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현재 나는 프랑스 몽펠리에에서 한 무용단의 객원 무용수로 2년째 춤추고 있으며, 한국에서 2곳의 대학 강단에 서고 허황된 꿈을 갖고 무용단을 꾸려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와 작업하고 있는 프랑스 안무가는 한국에서 몇 번 작업한 사람이다.
내가 왜 이런 글을 쓰게 되었는지 차츰 짐작할 것이다.
우선, 나의 시건방진 생각일지는 모르나 한국에서 무용가의 삶이 얼마나 척박하고 소비적인지 깨달은 시점에서 어떻게 하면 좀 더 비옥한 토지 위에 서 있을 수 있을지 수도 없이 생각해보았다. 물론 별 다른 방법을 찾지는 못 했다. 비옥해지기 위한 충분한 일조량과 강수량은 그저 꿈에 지나지 않는다.
그 땅을 위해 더러운 거름이 될 수 있는 희생은 누구나 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대한민국의 IT 발전이 이루어준 정보의 바다를 통해 외국인들의 상품을 쉽게 접하면서 어떤 것이 좋고 나쁜지 거르지 않고 마냥 받아들이고 있다는 느낌만 받는다. 물론 어렸을 때부터 미제나 유럽의 선진국 제품들을 못 사서 안달인 사람들을 많이 봐왔으며, 나 또한 질 좋은 외국 물건들을 보면 갖고 싶어 했으니 말이다.
다시 돌아가서, 나는 프랑스에서 문화적 열등감에 대한 무의식적 교육으로 내 존재의 자부심보다는 그곳의 시스템에 맞춰가는 한심한 작태를 2년여 가까이 해오고 있다. 또한 많은 무대 경험을 통해 스스로 무대에 서는 것에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고 의미 부여를 하기도 하지만 뭔가 항상 밑지는 장사를 하고 있다는 석연찮은 의심 역시 품고 있다.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며 춤을 추지는 않고 있지만, 외국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해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생겼고 그로 인해 어깨에 살짝 힘이 들어간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스스로 반성하고 있다. 이들이 피땀 흘려 만든 것들을 그저 좋은 것이라고 받아들이려고 무수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 내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가를 말이다.
한국에는 수많은 안무가들과 춤꾼들이 수많은 작품을 만들고 공연한다. 그렇지만 뭔지 모를 거리감을 느낄 뿐이다. 모방과 창조 사이의 백지장 한 장 차이를 고민하기보다는 답습한 것을 그대로 포장하는 것을 더 쉽게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무래도 그 주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모방이라도 해보면 분명 자신의 것인지 아닌지를 알게 될 터인데, 남의 것을 나에게 맞추기 위한 노력보다도 그대로 입고 나와서 자랑하는 모습은 정말 재미있는 쇼를 보는 것 같다.
거기다 더 재미있는 쇼는 남의 옷을 입고 내가 앞서 말했던 무조건적 열등감 조성의 교육을 거침없이 행하며 가끔은 가르치는 사람인지 예술가인지의 구분조차 모호하게 만드는 자칭 슈퍼 히어로(독재자)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지녀야 할 엉뚱한 자신의 상상력에 경의를 표하기보다는 유행에 민감하고 쉽게 할 수 있는 방법만 고수하면서 존경을 받고자 하는 모습은 정말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가끔 자기 꾀에 넘어가는 사람들을 더러 본다. 슈퍼 히어로는 절대 약자들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혼자 잘 났다고 떠드는 사람은 별 볼일 없다는 얘기다. 분명 그들은 책임 의식을 갖고 약자를 구하려고 노력하며 자신의 실수에 괴로움의 눈물을 흘린다. 뭐! 대중들이 원하는 것이 더 있을지 모르나 나는 그 정도면 슈퍼히어로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무조건적 답습을 통해 그나마 있던 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외면 받기를 무서워하는 사람으로서 개인적 반성과 사회적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이 되고자 함을 간절히 느껴본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이 글은 내가 보아온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사적인 보고서를 쓰고 싶다는 욕구에서 시작된다.
2010년 부산에 한 프랑스 안무자가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 입국한다. 그리고 그는 오디션을 통해 부산에서 6명의 댄서를 찾았으며, 약 2주라는 시간 동안에 페스티벌을 위해 작품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열악하지만, 주최 측에서는 한국인들에게 주는 조건들보다 더 많은 것들을 신경써주고 하물며 타지 와서 고생한다며 홍삼 세트까지 챙겨주는 모습에서 한국인의 정 문화에 나는 눈물이 날 뻔 했다.
지금까지 한 얘기만으로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뒤에는 6명의 무용수들이 있다. 외국인 안무자랑 작업하는 것을 기대하고 더 좋은 무대에 서고 싶다는 일념 아래 그들은 그 어떤 보상도 받지 않고 자신들의 생활고도 뒤로 한 채 작품에 충실하려고 했던 것을 난 보았으며, 페스티벌 측에서는 너희가 그런 기회를 받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들었다.
이 얘기는 그 사람에게 배운 것이 없어도 나이가 많으면 선생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무대에 서는 예술가를 학생으로 취급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외국인을 위한 무조건적 사랑을 실천하시는 그분들이 6인의 열정을 무참히 짓밟는데도 6인의 무용수들은 감사히 무대에 서고 있었다.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그들도 아니꼽다고 한다. 하지만 어쩌겠냐고 오히려 나에게 반문하는데 나 역시 우물쭈물할 수밖에 없었다.
왜 뭐가 문제인 것일까? 잠깐 딴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서울의 나름 큰 무용 페스티벌에서 외국인 무용가와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를 불렀다. 한국의 한 중견 무용가와 협연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나는 그 중견 무용가를 위해 그 2명의 예술가와 한 예술가의 아내를 공항까지 가서 픽업하고 호텔로 데려갔다.
문제는 호텔이 허름하고 지저분하고 복잡한 동대문에 있었다는 것이다. 주최 측에서 조금은 신경을 못 쓴 듯한 느낌도 들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자신의 집에다 재우고 다른 숙소를 알아봐주시는 친절한 중견 무용가를 보면서 한국인의 정 이상으로 과한 문화적 콤플렉스를 보고 만 것이다. 자신이 공연하는 데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내놓으면서 축제와 관련된 사람들이 아닌 학생들이 공연 진행에 투입되는 것도 보았다.
그들은 초청받은 것이고 수락하였기에 한국에 온 것이다. 그들이 숙박의 문제로 작품에 어떤 영향을 받는다면 그들은 그저 그런 사람들일 것이다. 아님 유독 아시아에서 한국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과감히 말해본다. 뭐 어때? 삶이 언제부터 공평하던가?
한국의 밝은 것만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동반하는지 생각해주기 바란다.
여하튼 나의 많은 지인들의 충고처럼 서론이 길기만 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충분한 경쟁력과 예술성을 가진 작품들이 한국에도 있으며, 그렇지 못하다고 한들 그것이 부끄럽지 않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말만 하지 말고 공연장에 가서 애정을 갖고 바라보며 냉정히 작품을 말하길 바란다. 힘의 원리에 나약하면서 아닌 척하는 예술가들이 있다면 해방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예술가들의 친구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바뀌어야 한다고 가르치지 말고 정말 바뀐 선각자의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그것이야말로 선배들이 해야 할 일들이며 앞으로도 순수한 마음을 가진 젊은 피들에게 물려줄 재산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젊은 피들에게도 말하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들이 세상의 어두운 면만 보고 굴복하고 답습하는 일이다. 제발 도전하고 인내하며 최소한의 에티켓을 갖추시기 바란다.
2011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