고 종합적으로 해석의 지평을 열어놓는 것도 바람직한 과제인 것이지요. 선생은 자신의 글을 ‘관무기’(觀舞記)라는 겸손한 표현으로 스스로 받아들였습니다.
4. 춤마라톤에 나선 경보선수처럼, 경쾌한 중량감으로
선생은 춤평론가의 길로 들어선 이후 대구 지역만이 아니라 서울, 부산, 광주, 전주, 대전 등 각 지역의 춤현장을 섭렵하는 ‘전국구’로서 ‘관무기’를 통해 춤꾼과 춤안무자에게 충언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춤을 사랑하는 이로서 고달프나 즐거운 긴 여정입니다.
선생은 춤현실 문제에도 고언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2000년 4월 말경 통영 마리나 리조트콘도에서 가진 춤평론가회 춘계세미나 발표에서 한국춤의 앞날을 기약하는 대학교육의 현실을 진단하면서 제안하신 사항이 10년이 넘은 이때까지도 실현되고 있지 않은 것을 새삼 되돌이켜 보게 됩니다.
예술은 실기가 생명인데, 현 실기교습은 다양한 장르의 강사진에게 맡기고, 이론교수의 강화를 통해 감성적 인식력과 개성적 창의력을 길러주는 교과로 대학춤교육의 지표를 삼아야한다. 특히 한국춤, 현대춤, 발레라는 양식론적 3분법의 실기교육은 폐기하고 양식융합의 춤언어학습이 긴요하다, 춤꾼 이외 춤대본, 춤연출, 춤이론, 춤평론, 춤무대공학, 춤의상, 춤음악, 춤분장, 춤기획행정경영 등 춤관련 전문분야의 인재가 대학춤학과 안에서 배출되도록 대학마다 특성화될 필요가 있지 않는가.
이 모든 대학춤교육 발전안은 무너져 가는 지방대 무용학과의 활성화를 위한 대안이 될 것임에 분명하니, 이것이 실현될 때는 언제일는지요?
선생은 2002년 자신의 평론집에 대구지역의 현역 무용인으로 대학원생을 포함하여 260여명의 인명을 기록해 두셨습니다. 그리고 대구지역의 60여 곳 춤학원의 명세서도 적어 놓으셨습니다. 이는 춤평론가이기 전 대구지역 춤꾼과 춤문화를 지극하게 사랑하는 이로서 그 흔적을 남긴 것이지요.
선생은 대학교수 중심의 춤공연 못지 않게 춤학원 주도의 공연을 열망하셨습니다. 이는 대학춤을 떠받들고 있는 재야 춤꾼들의 처지와 열정과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러하셨습니다.
선생은 매사마다 사전 예측과 사후 반성을 일상화하셨습니다.
선생은 인생은 마라톤이라 하시고 건강을 위해서라도 승용차 말고 걷기와 자전거 타기를 권하셨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춤길은 자전거타기조차도 사치스러워 보입니다. 마라톤보다 더 힘겨운 경보선수처럼 걸어 달려오신 행적을 좇아, 더듬어 두 손을 가슴에 모읍니다. 경쾌한 중량감으로 한평생을 걸으며 달려오신 이 길이 즐거운 소풍길이었다고 하시겠지요.
* 이 글은 84세로 2012년 1월 21일 작고하신 평론가 정순영 선생에 대한 회고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