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서울의 대표적인 공연장 중 하나인 호암아트홀이 지난 연말 문을 닫았다. 호암아트홀은 새로 출범한 종합편성 TV 방송국의 스튜디오로 변신했다. 처음 TBC방송국의 스튜디오에서 공연장으로 탈바꿈했다 다시 방송국 시설로 제자리를 찾아간 셈이다. 춤 공연이 타 장르에 비해 많진 않았지만, 기억에 남는 공연도 적지 않다.
극장은 아티스트, 무대기술 스태프, 그리고 관객들에게 소중한 공간이다. 평론을 업으로 하는 비평가들에게도 극장은 새로운 창작 공연들을 만나는 보고(寶庫)나 다름없다. 그곳에서 본 작품이 좋으면 좋을수록, 만났던 예술가들이 특출나면 특출날수록 공연의 여운도 길고 오래 남는다.
무용가들에게 호암아트홀은 서울 도심에 있는, 중극장 규모의 공연장이란 점이 가장 매력적이었다. 단발성의 대관 공연이 거의 대부분이었고, 연중 10회 내외의 그리 많지 않은 무용 작품을 만날 수 있었지만, 돌이켜 보면 기억에 남는 공연도 적지 않다.
1985년 개관 공연 무대에 오른 홍신자와 래핑스톤 무용단은 당시 뉴욕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전위무용의 한 유형을 보여주었다. 2002년 7월에 있었던 일본의 산카이 주쿠 무용단, 2003년 10월에 있었던 프랑스의 마기 마랭 무용단의 공연도 인상적이었다. 해외 무대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무용단체인 산카이 주쿠 무용단은 당시 창무 국제예술에 초청 되어 투명한 유리병을 오브제로 한 강렬한 비주얼의 무대와 특유의 느림과 여백을 살린 작품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2003년 7월에 있었던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스타 초청공연>에 초대된 해외 한국인 무용수들의 무대도 인상적이었다. 당시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유일한 동양인 단원이었던 김용걸이 보여준 모리스 베자르의 작품
그런가하면 당시 영 스타로 무대에 섰던 서희는 미국 아메리칸발레씨어터(ABT)의 솔리스트로 간간이 주역을 맡기도 하는 등 해외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호암아트홀은 2002년 재개관을 계기로 창무국제술제, SIDance(서울세계무용축제), 그리고 국립발레단의 상설 프로그램이 연계되면서 무용 공연이 더욱 늘어났다. 특히 SIDance 는 2002년 이후 올해까지 매해 이곳에서 열리면서 호암아트홀은 국내외의 다양한 춤들이 소개되는 장으로 거듭났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이어진 국립발레단의 "해설이 있는 발레 공연" 시리즈는 발레 관객들을 호암아트홀로 불러오는 기폭제가 되었다. 2003년에는 <지젤><백조의호수><해적> 등의 작품 일부가, 2004년에는의 마리우스 프티파, 조지 발란신, 유리 그리가로비치 등 유명 발레 안무가들의 작품이 잇따라 공연되었다. 2005년에는 국립발레단과 함께 <무용평론가 장광열이 풀어주는 현대발레>란 제목으로 이틀 동안 필자가 직접 해설을 맡아 다양한 유형의 컨템포러리 발레 작품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틀 동안 진행된 공연 때 어린이부터 장년층에 이르기까지, 발레 문외한에서 전공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의 관객들이 몰려와 어디에 맞추어 해설을 진행해야 할지 무척 고민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2008년에 내한한 에곤 마젠-에릭 고띠에의 발레공연 <돈큐>는 독특한 형식의 1인 발레 공연으로 치밀한 컨셉트와 아이디어, 그리고 안무가이자 무용수인 에릭 고띠에의 뛰어난 순발력이 결합된 작품을 선보여 그해 내한한 해외 공연단 중 기억할 만한 무대로 남아 있다. 에릭 고띠에는 지금 슈투트가르트를 기점으로 안무가로 활발한 공연을 펼치고 있다.
호암아트홀은 2010년부터 안애순무용단과 상주단체 계약을 맺고 작품 창작을 위한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더욱 확대했다. 올해 10월 서울세계무용축제 기간 중에는 힙합의 진화에서부터 해외 무용단, 우리춤 빛깔찾기 공연 등 대중무용과 순수무용의 접합에서부터 국내외 컨템포러리댄스까지 다양한 장르의 춤들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이 공연장은 종편 방송이 시작되면서 텔레비전 방송국의 스튜디오로 변신했다. 가뜩이나 도심 속에 중극장 규모의 쓸만한 공연장이 부족한 현실에서 호암아트홀이 공연예술인들로부터 멀어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